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슈타트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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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론슈타트 반란
Кронштадтский мяте́ж

러시아 내전의 일부
1921년 3월 1일 ~ 3월 18일
원인
볼셰비키 정권의 전시 공산주의 수탈과 정치적 억압
장소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페트로그라드
교전국
파일:rC9lmmQ.png 크론슈타트 반군
파일:스파르타쿠스의 난.png 좌파 사회혁명당
파일:검은 깃발.svg 아나키스트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지휘관
파일:rC9lmmQ.png 스테판 페트리첸코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블라디미르 레닌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레프 트로츠키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미하일 투하쳅스키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파벨 디벤코
병력
28,961명
40,075명
피해규모
10,000명 전사
21,600명 학살
1,412명 전사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승리
전시 공산주의의 폐지 및 NEP 시행
볼셰비키 독재의 공고화[1]

1. 개요
2. 배경
2.1. 크론슈타트 수병
2.2. 전시공산주의
3. 진행
3.1. 제3의 혁명
3.2. 크론슈타트 반란
3.3. 진압군의 투입
3.4. 끝이 난 혁명의 꿈
4. 결과
5. 후대의 평가
6. 대중매체



1. 개요[편집]


1921년 볼셰비키권위주의적 통치와 착취에 반대해 일어난 크론슈타트 수병의 대규모 반란.


2. 배경[편집]



2.1. 크론슈타트 수병[편집]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은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지지자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1905년 러시아 혁명, 2월 혁명, 10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혁명세력과 볼셰비키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을 뿐만 아니라 10월 혁명에서 파벨 디벤코가 이끌던 발트 함대의 무력시위가 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볼셰비키의 지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2]

그러나 그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전을 겪으면서 점차 지나친 러시아 공산당권위주의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이전 제국의 압제자들처럼 농민들을 수탈하자 점차 러시아 공산당을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레닌과 러시아 공산당도 이들의 불만사항을 수용하기보다 배신행위로 여기면서 억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도 공산당의 일방적인 명령에 점차 소비에트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의 지지층이었던 도시 노동자들은 어느덧 내전 종결과 농촌 수탈 중지, 소비에트 민주화를 외치며 좌파 공산주의적 흐름으로 변해 갔다.[3]


2.2. 전시공산주의[편집]


제헌의회를 호기롭게 해산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볼셰비키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그들은 화폐를 폐지하고 군대의 계급을 폐지했으며 몇 주면 내전을 종결시키고 독일과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전 세계에 공산혁명을 일으켜서 외교부 따위는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몇 개의 성명 발표만 하고 나면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전에 러시아 공산당이 마주한 딜레마는 농민 문제였다.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 정권의 가장 큰 공약은 농토의 사회화였는데 지주들의 땅을 무상몰수해서 가난한 빈농들에게 무상배분하겠다는 것이었다. 1918년까지만 해도 소비에트 정부의 가장 큰 적은 콜차크나 데네킨의 군벌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등에 업은 사회혁명당 세력, 일명 코무치였다.[4] 그들을 지지하는 농민들이 소비에트를 지지하도록 하는 방법은 그들의 아들들을 고향으로 보내고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페트로그라드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의 식량 수급은 우크라이나 같은 곡창지대에서 곡물 가격을 후려서 가져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소비에트도 임시정부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입으로만 개혁을 외치는 꼴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이에 대한 고찰 없이 그냥 토지를 나눠주고 농민들에게 불리한 곡물 가격과 세금제도를 정상화했다. 결국 고립된 도심 지역에서는 심각한 식량 소요가 일어나고 군대를 해산한 결과 독일군에게 속절없이 당하면서 굴욕적인 평화협정에 싸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 공산당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인민들을 쥐어짜서 해결하자.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이른바 전시공산주의였다. 우선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있는 전 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하고 무려 500만명의 대군을 징병했는데 당연히 고귀한 대의보다는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죽기 싫어서 혁명에 가담했던 이들은 반발했지만 트로츠키는 로마군에서도 쓰지 않았다는 10분의 1형까지 이용해 가면서 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었다.[5][6] 뿐만 아니라 곡물의 수탈도 재개되었고 덕분에 농촌에서는 "볼셰비키가 돌려준 땅을 공산당이 가져간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며 만약 비축해둔 곡물이 발각될 시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 곡물을 수급받은 도시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당장의 끼니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러시아 공산당의 지시 하에 정해진 물건을 만들었고 물건의 가격은 소비에트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했으며 노동자들은 협상조차 나설 수 없었다. 노조마저 공산당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자체적으로 목소리를 낼 출구 자체를 봉쇄했고 설령 이런 지시에 반항한다고 해도 체카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7] 그리고 이 상황에 멘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들은 전시 공산주의의 중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3. 진행[편집]



