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커크패트릭

덤프버전 :


파일:Seal_of_an_Embassy_of_the_United_States_of_America.svg

[ 펼치기 · 접기 ]


초대
에드워드 스테니우스
제2대
워런 오스틴
제3대
헨리 캐벗 로지
제4대
제리 워즈워스


제5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제6대
아서 골드버그
제7대
조지 볼


제8대
제임스 러셀 위긴스
제9대
찰스 W. 요스트
제10대
조지 H. W. 부시
제11대
존 A. 스컬리


제11대
존 A. 스컬리
제12대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제13대
윌리엄 스크랜턴
제14대
앤드루 영



제15대
도널드 맥헨리
제16대
진 커크패트릭
제17대
버몬 A. 월터스
제18대
토머스 R. 피커링


제19대
에드워드 J. 퍼킨스
제20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21대
빌 리처드슨
제22대
리처드 홀브룩

제23대
존 네그로폰티
제24대
존 댄포스
제25대
존 볼턴
제26대
잘마이 카질라드


제27대
수전 라이스
제28대
서맨사 파워
제29대
니키 헤일리
제30대
켈리 크래프트

제31대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제16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진 드웨인 커크패트릭
Jeane Duane Kirkpatrick


파일:커크패트릭2.jpg

출생
1926년 11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덩컨
사망
2006년 12월 7일(향년 80세)
미국 메릴랜드주 베서스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배우자
에브론 모리스 커크패트릭(1955년 결혼~1995년 사망)
자녀
슬하 3명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정치학 / B.A.M.A.Ph.D.)
스티븐스 칼리지
종교
장로회
정당

(1945년~1948년)

(1948년~1985년)

(1985년~2006년)
서명
파일:커크패트릭서명.jpg

1. 개요
2. 생애
3. 주요 저서
4.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외교관이자 정치학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으며 국가안보회의, 해외정보자문위원회, 국방정책검토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네오콘의 대모로도 불리며 냉전 후반기에 미국의 목표에 부합한다면 독재정권과도 손을 잡는다는 커크패트릭 독트린(Kirkpatrick Doctrine)을 발표하여 레이건 정부의 간섭주의적 대외정책의 큰 축을 담당했다.

2. 생애[편집]


진 커크패트릭은 1926년 오클라호마 주의 던컨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일리노이 주 마운트 버논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미주리 주의 스티븐스 칼리지에서 준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의 버나드 칼리지(Bernard College)를 졸업했다. 1955년 학자이자 전 OSS 직원이었던 에브론 커크패트릭과 결혼했다. 1968년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대학교에서 1년간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1973년에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보수주의자가 되었으나 젊을 적에는 좌익 성향이었는데, 사회주의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미국 사회당의 청년 사회주의 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당원이 되어 당시 대선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의 대선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72년 민주당 대선후보 헨리 M. 잭슨과도 가깝게 지냈다.

1976년 지미 카터의 선거운동을 도왔으나 카터 행정부의 출범 이후 나약한 도덕주의 외교정책에 실망하여 거세게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했으며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독재정과 이중잣대(Dictatorships and Double Standards)' 등이었다. 이 작품은 특히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로널드 레이건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커크패트릭은 레이건의 대선 기간과 재임기간 동안 외교 정책 고문으로서 활동했고, 당선 후 4년간 유엔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그녀는 레이건 정부 초기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표명했으며 1982년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정권을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친영 정책을 주장했던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와 대립하여 전쟁에서 중립을 주장했으며 이는 미국이 전쟁 초반에 줄타기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502호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영국을 지지했다. 또한 적성국 이란에 비밀스럽게 무기를 수출한 대금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다 발각된 이란-콘트라 사건에도 관여했다.

유엔 주재 대사로서는 유엔을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를 세계를 위해 판단할 권리를 가진 기관'이라며 규범적 권한에 대해 어느 정도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임기를 수행했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때 소련 요격기 조종사의 오디오를 유엔 안보리에 제출하여 소련의 책임을 물어내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1985년 그녀는 공화당원이 되었으며 레이건 정부 이후에는 조지타운 대학교로 돌아와 미국기업연구소, 미국 자유 저널 등의 기고가로서 활동했다. 또한 다문화 등 진보적 의제에 반대하는 보수적 교육을 주장하는 전국학자협회(NAS)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88년 조지 H.W. 부시에 맞서 대통령 출마를 잠시 고려했으나 취소했고 대신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밥 돌 상원의원을 지원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공식적 선전포고를 할 것을 의회에 촉구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전쟁의 정당성을 크게 주장하진 않았으나 사담 후세인이 지속적으로 유엔에 대항해왔다며 전쟁의 책임을 이라크에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그녀는 당시 대통령 조지 W. 부시에 대해서는 '너무 간섭주의적'이라 묘사했다.

그녀는 심장병 진단을 받은 이후 몇 년 동안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2006년 12월 그녀의 집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이후 메릴랜드 주 록빌의 파크론 기념공원에 묻혔다.

3. 주요 저서[편집]


  • 평화 유지를 위한 전쟁(Making War to Keep Peace), 2007

  • 국제 규정: 변화하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규정(International Regulation: New Rules in a Changing World Order), 1988

  • 정당성과 강제력(Legitimacy and Force: State Papers and Current Perspectives), 1981–1985, 1987

  • 레이건 독트린과 미국 외교 정책(The Reagan Doctrine and U.S. Foreign Policy), 1985

  • 독재정과 이중잣대(Dictatorships and Double Standards: Rationalism and Reason in Politics), 1982

  • 대통령 지명 절차: 개선될 수 있는가(Presidential Nominating Process: Can It Be Improved), 1980

  • 정당해산: 정당개혁과 정당해산에 대한 반성(Dismantling the Parties: Reflections on Party Reform and Party Decomposition), 1978

  • 정치적 여성(Political Woman), 1974

4. 기타[편집]


  • 권위주의 정권과 전체주의 정권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사적 소유가 없는 국가 통제 명령 경제가 이뤄지는 국가[1]들을 전체주의 국가로 보았으며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

  • 사회주의에 한때 관심을 가졌었으나 이후 여러 사회주의자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이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확고히 지지했으나 유엔 주재 대사로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여러 결의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 미국의 간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 놈 촘스키는 그녀를 '레이건 정부의 수석 사디스트'라고 부르며 민주주의적 가치와 상충되는 잔인한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위선에 대해 비판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04 13:39:13에 나무위키 진 커크패트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