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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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 Wagon

1. 개요
2. 동아시아의 전투 마차
2.1. 명나라 때의 재발견
2.2. 조선시대의 전투마차
3. 유럽의 바겐부르크



1. 개요[편집]


흔히 전차(戰車)라고도 한다. 고대 전차처럼 '수레'라는 점은 똑같지만, 병기 자체를 타고 전장에 뛰어드는 공격적인 돌격 병기인 전차와는 반대로 아군을 보호/보조하는 방어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소설 초한지에서 초왕 항우한신이 평원에서 회전으로 승리한 철수레[1]삼국지연의에서 위나라 조진촉한제갈량이 대결할 때 조진의 구원군으로 온 서강족의 철차(鐵車)도 이것에 속한다.[2]다만 이런 형태의 전차는 후술하겠지만 좀 후대 물건이다.

사용법은 전차처럼 무장하고 돌진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이다. 돌격용 전차는 이미 기원전이 끝나기도 전에 기병에 자리를 내 주고 도태되었다. 이건 간혹 돌격용으로도 쓸 수는 있겠다만 보통은 수레를 아군 진지 주변에 둘러쳐 바리케이드로 사용하여 작은 임시 고정 방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군, 특히 기병의 돌격력을 상쇄시킬 수 있어 주로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많이 쓰였다. 그러나 상대가 공격을 해오는 형태에 따라 맞서는 방어 전략을 중심으로 하기에 전투의 주도권은 일단 적에게 넘겨주게 되며, 더욱이 크고 무거운 수레를 사용하기에 진형을 짜고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결과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상대가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대처하기 힘들고 포위당해서 전멸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아예 임시 고정진지 속에 틀어박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상대가 장거리에서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대포를 동원할 경우에는 속수무책으로 과녁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물론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이 단점을 장점으로 상쇄시키는것도 가능했다. 유럽에서 전투 마차 전술의 달인인 얀 지슈카는 작전상 후퇴와 전투지역 선정을 훌륭히 해내서, 전투마차 만으로도 불패 장군의 명성을 쌓았다. 똑같이 전투마차나 수레를 이용한 전술인 팔진도를 사용한 촉한의 제갈량과 서진마륭 역시 공세적인 입장에서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근대시대로 접어들면서 대포의 발달로 이런 전투용 수레 진형전술은 완전히 사라지며, 현대에서는 시위대 진압시 버스나 방패가 달린 트럭/차량으로 차벽을 쳐서 시위대의 공격을 차단할 때 사용된다. 차벽 문서 참조. 그리고 컨테이너도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보병에게 이동식 엄폐물을 제공해준다는 전술 개념 자체는 계속 살아남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투입된 최초의 현대 전차[3]는 보병에게 이동식 엄폐물을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1930년대까지 보병전차라는 개념으로 꾸준히 개발되었다. 고대 전차와 같은 공격 병기로서의 전차는 순항전차 등이 계승한다. 이런 각각의 분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하나로 통합된 것이 오늘날의 주력 전차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전차(공격)와 전투마차(방어)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 현대의 전차라고도 볼 수 있다.


2. 동아시아의 전투 마차[편집]


삼국지의 무대이기도 한 중국 삼국시대에서 돌격 목적이 아닌 전차가 확인된다. 돌격과 바리게이트 양쪽으로 사용된 예시는 춘추전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 말기의 전투 운용이 특히 그렇다.

삼국시대에도 북방 기마민족들의 공격이나 적 기병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우마차를 사용해 임시 바리케이드로 사용해 방어진을 짜는 '거진'이 존재했는데, 이는 수레에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은 가시나무를 싣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재빨리 제일 앞줄에 수레를 배치하고 가시나무를 쏟아 임시 방어선을 만드는 용도였다. 혹은 그냥 평범한 수레들을 배치하고 연결해 적의 돌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제갈량의 팔진도가 바로 이런 전투 마차를 이용한 전술이었다고 추정된다. 마륭이 사용한 팔진도를 보면 편상거라는 수레를 이용해 적을 막아냈다고 한다.

중국과 가까운 한반도에서도 고대부터 채리엇이 사용되었고, 이후 방어용 전차에 대한 기록도 간간히 나타난다. 가장 직접적으로 한국의 전투수레로 언급되는 것은, 산악전이 많다는 지형상의 특징으로 무거운 전투수레를 만들기보다는 가벼운 산악수레에 추가적인 방패를 장착하는 검차의 형태가 주로 쓰였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된다.[4]

주로 중세시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전과는 조금 모습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그냥 보통 수레를 이용했는데, 이때부터는 일반 수레와는 달리 전면부에 큰 방패판을 세우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창검을 달아 적의 돌입을 저지하거나 성벽/성문이 파손되었을 때 배치하여 임시 방책으로 사용하거나, 공성전에서 전면에 앞세워 적의 화살을 막아내는 등 용도가 완전한 전투 전용으로 고정된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에서 사용된 검차가 바로 이런 종류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화차도 방패와 창칼을 달아서 화포와는 별도로 기본상태에서도 검차와 유사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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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에서 사용한 항전차의 모습. 한국의 검차도 이런 종류였지만 조금 더 가벼운 형태였다. 뒤의 손잡이를 병사들이 밀면서 전진하고, 방패 뒤의 약간의 공간에서 궁노수들이 화살을 쏜다.

