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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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개념
3. 용도
4. 사용법
4.1. 관련 문헌
4.2. 군사적 기능
4.3. 연원
4.4. 계승과 창안
4.5. 팔진도로 체현된 제갈량의 기동전술
5. 연의
6. 기타 창작물에서
7. 여담



1. 소개[편집]


八陣圖 / 石兵八陣

팔진도의 상상도, 팔진도의 상상도2 왕종기가 쓴 무후팔진병법집략(武侯八陣兵法輯略)[1]

제갈량이 썼다고 전해지는 진법(陣法)으로 본래 이름은 팔진(八陣), 즉 8개의 진이다. 진법(陣法)의 한 가지로 그 형식에 따라 태고(太古) 시대에 된 것. 풍후(風后)가 만든 것, 손자(孫子)가 만든 것, 오기(吳起)가 만든 것, 손빈병법의 팔진,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이 만든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통은 제갈량이 만든 것을 대표로 꼽는다.《후한서》이현(李賢) 주에는 옛날에 팔진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그것을 따랐다고 쓰여 있다. 제갈량은 그 팔진을 잘 이용했고 새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특기였다.

참고로 제갈량이 팔진을 만들고 잘 썼다는 근거는《제갈량전》에서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기록, 유홍이 이흥을 시켜서 쓴 기록인 "그대의 팔진은 손자, 오자의 병법에도 없었다." 운운하는 기록,《옥해》에 그가 팔진법으로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기록등이 있다. 또《수경주》에는 제갈량이 팔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쓰여 있고,《원화군현지》,《원반구역지》등에도 제갈량이 팔진을 잘 썼다는 내용이 있다.

별칭으로는 석병팔진(石兵八陣)이라고도 불린다. #


2. 개념[편집]


무후(武侯)의 팔진도는 모두 세 개인데, 하나는 면양(沔陽)의 높고 평평한 옛 보루에 있고, 하나는 광도(廣都)의 팔진향(八陣鄉)에 있고, 하나는 어복(魚腹) 영안궁(永安宮) 남강(南江) 탄수(灘水) 가에 있다.

그 진법은 64진(陣)이다. 천충(天衝) 16진은 양쪽 끝에 있고, 지축(地軸) 12진은 중간에 있고, 천전충(天前衝) 4진은 오른쪽에 있고, 후충(後衝) 4진은 왼쪽에 있고, 지전충(地前衝) 6진은 앞쪽에 있고, 후충(後衝) 6진은 뒤쪽에 있고, 풍(風) 8진은 천(天)에 붙이고, 운(雲) 8진은 지(地)에 붙여서 도합 8진이다. 천충은 전후충(前後衝)을 아울러 24진인데 풍 8진을 합하여 천(天)에 붙여 32양(陽)이 된다. 지축은 전후충을 아울러 24진인데 운 8진을 합하여 지(地)에 붙여 32음(陰)이 된다. 유병(遊兵) 24진은 64진의 뒤에 있다. 무릇 군대를 옮겨가며 진터를 결성하고 전충에 맞붙으며 터진 곳을 보충하는 것은 모두 유병에게 달려 있다. 천지(天地)의 전충(前衝)은 호익(虎翼 범의 날개 진)이 되고, 풍(風)은 사반(蛇蟠 뱀이 똬리 튼 진)이 된다. 병법가들은 음(陰)을 우선하여 오른쪽으로 앞을 삼고, 또 바람(風)은 호랑이(虎)를 따르는데 호랑이와 뱀(蛇)은 모두 음의 종류로서 서북에 위치한다. 천지의 후충(後衝)은 비룡(飛龍)[2]

이 되고, 운(雲)은 조상(鳥翔 뱀의 날래 진)이 된다. 병법가들은 양(陽)을 뒤처지게 하여 왼쪽으로 뒤를 삼고, 또 구름(雲)은 용을 따르는데 용과 새(鳥)는 모두 양의 종류로서 동남에 위치한다.

천, 지, 풍, 운을 사정(四正)으로 삼고 용, 호, 조, 사를 사기(四奇)로 삼으니 이른바 팔진(八陣)이다. 늘 2진(陣)이 서로 따르는데 1진의 안에는 또 두 개의 진이 있어 한편으로는 전투하고 한편으로는 수비한다. 중외(中外)는 경중(輕重)의 권세가 있고, 음양(陰陽)은 강유(剛柔)의 절도가 있으며, 피차(彼此)는 허실(虛實)의 지점이 있고, 주객(主客)은 선후(先後)의 수리(數理)가 있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15권 한 후주(漢後主) 건흥(建興) 12년조의 기사


팔진은 원래 황제(黃帝)의 신하 풍후(風后)가 지은 여덟 가지 형태의 병진(兵陣)으로, 천(天) ,지(地), 풍(風), 운(雲), 호익(虎翼), 사반(蛇蟠), 비룡(飛龍), 조상(鳥翔)이 있었는데, 제갈량(諸葛亮)이 이에 의거하여 동당(洞當), 중황(中黃), 용등(龍騰), 조상(鳥翔), 연횡(連衡), 악기(握奇), 호익(虎翼), 절충(折衝)의 진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기정은 사기(四奇), 사정(四正)을 가리킨 것으로, 위의 팔진 중 용(龍), 호(虎), 조(鳥), 사(蛇)를 사기라 하고 나머지 4개 진형을 사정이라 한다.

천지와 풍운은 팔진(八陣) 중 네 진의 이름이다. 정(正)은 적과 대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접전하는 것이고, 기(奇)는 매복하거나 습격하는 등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당나라 이전(李筌)의 《신기제적태백음경(神機制敵太白陰經)》 〈진도(陣圖)〉에 “천진(天陣)은 건(乾)에 해당하며 천문(天門)이 되고, 지진(地陣)은 곤(坤)에 해당하며 지문(地門)이 되고, 풍진(風陣)은 손(巽)에 해당하며 풍문(風門)이 되고, 운진(雲陣)은 감(坎)에 해당하며 운문(雲門)이 되고, 비룡(飛龍)은 진(震)에 해당하며 비룡문(飛龍門)이 되고, 호익(虎翼)은 태(兌)에 해당하며 호익문(虎翼門)이 되고, 조상(鳥翔)은 이(離)에 해당하며 조상문(鳥翔門)이 되고, 사반(蛇盤)은 간(艮)에 해당하며 사반문(蛇盤門)이 된다. 천(天), 지(地), 풍(風), 운(雲)은 사정(四正)이 되고, 용(龍), 호(虎), 조(鳥), 사(蛇)는 사기(四奇)가 된다.”라고 하였다.

삼성(三成) 지역의 넓이에 따라 추연(推演)하여 만든 팔진은 세 가지 형태로, 소성(小成), 중성(中成), 대성(大成)이 된다.. 55명으로 구성된 1대(隊)가 8개 모인 8대(隊)가 1진(陣)이 되니, 1진은 총 440명으로써 이루어진다. 8진이 모여 1부(部)가 되는데 총 3520명으로 이루어지며 소장(少將)이 거느리니, 이것이 소성(小成)이다. 다시 8부(部)가 모여 1장(將)이 되는데 이는 총 2만 8160명으로 이루어지며 중장(中將)이 거느리니, 이것이 중성(中成)이다. 끝으로 8장(將)이 모여 1군(軍)이 되는데 이는 총 22만 5280명으로 이루어지며 대장(大將)이 거느리니, 이것이 대성(大成)이다.

