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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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래
3. 방식
4. 저항
5. 쇠퇴
6. 유사 사례
7. 대중 매체에서 등장



1. 개요[편집]


프레스 갱(Press gang)은 주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있었던 서양 문화권 해군의 강제 징집이다. 정식 명칭은 "강제 징용"(impressment)이며, 국가폭력에 해당한다.

사실 그 당시에는 타 유럽 국가들 또한 이런 식의 강제 징집을 실행하였으나, 영국의 사례가 특히 유명하며, 이를 "프레스" 혹은 "프레스 갱"이라 부른다. 이하에서는 주로 영국 해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2. 유래[편집]


이 프레스 갱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다고 언급된다#.

흔히 범선 시대 유럽에서 해군으로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기에 기피 대상이었으며, 이로 인해 강제 징집이 성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정확히 말해 전시가 아닌 평시의 경우엔 해군 수병이 오히려 상선 선원보다 인기가 더 높기도 했다. 왜냐면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에 소속된 특성상 인건비 절감을 위해 선원을 최소한으로 고용하려 한 상선과 비교했을 때 당시 해군은 필요 이상으로 인력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고, 식량과 술의 공급도 회사 여건에 따라 들쭉날쭉한 상선보다 정량 배급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시 기준으로 영국 해군은 자원자로 충분히 필요한 인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에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아서, 영국 해군史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던 트라팔가 해전 당시에도 전체 수병 중 절반이 자원자였다.

문제는 봉급이다. 전쟁이 나면 물자 수송을 위한 상선단(merchant navy)의 활동이 증가하고, 해군에서도 뱃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하니, 결국 뱃사람의 평균적인 봉급이 상승한다. 자기가 일하려 한 상선이 전쟁 중에 사업을 멈춰버려서 해군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상선이 해군보다 돈을 많이 주면 말짱 도루묵. 그리고 상선에서 선원 수요가 줄기는커녕 더 늘어서 봉급 부담이 배로 늘어나는 경우는 아주아주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영국 해군의 경우 1653년부터 1797년까지, 무려 140년이 넘도록 수병의 봉급이 동결되었다. 반면에 상선원은 항해 횟수마다 계약 및 하선이 자유로운 데다, 계약한 시점 이전 중간 기항지에서 위약금을 일부 물고 내려버릴 수도 있어 한번 입대하면 몇 년은 묶여있는 수병들보다 입사와 퇴직이 자유로웠고, 기항해도 대개 상륙이 금지된 수병들과 달리 상선원들은 기항지에서 다음 출항일까지 다음 출항 준비를 위한 작업과 당직 근무만 빼면 상륙해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선원은 개인이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출항 전에 사서 다음 기항지에서 이익금을 붙여 되팔아 이윤을 남겨 돈벌이를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해군에 들어오는 경우만큼이나 해군에 중지 올리고 피하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애초부터 배를 탄다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이라 (다른 대체제가 있다고 가정할 때) 바닷일은 예나 지금이나 선호되지 않는 직업[1]으로 뱃사람의 수 자체가 작으므로 선원/사관 모집은 언제나 골칫거리.

이 와중에 전시에 해군은 인적 자원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는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해군의 크기를 늘렸고, 그 결과 국가 경제가 해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유럽 국가들은 부담이 되어 해군은 평시에는 군축을 통해 해군의 규모를 줄인 채 유지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하였다.

영국의 경우 평시에는 상선들이 다니는 항로를 타국의 해적사략선(privateers)들로부터 보호하고 적 함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상시 초계를 하는 프리깃슬루프, 4급 전열함은 전 함정을 운용하고, 실제 전투 즉 함대 결전에서 주로 쓰이는 1급부터 3급 전열함은 훈련함기함 임무 수행, 긴급 시 바로 투입하기 위해 현역함으로 유지하는 소수를 제외하고 전부 육상에 올려 무장과 항해용 장비들을 제거해 보존, 전시에 재정비해 투입하는 방식으로 운용하였다. 이를 "in ordinary" 상태라고 지칭했다.

