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필식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외무관료. 외무부 차관, 주캐나다대사 및 주서독대사를 역임. 본관은 여양.
2. 상세[편집]
1923년 충청남도 연기군 출생. 1942년 3월 공주중학교 졸업 후, 1943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0회(문과)로 입학하여 대학예과 과정을 수료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학병에 동원되었다. 8.15 광복을 중국에서 맞은 그는 한국광복군 주항주지대 소대장을 맡았으며, 귀국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된 모교에 복학하여 1948년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1]
1948년 정부 수립 후 출범한 외무부에 주사로 임용되어[2] 조사국 정치조사과 계장에 발령받아 외교관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9년 5월 통상국 정책계장, 8월 정무국 구미(歐美)계장을 거쳐 1950년 정무국 정책계장에 보임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7월에는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하여 도미했고, 1954년 7월에는 주로스엔젤레스총영사관 영사(총영사대리)가 되는 등 미주 지역에서 초기 경력을 쌓았다.
1955년 10월 귀국하여 본부 방교국 전례과장에 앉았고, 11월 정무국 제3과장을 거쳐 1956년 3월 정무국 아주과장에 보임되었다. 1957년 6월 주일본대표부에 발령되어 1등서기관, 정무참사관을 역임하였는데 재일동포 북송 문제에 대처했고 한일회담 대표를 수행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60년 2월 본부 통상국장을 거쳐 4.19 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정부에서 1960년 11월 제5회 한일회담 대표로 임명되어 대학교 대선배인 유진오 수석대표를 모시면서 실무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전복되자, 1961년 6월 타이베이의 주중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 받았다. 이후 본부로 복귀하여 1962년 4월 정무국장, 1963년 2월 기획조정관 등 요직을 거쳐 1963년 9월 주제네바대표부 공사로 영전했다. 그러나 군인 출신들에게 제네바 공사 자리가 넘어가면서 1964년 10월 주홍콩총영사로 강등성 전임되었고, 1966년 10월에는 주칠레대사로 부임하는 등 우방국 공관장을 역임하였다. 이윽고 1967년 9월에 44세의 나이로 외무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이 때 진필식은 해방 이후 외무부에서 최초로 대사 경력을 가진 상태로 부임한 차관이었다고 한다. 차관 재직 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겪었다.
1969년 12월 주캐나다대사로 발령 받은 그는 재직 시절 캐나다의 주한 상주대사관 개설 및 CANDU 원자로의 한국 수입을 성사시켰다. 1974년 1월에는 주서독대사로 부임하는 등, 냉전 시기 주요 서방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시국 문제로 당시 정부와 갈등을 겪은 끝에, 1975년 서울로 소환되어 서독대사에서 전격 경질되었고 동년 7월 외교부에서 퇴직했다.
은둔생활 끝에 그는 1979년 미국을 경유하여 자신이 대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캐나다로 망명성 이민을 선택하였고, 이후 캐나다에서 슈퍼마켓, 모텔 경영 등 소매업에 종사하였다. 2008년 8월 23일 캐나다 노스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3. 가족[편집]
부인 이덕경과의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진병직은 토론토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뛰어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캐나다화학협회(CSC)에서 수여하는 버나드 벨루상을 수상했다(#).
차남 벤 진(Ben Chin, 한국명 진병규)은 캐나다의 현역 정치인이다. 뉴스 앵커로 인기를 얻은 그는 2006년 캐나다 자유당 후보로 연방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현재 총리 저스틴 트뤼도의 수석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장녀 진병연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차녀 진병희는 재미 사업가로, 3녀 진병진은 약사로 활동 중이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8 03:10:10에 나무위키 진필식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