파일:external/www.militaryreview.com/cha_4.jpg
송나라 때 사용된 검차의 일종인 상차(象車)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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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군사서적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검차와, 그 검차로 짜는 전차진의 개념도.출처링크

파일:/image/020/2008/09/04/200809040390.jpg
조선시대 사용된 문종화차의 모습.[5] 우리가 흔히 아는 모습은 저기서 좌우의 방패와 전면부 칼날이 없는 형태인데, 초기에는 검차의 업그레이드 형태로 추측될 정도로 방패판을 장착한 기종들이 있었으나 이동시 불편함의 이유로 나중에는 제거되고 한국 특유의 전투수레보다는 포탑 기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화차 계열의 무기체계로 발전했다.


2.1. 명나라 때의 재발견[편집]


이후 몽골원나라에서는 별다른 등장이 없다가, 명나라 시대 여진족, 특히 명 말기 후금(후일 청나라)이 건국되어 크게 성장하면서 다시 대두된다. 남방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북방에서는 기마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고 만리장성 수축에 공을 세운 척계광은 저서 '연병실기'에서 전차를 이용해 방어진을 짜는 거영과 전차의 설계도, 훈련법을 제시하였다. 다만 이 당시의 휴전 분위기로 척계광의 거영이 실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일은 없다. 이 때문에 척계광의 거영이 몽골기병을 상대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떡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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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계광의 전술에 등장하는 전차진형의 모습.

명나라에서 전차진에 사용하던 전투마차들의 모습.*

명나라 멸망 후 청대에도 전차는 여전히 활용되었다. 그러나 위에 나온 척계광식의 대기병용 전차진형이 아니라 송나라 때 것처럼 전면에 커다란 방패판이 달린 형태였고, 기병이 중심이었던 청나라의 특성상 사용빈도 역시 감소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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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공성전 당시 남명포르투갈 용병이 청군을 공격하는 모습. 청나라 군대가 앞에서 말한 방패판이 달린 전차를 사용해 포르투갈 용병대의 공격으로부터 아군 총병을 보호하면서 진군하고 있다


2.2. 조선시대의 전투마차[편집]


위의 동아시아 항목의 서술처럼,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검차 같은 가벼운 전투수레에 방패와 창칼을 장착하고, 그 뒤에서 원거리 투사 무기를 사격하는 방진을 사용했다. 이렇게 산악지형에서 이용하는 가벼운 전투수레에 화약무기를 덧씌운 시스템이 바로 고려후기부터 등장하는 한국의 화차였다. 대략적으로는 1300년대 중반부터 전투수레+화약무기 방진이 이용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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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전투수레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종 총통기 화차. 검차처럼 방패판을 장착해야 방호력이 확보되는 다소 가벼운 형태인 동시에,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적의 돌격을 막으면서, 당시의 주요 적군이었던 경무장 병력들을 살상하는데 유리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사실상 검차 뒤에서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던 전통적인 한반도의 경량수레 전술에서 연발 화포를 장착하여 업그레이드했던 형태이다.

조선의 성립 이후에도 팽배수들과 함께 북방 수비전략과 산악전투에서 조선의 초기 화차들은 검차에 화약무기를 장착한 무기로서 적의 정면 돌격을 차단하는 역할을 병행하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이 사용하는 전투수레의 개념은 위처럼 이동하기 쉬운 기동성을 중시하면서 높은 화력을 쏟아붓는 화차의 개념에 가까웠다.

