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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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① 경성제국대학
, ,
, ,② 대북제국대학
, ,, ,
① 사실상 서울대학교의 전신. ②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편.


帝国大学(ていこくだいがく
제국대학 | Imperial University | 帝國大學

파일:제국대학.svg
일본 본토에 위치한 구 제국대학의 휘장
1. 개요
2. 일람
3. 역사
3.1. 설립
3.2. 개편
4. 위상
5. 상호 관계
5.1. 동문회
5.2. 정기전
6. 조선인 관련
7. 기타
8. 여담



1. 개요[편집]


제국대학령(帝國大學令)

제1조: 제국대학은 국가의 필요에 응한 학술 기예를 가르치고 또한 그 학문의 심오한 경지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원문]

칙령 제3호, 1886년(메이지 19년) 3월 1일 공포

일본 제국이 제국대학령[1]에 의거하여 설립한 9곳의 관립 종합대학. 일본 제국국립대학종합대학은 이 제국대학들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기존의 제국대학령이 국립종합대학령으로 대체되면서 제도적으로 제국대학은 폐지되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후신으로 본토에 남은 7개 국립대학들을 구제국대학(旧帝国大学)으로 지칭한다. 약칭은 구제대(旧帝大(きゅうていだい), 혹은 칠제대(七帝大(ななていだ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소학교(6년)-구제중학교(5년)[2]-구제고등학교(3년)[3] 도합 14년에 걸친 입시 경쟁에서 승리한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학교였다. 오늘날 제국대학의 후신들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4] 현재의 일본, 한국, 대만 지역에서 구제국대학들만이 학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할 수 있던 곳이었다.

1920년대 이후로는 다른 교육기관들도 구제대학으로 승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학위 수여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한편, 제국대학령 제3조에는 제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아 박사 과정에 등록해야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 등록 중인 사람을 연구생이라 불렀다. 이러한 연구생이라는 단어는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와, 지금은 해외 대학에서 일본의 대학 석사[5] 혹은 박사 과정에 정식 등록하기 전까지 일본식 실험이나 연구 등의 연수를 받는 비정규생들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2. 일람[편집]


  •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약칭 토다이(東大(とうだい)
  •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약칭 쿄다이(京大(きょうだい)
  •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약칭 호쿠다이(北大(ほくだい)[6]
  •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약칭 큐다이(九大(きゅうだい)
  • 홋카이도제국대학(北海道帝國大學), 약칭 카이다이(海大(かいだい)[7]
  •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약칭 조다이((じょう(だい)[9]
    • 현재 서울대학교[8]
  • 대북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 약칭 타이다이(臺大(たいだい)
    • 현재 국립타이완대학[10]
  • 오사카제국대학(大阪帝國大學), 약칭 한다이(阪大(はんだい)
  • 나고야제국대학(名古屋帝國大學), 약칭 메이다이(名大(めいだい)


3. 역사[편집]



3.1. 설립[편집]


제국대학의 기원은 1877년 세워진 구 도쿄대학[11]이다. 일본 제국은 1886년 3월 1일 제국대학령(메이지 19년 칙령 제3호)을 제정 공포하고 4월 1일 시행하여, 이 구 도쿄대학을 모체로 하는 최고학부인 제국대학[12]도쿄시에 설립했다. 1897년에는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13]

 • 제1차 제국대학령 [ 펼쳐 보기 / 접기 ] 

제1조: 제국대학은 국가의 수요에 부응해 학술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1]

를 공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제국대학은 대학원과 분과대학으로 구성하며, 대학원에서 학술기예의 온오를 공구하고 분과대학은 학술기예의 이치와 응용을 교수한다.

제3조: 분과대학 학과 졸업시 규정된 시험을 통과하면 졸업증서를 수여한다.

제4조: 분과대학을 졸업한 자나 동등한 학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자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온오를 공구하고 규정된 시험을 통과하면 학위를 수여할 수 있다.

제5조: 제국대학의 직원을 다음과 같이 둔다.

- 총장(칙임관)

- 평의관

- 서기관(주임관)

- 서기(판임관)

제6조: 제국대학 총장은 문부대신의 명을 받아 제국대학을 총할하며 그 직무 요령은 다음과 같다.

- (1) 제국대학의 질서를 보지하는 일

- (2) 제국대학의 상황을 감시하고, 개량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 문부대신에게 방안을 제출하는 일

- (3) 평의회 의장으로 의사를 정리하고 의사의 전말을 문부대신에게 보고하는 일

- (4) 법과대학장의 직무에 해당하는 일

제7조: 평의회는 편의에 따라 제국대학이나 문부성에서 열리며 평의회는 다음 사항에 관해 논의한다.

- (1) 학과과정에 관한 사항

- (2) 대학원과 분과대학의 이해에 관련된 사항

제8조: 평의관은 문부대신이 각분과대학 교수 중 두명씩을 특별히 선정한다.

제9조: 평의관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임기가 만료된 후 시의에 따라 근속을 명받을 수 있다.

제10조: 분과대학은 법과대학•의과대학•공과대학•문과대학•이과대학으로 하며 법과대학은 법률학과•정치학과의 두 부분으로 한다.[2]

제11조: 각분과대학의 직원을 다음과 같이 둔다.

- 장(주임관)

- 교두(주임관)

- 교수(주임관)

- 조교수(주임관)

- 사감(주임관)

- 서기(판임관)

제12조: 각분과대학장은 교수 중에서 특별히 선정해 겸임하고 분과대학장은 제국대학 총장이 명령한 범위내에서 주관 분과대학의 사무를 처리한다.

제13조: 각분과대학 교두는 교수 중에서 특별히 선정해 겸임하고 교수와 조교수의 사무를 감독하며 교실의 질서를 보지한다.

제14조: 각분과대학 교수와 조교수의 정원은 그 학과의 경중과 학생의 숫자에 따라 문부대신이 정한다.

메이지 19년 3월 2일 칙령 제3호 제국대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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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은 제1차 제국대학령에 따라 도쿄제국대학(당시 명칭 제국대학)을 설립한 1886년 당시만 하더라도 제국대학을 추가로 설립할 계획이 없었으나, 청일전쟁 승전 후 전쟁 배상금을 활용해, 제3고등학교를 기반으로 1897년에 교토제국대학[14]을 설립했다. 또 러일전쟁 후, 후루카와 재벌의 기부금을 등을 활용하여 1907년에 도호쿠제국대학[15], 1911년에 규슈제국대학[16], 1918년에 홋카이도제국대학[17]을 설립하게 된다.

1918년 12월 6일 공포된 대학령 제정과 고등학교령의 개정에 발맞추어, 기존의 제1차 제국대학령을 전부개정하는 형태로 제2차 제국대학령[18](1919년 4월 1일 시행)이 1919년 2월 6일에 공포되었다.
 • 제2차 제국대학령 [ 펼쳐 보기 / 접기 ] 

제1조: 제국대학은 수 개의 학부를 종합해 구성한다.

제2조: 각제국대학에 설치할 학부는 별도의 칙령으로 정한다.

제3조: 제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

제4조: 제국대학 관제에 총장·학부장·교수·조교수 기타 필요한 직원을 설치한다. 필요한 경우 제국대학 총장이 강사를 촉탁할 수 있다.

제5조: 제국대학에 평의회를 두고 각학부장과 각학부 교수 2인 이내로 조직한다. 제국대학 총장은 평의회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

제6조: 교수로서 평의원이 되는 자는 각학부마다 2명의 교수를 호선하여 문부대신이 임명하며, 전항 평의원의 임기를 3년으로 한다.

제7조: 1. 평의회는 다음의 사항을 심의한다.

- (1) 학부에서 학과의 설치 및 폐지

- (2) 강좌의 설치 및 폐지에 관하여 자문한 사항

- (3) 대학 내부의 규정

- (4) 기타 문부대신이나 제국대학 총장이 자문한 사항

2. 평의회는 고등교육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 문부대신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8조: 학부에 교수회를 두고 교수들로 조직한다. 학부장은 교수회를 소집하고 그 의장이 된다.

제9조: 교수회는 다음의 사항을 심의한다.

