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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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안동차전놀이
安東車戰놀이
Andong Chajeon Nori (Chariot Battle of Andong)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분류
무형문화재 / 전통 놀이·무예 / 축제
지정일
1969년 1월 7일
관리주체
(사)국가무형문화재 안동차전놀이보존회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차전놀이.jpg

1. 개요
2. 역사
3. 상세
4. 규칙
4.1. 참가인원 수 및 편가르기
4.2. 선수 구성
5. 진행 과정
5.1. 경기 전
5.1.1. 발의
5.1.2. 재목 선정
5.1.3. 동채 만들기
5.1.4. 째기동채싸움
5.2. 경기 당일
5.2.1. 우군맞이
5.2.2. 경기 진행
6. 유사한 풍속


1. 개요[편집]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생겨난 민속놀이로, 정월대보름 즈음에 한다. 마을 청장년들이 패를 갈라 나무로 만든 동채라는 물건을 서로 부딪쳐 승부를 겨루는 것인데, 그래서 차전놀이를 다른 말로는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2. 역사[편집]


안동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후삼국시대 말기인 930년에 지금의 안동에서 고려후백제고창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1]

당시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그는 모래땅에 진을 치고 있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왕건 입장에서는 그것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는데, 이때 안동 출신의 권행, 김선평, 장정필 세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윽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합전교(合戰郊, 現 안동시 송현동)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세 사람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이라는 데에서 꾀를 내어 안동 사람들로 하여금 낙동강에 소금을 풀게 하고 큰 나무를 묶어서 앞으로 진격하게 하였더니 견훤이 강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창 전투는 승리하게 되었고, 후삼국통일의 향방을 가르게 되었다. 왕건을 도와 고창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행, 김선평, 장길 세 사람은 각각 성씨를 하사 받아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왕건은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하여금 동쪽을 평안케 했다 하여 고창에서 안동(安東)으로 지명을 고쳤다. 차전놀이는 고창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안동 사람들 놀이로 만든 것이라 한다.

1922년부터는 일제가 금지시켰으나, 당시 안동중학교 교장이었던 박순호 교장의 노력으로 1966년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안동고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활했다. 이 공로로 박순호 교장은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그 3년 후인 1969년 1월 7일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안동차전놀이보존회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3. 상세[편집]


차전놀이는 매년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할 것이 워낙 많고, 동채 만들기 등으로 경비도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금년에 시행할지 말 건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차전놀이가 시행되지 않는 해에는 줄다리기로 대체했다. 또, 사정에 따라서는 정월대보름에서 며칠 더 미뤄지기도 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정월대보름날에 매년 시행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차전놀이는 워낙 험한 놀이이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준비만 돕고 놀이에 참가하는 건 성인 남성들이다. 양반들은 가담하지 않고 관전만 하였다고 한다.

차전놀이는 본래 농작물의 풍흉을 점치는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차전놀이와 비슷하게 대규모 군중놀이인 고싸움이나 석전 같은 경우는 이긴 쪽이 풍년, 진 쪽은 흉년이 든다는 속설을 가지고 있기에 굉장히 치열하게 싸운다. 농업국가였던 시절이었기에 이와 같은 민속놀이는 승패가 굉장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차전놀이에서 승패에 따라 풍흉을 점치는 의미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4. 규칙[편집]


동채와 동채를 서로 맞닿게 하고 경기를 진행한다. 상대편의 동채를 눌러 앞머리를 땅에 닿게 하거나, 상대편의 동채에 머리꾼들이 올라가 상대편의 동채를 빼앗으면 결정승으로 하며, 자기 편 동채의 앞머리가 상대방의 앞머리보다 높이 올라간 상태로 우세를 오랜 시간 유지할 경우 판정승으로 한다.

판정승의 경우는 보통 오랫동안 승패가 결정이 나지 않는 경우에 그렇게 하는 편이다. 즉, 우세는 유지하고 있으나 머리꾼이 상대편 동체를 빼앗지 못 한 경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4.1. 참가인원 수 및 편가르기[편집]


참가인원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으나, 대체로 25~40세의 남자 수백 명씩 참가했다. 그리고 관전하는 사람은 거의 수천 명이 모이므로 넓은 공터를 필요로 했는데, 대보름 무렵에는 농작물이 없기 때문에 넓은 보리밭이나 백사장에서 진행했는데, 주로 낙천교에서 태화동 앞까지의 긴 백사장에서 주로 진행했다고 한다.

편가르기는 지금의 안기천로를 기준으로 안동을 동서로 갈라 편성을 한다. 이때는 거주지 위주가 아니라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편이 갈렸는데, 그래서 비록 한 가족일지라도 태어난 곳이 다르면 이때만큼은 다른 편에 서는 경우가 있다.

동부의 깃발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東部(동부), 王建軍(왕건군), 靑龍(청룡), 朱雀(주작), 與旗(여기) 등으로 쓰며, 서부의 깃발은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西部(서부), 甄萱軍(견훤군), 白虎(백호), 玄武(현무), 營旗(영기) 등으로 쓴다.