치열한 백병전이 자주 벌어진 고대시대와는 달리, 중세 초반의 한반도에서는 육중한 이동식 바리케이드를 쓸 이유가 적었다. 몽골의 침입 이후 주로 상대한 적의 군대가 유목민들의 경기병이었기 때문이다. 즉, 경기병 및 경보병들과 술래잡기를 해야했던 안보환경 때문에, 고려말 조선초 시대에 만들어진 전투수레들도 그만큼 기동력과 민첩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기관총 같은 소형 연발포 혹은 신기전과 같은 편리한 로켓무기를 싣어놓은 상태에서 가벼운 검차의 업그레이드 형태로서 만들어진 화약병기들이 당시의 안보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투수레로서 발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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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바겐부르크 등장 일본 보병 다 죽는다 이놈들아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 의병들이 오르간 건을 싣은 전투마차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임진왜란에서 수백년만에 한반도 내부에서도 대규모 백병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일어나자, 육중한 바리케이드와 다수의 화포를 조합하여 근접전을 차단하는 전술이 의병(=농민+지방군대)들에 의해서 다시금 발달하면서 대형 전차들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임진왜란의 조선이 바다에서는 거북선으로 백병전을 막았다면, 육상전에서는 의병들이 전차를 제작하여 백병전을 차단하는 전술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일본군을 상대로 비슷한 전술을 사용한적이 있었던 명나라의 척계광의 전술과 서적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기본 전투교본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후에는 조선 정부에서도 전투마차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척계광의 다른 저술 '기효신서'를 증보개정한 '병학지남'에서도 '연병실기'에 등장하는 전차전에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많은 지형상의 문제와 화기의 발달로 척계광식의 전차전은 그다지 널리 쓰이지 못했으며, 고려왕조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한국지형에서 잘 쓰인 기존의 화차와 검차를 재개발하고 이를 이용한 진형이 더 일반적이었다.

어찌되었든 조선이 전투마차를 자주 사용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던 임진왜란 시기에는 의병들이 화차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레에 소형화포를 20~40개씩 싣으며 일본군을 상대로 이겼다는 묘사를 보면 훈련도가 떨어지는 의병들이 아래의 유럽 후스파 전차와 비슷한 상황에서 전차전술을 개발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이런 식으로 효율성을 보여준 화약무기를 싣은 전차로 방진을 짜는 전략을 조선의 정규군에서도 도입하게 되면서, 조선만의 독자적인 전투마차들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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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은 현대적인 탱크와 유사한 사격장치들이 달린 전투마차들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위의 그림에 있는 제주목사 신경준의 화차인데, 회전식 화포를 장착하고 내부에서 화약무기를 정비할 수 있어서 사실상 원시적인 중세 탱크 컨셉의 무기였다. 그밖에도 조선 중기에는 70여명이 조작해야 하는 귀거라는 초대형 화약 전차가 개발되기도 했다. 거북이수레라는 뜻이니까 대충 거북선의 육상전차 버전인듯? 하지만, 별로 쓸모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러한 탱크 형태의 화차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더 좋은 야전용 화포를 양산하는 기술이 현명한 선택이었고, 조선에서도 아이디어만 그럴싸한 중세 탱크 같은 자원을 낭비하는 무기보다는 신뢰성이 좋은 지원화기 불랑기포와 저격이 가능한 화승총 천보총을 더욱 개량하여 화약무기의 비거리와 대규모 무기 지급을 우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조선시대 화차방진도 링크. 화차를 사용해 방어진을 짜는 것이다. 네모난 직사각형이 화차, 작은 쥐처럼 생긴 것은 목화수거이다. 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화차 문서 참조.

3. 유럽의 바겐부르크[편집]


유럽에서도 중세 시기에 이미 비슷한 것이 사용되었다. 바겐부르크(Wagenburg)라는 전투마차로서, 사용법은 척계광의 전차전 같은 화약시대의 전투수레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 강력함은 마차(城)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애초에 바겐부르크란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마차(Wagen) + 성(Burg)의 합성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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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4륜 수레가 대포를 장착한 바겐부르크. 오른쪽은 일반 포차다.
출처

대표적으로 바겐부르크를 사용한 사례는 유럽의 후스파에서 보인다. 보헤미아 지역의 종교 개혁가였던 얀 후스를 추종하던 후스파는 주축이 농민군이었기에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성 로마 제국 제국군과의 야전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후스파의 사령관 얀 지슈카는 마차로 방어진형을 짜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전법을 들고 나왔고, 핸드 캐논석궁으로 기사들을 원거리에서부터 조진 후 근거리에까지 달라붙은 기사들은 마차 위에서 도리깨로 두들기는 전법으로 후스파의 여러 차례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불패의 명장으로 군림했다. 이러한 마차 방어 진형은 후스파의 거점 타보르에서 이름을 따 타보르라고 불리었으며, 이 영향으로 이후 동유럽에선 타보르가 자주 쓰이게 된다. 이 때문에 "최초의 탱크"라는 조금은 과분한 평가도 받는다. 그래도 자체적인 포탑과 백병전 저지장치 같은 몇몇 요소가 부족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후 한국에서 이를 보완하여 만들어진 원시적인 탱크 형태의 전차들보다 100여년 정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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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용된 바겐부르크(Wagenburg)의 레플리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4Wagenburg_der_Hussite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genburg.jpg
전형적인 형태.