- (1) 학부의 학과에 관한 사항

- (2) 학생의 시험에 관한 사항

- (3) 기타 문부대신이나 제국대학 총장이 자문한 사항

제10조: 학부장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조교수나 촉탁 강사를 교수회에 참석시킬 수 있다.

제11조: 학부강좌를 둔다. 강좌는 교수를 담임으로 삼는데, 교수가 없거나 기타 특별한 사정의 경우에는 조교수나 촉탁 강사를 담임으로 할 수 있다.

제12조: 강좌의 종류와 그 수는 별도의 칙령으로 정한다.

제13조: 제국대학은 공로가 있고 학술상 업적이 있는 자에게 (천황의)칙지에 의해 명예교수의 명칭을 더할 수 있다.

다이쇼 8년 2월 6일 칙령 제12호 제국대학령



개정된 제국대학령에 의거해 1924년 조선에 경성제국대학[19], 1928년 대만에 다이호쿠제국대학[20]이 각각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문과 계열 학부 설치가 예정에 없었던 도호쿠제국대학과 규슈제국대학에도 법문학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오사카제국대학[21], 1939년에는 나고야제국대학[22]을 설립함으로서 최종적인 9개의 제국대학 체제가 완성된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개전에 따라 공학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도쿄제국대학에는 군수 공업을 담당한 제2공학부를 설치하고[23], 각 제국대학에는 공학부를 증설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군의관 수요가 폭증하자 각지에 의학전문학교를 늘려감과 동시에 각 제국대학에는 임시의학전문부를 설치했다.


3.2. 개편[편집]


파일:1608144821487.jpg
파일:제국대학 후신 위치 수정.png
제국대학 9개교와 후신학교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한 후 GHQ에 의해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일본에서는 1947년 9월 30일 쇼와 22년 정령 제204호로 국립종합대학령(본문)이 공포되어 기존의 제국대학령의 명칭을 개정하였고,[24] 제국대학령 조문의 '제국대학'이 '국립종합대학'으로 변경됐다.[25] 따라서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들은 교명에서 제국이 빠진 '국립종합대학'이 된다.

 • 국립종합대학령 [ 펼쳐 보기 / 접기 ] 

제1조: 국립종합대학은 수 개의 학부를 종합해 구성한다.

제2조: 각 국립종합대학에 설치할 학부는 별도의 칙령으로 정한다.

제3조: 국립종합대학에 대학원을 둔다.

제4조: (1) 국립종합대학에는 관제에서 정한 바에 따라 총장·학부장·교수·조교수·기타 필요한 직원을 둔다. (2) 필요한 경우 국립종합대학 총장은 강사를 촉탁할 수 있다.

제5조: (1) 국립종합대학에 평의회를 두고 각 학부장과 각 학부 교수 2인 이내로 조직한다. (2) 국립종합대학 총장은 평의회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

제6조: (1) 교수로서 평의원이 되는 자는 각 학부마다 2명의 교수를 호선하여 문부대신이 임명한다. (2) 전항 평의원의 임기를 3년으로 한다.

제7조: 1. 평의회는 다음의 사항을 심의한다.

- (1) 학부에서 학과의 설치 및 폐지

- (2) 강좌의 설치 및 폐지에 관하여 자문한 사항

- (3) 대학 내부의 규정

- (4) 기타 문부대신이나 국립종합대학 총장이 자문한 사항

2. 평의회는 고등교육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 문부대신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8조: 학부에 교수회를 두고 교수들로 조직한다. 학부장은 교수회를 소집하고 그 의장이 된다.

제9조: 교수회는 다음의 사항을 심의한다.

- (1) 학부의 학과과정에 관한 사항

- (2) 학생의 시험에 관한 사항

- (3) 기타 문부대신 또는 국립종합대학 총장이 자문한 사항

제10조: 학부장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조교수나 촉탁 강사를 교수회에 참석시킬 수 있다.

제11조: (1) 학부에 강좌를 둔다. (2) 강좌는 교수를 담임으로 하며, 교수가 없거나 기타 특별한 사정의 경우에는 조교수나 촉탁 강사를 담임으로 할 수 있다.

제12조: 강좌의 종류와 그 수는 별도의 칙령으로 정한다.

부칙 : 본령은 다이쇼 8년 4월 1일부 시행한다.

부칙(쇼와 21년 칙령 제353호 초) : (1) 본 칙령은 공포일부 시행한다. (7) 본 칙령을 시행할 당시 국립종합대학, 고등사범학교 또는 기타 문부성 직할제학교의 명예교수 명칭을 가진 자는 각자 이 칙령에 따라 명예교수의 명칭을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쇼와 22년 정령 제204호



이어 통합학부들이 단일학부로[26] 분리되었으며, 미군정의 '고등교육기관 일원화' 방침에 따라 1948~1949년에 걸쳐 각 지방(도도부현)에 있던 구제고등교육기관구제고등학교[27], 구제전문학교[28], 고등사범학교[29], 여자고등사범학교[30], 사범학교(1943년 이후)[31], 청년사범학교[32]들을 흡수하여 신제대학[33]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5월 31일 국립학교설치법(쇼와 24년 법률 제150호)이 공포·시행되면서 국립종합대학령이 폐지되고 제국대학을 비롯한 구제대학의 개편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외지에 위치한 2개의 제국대학, 조선경성제국대학대만다이호쿠제국대학 또한 비슷한 변화를 거치는데, 경성제대는 1945년 9월 미군정청에, 다이호쿠제대는 1945년 11월 중화민국 정부에 접수되어 경성대학국립타이완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예과 및 부속 전문부를 폐지하여 학부에 흡수시킴과 동시에 인근에 위치한 구제전문학교들을 흡수통합하면서 미국식의 신제대학 체제로 개편되었다.
  • 경성제국대학 - 1946년 8월 22일 미군정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의거하여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이학계열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구성하고, 의학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흡수해 의과대학이 되며, 이공학부 공학계열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합쳐져 공과대학을 만들었다.[35] 동시에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사범대학[36]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법과대학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상과대학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치과대학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농과대학으로 흡수하고 예술대학을 신설하여 국립서울대학교로 출범.
  • 대북제국대학 - 1945년 12월 15일 타이완 섬을 접수한 중화민국행정원 결의에 의해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예과를 통합하고, 단과대학을 일본식 학부(學部)에서 중국식 학원(學院)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문정학부를 문학원과 법학원으로 분리. 1947년 구제전문학교인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37]를 법학원 상학계로 흡수.[38]


4. 위상[편집]


일본 제국 당시 최고의 엘리트만이 가는 종합대학이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국립•공립대학은 200여 개 가까이 되지만, 제국대학은 그중에서도 최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500여 개가 넘는 웬만한 4년제 사립대학들은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이다.

실제로 3대 대학 랭킹이라고 불리는 ARWU, THE 세계 대학 랭킹, QS 세계 대학 랭킹이나 자연과학계 연구성과를 가장 잘 나타내는 네이처 인덱스 등을 살펴보면 일본내 1위부터 8위까지는 항상 구제국대학이 차지한다.[39]

구제국대학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특히 이공계의 경우엔 국립대학사립대학 간 가성비 차이는 넘사벽이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학생 한명에게 쏟아붇는 공재정지출의 경우, 국립대학은 231만엔, 사립대학은 18만엔으로 약 13배의 차이가 난다.출처[40] 이공계의 경우, 사립대학의 수업료가 국립대학의 3배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국립대와 사립대의 가성비의 차이는 약 40배이다. 이공계에서 특히 국립대와 사립대의 선호도의 차이가 현저한 이유는, 이공계 특성상 엄청난 재정을 투자해야 하는데,[41] 사립대학은 자신들의 이윤 창출이 제1의 목표이기 때문에 돈이 드는 이공계열 학과에 대한 투자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이는 의학과로 가면 더 벌어져, 의대의 경우에는 구제국대가 거의 모든 사립대학 의학과를 압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42] 왜냐하면, 일본의 국립대학 의학부는 한국과 비교해도 등록금이 아주 저렴하지만(1년 등록금 약 550만 원), 사립대 의대는 가장 저렴한 곳이라도 연간 학비가 한화로 환산하면 2천만원 가까이 되며, 1억이 넘는 곳도 있다.[43]

게다가 일본의 의료 체계가 국립대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형태인지라 일본의 의료 소비자들도 국립대학 병원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립 의대는 의사가 자신의 병원을 물려주기 위해 자기 자녀를 진학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입시 난이도도 소케이 이공학부보다도 쉬운 경우가 있다. 다만 애초에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의대 집중 현상이 덜한 편이긴 하다.