64진(陣)이란 제갈량이 만든 군진(軍陣)인 팔진(八陣)을 말하는데, 전후좌우로 8개씩의 군진이 포진되어 전체 64개의 군진을 형성한다. 채원정은 이 팔진을 부연 설명한 〈팔진도설(八陣圖說)〉을 지었으며, 주자는 제갈량의 팔진이 용병(用兵)을 잘한 것이라고도 하였고 채원정이 〈팔진도설〉을 지은 것을 가상히 여기기도 하였다.[3]

팔진도(八陣圖)에 대하여, 설사룡(薛士龍)이 이르기를, "팔진도를 볼 수 있는 곳이 세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면양(沔陽) 고평(高平)의 구루(舊壘)에 있고, 하나는 신도현(新都縣)의 팔진향(八陣鄕)에 있고, 하나는 어복현(魚復縣)의 영안궁(永安宮) 남강탄(南江灘)의 물가에 있다." 하였다. 이중 어복현의 팔진도가 유명한데 지금은 흔적이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기협(夔峽)은 양자강 삼협(三峽) 어귀에 있는 구당협(瞿塘峽)의 이칭으로 여기에 제갈량이 팔진도를 설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3. 용도[편집]


연구에 따르면 수레[4]를 주변에 둘레를 쳐놓고 기병을 방어하는 전술이라 한다. 북방을 차지하여 강력한 기병을 육성할 수 있게 된 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기병이 약한 촉한의 군대가 위의 기병에 맞서 싸우려고 만든 전법이라는 주장이 있다.[5] 일설에는 팔진을 일종의 모루로, 외곽의 기병대를 망치로 쓰는 모루와 망치 전술의 변형판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마차를 대기병방책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노병이 적을 쏜다던가, 노병과 궁병을 잘 배치하고 보병으로 적을 끌어들여 십자포화 형식으로 사격한다던가 하는,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있는 기본 대형이나 상황의 전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상당히 훌륭한 전술이었는지 서진마륭선비족독발수기능을 격파할 때 쓰였으며, 후대에《이위공문대》에 따르면 당 태종이 팔진법을 물었다는 기록도 있다.《송사》지에 따르면 송나라에서는 변경의 장수들에게 제갈량의 팔진법을 가르쳤으며 (唐) 나라 장수 이정(李靖)은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을 본떠서 육화진법(六花陣)을 만들어 돌궐토번기마 민족을 상대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진왕 사마소촉한이 망하자 장수 진협(陳勰)을 시켜 제갈량의 진도(陣圖)를 학습하게 했다고 전해지며, 명나라의 용정(龍正)은《팔진합변도설(八陣合變圖說)》을 지어 제갈팔진도를 연구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역시 성과를 거두었다 한다.

제갈량의 팔진도는 항오, 행군, 숙영, 배치 등 군의 운용에 있어 효과를 발휘하는 진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의에서의 요괴틱한(...) 요소와는 전혀 상관없이 실제 팔진도는 군 운용의 지침이자 높은 완성도를 가진 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진의 형태를 검토한 후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군의 숙영과 배치에서도 쓰이는 진법이었을 것이다.


4. 사용법[편집]


출처: 제갈량의 기동전술 팔진도

촉한은 산악지대이므로 산림에서 군사조련을 했다. 그러나 북벌을 시작하여 관중과 농서(隴西)[6]에 이르면 지형과 기후가 촉과는 판이하게 변한다. 또 촉군은 보병을 주력으로 기병을 보조 부대로 구성했지만, 위군은 기병을 주력으로 보병을 보조 부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촉군이 북방의 평원 지대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위군과 대항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제갈량은 촉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술적인 고민을 해야 했다. 역사서에는 제갈량이 여러 가지 병법을 토대로 팔진도를 고안하여 군사들을 조련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역사서의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팔진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기는 어렵다.

최근 학술계는 팔진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직도 약간의 문제는 남아 있다. 그러나 제갈량의 전술 사상과 팔진도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4.1. 관련 문헌[편집]


승상 제갈량이 부릉의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그대의 팔진(八陣)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7]

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제갈량전 추석 촉기, 유홍이 이흥을 시켜 쓰게 한 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이나 그에 쓰였던 원융(元戎)이 이전에 없던 독창적인 것이며 제갈량이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다.


마륭은 표지를 세워놓고 4균(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36균[8]

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 아침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총 3,500명이 모집되었는데 마륭은 이를 보고 말했다.[9]

"충분하다."

진서 마륭열전


마륭이 서쪽으로 온수(溫水)를 건너자 오랑캐 수기능 등이 만[10]

을 헤아리는 무리로 일부는 험지를 타 맢을 막아서고, 일부는 복병을 두어 뒤를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八陣圖)에 의거하여 편상거(偏箱車)[11]를 만들었고, 넓은 땅에서는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좁은 길에서는 법칙대로 목실(木屋)을 수레 위에 올렸다.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니 궁시가 그곳까지 미치고 쏜 화살이 보기 좋게 명중하여 활시위의 소리에 응하듯이 적이 넘어졌다, 기책을 간간이 발하니 적이 나와 대적할 뜻을 잃었다.[12]

진서》<마륭열전>, 중국 사서들은 수많은 전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특정한 진법으로 작전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법을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黃帝)의 탁록(涿鹿) 전쟁이나 팔진도로 명성을 날린 제갈량의 전쟁 기록에도 무슨 진법으로 싸웠다는 내용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진법이 군사적 기밀사항이라 사관들이 인지할 수 없었던데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진서에서 마륭이 팔진도에 따라 싸웠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팔진도의 위력이 서진은 물론 (진서가 편찬된) 당대(唐代)에까지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하여 서기 234년에 제갈량이 죽은 뒤 45년이 지났는데도 서진에서는 제갈량이나 그의 팔진도 전법을 연구하고 활용했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당대 팔진도는 이전의 병법에 없는 제갈량만의 독특한 병법으로 여겨졌다. 손오의 병법에도 없는게 제갈량의 팔진도라고 한 진남장군 유홍과 제갈량의 팔진도를 완벽히 습득한 진협, 팔진도를 실제 사용한 마륭은 완전히 동시대 사람이다.


제갈량은 기발한 착안을 하여 연노목우유마를 제작하였고, 병법을 추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주석한 것을 보면 제갈량이 만든 연노는 원융(元戎)이라 불렀는데 철(鐵) 화살을 만들었고 길이는 여덟 치였다. 연노 하나는 동시에 10개의 화살을 발사하였다

학경 속후한서, 먼저, 편상거에는 숫자를 제시하지 않았어도 쇠뇌와 활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쇠뇌는 편상거에 고정시키고 활은 군사들이 휴대하였다. 먼 거리에 있는 적은 쇠뇌로 사살하고 중․근거리에 있는 적은 활로 쏘았으며 백병전에는 창이나 칼과 같은 병장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제갈량은 한 번에 10대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쇠뇌를 개발했는데 그 쇠뇌에 사용하는 화살은 길이가 여덟치(약 24cm)이고 화살 자체가 철로 만들어져 중량감이 상당했기에 적에게 타격을 주기 쉬움을 알수 있다. 일반 화살들의 길이가 2자 6치(약 79cm)에서 3자(약 90cm)인 점을 감안하면 철시(鐵矢)는 매우 짧아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위력을 발휘한 조선의 편전(片箭)과 유사한 점이다.


제갈량의 팔진은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촉의 10만 군대로는 대다수가 기병(騎兵)으로 편성된 위의 30만 상비군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궁노 부대(弓弩 部隊)를 대량으로 양성했다. 이 궁노 부대는 제갈량이 창안한 약 6미터 길이의 목병륜(木柄輪)과 7.5미터 길이의 죽병륜(竹柄輪)을 장비하여 거마(拒馬)와 녹각(鹿角) 같은 장애물을 곁들여 이용하면서 적의 기병이 600미터 정도 접근해 왔을 때부터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군(遊兵) 24개 부대를 별도로 배치하여 궁노의 공격에 붕괴된 적군을 주살하였다.