바겐부르크 진형 중 하나의 모습. 저 반달형 진형 테두리의 작은 상자같은 것들이 전부 바겐부르크다.

얀 지슈카가 휘하 농민병들을 이끌고 바겐부르크 진형을 짜서 적 기병대를 상대하는 모습.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든 영화의 장면이다. : 영상 링크 좀 오래된 영상이라 화질이 안 좋고 길지만 당시 전투모습을 잘 고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방어진형을 짜는 방어적 전술만 쓴 것은 아니었다. 종종 바겐부르크 자체를 적 진형으로 돌격시키며 싸우는 채리엇 식의 활용도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빈도는 매우 낮았으며, 애초에 바겐부르크 자체가 대형 사륜 짐마차를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큰 덩치에 비해 느려서, 채리엇처럼 신속하게 움직여 적에게 충격력을 주긴 힘들었다. 초기 채리엇이 4륜을 채택하다 2륜으로 바뀐 이유를 생각해보자.

애초에 잘 쓰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정규군들은 기병 전술이나 보병 장창진이 대중적이었던 것도 있고,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수레는 상당히 귀한 물건이다. 후스파의 바겐부르크 진형 전투도 어디까지나 후스파의 주축이 농민군이었기에, 이에 따르는 전투경험과 훈련도 부족, 병력 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이었다.[8][9]

이 약점은 결국 최후의 순간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30년 전쟁 시기에 바덴 변경백은 틸리가 지휘하던 가톨릭군에 맞서 바겐부르크에 대포를 실어서 전투에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 때 고정된 바겐부르크는 적의 변칙적인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적군이 가한 포격에 아군 진형 내 화약마차가 터지면서 진형이 통째로 박살나는 일을 겪고 말았다. 성공했다면 정말 탱크의 원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후 근대시대로 접어들어서는 화포의 발달로 전열보병이 주력이 되면서 바겐부르크가 직접적으로 전선에서 활약하는 일은 없었다. 이후 서부개척시대에나 비슷한 무기가 간간하게 사용되는 정도. 데뷔보다는 훨씬 초라한 몰락이었다.

[1] 하지만 이는 시대와 맞지 않는 물건이고 팽성전투의 후속격인 이 전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 삼국지연의에 보면 전투가 벌어지면 서강군이 철차를 이어 성벽을 만들고 화살을 퍼부었다고 나온다. 물론 돌격도 한다. 거진의 대표적인 형태이다.[3] Mark I 탱크. A7V[4] 무기 문제는 인접한 국가들과 큰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주변국가들과의 정면에서 싸움을 벌이는 현실에서는 경쟁에서 뒤처지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간간히 마차 수비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사실 주변국들과 큰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5] 화차 역시 수레형 무기인데, 사실 검차에 화약무기를 싣은 형태라는 점에서는 검차의 연장 선상에서 고려시대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화차 문서 참조.[6] 청나라 태조(누르하치)실록에 보면 궁수총포수가 탑승하는, 앞부분에 대형 방패판이 장착되어 있는 수레를 앞세워 진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를 복원한 오스프리 삽화는 국내에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라는 책에 실려 있다. 해당 그림은 본문에 기재.[7] 애초에 한국 지형에서는 산성 방어전투에서 정확한 명중률을 지니고 사거리가 긴 저격수, 연사력과 살상력에 중점을 두는 대규모 화망 형성 부대를 기반으로 유목민들의 궁기병을 주로 상대하는 화력 컨트롤을 중심으로 화약무기의 방식이 발전되었다. 덕분에, 전통적으로 고대 한국 국가들은 이동식 바리케이드보다는 투사무기의 사거리, 연사력, 신뢰성에 많은 투자를 했던 경향이 있다. 이러다보니 정규군은 검차 같은 가벼운 수레와 방탄갑옷만 갖춘 후에 우월한 화력을 우선하고, 주로 화력을 갖추기 힘든 의병들이 실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이후에 이동식 바리케이드 전술을 만들고나서 정규군에도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많은 것도 특이한 점이다.[8] 장창병 대 기병 전투시, 기병도 기병이지만 장창병 역시 우르르 돌진해오는 기병 앞에서 끝까지 창을 잡고 버티는 데는 상당한 강단과 훈련, 그리고 전투경험이 필요하다.[9] 다만 헝가리의 장군인 야노슈 후냐디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바겐부르크를 수비용으로 적극 활용한 예도 있다. 물론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세력이 쭉쭉 늘어나고 있었던지라 바르나 전투나 2차 코소보 전투 등에서 연패했지만, 오스만 제국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야노슈 후냐디의 아들이자 헝가리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끈 국왕 마티아슈 1세는 이를 변형하여 마차 대신 파비스를 든 창병이 원형으로 진을 치고 그 안에 총병이나 궁병을 배치하는 전법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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