치대약대는 위상이 의과 대학보다 비교적 낮아서 하위권 대학의 경우 모집인원 미달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의과 대학의 위상은 타국가들의 주요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높지만 상대적으로 약학 대학 및 치과 대학 등은 의과 대학에 비해 낮은 편이다. 특히 국립대학의 위상이 강한 일본 대학의 특성상 대학 내에서도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사립대는 일반적으로 수험난이도에 대한 부담이 국립대보다 훨씬 낮으며[44], 일부 전형을 제외하면 대학입학공통테스트를 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립대학의 편차치는 실제 난이도보다 높게 나오기에, 소케이[45]가 도쿄대학 다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46] 실제 전국적인 수험생들의 관점으로는 7곳의 제국대학도쿄공업대학 등의 최상위 국립대학들을 돌고 난 다음 순서로 취급받는다.

물론, 사립대학은 일반적으로 학생 수가 매우 많아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이 중요시되는 문과 계열에서는 국립대학에 밀리지 않는다. 특히 상장기업의 임원 수나 고등고시 합격자 수, 공인회계사 합격자 수 등은 와세다 게이오 등의 사립대학이 전반적으로 제국대 대비 우세하다.[47] 하지만, 7곳 제국대학의 문과 정원을 전부 합한다고 해도 대표적인 사립대학인 와세다대학의 문과 정원보다도 적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각 대학별 문과계열 모집 정원을[48] 확인해보면 도쿄대 1,223명[49], 교토대 970명[50], 도호쿠대 700명[51], 규슈대 717명[52], 홋카이도대 625명[53], 오사카대 1,352명[54], 나고야대 545명[55] 수준이다.[56] 이에 반해서, 와세다대의 모집정원은 문과만 무려 7,210명[57]에 달해서 7개 제국대학의 모든 문과생 수를 합친 것 보다도 많다.[58]

파일:admission imperial univ.png
동 세대 1.6%만이 구제국대학에 진학 (2017년)
역사적으로도 제국대학 자체가 의학부/이학부/공학부를 시초로 출발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1945년 종전 당시 기준으로도 도쿄제대교토제대만 법학부/경제학부/문학부가 독립되어있었고, 도호쿠제대[59]규슈제대[60], 경성제대[61], 다이호쿠제대[62]에는 법문계가 '법문학부'[63]라는 단일학부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외에 홋카이도제대오사카제대나고야제대는 문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홋카이도, 오사카와 나고야제국대학의 문과계열 학부들은 대부분 전후 신제대학이 되면서 구제고등학교를 흡수하거나[64] 관공립대학을 병합하면서[65]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비교적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격화로 중단되기 전 마지막이었던 1943년까지의 일본 제국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실적을 보면, 도쿄제대와 교토제대가 선두를 달리는 한편, 유일한 문과계열 학부인 문정학부[66]를 통틀어 한 학년이 10~20명 수준에[67] 법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이호쿠제대에서도 합격자가 있었고, 심지어는 아예 문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홋카이도제대에서도 합격자가 있었다.[68] 또한 사립학교들이 50년 동안 누적된 수치인데 반해서, 도호쿠제대(1926년 법문학부 1회 졸업), 규슈제대(1928년 법문학부 1회 졸업), 경성제대(1929년 법문학부 1회 졸업)는 15년 정도 동안의 합격자에 불과한 수치인데다[69], 사립대에 비해 학부의 규모 자체가 상당히 작았는데도[70] 상당수의 합격자를 배출하며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는 위엄을 보이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와 국채발급과 이자지급에 쓰이는 예산이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줄일 수 있는 연구비를 줄이고 있다.[71] 그래서 결국에 제대로 된 학문의 연구·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연구중심대학인 구제국대학에 몰릴 수밖에 없는 고로, 구제국대학의 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본은 최근 2000년대에 들어서 2021년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20명 배출하며 대략 1년에 1명 꼴로 수상하였으나[72], 그 수상자들은 모두 국립대학 출신이었고, 최종학력은 대부분이 구제국대학이었다.

여담으로 2008년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고야대학 출신이 있는 걸 한국의 기자가 '지방 명문'이라 칭하면서 "어이쿠 지잡에서 용났네"란 뉘앙스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건 그냥 기자의 무식함을 자랑한 케이스이다.[73] 한국은 유명 대학들은 대부분 수도권 집중이지만, 일본은 각 지역별로 제국대학이 분포되어 있는 구도이다.


5. 상호 관계[편집]


제국대학 학생들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같은 제국대학 이외에는 다 아래로 깔보는 편이었다. 물론 제국대학끼리도 겉으로는 친한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우리가 최고다'라는 본심을 숨기고 있었으며, 특히 도쿄대학교토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유명한 라이벌 관계다. 교토대 출신은 도쿄대 출신을 '그저 암기만 잘하지 교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놈들'이라고 까고, 도쿄대 출신은 교토대 출신을 '허구한 날 낡아빠진 전통 타령이나 하는 빨갱이[74]'라고 깠을 정도. 물론 이건 옛날 쌍팔년도 시절이나 학회에서의 얘기.
  •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 또한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 국립대학의 최고 직위(한국의 총장)는 법적으로 학장(学長)이라고 부르도록 규정되어 있지만[75], 구제국대학만은 특별히 총장(総長)이라고 일관되게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1947년까지만 해도 종합대학이라곤 제국대학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국대학들이 대학 최고 직위를 학장이 아닌 총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 서울대학교의 경우에도 이런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해방 후 당시에는, 사범대학은 '사범대학신문', 농과대학은 '농대신문' 등, 자신의 단과대학 소속을 이름에 넣어서 단과대학 별로 따로 기관지를 발행했다. 하지만, 1947년 7월 1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문화부에서 창간한 학보의 제호는 그냥 '대학신문'이었다.[76] 유독 문리과대학이 '대학신문'이라 한 이유는, 구제전문학교구제중학교와 통합된 다른 단과대학들(법대, 공대 등)과는 달리, 문리과대학은 온전히 일제시대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의 문학부와 이학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적통[77]에서 기인한 자부심이었던 것이다.[78]

이들은 지금도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한다. 구제국대학 출신들의 동창회학사회가 존재함은 물론, 또한 구제국대학들이 매년 모여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개최한다. 이는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매기며, 각 대학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한다. 구제전 수학부문(旧帝戦数学部門)이라는 것도 있는데, 각 구제국대학들의 캠퍼스에 3문의 수학 문제가 게시되어 있는 상자를 설치, 그것을 가장 빨리 푸는 대학이 승리하는 대회로, 문제를 다 풀면 상자 안에 있는 전리품을 참가상으로서 얻을 수 있다. 우승자에게는 수학제전[79]에 참가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 또한, 일본의 학회나 연구, 학술회 등도 이들 구제국대학 출신들이 휘어잡다시피 하고 있다.[80] 자기네끼리 파벌을 만들어 서로 투닥댈지언정 사립대학 출신들은 아예 끼워주지도 않는다.[81]
  • 실제로,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대학교가 국제화를 추진할 때 해외 대학 중 최초로[82] 1995년 10월 도쿄대학와 학생교류협정(교환학생 협정)을 체결하고[83] 이를 시작으로 교토대 등 제국대학들과도 협정을 체결하고 협력 단계를 심화시켜왔고, 홋카이도대[84]와는 학술 심포지엄을 매년 번갈아 개최하고 있기도 하는 등, 특히 구제국대학들과는 현재 활발한 학술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5.1. 동문회[편집]


学士会(がくしかい
학사회
Gakusikai
파일:1557929133206.png
설립
1886년 7월
분류
일반사단법인
이사
사사키 다케시 (佐々木 毅)
대표 위치
도쿄도 치요다구 칸다니시키초
홈페이지
학사회 링크
학사회관 링크

구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종합적인 동문회 모임인 학사회(学士会)가 존재한다. 이름이 '학사'회인 이유는 당시 학위를 부여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원칙적으로 제국대학들에만 한정[85]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학사회 규정에는 경성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 출신자도 회원 자격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으나, 물론 서울대학교나 국립타이완대학 출신자는 가입이 안 된다.