전소림(田昭林, 중국학자), 제갈량의 팔진도(諸葛亮的八陣圖) 군사역사연구 제2기(軍史歷史硏究 第二期) 1999, p.124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어때한 전략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은 정병(正兵)으로 공략하려고 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장군이 지난 번 돌궐을 평정할 때에는 기병(奇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정병을 사용하려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갈량남만을 정벌하여 그 군주인 맹획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을 때 바로 정병을 사용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진(晉)나라의 마륭양주강족을 토벌할 때에도 (제갈량의) 팔진도에 의하여 편상거(偏箱車)를 활용하였는데, 지세가 광활하고 평평하면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만들어 적의 진공에 대비하였고, 도로가 협착하면 수레 위에 판자 지붕을 만들어 덮고 적과 싸우면서 진군을 계속한 바 있소. 그러니 정병은 옛날의 명장들도 중요시하였던 것이기는 하오.

이정이 말하였다.

지난 번 신이 돌궐을 토벌할 때에 서쪽으로 몇 천리를 진격하였습니다. 그 때 만일 정병을 쓰지 말았다면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녹각거(鹿角車)와 편상거(偏箱車)는 전투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사들의 전투력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면, 전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전진하면서 대오를 정돈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교대로 상황에 따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마륭은 (제갈량의) 옛 전법을 깊게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위공문대


의당 근처의 주(州)에서 무예에 뛰어나고 용감한 4만 명과 경사의 2만 명을 징발해, 6만 명을 모아 무사로 삼고, 후원 내에 정북대장군부(征北大將軍府)를 세워,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도량과 식견이 있는 이를 선발해 담당하게 하고, 아래로는 관속을 둬서, 3군(軍으)로 나눠, 2만 명은 오로지 궁술을 익히고, 2만 명은 오로지 창과 방패를 익히고, 2만 명은 오로지 말을 타고 삭을 씀을 익혀야 합니다. 전장을 세워, 10일에 한 번 연습하며,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을 채용해, 평지에서 적을 막는 방식으로 삼아, 그들이 병기의 적합함을 깨닫고, 정기(旌旗)의 규칙을 알아보게 하며, 기계가 정교하고 견고하면, 필시 적을 막는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54권, 고려(高閭)전


진법은 희녕[13]

(1068년 ~ 1077년) 2년 11월, 조설(趙禼)이 제갈량의 팔진법을 조사하여 구하고(講求) 변경의 장수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관리의 임기응변(應變)으로 삼았다. 곽규와 조설에게 공동으로 조서를 내려 조사하여 구하게 하니(講求) 지형을 보고 헤아려 정히 진도를 임금에게 아룄다.

송사(宋史) 지(志) 195권, 병9


황제(黃帝)가 처음 팔진법(八陣法)을 설치해, 탁록에서 치우(蚩尤)를 물리쳤다. 제갈량(諸葛亮)이 팔진도(八陣圖)를 어복(魚復) 모래펄 위에 만드니, 돌을 쌓아 8 행(行) 이었다. 진晉의 환온(桓溫)이 이를 보고는 이르길 : "상산사세(常山蛇勢)[14]

로다."[15] 이가 바로 구군진법(九軍陣法)이다. (隋) 때 이르러 한금호(韓擒虎)가 그 법에 정통하여, 그의 생질 이정(李靖) 에게 전수했다. 이정은 당시 오래도록 어지러워서, 무관 중 통달하여 훤히 아는 이가 자못 많았기에, 육화진(六花陣)을 만들어서 구군의 진법을 변경하여, 세상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게 했다. 대저 팔진이 바로 구군으로, 구군은 방진(方陣)이다. 육화진이 바로 칠군(七軍)으로, 칠군은 원진(圓陣)이다.[16]

송사(宋史) 지(志) 195권, 병9


팔진도는 연병, 행군, 작전, 숙영 및 각종 병종 간의 밀접한 배합에 관한 진법이다. 그 기본 진형은 종횡으로 각각 8행으로, 이 때문에 팔진(八陣)이라 한다. 그러나 기미의 변화에 따라 많은 진법이 파생되어 나오니, 후세의 부회는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명협


이에 앞서 진협(陳勰)은 문제(文帝)에게 기대를 받았는데 유달리 재능이 탁월하여 군령을 명확히 이해하였다. 문제가 진왕(晉王)이 되자 군대를 관리하는 일을 믿고 맡겼다가 촉한을 멸망시킨 후에는 제갈량의 진법과 그것을 운용하는방법, 갑을교표치(甲乙校摽幟)로 지휘하는 요령 등을 진협에게 주라는 영을 내렸다. 진협은 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숙달했다. 드디어 진협은 궁궐 안의 군대를 관리하는 전중전병중랑장(殿中典兵中郞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무제(武帝, 265-290)가 출입할 때마다 백수번(白獸幡)을 들고 어가의 좌우에서 의장대들을 지휘했는데 진협이 지휘하는 부대는 진형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기강이 매우 삼엄하였다.

진서 직관지, 위 내용은 진협이 제갈량의 진법을 학습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진협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본 사마소는 평소 그를 총애하다가 촉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촉에서 입수한 제갈량의 진법을 진협에게 주어 배우게 하였다. 이때 진협이 공부한 제갈량의 진법은, 포진 방법과 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응용술(圍陣用兵倚伏之法) 및 깃발로 각급부대의 지휘관들을 지휘하는 방법(甲乙校摽幟) 등이라고 하였다. 사마소에게 제갈량의 진법을 받은 진협은 모든 것을 다 암기하고 숙달하였다. 이후 진협은 궁궐 의장대를 지휘하는 장군이 되었다가 사마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 원제(元帝)로부터 제위를 찬탈해 황제가 되자 출입할 때마다 승여(乗輿)[17]

의 좌우에서 백수번을 잡고 의장대들을 지휘하였다. 그는 제갈량의 용병법에 따라 지휘하였기에 의장대의 진열은 매우 정 렬되어 있고 엄숙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과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통하여 제갈량이 혁신한 팔진법의 일면을 탐색해 볼 수 있다.


태강(太康) (280년 ~ 289년) 말에 무제가 꿩 사냥에 나가자 진협은 이때도 도수사자(都水使者)가 되어 따라 나갔다. 거가(車駕)를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각자 사냥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사냥을 끝내기 위해 분산된 거가들을 소집했으나 시간이 지나도록 모여들지 않았다. 그러자 무제는 진협에게 군사들을 집합시키라고 하명하였다. 이에 진협이 백수번을 들어 흔들자 잠깐 사이에 집합이 완료되었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진협의 통솔력을 칭찬했고 진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이 글을 통하여 제갈량의 팔진도는 일사불란하면서 신속 정확한 통신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제의 사냥에 따라 나간 군사들은 황제와 고관들의 사냥을 돕기 위해 각처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볼 때는 통제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군사들을 집합시키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이 생각되었지만 진협이 백수번을 한 번 흔들자 그 신호를 본 군사들은 잠깐 사이에 집합되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진협의 지휘통솔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로써 제갈량의 진법은 부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였고, 그 조직을 지휘하는 체계 역시 주도면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협은 왜 백수번을 갖고 다녔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다음과 같은 문헌들에서 풀어 볼 수 있다.


제갈량과 사마의가 전쟁을 하게 되자 사마의는 무장을 갖추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해 제갈량의 동태를 살펴보게 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 온 사람이 보고 하길 "제갈량은 간소한 수레를 타고 칡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삼군을 지휘하는데 군사들은 그 백우선의 신호에 따라 진격하거나 정지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 보고를 들은 사마의가 탄식하면서 “명사(名士)로다.”라고 말하였다.