3.1. 제3의 혁명[편집]


반볼셰비키 좌파 세력들은 하나 둘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멘셰비키 우파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란 독립국을 세우면서 볼셰비키와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군사정부 모두에 대항하였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공산당과 결별하고 공산당에 대한 테러 행위에 가담했다.[8]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각지에 흑위대를 설립하여 소비에트와 맞서고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들은 마흐노의 지휘 아래 마흐노우슈치나를 건설했다. 곡물 징발에 반대하던 농민들과 살아남은 우파 사회혁명당원들은 녹군을 조직해서 적군의 수탈을 막기 위한 자경적 봉기에 들어갔다.[9] 마르토프의 국제파 멘셰비키는 세력이 미약하여 실력행사에 들어가진 못했으나 볼셰비키의 권위주의가 반마르크스주의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써 그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데 주력했다. 이처럼 군국주의 반동군벌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정부는 당시 모든 정치세력의 적극적 반대를 받았다.

3.2. 크론슈타트 반란[편집]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모든 정치세력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을 움직인 것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던 전시 공산주의였다. 1920년에 이르면 적군은 콜차크의 러시아국을 완전히 분쇄하면서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젤레나 우크라이나, 바스마치 운동만 해결하면 되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했고 이는 심각한 기아와 질병, 억압을 야기하여 러시아 인민들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여기에 더해 소비에트는 동유럽의 신생 독립국(폴란드, 트 3,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제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 모습에 크론슈타트는 이것은 절대 우리가 원한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소련 공산당의 권력 축소, 내전기 동안 거대해진 공산당 관료집단 해체,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자유, 노동계급의 시민권 회복(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인민주의, 사민주의)와 아나키즘 세력이 참여하는 연립 정권 등을 주장하면서 3월 1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미하일 칼리닌 등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인사들은 그동안 전례가 없던 대규모 집회에 당황하며 이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헌법에 적혀 있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3월 2일 크론슈타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점령하고 본격적인 반란의 서막을 알렸다. 그러자 모스크바 당국은 철저히 비타협적이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시위가 반혁명세력의 선동이라고 맹비난하였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는 무력행사를 지양하고 그들에게 협상에 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참다 못한 크론슈타트의 지도자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나이사르 군인과 요새건설자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크론슈타트는 소비에트를 선제공격할지, 아니면 농성을 계속해서 소비에트와의 협상할지 갈등이 생겼다. 결국 크론슈타트는 소비에트와 전면전을 치르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농성을 지속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3월 5일 최후통첩으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3.3. 진압군의 투입[편집]