일본 최고 학술연구기관들의 연합 동창회인 만큼, 다른 사립대 동창회처럼 단순히 인맥만들기 모임의 기능 뿐만이 아니라, 학술 강연, 선학 방문, 연구 지원에도 크게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격월로 각 분야 최고의 교수 수십명을 초빙해 강연을 진행하고, 그 내용들을 엮어 학사회회보(學士會会報[86])로 발간하고 있다. 학사회회보는 1887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간 중이며, 그 외에도 학사회 아카이브, NU7, 메일 매거진 등을 발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에도 협찬하고 있으며, 매년 7천만원 이상의 협찬금을 지출하며 우승 대학에는 학사회 트로피를 증정하고 있다.

학사회의 학사회관(学士会館) 건물은 1928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유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숙박시설, 레스토랑, 회의실, 연회장, 미용실, 사진관, 결혼식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일반인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학사회 회원만 발급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도 있다. 사진 참조. 다이너스 클럽시티카드로 발급받을 수 있다.



5.2. 정기전[편집]


파일:nanadaisenn.jpg
개회식의 모습[87]

야스다강당 앞에 모인 각 대학의 응원단[88]

파일:CIMG1700-Yuji-Higuchi.jpg
칠대전 글라이더 경기

홈페이지 링크
일본 본토 7개의 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全国七大学総合体育大会)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실시한다. 줄여서 칠대전(七大戦)으로 부르기도 하며, 2023년 기준 62회를 맞이했다.[89]

대회는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7개 대학이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90] 종목은 일정하진 않지만, 주로 아래와 같은 항목을 두고 겨룬다.


6. 조선인 관련[편집]


모든 제국대학은 원칙적으로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혹은 그 제국대학에 부속되어 있는 예과를 졸업해야 입학이 가능했다. 이 당시의 고등학교(구제)는 현재 대학 교양과정 레벨을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독일계 학교인 김나지움 혹은 영국계 학교의 식스폼 과정에 해당하는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92]

그런데 한반도에는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93], 혹은 구제고등여학교구제중학교[94]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예과를 갖추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가지 못한 조선인 학생들은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나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와 같은 구제전문학교를 다녔고, 정 대학을 가고 싶다면 일본 본토의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사립 구제대학[95]을 다녔다.[96]

본토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극소수의 엘리트 조선인 학생들은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 본과에 바로 입학하는 과정을 밟거나[97],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대다수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조선인에게 입학허가를 비교적 후하게 내주었던 마쓰야마(松山, 송산)고등학교(現 에히메대학)로 진학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1924년 조선에서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이 조선 식민지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려 하는 유학생은 계속 증가하였다. 우선 일본 본토 제국대학이 교육, 설비의 질적인 수준이 높았으며, 본토 제국대학 출신들이 더 대접받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또한 법문학부, 의학부만 존재하였고, 1941년이 되어서야 이공학부가 추가되는 등, 배우거나 연구할 수 있는 분야도 한정되어 있었다.[98] 두 번째 이유로 관료주의 사회였던 일본에서 기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일본 최고의 대학인 제국대학을 졸업함으로서 이를 얻어내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마지막으로 식민지로서의 억압으로 인한 이유이다. 조좌호[99], 김사량, 송을수[100]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항일운동 활동으로 인해 조선에서 대학 진학이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중에 학병으로 끌려간 신상초도 회고록 <탈출>에서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현해탄을 건너는 도항증을 요청하러 갔을 때, 일본인 경찰관들은 불손하다는 이유로 소년 신상초를 욕하고 때렸다. 몇 년 후 신상초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고 귀향하자 이번에는 그 경찰관들이 “환심을 사느라고 오히려 아첨” 하기에 바빴다.

-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휴머니스트, 201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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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테크를 밟은 사람들의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그 외의 출신자는 구제고등학교 항목 참조.

한편,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제국대학 교수까지 한 케이스도 있었다.[102]
  • 이태규(李泰圭)는 경성고등보통학교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의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였다(이학박사). 1937년에 교토제국대학 조교수[103], 1943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경력 때문에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 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기도 했다.
  • 리승기(李升基)는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공학박사). 교토제국대학에서 조교수를 지낸 리승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제2대 학장을 지내다가, 6.25 전쟁월북하여 자신이 1939년에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 임호식(林浩植)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제국대학 조수를 거쳐 1935년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농학박사로도 알려져 있다.
  • 윤일선(尹日善)은 경성중학교제6고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수 및 조수를 거쳐 1928년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고영순(高永珣)은 부립 오사카의과대학(오사카제국대학의 전신)을 나왔다. 1928년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표를 내고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였다. 임명재[104], 심호섭[105]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다고 한다.
  • 김종원(金鍾遠)은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지질학교실에서 연구생 생활을 하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강사를 거쳐 1945년 7월 13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106]

구제고등학교는 전부 남고라 실질적으로 제국대학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으나, 조선인 출신의 제국대학 여학생도 있었다. 이회창자유선진당 대표위원의 막내이모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김삼순이 그러한데, 김삼순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現 오차노미즈여자대학)[107]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와 광복 후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을 지낸 정두현은 무려 3곳의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기사 링크 도쿄제대에서 '농학'을, 도호쿠제대에서는 '이학'을, 다이호쿠제대에서는 '의학'을 공부했다. 다만 도쿄제대의 '농과대학 실과'는 이후 농학부가 되는 농과대학 본과가 아니라, 부속 전문부 과정이었므로 정식 학사 학위로 인정되진 않았다.[108]

민족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릿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109]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110][111]


7. 기타[편집]


  • 일본제국 시절, 제국대학 출신은 같은 일을 해도 봉급을 더 받는 등의 우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등문관시험 준비를 위해 경기도청 고원으로 있었던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김영재는 65원의 월급을 받았다. 구제중학교 졸업자는 30원,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는 40원, 일본 사립대학의 졸업자는 45원의 임금을 받은 데 반해 제국대학 졸업생은 65원의 최고 수준 봉급이 주어졌던 것이다.[112] 또한, 전쟁 전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 등 재벌계 대기업의 평균 초봉은 제국대학과 상대는 80엔, 고등상업학교소케이는 70엔, 그 외 사립대학은 60엔이었다고 한다.[113]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 신동아, 2005년 12월호 <경성제국대학 입시 대소동> 中.[114][115]
메이지 시대 말기[116]의 관립/사립학교 문과 졸업생의 초봉 격차를 "제국대학 100엔에 대해서 히토츠바시[117] 60~70엔, 게이오 50~60엔, 와세다는 30~40엔을 동등한 것"으로 본다.

오자키 모리테루[118] 일본취직사(日本就職史) 中.
사립대학이 정식 구제대학으로 승격한 다이쇼 시대 이후에도 엄연한 급여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이쇼 버블 시대의 닛폰유센(日本郵船)에서는 제국대학, 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 졸업생의 초봉은 80엔, 와세다·게이오와 지방고등상업학교가 60~65엔, 소케이를 제외한 사립대학이 50~55엔이었다. 대체로 제대(帝大) - 상대(商大) - 소케이(早慶) - 기타사립대학이라는 순서로 평가받으면서 사립대학 출신은 기업에 취직하더라도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 주모쿠 고사이(寿木孝哉) 취직전술(就職戦術) 中.[119]

  • 일본제국 시절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도 제국대학에 (어디까지나)버금가는 수준이라고 보았다고 한다.[120] 당연히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학비 무료에 관료 임용까지 보장한다는 특전, 그리고 징병 징용대상에서 면제된다는 점 때문에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121] 하지만 건국대학이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최고학부이다 보니 만주국에서는 알아줘도 일본제국 본토에선 대접받지 못했다. 입학도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122] 그래도 그나마 전쟁 당시에는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제국대학 출신들 특히 숫적으로 가장 많았던 경성제대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참고로, 이 건국대학의 학맥은 현재 이어지지 않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대학 문서 참조.