송나라 증조(曽慥)가 편찬한 유설(類說), 위 글은 촉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출정한 사마의가 첩자를 보내 제갈량의 움직임을 탐지한 내용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제갈량이 어떤 모습으로 전장지휘를 했는가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첫째는 일국의 승상인 그가 타고 다닌 수레는 보통 사람들이 타는 장식없는 수레였고, 머리에 쓴 것은 가난한 선비들이 쓴 갈건(葛巾)[18]

이었다. 이로써 그가 어느 정도 검소하였는가를 알게 한다. 둘째는 백우선을 갖고 군사들을 지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우선은 흰 깃털로 만든 부채이다. 이것은 멋을 내기 위한 사치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흰색은 불빛이 없는 야간에도 잘 보이기 때문에 주야 겸용하기 위해 선택했던 지휘기구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검소하고 단아한 제갈량의 모습을 전해들은 사마의는 제갈량을 ‘명사(名士)’라고 했는데 이 말 속에는 그가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란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위 글을 통하여 진협의 백수번은 진법을 운용하기 위한 도구란 것을 알게 한다. 다만 백우선 대신 흰 색 깃발을 사용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동진의 지인소설 어림,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이 지은 연번로(演繁露), 왕응린(王應麟)이 쓴 옥해(玉海), 명나라 조학전(曹學佺)이 지은 촉중광기(蜀中廣記) 등 여러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나라 때는 오직 진협과 마륭이 제갈량의 옛 진법 한 두가지를 사용했을 뿐이다. 마륭은 3,000명을 모병하여 서량을 평정해 그의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나, 진협에 대한 일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교표치(校標幟) 라는 군대의 한 가지 기물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여러 차례 혼란을 수습하였다. 부대 간에 다툼이 일어나 도성의 궁궐이 포위당하는 위협을 받았으나 백비번(白飛幡)을 한 번 휘저으니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풀고 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가 휘(麾)의 신호를 가지고 효력을 본 것이 여러 차례나 되는데, 누가 옛날의 진법을 일러 후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일상생활이나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19]

진협과 마륭의 일은 후대에서도 관심사가 되었다. 한 예로 송나라는 황제까지 나서서 진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했던 시기가 있었는데,[20]

이 때도 진협과 마륭의 고사는 비중있게 다루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위 글은 진부량(陳傅良)이 쓴 역대병제(歴代兵制)에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는 "옛날에 사용했던 진법은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후대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법과 같은 군사 분야의 제도들은 군대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국가의 통치수단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같은 시기의 장여우(章如愚)가 편찬한 군서고색(羣書考索)[21]과 왕응린(王應麟)이 쓴《옥해(玉海)》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로 송나라 시절은 송사 예문지에 남아있는 제갈량집 14권과 제갈량행병법(諸葛亮行兵法) 5권, 무후팔진도(武侯八陣圖) 1권 등이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는 등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 현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시기였다.[22]



4.2. 군사적 기능[편집]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팔진도는 연병(練兵), 행군(行軍), 작전(作戰), 숙영(宿營)과 같은 외형적인 군사행동과, 각 병과 즉 보병, 기병, 궁노수와 같은 질적인 요건들을 상황에 맞게 배합한 진법(陣法)이다. 기본 진형이 종횡으로 각각 8행이므로 팔진(八陣)이라 부른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환되고, 또 여러 가지의 진법이 연역되어 나왔으므로 후세에 신묘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문헌에 기재된 것에 따르면, 제갈량은 돌로 팔진도의 모형을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 유적은 다음과 같이 3곳에 남아 있다.

  • 지금의 섬서성 면현(勉縣) 한중 정군산(定軍山)
  • 지금의 사천성 금당현(金堂縣) 미모진(彌牟鎭)
  •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백제성(白帝城) 아래쪽의 강변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제갈량의 팔진도는 군사를 조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3곳의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백제성에 있는 것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이곳을 여행하다가 다음과 같은 팔진도(八陣圖)라는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공은 천하를 삼분하여 세운 나라를 뒤덮고/功蓋三分國

이름은 팔진도로 남았구나/名存八陣圖

강물도 돌을 돌아가지 못하여/江流石不轉

오를 삼키지 못하는 한으로 남았다네/遺恨失呑吳


세월이 흘러 옛 팔진도의 흔적은 비바람에 침식되었다. 일찍이 남북조의 역도원(酈道元)이 《수경주(水經注)》를 편찬할 때 이미 면현(勉縣)의 팔진도는 기초만 남아 있고 그 위로 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백제성 아래의 팔진도도 여름에 강물이 넘쳐 거의 흔적을 찾아버기가 힘들 정도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앞에서 말한 3곳의 유적지는 그 형태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마모되었으며, 고작 몇 개의 흙무더기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어떻게 배열되고 조합되었으며, 공격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수비를 위한 것인가?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지 2백년이 경과한 후, 역도원이 실사를 했을 때 이미 거기에 관한 정보가 없어졌다. 역도원은 상당히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팔진도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송원대 이후로는 팔진도에 관해 견강부회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게다가 소설이 유행을 하자 더욱 과장이 심해졌기 때문에, 팔진도에 대한 신비로운 색채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군사과학적인 관점에서 팔진도는 고대에 작전을 펼칠 때 사용했던 일종의 진법일 뿐이다.

팔진도는 병세를 운행할 때 행장(行藏)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행군과 작전을 전개할 때 전투의 상황에 맞추어 순식간에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가 있도록 하는 진형이다. '행장'의 출전은 《논어 술이편(論語 述而篇)》으로 "써주면 천하를 위해 일을 하고, 버리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에서 나온 말이다. 대군을 지휘할 경우에 행(行)은 출격 또는 진군을 의미하고, 장(藏)은 주둔 또는 매복을 의미한다.

제갈량의 군사 사상은 당연히 적을 살상하고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는 남중의 반란을 진압할 때 적을 살려주고 승리를 얻는 쪽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위와의 전쟁은 상황이 달랐다.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하며, 적은 다수이고 아군은 병력이 부족했다. 촉한은 국토가 협소하므로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기동력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자기의 약점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팔진도가 실제로 응용된 것은 대략 가정에서의 패배 이후로 여겨진다. 제갈량은 그 후에 이렇게 밝혔다.

팔진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부터 군사 행동에서 활용할 것이다. 다시는 패배를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목적은 아군의 전투력을 높이고, 군사 행동을 할 때 절대 패하지 않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4.3. 연원[편집]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팔진도가 제갈량이 창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진(西晉)의 이흥(李興)은 제제갈승상문(祭諸葛丞相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진도는 손오(孫吳)의 병법에도 없는 것이다.


즉 유명한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에도 팔진도가 없으므로,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여러 가지 사료를 검토해보면, 팔진도의 역사적 자취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평 원년(永平 元年) 89년 두헌(竇憲)이 흉노를 정벌하고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돌에 그 공적을 새겨놓았다.


반고(班固)의 연연산명(燕然山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레 1만 3천여 대가 구름처럼 도로를 뒤덮고 팔진을 구축했다. 그 위용이 마치 신군(神軍)과 같았으며, 검은 갑옷이 햇빛에 빛나고, 붉은 깃발은 하늘을 촘촘히 가렸다.(雲輜蔽路, 萬有三千餘乘, 勒以八陣. 莅以威神, 玄甲耀日, 朱旗縫天)


또 이현(李賢)[23]은 병법에 팔진도가 있다고 하면서 "두헌이 팔진으로 흉노를 격파한 것으로 미루어 팔진도는 고대 병법에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이 팔진도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병법을 참고로 자신이 실정에 맞게 개조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현의 판단이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갈량이 팔진도를 만들면서 참고로 삼았던 고대의 병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을 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두헌도 팔진도의 창시자는 아니다. 《정사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은 진의 제도를 대부분 이어받았다.(중략) 10월에 전차와 기마부대를 시험하기 위해 장수의 남문으로 행차하여, 5영의 군사들을 모아 팔진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시찰했다.


그렇다면 팔진은 진대에 이미 유행을 했으며, 한대에는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그 용도는 방진(方陣)으로 배열하여 검열을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1972년 산둥성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손빈병법(孫臏兵法)》에는, 비록 글자가 마모되어 불완전하지만 200여자로 된 《팔진편(八陣篇)》이 있다. 이 자료는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우선 팔진도가 전국시대에 이미 출현했으며, 진수가 말했듯이 팔진도는 제갈량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병법을 보고 나름대로 수정보완을 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또 이흥이 팔진도가 당시에 유행했던 손무와 오기의 병법에는 없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팔진이 실제로 응용된 《손빈병법》의 《팔진편》은 다음과 같다.