크론슈타트 반군의 주장은 간단히 말해 소비에트 자유선거, 노동자 자결권, 전위당 이론을 거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레닌은 소부르주아적 주장이라며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선동해서 이권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3월 7일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제7군은 코틀린 섬과 나마세르, 크론시타트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시내에 있는 크론슈타트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도착했다. 그러나 농민으로 구성된 제7군은 크론슈타트 반군의 예상대로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기는 다른 어떤 전투보다 특히 바닥이었다. 근왕주의자들과 귀족들을 물리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던 시베리아 내전과 달리 이 전쟁은 자신의 희망을 자신의 손으로 부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에 크론슈타트 반군은 얼어붙은 바다를 걸어가면서 크론슈타트 섬으로 복귀했고 섬을 1300명의 수병들과 페트로그라드에서 온 자원병 2,000여명으로 보호했다. 섬에는 대포가 135문이 있었고 전체가 방벽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나 방한복, 식량, 탄약 등이 장기전을 치루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전투는 아침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적군과 생도군, 체카 무장대로 구성된 12,600명의 진압군은 곧바로 진압에 나섰다. 먼저 페트로그라드 시내 기준으로 섬의 우편을 포격하여 이들의 방비를 약화시키고 동이 틀 때쯤 좌편과 우편 양 사이드에서 진격해 왔다. 크론슈타트 반군은 이들을 향해 포격했는데 얼음이 깨지면서 진압군은 전부 수장되었다. 진압군은 진입을 포기하고 야포 사격으로 맞대응하였다. 오후에는 항공 폭격까지 동원하였으나 크론슈타트 섬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위원장 그레고리 지노비예프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공격을 볼셰비키에 충실한 이들(생도군, 체카, 라트비아 소총연대) 등으로 보충할 동안 그들에 대해 유화적인 저자세를 유지했다.[10]


3.4. 끝이 난 혁명의 꿈[편집]


그러는 사이 공산당 내부에서도 크론슈타트 반군의 예상 외의 선전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공산당 내부 반대파와 크론슈타트의 처우를 두고 제10차 공산당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의 결과 크론슈타트 가담자에 대한 사면과 노동자 자결권은 거부되었고 당내 모든 파벌은 즉시 해산되어야 했다. 다만 곡물 징발이 금지되면서 전시공산주의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졸지에 크론슈타트를 지지하던 농민들과 도시민들은 자유 아래 죽음이냐, 복종 아래 생존이냐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월 16일 적십자사가 크론슈타트에 인도적 지원을 약속하자 다급해진 진압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투하쳅스키는 이번엔 50,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있었다. 파벨 디벤코 등 유능한 장교진들도 여럿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먼저 야밤 내내 크론슈타트 섬을 향해 포격하였고 새벽이 되자 섬의 남쪽 방면(좌편)과 동쪽 방면(정면)을 향해 안개에 숨어 조용한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반군에게 얼마 안 가 발각되고 반군은 같은 공산주의자끼리 피를 봐야겠냐고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얼음 위의 요새는 결국 수비 측에 유리하였다. 돌격하는 진압군을 향해 다시 한번 반군은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어둠과 안개 속에서 그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진압군은 크론슈타트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핀란드 측은 해빙 이후 시체들이 자국 해안으로 밀려올 것을 걱정하면서 소비에트 정부에게 시체를 방치하지 말라고 일렀다.

함락 직후 스테판 페트리첸코와 크론슈타트 반군 간부들은 요새가 점령당하자 얼어붙은 바다를 걸어가면서 핀란드로 망명했다. 크론슈타트 반군의 절반 가까이 그들을 따라 핀란드로 향했다. 한편 남은 이들에 대해 소비에트는 파벨 디벤코에게 포로들의 처우를 전적으로 맡겼다. 디벤코는 크론슈타트에 남아 있던 반란 수뇌부 13인에 대한 비공개 재판을 진행하고 전부 사형을 구형했다. 포로들도 감옥으로 이송했는데 감옥에 자리가 부족하자 남은 이들을 즉결처형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크론슈타트 반군의 항복 직후부터 가담자들과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전투 자체는 둘 다 비슷한 사상자가 나왔으나 양 측의 병력을 웃도는 수의 포로들이 즉결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체카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는데 기아와 과로, 질병에 시달리다가 대부분 사망했다. 핀란드로 망명 간 이들도 난민 캠프에서 적십자의 도움으로 근근히 생활하는 수준이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에게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제안하면서 사면을 약속했다.

