효공(통일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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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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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26대 국군
효공
孝公


파일:진효공.jpg


영(嬴)

조(趙)

거량(渠梁)[1]
아버지
진헌공(秦獻公) 영사습(嬴師隰)[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81년 ~ 기원전 33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1. 개요
2. 당시 진나라의 상황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3.1. 진나라의 위기
3.2. 상앙의 변법
3.3. 진 효공의 대외 정복
3.4. 최후
4. 평가
5. 후일담




1. 개요[편집]


진(秦)나라의 제26대 군주. 진헌공(秦獻公)의 아들. 혜문왕의 아버지. 이때 상앙(商鞅)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해 진 헌공 때 커졌던 국력이 더욱 커져 6국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3] 월절서에는 진평왕(秦平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2. 당시 진나라의 상황[편집]


아버지 진 헌공이 나라를 개혁하고, 국력을 키워 진나라도 전국 시대의 강국이 되는 기반이 마련된 상태에서 진 효공이 즉위하였다. 이때는 제위왕, 초선왕, 양혜왕, 연후문공, 한소후, 조성후 때였다.[4][5]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편집]



3.1. 진나라의 위기[편집]


진 효공 원년(기원전 361년), 초나라위나라가 진나라와 경계를 맞댔고, 그들이 진나라를 위협적으로 여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진 효공은 구현령을 내려 부국 강병의 의지를 드러냈고, 그 계책을 내는 자는 재상으로 봉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해 진 효공은 2갈래 길로 출병해 동으로는 섬성, 서로는 서융을 쳐서 그 수령을 죽였다. 이에 조나라, 한나라는 진나라가 커지기 전에 진나라를 치려고 했다.


3.2. 상앙의 변법[편집]


진 효공 2년(기원전 360년), 현왕은 사신을 보내 제사 지낸 고기를 보냈다. 이때 위의 재상 공숙좌가 죽자 그 식객 상앙이 진 효공이 구현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상앙이 진 효공의 측근인 경감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나 성인의 도리와 왕도 정치에 대해 논하자 진 효공은 졸았다.[6] 그 뒤 진 효공에게 상앙이 자신의 주특기인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대해 논하니 진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등용했다고 한다.[7] 상앙의 변법은 다음과 같았다.

1. 십오제(什伍制) : 이것은 5개 내지 10개 가구가 일종의 전우조가 되어 상호 감시를 하여 납세와 징병을 하는 기초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나머지 집을 박살내는 상호 감시 용도로 활용했다. 이것은 조선오가작통법으로 그 흔적이 남았다. 심지어 김씨 조선의 경우 5호담당제라고 하는 현대판 오가작통제를 실행중이다...

2. 억상 정책 : 그 이유는 당시의 산업 구조가 농업 중심이었는데, 그 이유는 농업이 발달해 생산력이 증대되면, 그것이 인구로 전환되었고, 그것이 국력이었기 때문이다.[8] 그러려면 상업을 종사하는 자들을 줄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나중에는 억상 정책은 누그러뜨리고 상업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다.

3. 노비제 폐지 : 노비에게는 세금을 거두지 못하므로 그들이 양민이 되면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해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어 국부가 증대된다.

4. 군공수작제 : 이것은 이름없는 평민이라고 해도 전장에 나가 적의 목을 베어오면, 1계급 승급을 시켜주고, 반대로 아무리 잘나가는 집안 사람이라고 해도 전장에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으면 기득권을 박탈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인해 진나라 병사들은 매우 용맹하게 싸워 '개인적인 싸움에서는 겁쟁이이나, 공적인 싸움에서는 용맹하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5. 악습 타파 : 악습을 타파해 진나라가 문화 발전에 기여했고, 그것이 진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조처들은 귀족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반발했다.[9] 그리하여 구신인 감룡, 두지 등이 특히 반대했으나 진 효공이 상앙을 적극 지원해서 그들의 말은 무시되었다.

진 효공 3년(기원전 359년), 상앙은 간초령을 내릴 것을 진 효공에게 제안했다. 그 내용은 생산력 향상을 권장하고, 상업을 억제하며, 귀족도 공이 없으면 귀족 노릇을 할 수 없게 하는 법령이다.[10] 그것으로 국가 수입이 증대해 진 헌공 때보다도 강성해졌다.[11]

진 효공 4년(기원전 358년), 진나라가 서산에서 한군을 물리쳤다.

진효공 5년(기원전 357년), 초선왕은 우윤 흑을 파견해 진 효공은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진 효공 7년(기원전 355년), 진 효공과 양혜왕은 두평에서 회맹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중원의 제후와 동렬에 서게 되었다. 이때 태자가 법에 걸려 스승 공자 건[12]과 나머지 스승에게 벌을 주었다. 그리하여 상앙은 2차 변법을 시행할 기반을 마련한다.

2차 변법의 내용은 이러했다.

정전제를 폐지하고, 원전제를 폐지해 토지의 사유화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전국을 현으로 나눠 군주가 직할 통치했고,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악습 타파도 다시 시행했다.[13]

처음에는 백성들이 상앙의 법을 불편해했으나 결국 나중에는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국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현왕은 그를 패자로 인정했다.[14]

진 헌공 때 진목공이 차지한 하서 땅을 어느 정도 수복했으나[15]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으로 힘이 커지자 하서 땅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3.3. 진 효공의 대외 정복[편집]


진 효공 8년(기원전 354년), 조나라가 위(魏)나라의 속국인 위(衛)나라를 치자 양 혜왕은 한단을 쳤다. 이 틈을 타 진 효공이 위나라를 습격해 하서의 요지인 원리를 점령하니 위군은 대패했고, 소량도 진이 완전히 지배했다. 같은 해 진 효공은 공손장에게 명해 한나라를 쳐 초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상지, 안릉, 산새를 점령해 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위나라, 한나라 땅에 깊숙이 진입했다.