팔진을 전쟁에 활용하려면 지형을 이용하여 거기에 적합한 8가지의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즉,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8가지의 진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거기에 적합한 군사를 배치하야 적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뜻이다. 작전의 도구를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지형이 평탄하면 전차를 투입하고, 험하면 기병을 투입하며, 협소한 곳에서는 노궁수를 투입한다.(易則多其車, 險則多其騎, 厄則多其弩)"라고 하였다. 《회남자 병략편(淮南子 兵略訓)》에는 "평탄한 곳에서는 전차를 투입하고, 험한 곳에서는 기병을 투입한다.(易則用車, 險則用騎)" 하였으므로, '액(厄)'은 곧 협소하고 막힌 지형을 가리킨다.

좌전 소공 원년(左傳 昭公 元年)》에는 "적은 보병이고 아군은 전차일 때, 서로 협소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 전차를 이용하여 가로 막아야 승리를 할 수가 있다.(彼徒我車, 所遇又厄, 以什供車, 必克)" 하였다. 춘추시대에 전쟁을 할 때는 전차를 많이 이용했다. 그러므로 협소한 지형에서 적의 보병과 갑자기 마주치면 전차를 연이어 공격하여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전차가 이미 기병으로 대체되었으므로, 손빈(孫臏)이 말한 '易則多其車'에서 '거(車)'는 이미 과거의 전투에서 활용했던 전차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손빈이 말한 전차는 전투용이 아니라 군수품을 싣고 운반하는 치중거(輜重車)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 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지에서 팔진도를 포진하는 것은, 갑자기 적이 기습공격을 했을 때 아군을 엄호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말한 두헌이 흉노를 공격했을 때 팔진을 짠 것은 치중거(輜重車) 1만 3천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터가 끝없이 넓은 사막이었므로, 치중거를 이용하여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흉노의 기병이 돌진을 하면, 한의 궁노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퍼붓거나 긴 창과 예리한 칼로 방어진을 뚫고 들어온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 다음 전황이 변화하는 대로 진형을 변화시켜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한말이 되면 팔진도는 군사검열에 활용된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팔진도를 내놓기까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의 진법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식도 변하고, 또 유력한 전투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갈량이 오늘날까지 팔진도의 창시자로서 여겨지는 것은 이런 팔진도의 기능을 되살렸기 때문으로 제갈량 이후 지금까지 팔진도는 제갈량 고유의 전술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4.4. 계승과 창안[편집]


제갈량은 전술적으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고대의 병법 가운데 '팔진(八陣)'에 대한 연구를 했다. 자료를 바탕으로 그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은 취하고, 새로운 전술에 맞게 고칠 것은 개선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다. 제갈량은 모두 5차례의 북벌을 시행했는데,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고 촉군이 물러난 후, 사마의는 촉군의 진영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갈량은 과연 천하의 기재로구나!


그것은 제갈량이 팔진의 기본요령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촉군의 전력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비록 적장이지만 같은 군사전문가로서 감탄했던 것이다.

팔진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 특징을 개괄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방어를 위주로 하면서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공수를 전환했을 것이다. 263년 촉한이 망한 후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은 진협(陳勰)에게 제갈량의 팔진도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진서 직관지(晉書 職官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협에게 명하여 제갈량(諸葛亮)의 위진(圍陣),용병(用兵), 의복(倚伏)하는 법(法)과 갑을교표치(甲乙校標幟)의 제도를 배우게하니 진협이 이를 모두 숙달하였다.(令陳勰受諸葛亮圍陣用兵倚伏之法, 又甲乙校標幟之制, 勰悉諳練之)


'圍陣用兵倚伏之法'은 진지를 굳게 지키며 적을 격파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위(圍)'는 일반적으로 포위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방어를 가리킨다. 《공양전 장공(公羊傳 庄公) 10년》의 圍不言戰에 주(注)를 단 하휴(何休 후한말의 학자)는 "군사들에게 성을 지키게 하는 것을 '위(圍)'라 한다." 하였다. 나중에는 대개 흙으로 성을 쌓은 수비시설을 위(圍)'’라고 불렀다. 《삼국지 촉지 위연전(三國志 蜀志 魏延傳)》 에는 위연(魏延)이 한중태수로 있을 때 "모든 곳에 튼튼한 성을 쌓아 외부의 적을 막았다.(皆實諸圍, 以御外敵)" 하는 기록이 있다. '의(倚)'는 의탁한다는 뜻이고 '복(伏)'은 숨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수세에 놓인 부대는 반드시 튼튼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엄호시설을 만들어 자신의 주력을 숨긴 다음, 기회를 노려 적을 격파한다는 의미이다.

'甲乙校標幟之制'는 각 부대에 깃발로 서로 다른 표시를 하여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갑교(甲校)' 또는 '을교(乙校)'는 갑이라는 부대 또는 을이라는 부대를 의미한다. '교(校)'는 고대의 부대 편성단위이다. 한무제 시대에는 '팔교(八校)'가 있었으며, 그 부대장을 교위(校尉)라 했다. '교(校)'마다 정원은 같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1천명 내외였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각 부대에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을 주고, 상황에 따라서 공격과 수비, 또는 진격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신호를 할 수 있는 일종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사마염은 이런식으로 장수 진협을 통해 시켜 제갈량의 진도(陣圖)를 학습하게 했다. 그리하여 진협을 전중전병중랑장(殿中典兵中郞將)으로 삼았다가 장군(將軍)으로 올렸다. 그로부터 오랜 뒤에 사마염이 늘 출입할 때마다 진협이 백수번(白獸幡,깃발의 일종)을 지니고 승여(乘輿)의 좌우(左右)에 있으면 의장행렬의 진열(陳列)이 가지런하고 엄숙하였다. (중략) 모두 진협이 통달함한 것에 사례하였고 무제로부터 매우 큰 신임을 받았다.

2. 팔진(八陣)은 주로 평지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팔진의 유적을 보면, 모두 평원에서 작전이 가능한 방진(方陣)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갈량집 고사 제작편(諸葛亮集 故事 制作篇)》에서 인용한 《옥해(玉海)》에는 "한의 두헌은 팔진을 펼쳐 흉노를 격파했고, 진의 마륭은 팔진을 이용하여 양주를 수복했다." 하는 기록이 있다. 북위시대에 북방의 유연족(柔然族)이 변경을 침입하자 고려(高閭)가 표를 올려 '제갈량의 팔진도를 이용하여 평지에서 적을 막는 방법'을 건의했다. 따라서 팔진을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 사례는 보두 북방의 평원지대였다.

3. 팔진도는 여러 부대를 통솔할 때 지휘관의 지시에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된 진법이다. 병법에 통달한 것으로 이름난 동진환온(桓溫)은 성한을 정복하러 가는 길에, 백제성 아래에 있는 팔진도의 유적을 살펴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상산지세(常山陣勢)로구나.


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팔진도를 높이 평가했다.

옛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남은 자취 찾아 왔소이다./望古識其眞, 臨源愛往迹.

그대가 남긴 일 끊어질까 염려되어, 남산의 돌들이 속삭입니다./恐君遺事節, 聊下南山石.


환온이 말한 상산지세는 신속한 기동성을 가리킨다. 손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용병에 능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군사를 움직일 수가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군사를 움직인다는 말은 상산의 뱀과 같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산의 뱀은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몸통을 치면 모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든다.


따라서 팔진도는 적을 대적할 때 각 부대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된 진법이다. 즉 부대를 머리, 꼬리, 몸통으로 나누어 적의 공격에 따라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진세(陣勢)인 것이다.

4. 팔진도의 포진은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작전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환하도록 짜여졌다. 앞에서 인용한 《손빈병법 팔진편》에는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평원에서 전개되는 작전을 제외하고도, 험난한 지형이나 협소한 곳에서도 적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진형을 변형할 수가 있다. 상황에 따라 기병은 정병으로 변하고 정병은 기병으로 변하여, 적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승리를 얻는다.