4.2. 선수 구성[편집]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을 동채꾼이라고 하는데, 동채꾼은 대장, 머리꾼, 동채꾼, 놀이꾼으로 이루어진다. 각 역할은 다음과 같다.

  • 대장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 차전을 지휘하는 사람으로, 담력이 세고 신체가 튼튼하며 통솔력이 있는 사람을 선출한다. 동부의 대장을 부사(府使), 서부의 대장을 영장(營將)이라고 한다.
대장은 왼손으로 고삐를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오른손으로 수신호를 하며 지휘를 한다. 오른손바닥이 앞을 향하게 하고 뒤에서 앞으로 흔들면 전진, 반대로 오른손바닥을 뒤를 향하게 하고 앞에서 뒤로 흔들면 후진, 오른팔을 빙빙 돌리면 좌회전, 왼팔을 빙빙 돌리면 우회전이다. 이때는 예외로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왼손으로 수신호를 한다. 오른팔꿈치를 90도로 하고 내렸다 올렸다 하면 정지의 신호이다.
수신호 말고 구호로도 명령을 하는데, 전진할 때 "밀어라', 후진할 때 "빼라", 회전할 때 "돌아라" 라고 한다. 깃발을 흔들며 수신호를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장은 상대편 대장과 동채를 잡아선 안 된다.

  • 머리꾼
머리꾼은 맨 앞에서 동채를 지고 가는 사람들로, 대개 힘이 센 사람들로 구성된다. 돌격할 때 차머리를 높게 들어야 하고, 상대편 동채가 내리누르면 버틸 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1명, 그 뒷줄에 2명, 그 뒷줄에 3명이 나란히 선다.
차머리를 높게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상대편 동채를 누르기 위함도 있지만, 동채가 아래로 눌렸을 때 상대편 머리꾼들이 타고 올라와 동채를 빼앗는 걸 막기 위함이다. 반대로 상대편 동채가 눌리면 머리꾼들은 재빠르게 상대편 동채로 올라가기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상대편 머리꾼들도 이를 방어하게 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어깨로만 밀 수가 있으며 손을 써서는 안 된다. 또, 상대편의 대장을 공격해서는 안 되고, 상대편의 대장이 떨어졌을 때는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상대편 대장이 다시 동채에 오르면 경기를 재개한다. 또, 머리꾼이 넘어지면 대장의 수신호에 따라 상호 후퇴하여 수습한 다음 다시 경기를 재개한다.

머리꾼끼리 몇 번이고 격돌하여 상대편의 대열을 돌파할 수가 없을 때에는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진도 하고 측면에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재빨리 머리꾼들이 대열의 위치를 바꾸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동채꾼들 역시 동채의 위치를 빨리 바꾸어야 한다.

  • 동채꾼
동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앞채꾼과 뒷채꾼으로 구성된다. 앞채꾼은 머리꾼보다 뒷쪽에 있으며, 머리꾼과 달리 동채를 떠나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편의 동채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앞채꾼들은 머리꾼들과 함께 상대편의 동채를 잡고 뜯으며 위에 올라탈 수 있다.
뒤채꾼은 가장 뒤에서 동채를 움직이는 사람들로, 돌격할 때는 뒤에서 힘을 싣는 역할을 하며, 후퇴할 때는 동체를 힘껏 잡아당긴다. 동채가 회전하게 될 때는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동채는 앞을 높게 들어야 하므로 뒤로 갈수록 동채를 낮게 메야 한다.

  • 놀이꾼
놀이꾼은 앞놀이꾼과 뒤놀이꾼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동채를 메지는 않고 대개 응원을 하는 편이지만, 때때로 경기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앞놀이꾼은 머리꾼 행세를 하기도 하고, 뒤놀이꾼은 뒤채를 보호하며 동채꾼이 넘어졌을 때 수습하는 역할을 한다.

5. 진행 과정[편집]



5.1. 경기 전[편집]



5.1.1. 발의[편집]


차전놀이는 상당히 큰 행사로서, 준비 또한 상당 기간 동안 공을 들여 한다. 보통 추수가 끝나면 각 마을의 원로들은 모임을 가져 차전놀이 거행 여부를 결정하고, 결정되면 상대편에 통보하는데, 상대편은 통보를 받으면 거절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렇게 차전놀이의 거행이 결정되고 난 이후에는 임원을 선출하여 각자 역할을 정하고 재원을 구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5.1.2. 재목 선정[편집]


우선 사람을 인근 고을에 보내어 동채 만들 재목을 물색하게 되는데, 동채는 참나무로 길이 10m 쯤 되는 곧고 튼튼한 나무를 구하여야 한다. 좋은 재목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안동 뿐 아니라 멀리 영양, 청송, 봉화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좋은 재목이 물색되면 부정과 잡귀를 막는 의미로 그 주변에 금줄을 쳐서 무단으로 출입하지 못 하도록 한다.