  • 당시 제국대학 학생들의 복식과 관련해서는 블로그 참조



  • 2차대전 패전 후 기존의 학제를 개편하는 과정에 미군정 GHQ CIE[123]는 1947년 기존 내지의 제국대학 7곳에 더해 호쿠리쿠, 주고쿠, 시코쿠 등지에 3곳을 신설한 국립종합대학 10개교만 국립(관립)으로 두고, 나머지 관립대학 및 관립전문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은 전부 지방 도도부현 소관으로 이관하여 공립학교로 삼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가나자와대학 50주년 기념페이지 참조.

  • 전후에는 이 10개 국립종합대학안과 별개로 여자교육의 진흥을 위해 수도권과 간사이 지방에 여자제국대학을 설립하는 구상이 제시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여자제국대학으로 격상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며, 역시 여자고등사범학교로 긴키지방의 유력한 유일 후보였던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는 이에 호응해 나라여자제국대학 승격 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실패.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지 못한 두 여자고등사범학교는 각각 오차노미즈여자대학나라여자대학이라는 두 국립 여자대학으로 승격하였다.


8. 여담[편집]



구글 어스로 본 구제국대학의 캠퍼스

  • 제정 러시아에도 제국대학이 있었다. 1917년 당시 모스크바(1755년), 유리예프(1799년 타르투), 빌뉴스(1803년 개교, 1831년 폐교), 하리코프(1833년 하르키우), 카잔(18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1819년), 알렉산드롭스키(1827년 헬싱키), 성 블라디미르(1834년 키이우), 노보로시스키(1865년 오데사), 바르샤바(1869년)[124], 톰스크(1878년), 니콜라옙스크(1909년 사라토프) 11개교가 있었다. (()안은 개교연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국대학 출신자는 블라디미르 레닌일 것이다(카잔제국대학 중퇴). 이 대학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국립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 관련 영상. 일본 국내의 7개 구제대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대학들을 노리는 일본의 수험생들의 심정도 나타내고 있다.

  • 일본 입시에서 구제국대학 7곳은 모두 전기대학으로 분류되어[125], 구제국대학에 진학하려는 수험생들은 2월 25일[126]에 7개 구제국대학 중 1곳씩만 지원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구제국대학 7곳의 합격자 발표는 3월 10일에 많이 하며, 간혹 하루이틀 당겨서 3월 8일이나 3월 9일에 하는 곳도 있다. 매우 드물게 후기를 뽑는 경우 후기 합격자 발표는 3월 20일, 3월 21일, 3월 22일 중 한 날에 한다.

  • 박정호 SK그룹 부회장은 "일본은 7개의 제국 대학을 가지고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고자 노력한다고 일본 영사가 자랑한 적이 있다" (기사 링크)라고 증언하며 인재양성과 관련해 전국 대학을 통해 균형 있는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일본의 구제국대학을 예를 들어 강조하기도 하였다. #