이상에서 설명한 팔진도에는 제갈량의 전술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는 고대의 팔진도를 자세히 연구하여 새로운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촉군의 전투력을 제고시켰다. 정지하고 있을 때는 산과 같이 육중하고, 전진을 하거나 후퇴를 할 때에는 바람처럼 신속하게 기동력을 발휘했다. 또 적의 공격을 받으면 머리와 꼬리가 뱀처럼 서로 상응을 하여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았다.


4.5. 팔진도로 체현된 제갈량의 기동전술[편집]


제갈량의 전술 가운데 기동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거몽진법(車蒙陣法)

제갈량은 《적의 기병이 침입했을 때에 대한 가르침(敵騎來敎)》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적의 기병이 좌우의 측면을 공격하면 거몽진(車蒙陣)을 구축하고 대비하라.


거몽진(車蒙陣)은 수레에 가죽을 씌워서 종횡으로 구불구불하고 중첩되게 늘어놓아 장애물을 만든 것을 가리킨다. 제갈량은 평소에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돌로 만든 누대(壘臺)를 팔진으로 배열하여 연습을 하도록 했다. 실전에서는 겉에 가죽을 씌운 치중거(輜重車)를 이용하여 여러 겹의 장애물을 만들고, 적의 기병이 돌격해 오다가 뛰어넘지 못하도록 막게 했다. 만약 일부의 적의 기병이 진지 내부로 들어와도 이미 공세가 약해진 상태이므로, 좌우로 무질서하게 배열된 치중거에 걸려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적이 우왕좌왕하면 숨어있던 아군의 보병들이 창으로 공격을 한다. 적의 기병이 멀리 있을 때에는 이 장애물에 몸을 은폐하고 노궁(弩弓)을 잇달아 발사한다.

2. 거치진법(鋸齒陣法)

깊은 산속이나 협곡에서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지세(地勢)를 이용하여 엄호를 하면서 팔진을 분화시켰다가, 적의 기병이 진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공격을 퍼붓는다. 제갈량은 지형이 협소한 곳에서는 톱니처럼 진형을 갖추고 기다린다고 했다. 거치진법은 적과 아군의 진형을 개의 치아처럼 엇갈리게 만들고, 백병전이 벌어지면 아군은 정예병에게 긴 과 예리한 칼 또는 연노(連弩)들의 무기로 잇달아 적진을 공격한다. 《손빈병법 팔진도》에서 "협소한 지역에서는 노궁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지형에서 연궁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실제로 4차북벌에서 위의 장군 장합(張郃)은 목문곡(木門谷)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연궁을 맞고 죽었다. 일종의 거치진(鋸齒陣)에 걸린 것이다.

3. 거형진법(連衡陣法)

평원지대에서 앞으로 전진을 할 때 팔진은 세로로 대형을 바꾼다. 제갈량은 "연형진법은 좁고 두터워야 한다.(連衡之陣, 似狹而厚)." 하였다. '협(狹)'은 일열 횡대로 형성된 좁고 긴 대형을 가리키고, '후(厚)'는 제2, 제3, 제4의 횡대가 서로 밀집된 형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형태의 거형진(連衡陣)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대진(大陣)이 소진(小陣)을 감싸듯이 적을 포위할 수가 있다. 동시에 보병과 기병을 함께 배합하여 '전면에 있는 기병은 수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은 수레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서로 엄호를 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면 적의 배후를 기습공격하거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도록 하는게 가능하다. 제갈량은 《비수를 분배해 둘 것을 지시함(作匕首敎)》에서 항상 비수를 예리하게 갈아두었다가 기병들에게 지급하여 단병접전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4. 삼면진법(三面陣法 )

팔진도를 가동하면서 전군을 지휘할 때 신호를 보내는 수단으로 금(金), 고(鼓), 기(旗), 번(幡)을 사용했다. 《손자병법 군사편(孫子兵法 軍事篇)》에서는 '金, 鼓, 旗, 幡 등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즉 각 부대의 장졸들에게 금과 고를 울려 그 소리를 듣게 하고, 기와 번을 흔들어 눈으로 보게 하여, 진격하고 멈추거나 공격하고 추격을 하도록 했다. 제갈량은 '북소리를 듣고 황색과 흰색으로 된 반쪽의 번(幡)을 흔들면 삼면진(三面陣)을 짜야한다.'고 했다. 삼면을 에워싸는 삼면진은 손자병법에서 말한 '상산지세' 또는 '격기중칙수미구지(擊其中則首尾俱至, 그 가운데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드는 것이다.) 같은 움직임을 가리키며,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공격할 수 있는 진법이다. 삼면진은 거몽진(車蒙陣)과 결합하여 적의 기병대를 무력화시킨다. 주력부대의 양쪽 선두에게 진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는 대장기(麾)로 방향을 지시했다. 팔진은 기치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화한다. 앞에서 인용한 반고의 《연연산명》에 "붉은 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하는 구절은 두헌의 팔진에서는 붉은 깃발로 지휘를 했음을 의미한다. 제갈량의 팔진도에 사용된 기와 번은 두헌이 사용했던 것이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군령(軍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진을 치면 모두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북소리를 똑똑히 듣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깃발이 앞으로 움직이면 전진하고, 깃발이 뒤로 움직이면 후퇴하고, 깃발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돌고, 깃발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만약 명령을 듣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는 참수한다.


팔진도를 제대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군령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체경기에서 승부가 대부분 팀웍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 같다.

팔진도에 사용된 무기는 도(刀), 모(矛), 검(劍), 극(戟), 비수(匕首), 활 등이 있었지만 가장 위력적인 것은 역시 한꺼번에 열 대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연노(連弩)였을 것이다. 이러한 무기들을 팔진의 변화에 맞추어 적절히 활용하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많은 훈련이 필요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5.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아예 마법 수준의 강력한 전술로 등장한다. 연의에서는 '어복포'라는 곳에 설치되었는데,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진엔 문 8곳이 있는데 그 위치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들어간 문을 계속 들어가거나 나와서 헤매게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미로.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를 추격하던 육손은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황승언 덕택에 살아나지만 이는 연의 한정이다. 애초에 병력없이 판타지속 골렘 마법진같이 묘사된 것에서 아웃이다.

이문열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팔진도는 그냥 별 거 없다는 식으로 제갈량 거품설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의처럼 거의 요술 수준의 전술이 아닐 뿐, 매우 높이 평가받았고 실전성도 뛰어났던 전술이 맞다. 도리어 이문열이야말로 제갈량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한 사례.


6. 기타 창작물에서[편집]



6.1. 삼국지 조조전[편집]


도사 클래스가 사용하는 책략으로서의 팔진도와 시나리오 맵에서 등장하는 팔진도가 있다

책략 팔진도는 범위내(3X3) 부대들에게 랜덤으로 효과를 부여하는 기술로서 전체범위 아닌 현무, 쉽게 말해서 쓰레기다. 그래도 써 보고 싶다면 무한 세이브 로드로 대박을 노려보자. 상세정보는 삼국지 조조전/책략 항목으로.

시나리오 맵 팔진도는 가상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어복포 전투'에서 등장. 보이는 적만 잡으면 길이 하나씩 열리기에 딱히 무한대로 헤매는 맵은 아니지만 한번 길이 열릴때 등장하는, 흙인형을 빨리 제거하지 못하면 다음 길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인형 자체의 공격력 및 특수능력(60% 혼란)도 짜증나는 데다가, 4턴 안에 모두 잡지 못하면 죽은 수만큼 추가로 리젠된다. 단 적 부대 무한 리필(...)이란 특성 덕분에 조조전에 익숙해진 유저들은 제한 턴이 넘어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 레벨 노가다를 하기도 한다.

게임 내 데이터베이스에서, 어복포 전투에서만 쓰이는 제갈량이 4개나 있다.