다시 말해 평시 요구되는 해군 인력과 전시 요구되는 해군 인력의 수는 엄청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 전쟁 이전 영국 해군은 18,000명이었으나, 독립전쟁이 시작된 이후 그 수요가 70,000명에 다다랐다. 즉 인원 수가 거의 4배나 차이가 났으며, 이로 인해 평시 인원을 모두 숙련병이라 가정하고 각 함선에 고참으로 배치하기만 하더라도 그 수요가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에 나머지 5만 명 가까이를 자원자들로 모두 채우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전술했듯 봉급 폭증을 어떻게든 돈으로 무마해 용케 인력을 구한다 하더라도 전근대의 느려터진 통신 속도 때문에 제대로 모집하거나 동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어마어마했다. 진짜 돈이 썩어 넘쳐서 마구 퍼준다고 해도 설득하는 것도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심지어 육군 등도 병력 충원 문제가 있고 전시에도 경제는 굴려야 하니 생산 노동을 할 인구도 남겨야 했던 등으로, 가용 남성 인원을 해군이 전부 독차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영국 왕립 해군은 사략선 및 상선단과 해적[2] 세력과 선원 머릿수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뱃사람도 사람이고 돈을 좋아하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 해군 봉급이 맘에 안 들면 차라리 내가 일하던 혹은 일하려던 상선이 전쟁 때문에 퇴짜를 놓아 백수가 될 지언정 위험천만하고 쓰레기 대우를 해주는 해군에 들어갈 이유는 완전히 사라진다.

심지어 모병을 하는 함정 간에도 경쟁이 붙었는데, 후술하듯 각 함정의 함장들에게 수병을 자체 충원토록 하다 보니, 지원자들도 자신이 타고 싶은 함의 상태나 분위기 등을 지켜보고 좋은 쪽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전공이 화려해서 모병 포스터나 모병관의 연설시 자랑 및 높은 포획 상금 획득 가능성을 어필할 수 있거나, 함장이 부유해 해군에서 보급해 주는 것보다 더 많고 비싼 페인트 등을 써서 배를 깔끔히 정비하여 보기 좋게 꾸미거나, 혹은 역시 함장이 사비를 털어 승조원들에게 깔끔한 피복을 지급하고 주류나 부식도 정규 보급에 더해 추가로 지급하거나 하는 함일수록 모병이 수월했고, 숙련되고 능력 있는 이들이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메리트도 없고, 설령 있어도 입대자 수가 미달되면 결국 남는 선택지는 단 하나, 몽둥이 들고 장정들이 모이는 적당한 곳에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위협하거나 죄다 후드려 팬 다음 배로 끌고 가는 강제 징병이다.

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하려면 조직이 가서 알려야 하는 것이다. 봉급을 넉넉하게 준다 치더라도, 그걸 설명할 시간도 아깝고[3], 그러는 동안 육군에서 선수쳐서 "예비 해군"들을 땅개에 끌고 가면 말짱 꽝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빠른 설득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해군에 인원이 갑자기 대거 필요해졌다는 것은 곧 프레스 갱을 한다는 소리가 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3. 방식[편집]


당시 영국에서 수병의 조달 권한은 해군 본부가 아닌, 영국 국왕어명에 의거하여 함대 사령관 및 개별 함선의 함장들에게 주어졌고 교육 및 훈련도 함선별로 자체적으로 했다. 해군본부는 제출된 명단에 따라 급여와 보급 물자 현물 및 그 구매 비용 등을 주는 정도만 했다. 따라서, 프레스 갱 또한 충분한 숫자의 승조원을 편성하지 못한 함선의 함장들이 자신의 배에서 장교가 인솔하는 징집대를 편성해 내보내는 식이었다.

징집대는 소속함이 정박한 뒤 육상에 상륙했고, 역시 정박한 상선이나 어선에 올라타 "국왕 폐하의 해군에서 복무할 지원자를 모집한다. 지원자의 수가 부족하면 강제로 차출해 징집하겠다."는 인솔 장교의 선언으로 시작하여, 자원자의 수가 모자라면 선원들 일부를 강제로 끌고갔다. 함장들 입장에선 가장 필요한 자원이 바로 숙련된 선상 경험 근무자였기에, 선원 몇 명을 징집하는 걸로 인원이 확충되면 이걸로 끝이다.

하지만 만약, 선원의 징집만으론 머릿수가 모자라거나 시간이 없다면, "기술자와 그 조수, 그리고 신사" 중에서 징집을 시작했다. 즉 에 보이는 모든 성인 남자들이 징집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징집 대상자의 의사는 당연히 무시된다. 이게 바로 프레스 갱이 공포의 대상이 된 이유다.