  • 관련 문헌
    • 제국대학 - 아마노 이쿠오 저 / 박광현·정종현 역. 산처럼 출판, 2017년.
    • 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정종현 저. 휴머니스트 출판,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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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第一條(だいいちじょう 帝國大學(ていこくだいがく國家(こっか須要(しゅよう(おうスル學術技藝(がくじゅつぎげい敎授(きょうじゅ(および(その蘊奧(うんのう攷究(こうきゅうスルヲ(もっ目的(もくてきトス[1] 제국대학은 설립/운영 주체에 따른 분류상으로 관립대학(국립대학)에 속했지만, 대학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다른 모든 구제대학과 달리 별도 법령인 제국대학령에 따라 설립되었다.[2] 오늘날의 중학교(전기중등교육)와 고등학교(후기중등교육)를 합쳐놓은 학교이다. 대한민국 역시 1950년까지는 일제의 구제중학교 시스템을 이어받아 중학교가 5~6년제였다.[3] 오늘날 한국의 의예과처럼 대학의 교양과정에 해당하며, 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은 중학교와 함께 5년제 구제중학교에 통합되어 있었다. 단, 부속 예과를 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당시 한반도에 구제고등학교가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 예과를 두어 직통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본토에는 홋카이도제국대학에도 예과를 둔 바 있다.[4] 당시 제국대학보다는 단과대학인 기타 관립대학이, 관립대학 보다는 사립 구제대학이, 사립 구제대학보단 구제전문학교의 격이 낮다고 보았다.[5] 석사는 수사(修士) 혹은 박사전기과정(博士前期課程)라고 함.[6] 다만, 현재 일본에서 호쿠다이(北大)는 홋카이도대학의 약칭으로 쓰이고 있고, 도호쿠대학은 약칭 없이 그냥 토호쿠(東北、とうほく)라고 불리고 있다. 마작 패의 중국어 독음을 가져온 속칭으로는 톤페(とんぺー)라고 불리기도 한다.[7] 다만, 전후 홋카이도대학과 관련해서는 일본제국 시절 약칭인 카이다이(海大)가 아니라 과거 도호쿠제국대학의 약칭인 호쿠다이(北大)가 현재 홋카이도대학의 약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원래 호쿠다이(北大)이던 도호쿠대는 약칭 없이 도호쿠다이(東北大、とうほくだい)라고 불리고 있다.[8] 법제상으로는 국대안에 따라 서울과 근교의 관립 고등교육기관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의 구제전문학교 및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등의 사범학교, 그리고 사립 경성약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교, 경성음악학교와 모두 통폐합되어 1946년 10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하였다. 실제로는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들은 물론 고베대학이나 츠쿠바대학, 히로시마대학 등 구 관립대학들도 전부 각 현에 1개의 고등교육기관만을 둔다는 미군정 GHQ의 방침에 따라 근교의 구제고등학교구제전문학교를 병합해 미국식 신제대학으로 새롭게 출범했으나 역사적으로는 구제대학 시절의 역사를 계승하는 부분과 대조된다. 서울대 역시 조선의 유일한 구제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본부가 그대로 서울대학교 본부가 되는 등 실질적으로는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각종 구제전문학교를 엮은 연합대학으로 출범한 것이며, 아래 대북제국대학-국립타이완대학의 경우처럼(본문의 아래 각주 참조)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 경성제대의 역사를 계승하는 입장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도 단과대학별로는 경성제대와 각종 전문학교 등 구제 고등교육기관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9] 경성은 일본어로 케이조((けい(じょう)로 읽힌다. 쿄다이(京大, 경대)는 당시 교토제국대학의 약칭이었으므로, 신설된 경성제국대학은 조다이((じょう(だい, 성대)로 불렸다. 2차대전 패전과 해방 이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이전의 경성대학은 기존의 성대와 함께 약칭 경대(京大)를 사용했다. 이러한 명칭 변경을 다룬 논문도 있다.[10] 서울대학교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자교 역사로 계승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국립타이완대학은 자신들이 대북제국대학을 승계했음을 인정하고 교사(校史)에서도 대북제국대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1928년 개교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국립타이완대학도 중국국민당이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정권 시기에는 1945년에 개교했다는 공식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는데, 민주화되면서 1945년 개교인지 1928년 개교인지에 대해 학내 견해가 엇갈리다가 대만정명운동(台灣正名運動)의 일환으로 2007년에 공식적으로 '1928년 개교' 입장을 확정함으로써 대북제국대학을 국립타이완대학의 전신으로 공식화했다.[11] 최초의 관립대학. 메이지 시대 내각 각 부처 소속의 개별 교육기관들의 연합체였다. 참고로 이 1877~1886년까지 있었던 구 도쿄대학은, 현재의 도쿄대학(신제)의 전신격 기관이지만, 법제상의 제도가 다르다.[12] 1886년 3월 1일 메이지 19년 칙령 제3호 제국대학령(원문) 공포로 구 도쿄대학(舊 東京大學)이 공부대학교(工部大學校)를 흡수합병하여 창설된 최초의 제국대학. 1893년 8월 11일 메이지 26년 칙령 제83호 제국대학관제(帝國大學官制)(원문)가 공포되고(동년 9월 11일 시행), 1897년 6월 메이지 30년 칙령 제210호 도쿄제국대학관제(東京帝國大學官制)(원문)로 대체.[13] 교토제국대학이 설치됨에 따라 더 이상 제국대학이 단 하나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14] 1897년(메이지 30년) 6월 18일 칙령 제209호 교토제국대학에 관한 건(京都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및 칙령 제211호 교토제국대학관제(京都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로 교토제국대학 설립. 기존 제국대학은 칙령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15] 1907년 6월 21일 메이지 40년 칙령 제236호 도호쿠제국대학에 관한 건(東北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및 칙령 제237호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農科大學官制)(원문) 공포로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개편되면서 도호쿠제국대학 설립. 참고로 이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은 1918년 4월 1일 현재의 홋카이도대학이 되는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으며, 센다이시에 현재의 도호쿠대학의 일부가 들어선 것은 1910년 12월 21일 메이지 43년 칙령 제447호 도호쿠제국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에 따라 1911년 1월 1일 설립된 이과대학(1913년 9월 22일 개학)이 최초이다.[16] 1910년 12월 22일 메이지 43년 칙령 제448호 규슈제국대학에 관한 건(九州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공포로 1911년 1월 1일부 규슈제국대학 설립(분과대학으로 공과대학을 설치. 공과대학의 수업 개시는 1911년 9월 11일), 1911년 3월 30일 메이지 44년 칙령 제43호 규슈제국대학관제(九州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로 교토제국대학 후쿠오카의과대학(京都帝國大學福岡醫科大學)이 4월 1일부로 규슈제국대학 의과대학으로 이관 개편.[17] 1918년 3월 30일 다이쇼 7년 칙령 제43호 홋카이도제국대학에 관한 건(北海道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및 칙령 제44호 홋카이도제국대학관제(北海道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로 홋카이도제국대학이 창설되고,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이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18] 다이쇼 8년 칙령 제 12호[19] 1924년 5월 1일 다이쇼 13년 칙령 제103호 경성제국대학관제(京城帝國大學官制)(원문) 및 칙령 제105호 경성제국대학에 관한 건(京城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공포.[20] 1928년 3월 16일 쇼와 3년 칙령 제30호 다이호쿠제국대학에 관한 건(臺北帝國大學ニ關スル件)(원문) 및 칙령 제31호 다이호쿠제국대학관제(臺北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21] 1931년 4월 28일 쇼와 6년 칙령 제67호 오사카제국대학관제(大阪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22] 1939년 3월 30일 쇼와 14년 칙령 제112호 나고야제국대학관제(名古屋帝國大學官制)(원문) 공포.[23] 현재는 치바대학 본부인 치바대학 니시치바캠퍼스가 되었다.[24] 이에 앞서 1947년 5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어 정식 국명이 일본국(日本國, Japan)이 되었다.[25] 물론 1946년 7월 6일 쇼와 21년 칙령 제353호로 공포된 국립종합대학의 명예교수에 관한 건(国立総合大学等の名誉教授に関する件) 등을 보면 1947년 이전인 1946년 7월에도 이미 제국대학이 아닌 국립종합대학으로 지칭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서울대학)→국립서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국립종합대학령은 이미 사용되고 있던 국립종합대학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26] 예컨대, 법문학부는 법학부/경제학부/문학부로, 이공학부는 이학부/공학부로[27] 1886년 제1차 중학교령 중 고등중학교 관련 규정과 제1차 고등학교령(1894년) 및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에 준거한 제국대학의 예과.[28] 전문학교령( 1903년)에 준거한 학교로 본과·예과·연구과·별과로 구성되며, 구제중학교급 학교의 졸업생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본과의 수업연한은 3년 이상이었다(제6조). 고등공업학교, 고등상업학교, 고등농림학교 등의 고등실업학교 외, 여자전문학교(여전), 의학전문학교(의전), 치과의학전문학교(치과의전), 약학전문학교(약전), 외사전문학교(외전), 기타 예술계 전문학교 등 관·공·사립의 다양한 학교가 존재했으며 구제 고등교육기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구제대학보다 하위의 고등교육기관이었지만, 극소수의 학교는 대학령(1918년)에 준거한 구제대학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한편 제국대학을 포함한 구제대학들도 부속학교로 구제전문학교에 해당하는 전문부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29] 사범학교령(1886년) 중 고등사범학교 관련 규정과 고등사범학교규정 (1894년), 사범교육령(1897년, 1943년 )의 고등사범학교 관련 규정에 준거한 학교로, 본과·연구과 등으로 구성되어 본과는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입학시켜 4년간 교육시키는 중등학교(구제중학교 , 고등여학교 , 사범학교) 교원양성기관이었다. 관립 고등사범학교 중 도쿄와 히로시마의 2개교는 본과 졸업생을 교육시키는 전공과를 기반으로 문리과대학을 설립했으며, 몇몇 사립대학들은 고등사범학교에 상당하는 과정으로서 부속 고등사범부를 설치했다. 또 중등교원 부족현상에 따라 제국대학을 포함한 관립대학·구제전문학교에도 고등사범학교급의 임시교원양성소와 실업학교교원양성소 등이 부설되기도 했다.[30] 여자고등사범학교규정(1894년)과 사범교육령(1897년, 1943년) 중 여자고등사범학교 관련 규정에 준거한 학교로, 본과·연구과로 등으로 구성되어 본과는 고등여학교 졸업자를 입학시켜 4년간 교육시키는 여자중등학교(고등여학교, 여자사범학교) 교원양성기관이었다.