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 미치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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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간 내각 국무대신
- 노다 내각 국무대신
- 일본 농림수산대신
- 일본 총무대신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청년국장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신진당 국회의원
- 민정당(일본) 국회의원
- 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42년 출생
- 2013년 은퇴
- 2021년 사망
- 야마가타시 출신 인물
- 일본의 정치인 자녀
-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정치인
- 혈액질환으로 죽은 인물
- 가쿠슈인대학 출신
- 욱일대수장
- 정3위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 양쪽에서 농림수산대신을 맡았으며, 세이와회의 프린스라고 불렸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편집]
1942년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에서 당시 가입인이던 카노 히코키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야마가타대학 부속 초등학교, 중학교, 야마가타현립 야마가타 히가시 고등학교를 거쳐 가쿠슈인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아버지 밑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을 을 받아 (구) 야마가타현 제1구에 출마해 4위 턱걸이로 당선되면서[1] 정계에 입문했다.[2] 당선 이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이끌던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가입한다. 이후 당 청년국장, 중의원 의사진행계, 운수정무차관, 당 교통부회장, 당 총무국장 등 여러 요직을 맡다가 1989년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3] 이후 아베 신타로 회장이 사망하면서 '포스트 아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아베파 사천왕을 이은 차세대 리더 후보로 지목되면서 파벌 내에서 '세이와회의 프린스'라고 불린다.
이후 1991년 12월 미야자와 개조내각에서 총무청 장관을 역임했고, 1993년에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그러다 호소카와 내각 총사퇴 직전인 1994년 4월 15일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미래를 창당해 당 대표가 된다. 하타 내각 총사퇴 이후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에게 투표하지만,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승리해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면서 가이후를 대표로 한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신진당에 합류한다.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1구에 출마해서 카노 본인은 당선되었지만, 신진당은 자민당에 패배한다. 이후 당 내 反오자와 세력을 모아 신진당 당수 선거에 출마했지만 패배한다. 당수 선거 9일 후 신진당이 해산되면서 1998년 1월 8일 국민의 목소리를 창당해 당 대표가 되었고, 같은 달 23일 민정당을 창당에 참가해 간사장이 된다. 그 후 4월 27일 구 민주당이 민정당, 민주개혁연합, 신당우애를 흡수하는 형태로 민주당이 창당되면서 당 정치개혁본부장이 된다. 이후 1999년 1월 간 나오토가 당 대표가 된 이후 국회대책위원장을 역임했고, 그해 11월 하토야마 유키오가 대표가 되면서 국회대책위원장에서 물러나 당 부대표가 된다. 이후 2000년 1월 중의원 헌법심사회가 설치되면서 회장 대리를 맡았고, 그해 4월 치뤄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그러다 본인의 비서가 이권에 개입해 뇌물을 받은 업제연 사건(業際研事件)이 터지면서 2002년 2월 6일 민주당을 탈당해 1년간 무소속으로 있다가,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 2003년 9월 23일 당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의 복당 요청을 받고 복당했으나, 이 사건으로 지역구 민심이 많이 나빠져서 엔도 도시아키에게 밀려 2위로 낙선하고, 석패율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2004년 9월 민주당에 상임위원회 의장이 신설되면서 회장을 역임하지만,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면서 석패율제 구제도 받지 못한 채 완전히 낙선한다.
그 후 4년 간 야인으로 있다가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랫만에 엔도 도시아키 후보를 꺾고 야마가타 1구에서 당선된다. 당선 이후 중의원 예산위원장을 역임하다가 2010년 9월 간 제1차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임명되면서 1991년 이후 21년만에 다시 각료로 입각했다. 그 후 노다 제1차 개조내각까지 역임한다. 그러나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엔도 도시아키에게 무려 20% 가까운 격차로 참패해 완전히 낙선했고, 2013년 7월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도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면서 결국 정계를 은퇴한다.
2014년 4월에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고, 2021년 10월 21일, 진성적혈구증가증으로 야마가타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편집]
2016년 이후 민진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명.
4. 선거 이력[편집]
5. 기타[편집]
[1] 당시 (구) 야마가타 1구의 정수가 4였다.[2] 이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동기들로 나카무라 기시로, 하토야마 구니오, 요사노 가오루 등이 있다.[3] 당시 리크루트 사건에 관계가 깊은 중진 정치인들 다수가 근신 중이라서 리크루트와 연관이 아예 없었던 카노가 농림수산대신으로 기용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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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설 합당[5]
, 태양당과 신설 합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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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신설 합당[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처음을 삼가고 마지막을 경건히 하라는 뜻으로,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할 땐 신중하게 하고 끝맺음을 잘하라는 의미의 단어로, 춘추좌씨전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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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설 합당[5]
, 태양당과 신설 합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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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신설 합당[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처음을 삼가고 마지막을 경건히 하라는 뜻으로,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할 땐 신중하게 하고 끝맺음을 잘하라는 의미의 단어로, 춘추좌씨전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