무차별 징집시엔 일단 만만한 부랑자[4]나 술집에 박혀 있는 술꾼들이 가장 먼저 끌려갔고, 자기 할일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프레스 갱한테 가족들 눈 앞에서 끌려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당시 해안가의 술집 고객 대다수는 선원이나 어부들이었으므로, 여기를 덮치면 해군에서 원하는 숙련된 인력을 확보하기 쉬운 데다, 좁아터진 술집에서 취한 몸으로 쉽게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어, 술집은 징집대가 수병 모집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같은 이유로 여인숙도 자주 털렸다. 영국 육군처럼 지방 유치장이나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을 사면해준다는 걸 전제로 징집하는 일도 있었다.

반면에 잘 빼입은 사람들의 경우 알고보니 높으신 분들이라서 잘못하면 함장이 피를 볼 수도 있었기에, 정말 급박하거나 막나가지 않는 이상 이들까지 끌려가는 일은 드물었다. 없었다는 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시의원씩이나 되는 사람이 난데없이 프레스 갱으로 끌려갔다가 가족들이랑 지역 유지들의 강력한 항의로 간신히 풀려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즉 상황이 절박하면 진짜 아무나 막 끌고가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자국 군인공무원, 군인 및 공무원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던 동인도회사 직원 등은 프레스 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도 제외였다. 또한 선원들 중 장교급에 해당하는 신사 계층인 선장이나 항해사, 기술자로 분류되는 직별장들도 징집하지 않았고 그 밑에 선원들만 끌고갔다. 외국인은 프레스 갱의 징집 대상이 아니었으나 "영국 여자와 결혼했거나, 영국 상선에서 2년 이상 근무했을 경우"는 가차없이 징집 대상이 되었다. 외국인을 포함해 이런 징집 대상이 아닌 이들에게 일종의 면제증(일명 protections)이 주어지기도 했으나, 해군본부가 정말 답이 없을때 꺼내드는 히든카드인 "핫 프레스"(hot press) 명령을 발동하게 되면 protections는 무용지물이 되어 이역만리 땅에 온 외국인들도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해군으로 복무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땐 오직 영국 의회 및 국왕 명의로 발행된 면제증만 인정됐는데, 이것도 동인도회사 직원 등 소수의 필수 인력에게만 인가됐다.

원래는 해안가 마을이나 항구에 선박을 댄 뒤 내려서 바로 끌고 갔지만, 사람이 부족해지자 내륙 지역까지 쳐들어 가서 장정을 끌고가는 일도 있었고, 방금 프레스 갱에서 풀려난 사람이 다시 다른 함의 징집대에게 잡혀가는 막장 상황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잉글랜드부터 아일랜드까지 일명 "대영 제국"의 모든 남성들은 강제 징집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당연히 민간인들 사이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불만 사실(grievances) 제 26항에서도 이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

프레스 갱은 육지 위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특히 지나가는 배를 나포한 뒤 선원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도둑질" 또한 빈번했다. 영국의 경우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대프랑스 전략의 일환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한 강제 검열을 실시하였다. 덤으로 프랑스와 교역을 하는 상선이 발견될 경우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검열이나 납세를 거부하면 발포하여 선박을 나포하였다.

이때 가장 만만하게 당하던 대상이 미국이었다. 왜냐면 당시 미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같은 언어를 쓰다 보니 영국의 탈영병이 미국 선박으로 도망가서 숨어드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 상선은 더욱 집중적인 수색 대상이 되었는데, 탈영병들은 이를 대비해서 위조된 미국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가려내는 도중에서 진짜 미국인조차 영국 해군에 강제 징집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미국의 민심은 폭발하였고, 미국 정부 또한 분노하여 미영 관계는 다시금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훗날 미영전쟁(1812년 전쟁)의 간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프레스 갱에게 끌려가면 해군에서 승선 및 해군 복무 경력 등을 따져 신병(Landsman), 이등수병(Ordinary Seaman), 일등수병(Able Seaman) 세 계급 중 하나를 부여했다. 배 한번 타본 적 없는 이는 신병, 승선 경력이 좀 있는 선원 출신은 이등수병, 승선 기간이 길거나 해군 복무 경험이 있는 자는 일등수병 계급을 줬다. 이들은 징집되어 있는 동안 공을 세우거나 모범 근무를 하여 장교의 눈에 들면 상위 등급의 수병으로 진급도 가능했다.