[31] 원래 소학교 졸업자를 교육시켜 초등학교(소학교) 교원을 양성하던 사범학교가 전면개정된 제2차 사범교육령(1943년)에 준거해, 구제중학교·고등여학교 졸업자 및 해당 사범학교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켜 3년간 교육시키는 본과를 설치하면서 고등교육기관으로 격상되었다.[32] 제2차 사범교육령이 1944년 일부 개정되면서 청년사범학교 관련 규정을 삽입하여 기존의 청년학교 교원양성소를 청년사범학교로 개편 승격시켜 본과·예과·연구과를 두고 본과에 구제중학교·고등여학교 졸업자와 해당 청년사범학교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켜 3년간 교육하도록 규정했다.[33] 新制大學. 구제대학의 반댓말로, 현재 제도의 대학을 의미.[34] 본래 출발이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학교 수산학부로, 1935년 홋카이도제국대학 부속 수산전문부에서 하코다테고등수산학교로 분리독립했다가 1944년 하코다테수산전문학교로 개칭한 후 1949년 다시 홋카이도대학으로 합병된 현재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35] 현재 서울대학교의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법과대학,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의 모체가 되었다.[36] 일제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당시 중등학교급이었다. 고등사범학교가 아닌 일반 사범학교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이 일제 말기인 1943년 제2차 사범교육령( 전부 개정법률)이었기 때문에 1945년 해방 당시까지 아직 고등교육기관이라는 인식이 미약했고 중학교(구제)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일본 내지에서도 신제대학이 될 때 사범학교가 전신인 신제대학의 교육학부나 에키벤 대학은 천시 대상이었다. 조선에서도 서울대학교 설립 초창기에 경성제대 예과•법문학부•이공학부 이학계열 등 경성제대 출신들로만 구성된 문리과대학에서 경성사범학교에서 비롯된 사범대학을 철폐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37] 1919년 대만총독부 고등상업학교로 설립, 1926년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를 거쳐 1944년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로 개편(동년 조선의 경성고등상업학교도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편). 1945년 중화민국에 접수되어 1946년 대만성립법상학원으로 개칭되어있던 상황[38] 대만의학전문학교는 1936년에 이미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를 창설할 때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된 상태였고, 공업전문학교농림전문학교(원래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자리에 1919년 먼저 개교했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였으나, 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흡수당했다가 1943년에 타이중으로 독립해 나감)는 각각 타이난타이중에 위치해 있어서 각각 국립성공대학국립중흥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외에 대만 유일의 구제고등학교인 다이호쿠고등학교는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시급한 중등교원 양성을 위해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별도 승격되었다.[39] 7개의 구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학이 대략 1~8위를 차지하고 있고, 쓰쿠바대학이나 히로시마대학, 대학원대학(OIST, NAIST, JAIST)등이 상당한 연구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40] 단순히 학생 1명에 들어가는 1년 예산을 보면 국립대는 320만엔, 사립대학은 154만엔으로 2배정도 차이가 난다. 사립대학은 국립대에 비해 가계(집)에서 쏟는 돈이 두배 더 많다.[41] 일본 국립대학의 이공계 분야는 일본 정부 지원금을 엄청 받고 있고 일본의 연구 거점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연구나 산학연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사립대학은 연구 규모나 재정적 측면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42] 물론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준텐도대학 의학부,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등 명성이 높은 사립 의대도 존재한다. 이 사립 의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학비가 비교적 싸다는 것. 그러나 사립 최고 의대인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역시 구제국대에 우위를 점하기 어렵고, 나머지 사립의대들은 관립의과대학이었던 구6의대에 밀린다.[43] 일본 전국구급 명문고등학교인 카이세이 고등학교의 진학 결과를 보면, 사립대학의 의학부에 중복 합격한 학생들은 대부분 동시에 합격한 국립, 공립대학 의학부로 다 빠져나갔다. 사립대학 의학부의 살인적인 등록금이 입학 지원에도 영향을 실제로 미치는 것이다.[44] 어느 정도냐면 사립대 문과는 수학이 필요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45] 와세다대학게이오기주쿠대학을 일컫는 용어.[46] 많은 한국인들이 위와 같이 착각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병철, 신익희, 이광수, 송진우, 양주동, 김성수 등 많은 유명인물을 배출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에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조선인들은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혀 다른 일본의 대학서열화를 한국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수도에 있는 국립대, 그 다음 라이벌 관계인 두 사립대라는 도식을 그대로 대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도쿄대와 소케이를 그냥 한국의 스카이에 대입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일본의 대학 서열화/외국/일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이랑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일본하고 미국하고 유사한 부분이 많으며 한국처럼 대학 앞글자 따와서 순서대로 나열하는 식의 서열화는 없다.[47] 물론 합격률로 봤을 때는 제국대학 쪽이 비슷하거나 더 높긴 하다. 국가공무원 총합직(한국의 5급 고시에 상당)나 사법시험(로스쿨) 등.[48] 고등학교 이과생에 할당된 문과 학부의 모집 정원까지 전부 포함해서[49] 링크 참고. 문과1류 401명, 문과2류 353명, 문과3류 469명.[50] 링크 참고. 종합인간학부 120명, 문학부 220명, 교육학부 60명, 법학부 330명, 경제학부 240명. 교토대 자료 참고[51] 링크 참고. 문학부 210명, 교육학부 70명, 법학부 160명, 경제학부 260명. 도호쿠대학 자료 참고.[52] 링크 참고. 공창학부 105명, 문학부 151명, 교육학부 46명, 법학부 189명, 경제학부 226명. 규슈대학 자료 참고.[53] 링크 참고. 문학부 185명, 교육학부 50명, 법학부 200명, 경제학부 190명. 홋카이도대학 자료 참고.[54] 링크 참고. 2007년 오사카외국어대학을 흡수 합병하면서 외국어문학부로 별도 편제된 덕분에 오사카대학은 현재 최대 규모의 학부를 가진 국립대학이 되었다. 문학부 165명, 법학부 250명, 경제학부 220명, 인간과학부 137명 등 기존 오사카대학 772명과 외국어문학부 580명. 오사카대학 자료 참고.[55] 링크 참고. 문학부 125명, 교육학부 65명, 법학부 150명, 경제학부 205명. 나고야대학 자료 참고.[56] 참고로, 서울대 문과(인문대, 사회대, 경영대, 사범대, 자유전공학부) 정원은 1,200명대, 대만대 문과(문학원, 사회과학원, 법률학원, 관리학원)는 약 1,430명이다.[57] 링크 참고. 문학부 660명, 교육학부 960명, 국제교양학부 600명, 문화구상학부 860명, 사회과학부 630명, 법학부 740명, 정치경제학부 900명, 상학부 900명, 인간과학부 560명, 스포츠과학부 400명. 이렇게 심지어는 개별 학부가 각각의 제국대학의 규모를 넘어설 정도.[58] 게이오기주쿠대학5,050명(문학부 800명, 법학부 1,200명, 종합정책학부 425명, 경제학부 1,200명, 상학부 1,000명, 환경정보학부 425명)에 달한다. 결국 소케이의 문과 정원은 모든 구제국대학은 물론이고, 기타 상위권 국공립 대학들의 문과 정원까지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라는 것.[59] 1907년 개교, 1922년 8월 법문학부 설치, 1923년 법문학부 제1회 입학[60] 1911년 개교, 1924년 9월 법문학부 설치, 1925년 법문학부 제1회 입학[61] 1924년 예과 개교, 1926년 법문학부 설치[62] 1928년 개교 및 문정학부 설치[63] 다이호쿠제국대학의 경우는 법학과가 없이 '문정학부'였다.[64] 제국대학에 흡수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대학예과)는 주로 교양학부가 되었다.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대 예과를 교양학부로 개편하고 법문학부를 신규설치했고, 오사카대학도 구제고등학교인 오사카고등학교나니와고등학교를 흡수해 교양학부로 삼고 법문학부를 신설했다. 나고야대학제8고등학교를 교양부로 개편했다. 기타 문과 학부가 존재하고 있었던 제국대학들도 마찬가지.[65] 나고야대학은 1948년 나고야경제전문학교와 오카자키고등사범학교를 흡수해 법경학부와 교육학부의 모체로 삼았고, 오사카대학은 2007년 오사카외국어대학을 외국어문학부로 흡수함.[66] 철학과, 사학과, 문학과, 정학과(政學科)로 구성[67] 1930년 제1회 졸업생 14명부터 1943년 제14회 졸업생 32명까지 총 324명으로 연평균 23명의 졸업생 배출. 논문 20페이지 참고.[68] 합격률로 따지면 문과가 없던 제국대학들도 모든 사립대학보다 높은 수치를 보인다.[69] 당시 평균수험기간이 졸업 이후 5년 정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70] 모집정원 도호쿠제대 법문학부 300명과 규슈제대 법문학부 200명 중 법학과의 정원은 1/4~1/3에 불과했고, 경성제대의 경우는 법문학부 80명의 절반인 40명뿐이었다.[71] 국립대학 연구비 삭감 2019년 대학별 연구비 순위 교차검증자료[72] 21세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에 이어 2번째. 참고로 2021년 기준 전부 29명의 일본인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틀: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참조.[73] 그리고 2014년에 반복되었다.# 다만 기사에 나온 도쿠시마대학은 제국대학이 아닌 점에 유의.[74] 예나 지금이나 교토일본 공산당의 지지세가 일본 전국에서 가장 강한 도시 중 하나다.[75] 원래는 일본도 대학령이 반포되기 전인 1919년까지는 종합대학 밑에 단과대학을 두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홋카이도제국대학 농과대학 등.) 그래서 이런 단과대학학장들을 총괄하는 직위가 총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과대학이 모두 학부제로 개편(e.g. 공과대학→공학부, 법과대학→법학부, 농과대학→농학부, 문과대학→문학부, 이과대학→이학부, 의과대학→의학부 등)되었으니, 일반 대학의 수장은 자연스럽게 학장이라고 부르는 게 원래는 맞는 셈.[7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대학신문'은 1947년 9월 제3호까지만 발행되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서울대 전체 학보인 '서울대학신문'이 창간되어 1950년 5월까지 발행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제17호를 마지막으로 정지되었다. 그리고 현재 발행되는 '대학신문'은 1952년 2월 4일 전시연합대학 시절에 탄생한 것이 이어내려온 것이다. 전쟁으로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서울대 학보의 명칭은 그대로 '서울대학신문'이 되었을 것이다.