6.2. 삼국전기 시리즈[편집]


1탄 스테이지 5에서 육손의 책략에 의해 들어가게 되는데, 적들만 주야장천 나오기 때문에 다 썰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여포를 만나기 위해서는 처음에 제갈량이 "파진심법, 잘 기억해라! 오행상유 자, 화금목토수!"라고 말한대로 파란색-노란색-붉은색-노란색-검은색 순서로 적들을 죽여나가야 한다는 것.

외우기 어렵다면 등장할 때 홀로 다른 동작으로 뛰쳐나오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놈들을 잡아주면 된다. 모르겠으면 그렇게 잡자.

실패하면 여포와 더불어 간장검과 태아검[24]은 물 건너간다.

2탄에서는 제갈량이 여전히 사기캐라는 사실을 입증하게 된 마법. 발동하면 석주 8개가 나와서 빙빙 돌며 모든 적을 공중으로 띄워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데, 당연히 그 동안 제갈량을 비롯한 아군은 무방비 상태인 적을 말 그대로 개패듯 무참하게 두들겨 패줄 수 있다.

보스도 당연히 걸린다. 대충 팔진도 깔고 장비의 용포를 날리거나, 진 방천화극으로 치거나, 여포 소환하고 흑호천운 몇번 갈기면 최종보스인 손권도 그냥 꽥.

거기다 쓰러지는 보스를 다시 팔진도로 주워올려 콤보를 이어나갈 수 있어서, 스코어링에 있어서도 제갈량을 따라올 자가 없다. 제갈량 혼자 10억 찍는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면 할 말이 안 나올 지경.

다만 6스테이지 보스 중 여포와 좌자, 코끼리 탄 맹우 이 3명은 팔진도가 안 걸린다. 덧붙여 사마의도 팔진도가 안 걸린다. 게다가 사마의는 제갈량의 마법 중 번개도 그냥 씹는다. 플러스(군웅쟁패, 개세영웅)으로 넘어가면 진 여포도 팔진도가 안 걸린다. 게다가 진 여포는 팔진도를 쓰면 아예 무효화시켜버린다.


6.3. 삼국지 시리즈[편집]


삼국지 12에 등장하는 전법. 소유무장은 제갈량장량, 타케나카 시게하루.

지휘 포인트 7을 소모하여 범위 내 아군의 전투력을 30 상승시키고 복병상태로 만드는 전법. 복병의 책과 고무의 책을 혼합한 성능이다. 복병으로 적군 부대를 동요시킨 뒤에 상승한 전투력으로 방어력과 공격력이 반토막난 적을 끔살시키는 것이 기본 운영법.

삼국지 12에서는 복병상태일때 아군 부대가 적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는데, 아군부대를 복병화시킨 후에 적의 빈집을 털거나, 러쉬를 오는 적을 포위하거나, 상대에게 심리전을 거는 등의 응용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특히 대전판에서 사기전법으로 통한다. 다만 컴퓨터가 쓰는 팔진도는 별로 유용하지 않은데 싱글 플레이 AI는 멍청돋기 때문에 그냥 팔진도 걸고 들이박기 때문이다. 그리고 싱글에서는 7포인트보다 싸고 팔진도보다 유용한 전법이 많다. 허유엄살이라든가....

팔진도는 전투력 상승보다는 아군 복병화를 노리고 운용하는 전법이다. 팔진도를 걸기 전에 자신의 부대가 상대 부대 하나를 집중공격하는 중인지 확인하고, 만약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부대와 교전하도록 조종하자. 일점사 상태에서 팔진도를 쓰면 동요가 맞고 있는 단 한 부대에만 일어나니, 미리 부대마다 공격할 대상을 다르게 지정하는 컨트롤이 필요하다.


6.4. Fate/Grand Order[편집]


제갈공명(Fate 시리즈)의 보구로 등장. 해당 항목으로.


6.5. 파티피플 공명[편집]




공명이 시부야로 날아오고 BB Lounge에서 취직한 다음 날, 코바야시와 바둑을 두는 중 코바야시가 팔진도 일화를 언급한다. 공명이 사용했던 팔진도는 연의에 서술된 것과 달랐기에, 팔진도가 그리 전해진거냐며 신기해하면서도 이 일화에 대해 과장되긴 했어도 지형, 기상, 사람의 마음을 읽으면 가능하지 않겠냐는 감상을 남긴다. 그리고 클럽 WAAARP의 이벤트에서 여러가지 기자재와 플로어 내부의 구조를 이용해 연의의 팔진도를 재현하는 것에 성공, 에이코의 공연 플로어에 온 이들이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에이코의 무대를 꽉 채우는 위엄을 달성한다.

물론 이들이 남은 이유는 팔진도 전략으로 인해 진짜로 나가지 못한게 아니라, 팔진도에 걸려 해메는동안 에이코의 노래를 길게 감상하면서 반해버린 것이다. 공명 자신도 발을 묶은건 자신이나, 이들이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에이코의 노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6.6.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이릉대전이 시리즈 대대로 등장하는 만큼 팔진도 또한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촉군 입장에서는 팔진도를 통해 안전하게 도망가면서 오군의 추격을 막는 것이 목표고, 오군 입장에서는 팔진도를 뚫고[25] 도망가는 촉군을 추격하는 것이 목표다.



7. 여담[편집]



* 상기 거론 된 여러 사료들이나 해외에서의 용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제갈량의 것으로 거론되는 팔진을 "팔진도 八陣圖"라 부르는 곳은 세계에서 단 한 곳, 한국의 삼국지 팬덤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팔진도 八陣圖" 에서 "-도"가 해당 진형, 진법의 이름의 일부가 아니라 단순히 "그림 도(圖)"자가 뒤에 붙어 "팔진의 도면"을 뜻하는 말을 언젠가, 누군가가 완벽하게 오독한 것이 무비판적으로 퍼져나가서 그냥 일종의 (해당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통칭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된 사료의 원문들에는 대부분 "팔진"으로 불리운다. "제갈량의 팔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제갈량의 팔진의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매우 드문 경우에 "팔진도"라고 언급되는 경우에는 맥락 상 "제갈량의 팔진의 그림으로 알려진 것은 이러이러한 게 있다"라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즉, 팔진을 그린 도면으로 전래되는 것들이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는 의미로 (당연하게도,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갈량의 팔진의 그림"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등장하는 것.

따라서, 본 문서상에 "팔진도"라고 적혀있는 사실상 모든 문장, 문항들이 실은 완전히 잘못된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 제갈량의 팔진의 "역사성"이나 "실체"를 논하는 것에는 상당히 신중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정규학문으로서 전쟁사에서조차도 이런 식으로 미시적으로 구체적인 진형이나 싸움법 등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매우 지엽적으로 언급이 되는 사소한 것들의 진위여부는 대개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삼국지와 관련 된 여러가지 문서들에서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내지는 상식"으로 회자되거나 언급되는 수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학문적 연구 레퍼런스나 소스를 통하여 진위여부가 규명된 것들이 아니라 그냥 팬덤에서 오래 반복되고 자주 언급되다보니 다들 그냥 사실인양 취급하는 카더라에 가까운데, 제갈량의 팔진에 대해 서술된 위의 많은 내용들도 결국에는 추측에 불과하다.

이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기초적인 고려요소는, 예컨대, 애초에 "팔진"에 대한 설명과 후대에 팔진에 대해 시도되는 설명들이 완전히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 있다. 즉, 애초에 "팔진"이라는 것에 대한 기본적 설명이 어떤 군사학적, 병법적 현실을 담고있기 보다는 전형적인 뜬구름잡는 유사철학적 설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8x8=64" 및 숫자 "8"이 갖는 의미는 어떤 군사적 현실과 접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고의 팔괘론에 기반한 신비주의적 설명에 불과하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싸우는 무술을 환원주의적으로 볼 때 "손발을 내질러 대상을 가격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현실에 무슨 "주천을 돌고 팔괘의 원리에 따라 무슨 기운이 어떻게 합일하고 블라블라..." 등의 신비주의적 설명을 동원하여 미화한 전형적인 중국전통권법식 허풍을 생각해보자.