징집병들은 최소 6개월 간 군함에서 수병 생활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부사관 제도 같은 것이 없어 부사관(Seaman Petty Officer)이란 단일 계급만 있는데다 이마저도 좀 오래 복무해 장교들 눈에 든 이를 임명하고 퇴임하는 고참 수병 정도의 느낌이라, 대부분 정해진 기간만 채우면 복무는 땡이었다. 물론 출항 기간이 6개월을 넘기면 육지와 먼 망망대해에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입항할 때까지 강제로 연장 복무해야 했다. 물론 부랑 생활 혹은 기존의 일터보다 그래도 해군 복무 환경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복무하다 보니 적성에 맞거나 해군이 체질이다 싶어진 본인이 희망하기만 한다면 정해진 기간이 지나도 계속 복무할 수는 있었고, 해군 측에서도 이를 당연히 권장했으며, 자원 입대자로 분류되면 입대시 이등수병의 수 개월치 급여가 장려금으로 지급되었다.


4. 저항[편집]


강제 징집에는 당연히 반발이 크며 저항이 있고, 여러 방법으로 행해졌다.

공식적으로는 강제 징집된 인원이 해군본부에 탄원해 풀려나는 방법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법적으로만 보장되어 있지, 출항한 함정에서 징집병들이 항의 서한을 보낼 방법 따윈 없었거니와, 그런 시도를 해봐야 함선의 군기반장인 갑판장에게 얻어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으므로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해군 인력이 부족한 것을 안 국회의원들이 강제 징집을 눈 감아 줘서 프레스 갱이 생겨난 것이다. 즉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저항은 징집 시도 단계에서부터 있었는데, 징병대가 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후딱 배를 출항해버리거나, 징집 대상자들이 대거 일시적으로 내륙으로 피신하고 숨는 것이 일상이었다. 심한 경우 몽둥이, 때로는 으로 무장한 징병된 이들의 가족과 친지, 동료 상선원들이 징집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해방시키는 일도 있었다. 당시 징집대는 보통 곤봉 정도로만 무장했기에 권총이나 커틀러스, 단검, 때로는 머스킷 등으로 무장한 사략선이나 상선원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답이 없었다. 아예 배에 징집대가 오르기도 전에 무장을 갖추고 딴 데 가서 알아보라며 쫓아내기도 했다.

상선이나 어선들도 지나가는 다른 선박이나 입항한 항구에서, 기항지에 징집대가 돈다는 소문을 들으면 거길 피해 입항하는 식으로 징집을 회피하기도 했다. 이 경우 운송중인 화물이 해당 항구에 도착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선장과 징집을 피하려는 선원들 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타협을 보지 못하면 기항지에 오기 전에 선원들이 집단으로 계약을 파기해 위약금 물고 배를 내리거나 파업 혹은 선상 반란을 일으켜 선장과 부선장, 항해사를 협박해 항로를 억지로 돌리기도 했다.

저항은 물론, 이런 "야만적인"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영국의 유명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는 영국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비난하였다.[5]


5. 쇠퇴[편집]


영국 프레스 갱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 군축을 실시하였고, 이로써 유럽 내 영국 해군의 제해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비상시에도 대규모 전력을 동원할 필요가 사라졌다.

해군 역시 이렇게 강제 징집되어 별 의욕도 없어 사기가 낮고, 특히 숙련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 6개월 이상 복무 후 입항하면 전역하는 비선원 출신 징집병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 수요가 줄어드니 징집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이후 동결됐던 수병들의 급여가 인상되고, 육군 병사들보다 후한 대우를 해주는 데다 1850년대엔 세일러복 형태의 수병용 군복이 제정되어 제복 없는 군인 신세를 벗어나는 등 복지가 향상되어 모병제로도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이 때문에 수병들의 질적 수준도 향상되어서 영국 스스로도 자조할 정도로 거칠고 무식하며 술이나 퍼마신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많이 사라졌다. 도리어 수병들이 군에서 배워 온 기술을 전역 후에도 제법 벌이가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쓸 수 있게 되어, 해군은 장기간 복무하지 않아도 싸고 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직업 훈련소 겸 경력 확보 수단으로 여겨지며 자연히 수병들도 기술자처럼 대우받았다.