[77] 의학부도 의예과를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의과대학이 아닌 문리과대학 소속으로 두었음. 2012년 3월에 자연과학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소속변경[78] 사실 제호나 명칭을 보통명사로 퉁치는 명칭부심은 최초, 최고의 위상이 확고한 경우에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 이름은 그냥 "TIMES"이고 세계 최초인 잉글랜드 축구협회 명칭은 그냥 "FA". 밑에서 서술할 제국대학의 종합적인 동창회인 '학사'회 역시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해있던 동숭동과 의학부가 있던 연건동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명칭 역시 '대학로'인 것도 대표적인 예.[79] 2회차 기준 수학제전 MATH POWER 2018 참가 티켓이 주어졌다.[80] 교수의 학부별 출신대학 점유율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제국대학 출신들로, 특히 이공계열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나마 문과에서는 소케이, 구 3상대, 문리과대학 등이 끼어있는 정도.[81] 이 때문에 제국대학 출신 학자들이 자국에서 서로 지지고 볶을 때 사립대학 출신들이 해외로 진출해 명성을 얻는 아이러니한 경우도 많다.[82] 단과대학 수준까지 포함하면 1987년 7월 15일 서울대 농대가 규슈대학 농학부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한 것이 최초[83] 이는 교환학생 파견 협정으로, 도쿄대학과의 '학술교류협정' 체결은 1990년. 서울대학교 60년사 (제3부 교육, 제4장 장학제도와 학생교류 확대) 참고. 현재는 관악캠퍼스에 도쿄대 사무소를, 도쿄대 캠퍼스에 서울대 사무소를 두고 있기도 하다. 참고 링크[84] 홋카이도대학 공학부 건물 내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본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85] 제국대학령이 반포되기 전까지 학사 학위를 부여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은, 개척사삿포로농학교(일본 최초의 학위 부여 기관), 구제 도쿄대학, 부성의 공부대학교, 농상무성의 코마바농학교, 사법성의 법학교가 있었다. 제국대학령 반포 후에는 삿포로농학교를 제외한 다른 기관들은 모두 도쿄제국대학으로 통합되었고, 삿포로농학교도 나중에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통합된다.[86] 會와 会는 구자체 신자체의 차이일 뿐 글자는 같은 '모일 회' 글자이다. '학사회' 부분만 구자체로 쓴 이유는 역사성, 정통성 강조 및 학회 예우 때문이다. 다른 예로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은 모든 한자를 구자체로 쓰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게이오'가 연호에서 따와서 이 부분은 여전히 구자체를 원칙으로 하는 등 구자체는 이러한 정통성 강조와 예우의 목적으로 여전히 쓰인다.[87] 총장들이 모여서 카가미비라키(鏡開き)를 시연하고 있다. 행사가 탈 없이 진행되기를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 풍습 중 하나.[88] 2023년 62회 칠대전은 도쿄대학이 주관한다. 본 사진에 찍힌 응원단기는 왼쪽에서부터 도호쿠대학, 홋카이도대학, 도쿄대학이다. 사진[89]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2020년 59회, 2021년 60회는 취소되었다.[90] 홋카이도 - 규슈 - 오사카 - 교토 - 도호쿠 - 도쿄 - 나고야 순서. 제1회 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홋카이도대학 클라크 회관 앞에는 칠대전 기념비가 건립되었다.[91] 전국7대학체육대회에서 하는 유도는 오늘날의 강도관 유도와는 규칙이 좀 다른 구석이 있는데, 스스로 누우며 그라운드 공방에 진입하는 행위에 대한 벌칙이 없으며, 스탠딩 선언을 받기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강도관 유도보다는 어려운 편이다. 강도관이 이런 저런 수정을 가하기 전의 초창기 유도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며, 오히려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더 비슷하다.[92] 구제고등학교를 일단 합격하면 대학 진학은 쉬웠다. 그래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입시생과 부모들의 관심사였고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이런 구제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해서는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심지어 도쿄 소재의 제1고등학교는 그 당시 도쿄제국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93] 예컨대 마산여자고등학교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 고로 분리되었다.) 고등보통학교구제중학교(5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8년부터.[94]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였다.[95] 일본의 학교교육법(1947년)이 시행되기 이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설립된 일본제국의 모든 대학을 지칭하는 말.[96]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97] 이를 방계입학이라고 한다. 이들은 구제고등학교예과 출신과는 달리, '선과생'이라고 하여 편입생 취급을 받았으며 졸업 자격은 획득할 수 있었지만 학력 평가를 포함한 별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고등학교/예과 출신과 같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98]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도 상과가 있었지만 구제전문학교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에 정치학, 경제학에 뜻을 둔 학생은 일본 본토로 갈 수밖에 없었다.[99]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졸업,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100]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진학.[101] 정확히 말하면 원래 구마모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재학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다가,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102] 당시 제국대학의 교원은 주임교수-조교수-강사-조수-부수 순으로 보직이 정해져 있었다.[103] 도중 경성제국대학에서 이공학부 화학과 교수로 초청받았으나 교토제국대학에 재직 상태였기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104]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105]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106] 해방 후 경성대학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교수이었으며(1946.8.22),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질학과 창설을 손치무 조교수와 같이 이루고 지질학과 과장이였다.[107] 구제전문학교 과정. 단, 당시 고등사범학교구제전문학교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108] 학위 수여 과정이 아니므로 도쿄제대 동문록에 등재되지 않았다.[109] 후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110] 거기다가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당해 시찰당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윤동주로써는 더욱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111] 영화 동주에서도 이런 상황이 묘사된다.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송몽규만 합격하자, 윤동주가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며 송몽규를 축하해주고 송몽규도 난처해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편지로 접한 윤동주의 아버지도 실망한다.[112] 출처: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p.49[113] 출처: 早稲田と慶応 名門私大の栄光と影 - 橘木 俊詔 (著)[114] 해당 기사에서 "(제국대학의)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오류다. 일본에서 교원자격증이란 것이 제정된 것은 전후인 1949년이기 때문이다. 또 이는 당시의 상황으로 대단한 특혜도 아니었던 것이, 전전 일본 교원은 대학 출신도 아닌 전문학교급인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에서 1950년대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경성제대 법문학부가 전신이었던 문리과대학이 경성사범학교가 전신인 사범대학을 괜히 없애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다. 급이 안 맞았기 때문. 물론 '원한다면' 제대 출신이 각급학교의 교원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대학의 교원이 되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은 제대 출신의 특혜였지만, 그 자격이 '자격증'이라는 형태로 있었던 적은 전전에도 전후에도 없으며, 문학부 출신으로 제한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115] 전전 일본에서 석사 학위자 이상이 구제 고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이는 구제 고등학교 교원이 대학의 교원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구제 고등학교는 신제 고등학교와는 달리 고등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에게만 열린 문호였던 것은 아니다. 참고로 1950년대에는 한국에도 이 관행이 남아 있어서, 대학에 자리를 나기 기다리면서 고등학교에 재직한 적이 있던 교수들이 있었다.[116] 1910년대 초 즈음이라 당시의 대학이라곤 제국대학뿐이었고, 그중에도 먼저 설립된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이다.[117] 당시 도쿄고등상업학교[118] 尾崎盛光. 전후 도쿄대학 문학부 사무장을 지냈다.[119] 웹사이트 출서 反東大の思想史 참고.[120]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121]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제국대학의 경우도 대학생들 중 가장 늦게까지 징병이 면제되긴 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 문학부-의학부 순서로 학병 징집되었다. 그러나 군수와 직결된 분야인 공학부는 끝까지 징병이 이뤄지지 않아서 공학부 인기가 의학부보다도 높았다고.[122] 전기/후기 과정으로 나누어져 전기가 대학예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고 후기가 본과 과정을 담당.[123] 문교부에 해당[124] 참고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는 1816년을 개교연도로 잡고 있는데, 이는 제정 러시아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의 왕립대학으로서의 창건 년도다. 폴란드가 완전히 러시아 제국 직할지가 되면서 제국대학으로 승격한 것.[125] 특히 도쿄대학오사카대학전기에 단 한 번만 뽑으며, 나머지 나고야대학, 규슈대학, 홋카이도대학, 도호쿠대학, 교토대학은 소수지만 후기 지원을 받는 경우가 있다. 2021년 국립대 합격자 발표일, 2022년 국립대 합격자 발표일, 2023년 국립대 합격자 발표일.[126] 후기는 3월 10일경. 다만, 구제국대학들은 대부분의 인원을 전기로 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