정월 초순에는 임원 일동과 목수가 목욕재계를 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한 뒤 산신과 나무에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읊으며 신에게 나무를 벨 것을 고하는 고사를 지낸다. 산신의 노여움을 사면 나무를 베거나 운반할 때에 사람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함이 없어야 한다. 상중이거나, 아내나 며느리가 아이를 낳거나, 살생을 하였거나, 부정한 일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나무를 베고 나면 안동으로 운반을 하는데, 인근의 관원은 자기의 관할구역을 통과하는 데에 협력을 한다.

5.1.3. 동채 만들기[편집]


이 과정을 거쳐 안동으로 운반된 목재는 정월 12일부터 동채로 제작된다. 약 20여 척 정도 되는 두 개의 나무를 같은 길이로 자른 후 불에 알맞게 굽는 과정을 거치며, 이후에는 힘 센 장정 3~4명이 물을 뿜어가며 힘차게 당기고 떡메로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를 약 2m 정도 되는 간격으로 벌리고 삼, 칡, 모발 등을 합하여 세 개의 선으로 꼬아둔 줄로 차머리를 X자형으로 묶는다. 그리고 차머리에 고삐를 매어 위에 올라선 사람이 잡고 지휘할 수 있도록 하며, 사다리처럼 생긴 동채 위에는 사람이 올라설 수 있도록 널판으로 방석만한 자리를 마련한다.

판자 뒤에는 몽둥이 두 개를 가로로 대고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

5.1.4. 째기동채싸움[편집]


차전놀이가 열리는 정월대보름 전, 아이들은 정초부터 작은 동채를 만들어 차전놀이를 하며 마을의 사기를 고취시킨다. 이를 째기동채싸움이라고 하는데, 째기동채는 작은 동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은 작전을 짜는 등 차전놀이 준비의 막바지에 이른다.

5.2. 경기 당일[편집]



5.2.1. 우군맞이[편집]


정월대보름 전날부터 당일 오전까지 각 편의 사내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시내를 누비며 풍물을 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당일 오전부터는 째기동채에 사람을 올려 태워 경기 장소에 모이게 되며, 머리꾼끼리 서로 밀며 훈련을 한다. 오후가 되어 멀리 동채가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고, 동채는 전진하다가 10m 사이에서 서로 멈춰 전열을 가다듬는다.

5.2.2. 경기 진행[편집]


경기가 시작되면 서로 치열하게 밀어붙인다. 경기는 수백 미터씩 밀고 밀리며 몇 시간을 지속된다.

그리고 승부가 나면 이긴 편은 승리의 기쁨으로 짚신을 벗어 하늘에 던지고 상대편 동채를 뜯어 해체한다. 패한 측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원통해한다. 승패가 나면 승자는 의기양양하여 동채를 메고 "월사, 덜사" 하고 춤추며 시위를 벌인다. 경기가 끝나고 해가 지고 나서도 이 행렬은 계속된다.


6. 유사한 풍속[편집]


안동 차전놀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광주광역시 지역 민속놀이인 고놀이(고싸움)가 있다.

고놀이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 때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 총괄기획 이어령은 당시 극렬했던 지역감정[2]을 넘어서서 종국에는 세계인이 모두 화합한다는 테마로, '화합' 섹션의 맨 앞에 고놀이를 배치했다.

KBS1 중계영상 자세히 보면 실제 차전놀이나 고놀이처럼 동군과 서군 양 측간 승부를 내지 않고, 고가 서로 맞물려 올라간 상황에서 상수들이 서로 등을 두들겨주며 공연을 끝내는 것이 보인다. 올림픽 개회식에서 '화합' 테마로 들어갔기 때문.

차전놀이와 고놀이의 가장 큰 차이는 동채 앞쪽이 맞물려 홈이 파여져 있는가, 아니면 앞이 둥그런가의 여부이다. 이 때문에 고놀이는 차전놀이에 비해 밑에서 밀어올리며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일꾼들의 노하우가 더욱 요구되며, 과거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벌어지던 것들은 대부분 차전놀이였다. 차전놀이의 경우 동체가 딱 맞물려 밑에서 밀어올리기만 하면 중심잡기는 고보다는 훨씬 나아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통제가 쉬웠기 때문이다. 반면 고놀이는 성인 장정들이 달라붙어도 중심잡기가 어렵다. 위 고놀이 영상에서도 거의 성인 수준의 고등학생들이 여러 번 연습했음에도 서군 쪽의 고가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기우뚱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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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안동의 지명이 고창군(古昌郡)이었다.[2] 사실 지역김정이라는 표현도 약간 수도권 입장에서 본 양비론이었다. 5.18 광주학살로부터 불과 7년 지난 시점이었고 6월항쟁 이후였지만 여전히 하나회 세력은 건재했기 때문에, 신문 방송에서는 이렇게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광주민주화운동으 제도권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건 이보다 10여년 후인 김영삼정부 말기 영화 꽃잎(이정현의 데뷔작)이 개봉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