그리고 수병들은 해군본부 인사 담당 부서의 체계적인 모병 계획에 따라 모집되고, 육상에서 충분한 기초군사훈련후반기교육을 통한 교육훈련 후 각 부대에 배치되는 방식으로 양성 과정이 바뀌어, 더 이상 각 함별로 수병을 징집해 알아서 마구잡이로 양성하는 일도 없어졌다. 또한, 전시에 대규모 인력이 필요해질 것에 대비해 현역 복무 후 전역 혹은 시작부터 예비역으로 입대하는 자원들을 활용한 해군 예비역(Royal Naval Reserves; RNR)과 해군 자원예비역(Royal Naval Volunteer Reserves; RNVR) 제도를 정비해뒀기 때문에, 더는 강제 징집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이 대규모 전력을 동원해야 했던 첫 전쟁은 크림 전쟁이었는데, 영국 해군은 고정 계약 제도를 도입하여 모병제만으로 그 전력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어졌다. 1차대전 때는 특히 참호전의 끔찍함을 피하기 위해 육군에 징집되기 전 해군에 자원 입대하려는 이들이 늘어, 더더욱 인력 걱정을 덜었다.

이렇게 프레스 갱은 악명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군대에서 총동원령이 부활한다 해도 이미 현대적인 징집 및 예비역 소집 관련 행정 체계가 잡혀 있으므로 프레스 갱이 편성될 일은 없다.


6. 유사 사례[편집]


영국은 아니지만 제정 러시아에서는 교도소의 죄수들을 해군 수병과 육군 병사로 강제 동원하는 일이 20세기 초반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결과, 러시아의 전제 군주정에 불만을 품은 정치범들을 강제로 해군 수병으로 쓰는 셈이었고, 이들은 의도적으로 태업이나 반항을 하여 해군 장교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러일전쟁 무렵 해군 장교들이 정치범 출신 수병들을 가리켜 "똑같은 명령을 5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전달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1905년 러일전쟁 와중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다. 단, 러일전쟁 때도 수병 상당수는 (비록 입대 후 이상과 격차가 큰 현실에 절망했을지언정)지긋지긋하고 급여도 짜거나 없다시피한 농노 신세를 벗어나고 크고 멋진 배를 타고 다니고 싶어 입대한 농촌 출신 자원입대자였다. 비록 대우가 개차반이어도 배를 타는 이상 육군 병사나 농노보단 수병의 대우가 훨씬 좋기도 했다.

한국전쟁에도 모병업무를 맡은 청년방위대들이 지나가던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홀치기'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중 상당수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당연히, 이는 대한민국 육군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당시 대한민국 해군은 죽을 확률도 낮고 급여와 대우도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인식으로 지원자가 몰려 인적 자원 걱정은 안 했으므로 강제 징집은 해병대 인원 선발에만 적용했다.


7. 대중 매체에서 등장[편집]


당시 해군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는 필수로 등장하는 요소이다.

게리 쿠퍼, 폴렛 가더드 주연의 영화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들(Unconquered)>(1947)에서는 1763년 여주인공이 프레스 갱에 의해 강제 징집 당할 위기에 처한 남동생을 구하려다가 영국 장교를 살해해 사형 대신 14년 이하의 계약제 하인형을 받는다.

소설 시리즈 혼블로워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밤중에 호각을 신호로 길거리에 나와있는 장정들을 무차별로 끌고 가는 막장 상황이 등장한다.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 함장이 이걸 골때리게 써먹는 장면이 나온다. 잭이 문제체포될 위기에 처하고 담당 관리 일행이 항구 주변을 돌고 있어 반강제로 자기가 함장으로 있는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하 장교의 생일 파티를 위해 잠시 상륙했다 관리 일행의 습격을 받는다. 도망치던 잭 일행은 때를 봐서 관리를 급습해 그가 법 집행시 신분증 대용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지팡이조타장이 빼앗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너 지팡이 없으니 이제 법의 권위를 잃었음"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무슨 함정카드마냥 프레스 갱을 발동, 그 관리를 수병으로 징집(...)해 버린다. 물론 관리가 이 따위 헛짓거리에 동의할 리가 없었고 단검을 빼들고 덤벼 몸싸움이 벌여졌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건장한 조타장이 흠씬 패서 기절시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몸싸움을 시도하는 관리를 본 잭이 "이색기 쌈닭인 거 보니 교육 잘 시키면 훌륭한 수병이 되겠군."이라고 중얼거린 건 덤이다.