현세적으로 무엇인가가 대단히 유용하거나 쓸모가 있거나 효과가 있을 때 그에 대해 (현대적 기준에서) '현실적인' 설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 요소들에서 신비주의적이거나 거의 방술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대는 것은 지금까지도 동양사에 투신한 학도들이 사료를 읽을 때 숱한 두통을 유발시키는 지극히 동양적 문법 중 하나이다. 현세적인 제도나 물건, 현상 등을 설명할 때 특히 자주 역경, 오행사상, 팔괘론 등의 상고의 점술적, 주술적 요소들이 일종의 "양념"처럼 배가되어 의미를 이해하기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것.

즉, "팔진"에 대한 설명이란 것도 결국 그게 실제로 군대의 전투포진법으로 어떤 의의를 가지는 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설명이 없다. 그냥 팔괘론적 신비사상에 따른 오만잡다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진형 내에 있다는 "문"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 문에 그런 이름이 붙고, 그 문에 들어가면 어떤 효과가 난다는 식의 설명은 그냥 실전을 수행하거나 이끈 적이 없는 문인들의 망상에 가깝다는 것.

여러 사료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갈량이 생전에 자주 사용하던 어떠한 진법(이것이 숙영지, 영채를 확립하는 방법으로서 '진법'을 뜻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회전/합전에 들어갔을 때 전투진형으로서 사용되던 의미에서의 '진법'을 뜻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이 있고, 그것이 효과적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죽은 후 가까운 시기 내에서 (대개 그의 사후 100년 이내) 몇몇 사람들이 그것을 연구했다는 것뿐이다.

이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더 멀리 당, 송 등의 시절부터 "제갈량의 팔진"으로 언급되었다는 것들이 실제 제갈량의 그것인지, 아니면 또 어느 누군가가 그럴듯하게 제갈량의 팔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일 뿐인지조차 확실히 규명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 팔진이라는 것이 수레를 둘러쳐 기병을 막던 식의 방어진이라는 설 등, 구체적인 얼개에 대한 논의는 더더욱 어떠한 현실적 근거도 없는 유희에 가까운 추론에 불과하다.

팬덤으로서 가볍게 토의하고 상상하면서 서로 즐거운 시간을 갖기에는 적합한 주제이나, 정말로 학문적 기준에서 역사성, 현실성을 논의하자면 이 문서에 열거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조차도 결코 '사실'에 가까울 수 없는, 나름의 크고 작은 근거를 지닌 확인될 수 없는 추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이 문서뿐만이 아니라 삼국지와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이러한 영역에 속해 있다.

8. 스타크래프트 맵[편집]


팔진도(스타크래프트) 문서로.

[1] 각 문헌에 제갈량의 팔진도가 쓰인 상황이나 팔진도의 근원에 대해 모아 저술한 것이다.[2] 나는 용의 진[3] 《朱子大全 卷76 律呂新書序》[4] 전투 마차, 전차[5] 제갈량의 북벌 우선 목표가 옹주와 양주 확보인데, 이는 촉한도 안정적인 기병 육성을 위한 의도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에 성공하면 최종목적인 위나라 점령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6] 현재의 감숙성(甘肅省) 서쪽, 황하 동쪽 지역에 해당함.[7]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8] 9석(石)이다.[9] 36균은 약 238kg이고 4균은 약 26kg.[10]자치통감》에서는 수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1]자치통감》에서는 마륭의 팔진도 사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서를 인용하면서 그가 편상거를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해 간접적으로 팔진도를 언급하였다. 편상거는 팔진도에 의거해서 만들어졌으니. 한편, 편상거는 제갈팔진도 중 치중차에 가죽을 덧씌워 공방일체로 쓴 거몽진법을 응용한 듯 싶다.[12]태평어람》에 인용된 왕은의《진서》에서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마륭을 무위태수로 삼았다. 군으로 갔는데, 악한 오랑캐 굴국수기능 등이 길을 끊고 마륭을 포위했다. 마륭은 팔진도를 만들어, 지형이 광활한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녹각거영으로 병진했고, 좁은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어 나란히 싸우고,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좁은 도로 측면에 자석을 뿌려서, 적의 갑옷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륭의 병사들은 소가죽 갑옷을 입어 움직일 수 있으니, 적이 귀신이 되었다."(馬隆為武威太守。之郡,惡虜窟局樹機能等斷道圍隆。隆作八陣圖,地廣則鹿角車營并進,狹則木屋施輪,并戰并前。智謀從橫,出其不意,以磁石累夾道側,賊鎧不得過。隆兵著牛皮鎧得過,賊以為神。)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관찬 진서의 표현대로 팔진도에 의거해 팔진에서 가장 중요한 편상거 진영을 만들었다는 뜻일것이다.《태평어람》에 인용된 왕은의《진서》의 다른 구절엔 "마륭은 양주를 공격했는데, 악한 오랑캐가 길을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 차영(車營, 수레진영)을 만들어서 나란히 추격했다, 좁은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고 나란히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능히 성공했다."(馬隆擊涼州,惡虜斷道。隆作八陣圖車營并追,狹則木屋施輪并前,智謀縱橫,出其不意,故能成功。)라고 나와 있기도 하고.[13] 송나라의 제6대 황제인 송신종 때의 연호.[14] 상산은 수미(首尾)가 상응한다는 전설상의 뱀인 솔연(率然)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손자(孫子)》 〈구지(九地)〉에 “솔연은 상산에서 나는 뱀으로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원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원하며, 중앙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응원한다.〔率然者, 常山之蛇也. 擊其首則尾至, 擊其尾則首至, 擊其中則首尾俱至.〕”라는 말이 있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는 솔연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15] 《진서(晉書)》 권98 〈환온열전(桓溫列傳)〉에 "처음에 제갈량이 어복(魚腹)의 백사장에다 팔진도를 만들 때 돌무더기를 여덟 줄로 쌓았는데, 줄 사이의 거리가 두 발이었다. 환온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상산(常山)의 뱀 형세이다.’라고 하였는데, 문관이나 무관이나 모두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16] 이는 송신종 시기 신종이 신하였던 장성일(張誠一), 이헌(李憲) 등과 팔진의 역사에 대해 논한 기록이다.[17] 임금이 타는 수레[18] 칡으로 만든 두건[19] 원문: 陳傅良, 歴代兵制 卷三 (電庫 所收), “三國…晉之世, 惟陳勰․馬隆, 用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克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槩見, 然,徒校標幟兵之一物耳, 更數大亂京闕圍逼, 而白飛幡一麾, 衆皆解甲不鬪, 麾號數信,收效至此, 孰謂古法之, 不可施於後世, 而軍政之果, 無益於人國也.”[20] 송사 195권[21] 원문: 章如愚, 羣書考索 後集 卷四十九 (電庫 所收), "兵門…晉之世, 惟陳勰․馬隆, 得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概見, 然徒校幖幟兵之一物耳. 當凉關, 倉皇之中, 而白虎幡一麾, 衆皆解甲麾弓, 素信收歛, 至此, 孰謂古法, 不可施之後世, 而軍政之無益於國哉.", 내용은 진부량의 역대병제와 거의 같다.[22] 더불어 태평어람 등에 무후병법, 제갈량병요 등이 인용되어 있었고, 왕응린이 쓴 옥해(玉海) 중흥서목(中興書目)에는 량집(亮集) 14권에 비기(碑記)등의 12편이 2권으로 더 편성되어 들어가 있었다.[23] 명나라의 대신[24] 간장검은 여포 격파시 바로 드랍되며, 태아검은 여포 격파 후 나오는 화씨벽을 입수해야 얻으러 가는 길이 생긴다.[25] 그래서 오군 이릉대전은 팔진도에 들어갈때마다 지도가 보이지 않거나, 확대 지도로 강제 전환되어서 길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핸디캡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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