진 효공 9년(기원전 353년), 위나라가 제나라와 계릉 전투를 벌이는 것을 틈타 위나라를 쳤다.

진 효공 10년(기원전 352년), 상앙은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포위해 점령했다. 양 혜왕은 요지인 고양 땅에 장성을 쌓아 진군을 막았다.

진 효공 11년(기원전 351년), 상앙은 고양을 포위했다.

진 효공 12년(기원전 350년), 양 혜왕은 융 땅에서 진 효공과 회맹해 긴장이 완화되었다.

진 효공 14년(기원전 348년), 새로운 조세 제도를 시행했다.

진 효공 18년(기원전 344년), 진 효공은 봉택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양 혜왕은 천자의 의장을 써서 어그로를 끌었다.[16]

진 효공 19년(기원전 343년), 진 효공은 무성에 성을 쌓았다.

진 효공 21년(기원전 341년), 마릉 전투에서 위군이 패한 틈을 타 상앙이 위나라를 치자고 해 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제나라, 조나라와 힘을 합쳐 위나라를 쳤다. 이때 상앙이 계략을 써서 위나라의 공자 앙을 속여 크게 이기니 진 효공은 상앙에게 상 땅의 15개 읍을 식읍으로 삼아 상군이 되었다.


3.4. 최후[편집]


진 효공 24년(기원전 338년), 진 효공은 다시 위나라를 쳐서 안문에서 위군을 물리쳐 위장 위착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진 효공은 연합군을 소집해 위나라의 합양을 공격했다. 이때 진 효공이 병사하자 그 아들인 영사가 즉위 하니 그가 바로 혜문왕이다. 혜문왕은 공자 건과 함께 상앙을 함정에 빠뜨려 잡은 뒤 함양에서 거열형에 처했다.[17]


4. 평가[편집]


진 효공은 아버지인 진헌공(秦獻公)의 정책을 이어 구현령으로 상앙을 등용해 그의 변법을 전적으로 밀어주어 진 헌공 때 회복한 국력이 더욱 강성해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도 혜문왕[18], 진무왕, 소양왕, 장양왕, 진시황으로 이어지는[19] 진나라의 황금기의 기반이 된 군주다.


5. 후일담[편집]


진나라는 그 뒤로도 국력이 신장하여, 사마착을 파견하여 촉나라를 정벌해 성공한 뒤 국력은 6국이 모여서 막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커졌다. 그리하여 그 손자인 소양왕 대에는 천하를 거의 통일할 뻔한 정도였고, 진시황 대에는 완전히 통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에 비전이 없었으므로 나라는 법가대로 백성들을 신나게 굴리기만 해서 불만을 키웠고,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즉위한 뒤 시대를 읽지 못한 지나친 법가 정책의 시행은 진승·오광의 난으로 그것의 폐단이 터져버렸고, 그로 인해 진나라는 멸망하였으며, 초한쟁패기를 거쳐 한고제전한을 건국하는 계기가 된다.

[1]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기록된 이름.[2] 영연(嬴連)이라고도 한다 문서참조[3] 물론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밸런스가 붕괴된 것은 사마착(司馬錯)이 촉나라를 먹은 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4] 즉 이들도 나름대로 세력이 커가던 시기라는 말이다.[5] 단 위나라의 경우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6] 그나마 왕도 정책을 얘기할 때는 좀 듣는가 싶더니 곧 졸았다. 성인의 도리를 논할 땐 아예 듣자마자 자버렸다고(...).[7] 다만 상앙의 성격으로 보면 진정으로 성인의 도리와 왕도 정치에 대해 논해서 진 효공이 들어주었다면, 자신의 뜻을 펴볼 길이 없다고 보고 떠났을 것이다. 양혜왕에게 그것을 공숙좌를 통해 그것을 알렸는데, 양 혜왕이 그 말을 무시했었다. 그런 즉 먼저 진 효공을 떠보고 앞서 말한 것을 듣지 않으면, 법가의 부국 강병책에 흥미를 보일 것이라 판단하고 설파 순서를 그렇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8] 일단 인구가 많으면 그들이 노동력이 되어 그 넓고 비옥한 관중 땅에 농사를 지어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고, 그들이 군인 및 부역에 동원되어 전쟁은 물론 기타 국가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된다.[9] 같은 사례로 초나라의 초도왕오기의 변법으로 반발한 초나라 귀족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10] 위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11]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진 효공 7년 기사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12] 진효공의 동생이다.[13] 악습 타파라는 것이 한두 번의 개혁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군대서 왜 금방 악습이 타파되지 않는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14] 패자는 달리 방백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진 효공이 마지막 방백 즉 패자이다. 그 이유는 진 효공의 아들 혜문왕은 왕을 칭해 패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15] 진목공(秦穆公)이 진혜공(晉惠公)을 한원 전투에서 이긴 뒤 차지했다. 그런데, 그 뒤의 진(秦)나라 군주들이 무능하여 거기를 잃었는데, 진 헌공이 그곳을 되찾았다.[16] 이것이 위나라 몰락의 결정타가 된다.[17] 다만 혜문왕은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변법을 그대로 시행해 진나라의 강성함은 전국 시대 말기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18] 위에서 보다시피 혜문왕은 상앙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그가 죽었어도 그의 정책 기조만큼은 그대로 유지했다.[19] 소양왕의 아들인 효문왕은 왕위에 오른 지 오래지 않아 죽어서 그 자신의 업적이 없으므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