Warhammer 40,000에서 임페리얼 네이비에 대한 묘사는 전근대 서양 해군의 모습을 차용했는데, 때문에 관련 설정 및 소설 상에서 임페리얼 네이비가 제국 시민들을 상대로 프레스 갱을 시전하는 묘사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임페리얼 네이비에선 징집된 최말단 계층이 노예나 마찬가지인 징집 노동자로, 수병이 되려면 여기서 승진해야 한다. 수병이 막내가 아니라니.... 게임 설정이긴 하지만, 로그 트레이더가 사생아 출신으로 오직 자신의 능력 만으로 출세한 행성 총독을 조언가로 쓰기 위해 자진 입대 시킨 사례도 있다. #. 헤러틱 아스타르테스 역시 제국 민간인들을 납치한 다음 자신들 시점에서 유망주에 해당되는 부류는 아스타르테스로 강제개조하거나 충성파 아스타르테스를 생포한 다음 각종 고문을 통해 강제로 타락시켜 신병을 충원하는 식으로 프레스 갱을 행한다.

해병문학에서 '자발적 입대 환영', 자진입대 등의 문구로 패러디, 아니 계승된다(...). 설정상 무모칠톤톤정이 오도봉고를 몰며 남성 시민들, 심지어 타군이나 경찰, 소방관, 남학생, 외국인(국적 불문) 남성들[6]마저 납치해 강제로 해병으로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프레스 갱을 묘사한 작품이 존재한다.문학영상[7]

유튜버 몰상식도 이에 관한 정보영상을 올렸는데 여기에 해병문학 패러디도 추가되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이 파운드파운드 존... 새-끼... 기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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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로빈슨 크루소 소설에서도 알 수 있는데 주인공이 배를 탄다고 하니 부모가 크게 화를 내며 만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도 조선시대에 수군 군역이 일명 "신량역천" 중 하나였으며 신분만 양인이지 사실상 노비나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신량역천의 경우 직업을 바꿀 수 없었고 대대로 세습되었기에 일반인으로서는 기피 대상이었다.[2] 반은 드립이지만, 반은 진담이기도 했다. 많은 수병과 상선 선원들이 자의든 타의든 해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3] 육군이야 적당히 범죄자 아니면서 용기 있고 자기 무기가 있는 장정들 데려오면 되고, 정말 급하다면 밀수범같이 폭력 범죄자가 아닌 경제 사범과 사법 거래를 해서 용병마냥 땜빵 인력으로 동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콜로넬이라 불리는 모병관이 예산 받아서 동네 방네 돌아다니며 모병 활동을 해 연대를 편성하는 식으로 좀 더 여유가 있었다. (이것도 비교적 더 엣날에 하던 일.), 콜로넬 굴려서 느긋하게 동원하는 방식은 시대가 흐를수록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아니면 유력자가 자기 돈으로 병력을 모집해서 장교직을 받는 매관매직을 하기도 했다. 경제와 행정으로 보면 세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아주 훌륭한 군대 편성 방식이지만 전문성이 없어 부작용이 엄청났다.) 해군은 바다라는 환경의 극악함 때문에 인력 풀인 선원 수 자체가 부족하다. 이들이 모병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 때 타격이 엄청나다![4] 당시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제정된 부랑자 법(Vagabonds act, 1597)에 따르면, 부랑자는 징집 대상이었다. 아니 징집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세 번 이상 부랑자 혐의로 붙잡힐 경우 최대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즉 특별한 이유없는 무직, 고정 거주지 부재 자체가 범죄였다.[5] 출처: Hume, David (1758). "Of Some Remarkable Customs". Essays and Treatises on Several Subjects[6] 미국 백인 출신이자 최초의 외국인 출신 오도해병인 서킨 딕슨 조가 대표적이다.[7] 참고로 같은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8] 영상에서 장교의 이 더빙(?) 대사 이후 이어진, 울상을 지으며 맞으러 가는 수병의 모습은 강제 징병에 항의하다 기합받는 장면이 아니다. 같은 배 승조원의 물건을 도둑하는 등 공동체에 해를 끼친 수병을 처벌하는 방식인, 당직자를 제외한 전 수병이 상갑판에 2열로 마주보고 도열해 선 뒤 체벌 대상자가 그 사이로 난 길을 동료 수병들이 한 대씩 치는 걸 맞아 가며 끝까지 완주케 하는 형벌의 집행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