4. 결과[편집]


크론슈타트 반군의 요구는 하나도 수용되지 못했다. 이전과 같은 소비에트 자유 선거는 다시는 오지 않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는 금지되었다. 사회주의, 아나키즘 정치범들은 석방되기는 커녕 늘어만 갔다.[11]

이 사건을 계기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 활동 중이던 타 정당들은 모두 소비에트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금지당했다. 이들은 러시아를 떠나든지 아님 남아서 전향을 하던지 두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12] 소련이 완전한 일당제 국가로 탈바꿈한 시점이 바로 크론슈타트 반란이다.

페트리첸코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핀란드에서 머무르면서 크론슈타트 난민들과 좌파 공산주의의 신화적 존재로 존경을 받았지만 핀란드화 과정의 일환으로 난민 자격을 박탈당하고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블라디미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5. 후대의 평가[편집]


옘마 골드만네스토르 마흐노 같은 아나키스트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같은 좌파공산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를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실현을 위한 순교라고 평했다.

레닌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그 어떤 반혁명 세력들의 공격보다 위험했던 순간이며 안톤 데니킨보다도 위험했다고 회고했다.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반군 생존자들과 노동자 반대파, 민주집중파의 연합체인 좌익반대파의 수장으로 재직할 시기에도 이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13] 말년에 스탈린의 일당제 공산주의를 비판할 때도 끝까지 크론슈타트 반란은 소부르주아적 폭동으로 매도하면서 진압을 정당화하였다.


6. 대중매체[편집]


  • 1965년 소련의 프로파간다 연극 '낙관적 비극'의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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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러시아를 통치하던 볼셰비키 세력의 명칭은 러시아 공산당(РКП(б))이다(물론 오늘날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는 다른 정당이다). 1925년 12월 31일 전연방공산당(ВКП(б))으로 개칭했고 1952년 10월 14일 비로소 소련 공산당으로 개칭했다.[2] 심지어 제헌의회 선거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당선된 비례대표 권역도 다름아닌 발틱 함대 군관구였다.[3] 레닌은 이같은 행동을 두고 《좌경모험주의라는 소아병》이란 제목의 저서까지 작성하면서 심각한 배당행위라며 이들을 반혁명 세력과 마찬가지로 파괴하여야 할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는 부르주아의 참여와 견제가 없는 정치체제를 의미했던 초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4] 정식 명칭은 '전러시아 제헌의회의원위원회'[5] 말그대로 항명이 일어난 부대 내에서 무작위로 1/10을 골라서 처형하는 극형이다.[6] 이 때문에 생겨난 제도가 정치장교다. 제국 출신의 장교고 징병당한 일반병이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충성을 확인할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7] 체카의 정식명칭은 '반혁명과 방해 공작을 퇴치하기 위한 전러시아 특별위원회'였다. 애초부터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었다.[8] 파니 카플란의 레닌 저격 사건, 페트로그라드 체카위원장 모리세이 유리츠키 암살, 주소 독일대사 빌헬름 폰 미르바흐 암살이 모두 좌파 사회혁명당의 작품이었다.[9] 이 충돌이 극에 달한 사건이 탐보프 봉기다. 적군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독가스까지 뿌려 가면서 이들을 학살했다.[10] 지노비예프는 이전에도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10월 혁명 당시 혁명이 실패할 것 같자 케렌스키에게 레닌의 무장봉기 계획을 흘리고 이후로는 트로츠키를 견재하기 위해 스탈린, 카메네프와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스탈린이 조직을 장악하자 신 야당을 창설하고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와 연합 반대파를 결성하다가 나란히 출당당했을 때는 스탈린에게 싹싹 빌면서 복당하고 숙청당할 때까지 스탈린의 나팔수로 활동했다. 지노비예프주의는 스탈린의 부상 이후 코민테른의 기회주의 노선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정도로 그의 평판이 안 좋았다.[11] 나중에 줄어들기는 했다.[12] 국내에서 전향하지 않고 버티던 인사들은 체카에게 죽임을 당했다.[13] 그나마 노동자 반대파를 의식했는지 제10차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기존의 입장을 선회해서 노조의 자율권을 주장하다가 머릿수로 밀려서 그야말로 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