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야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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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G 트윈스 시절
1.1. 1998 ~ 2000 시즌
1.2. 2001 ~ 2004 시즌
1.3. 2005 ~ 2009 시즌
2.2. 2013 시즌
4. 연도별 주요 성적
5. 총평



1. LG 트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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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1.1. 1998 ~ 200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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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국가대표 포수출신으로, 고려대출신의 라이벌인 진갑용과 쌍벽을 이루는 재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LG트윈스의 주전포수이던 김동수의 팀내 위치를 위협했고, 김정민과의 백업포수 경쟁에서 승리. 그리고 앉은 자세에서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잡아내는 강견을 자랑하며 일찌감치 주력 포수로 자리잡았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조인성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신인시절 타격자세를 취한 저 사진은 불암콩콩코믹스에서 조인성이 20년전의 나라면서 자신도 미남이었다고 주장하는 신에 쓰였다.

데뷔 첫 홈런이 1998년 5월 5일 어린이날 두산과의 경기에서 나왔다. 3-0으로 지던 8회말 대타로 들어서 동점 쓰리런을 기록해 LG는 10회말 박종호의 끝내기 밀어내기 사구로 승리했다.

첫 해부터 백업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주전~준주전급에 아마추어 선수를 데려간 방콕 아시안 게임의 주전 포수로 발탁되어 병역 혜택까지 누렸다.

1.2. 2001 ~ 200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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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인성이 곧바로 주전이 된 것은 아니라서 2000년에는 김정민과, 2001시즌에는 장재중과 같이 플래툰으로 뛰었고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올라선 것은 2002시즌부터였다. 2002~2003시즌에는 투수 리드가 안좋았을지언정[1] 블로킹이나 도루저지에서 강점을 보였고,[2] 하위타선의 뇌관 역할을 잘 수행했다. 2003년에는 19개의 홈런으로 암울했던 팀 타선에서 커리어 첫 두 자릿수 홈런 및 팀내 최다 홈런 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순철이 부임하면서 슬슬 기대치에 비해서 낮은 타율과 투수 리드면에서 못미치는 성적으로 서서히 2000년대 LG 트윈스의 하락세의 주범으로 찍히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이전의 김성근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이 종종 조인성을 지목하면서 투수 리드 등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코멘트들이 기사화되면서 재능과 이름값만 믿고 노력은 안하며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선수라는 인식이 심어지게 되었다.

이후 2004년까지는 팀의 주전 포수로 있었지만 2003년에 비해 급락한 장타력으로 팀 성적 하락에 일조했으나 애초에 포수에게 과한 공격력을 바랄 필요가 없었음을 생각하면 그냥 무난한 포수.


1.3. 2005 ~ 2009 시즌[편집]


2005년 이후부터는 부상과 부진이 계속 겹치며 2007년을 제외하면 성적이 크게 하락했다.

2005년에는 부상으로 시즌의 1/3을 날려먹고 타격도 계속 부진했다. 심지어 타격은 김정민이 2005년 회광반조를 제대로 보여주며 맹활약한 덕에 아예 주전 경쟁에서 밀릴뻔 하기도 했다. 다만 이와중에 올스타전 포수로 뽑혔다. 그러나 2006년 김정민이 노쇠화로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조인성은 타격은 여전히 부진했지만 전보다 개선된 수비로 국가대표에도 차출되었다.[3] 이 시기 LG는 불펜에서 마무리로 시즌 중 전환한 우규민이 팀 내 sWAR 1위를 기록하는 등 엉망인 투수진이었지만, 그럼에도 조인성의 수비 자체는 전보단 낫더라는 평가를 받았다. 타격 역시 투고타저에서 세이버 스탯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한편 2005년 4월 8일 강상수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때려내 당시 엄청난 화제의 선수였던 박지성, 박찬호를 제치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를 기록한 적이 있다. 다만 9회 초였기에 끝내기는 아니다. 즉 타격 면에서 부진했다 한들 이런 임팩트 있는 결승타를 여러 차례 때려내며 올스타전에도 뽑혔다.

이후 2007년에는 FA로이드를 제대로 먹었는지 2010년 이전 타격 커리어하이인 0.282에 좋은 클러치 히터로 활약했다. 홈런이 2003년에 비해 크게 감소했지만 투고타저를 감안했을 때 타율도 3할을 넘긴 수준이나 다름없었고 중장거리 타자로 변모해 2루타 개수를 크게 늘렸다. 또한 득점권 타율 역시 좋아져 조인성이 부활하자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도 이뤄지나 싶었지만 우규민이 막바지 체력 저하로 13블론세이브라는 방화를 저지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은 실패했다. 이 해 박경완과 골든글러브 경쟁을 펼쳤으나 아쉽게 수상에 실패했다. 세이버로 파고들면 박경완의 수상도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이 시기 기자들이 지금도 세이버 따윈 안 보는 와중에 한국에 개념조차 없던 세이버매트릭스를 알았겠는가?[4] 홈런을 제외한 단순 클래식 스탯이나 소화한 수비 이닝에서 꽤 차이가 있었음에도 우승 프리미엄 + 기자들의 몰상식한 투표로 골든글러브를 놓치고 말았다.

어쨌든 좋은 활약을 인정받아 첫 FA에서 3+1년 총액 34억원(보장금액 28억원[5], 옵션 6억원[6])에 계약을 했다.

이후 2008년에는 FA 이후 부상과 부진이 다시 도지며 백업 포수 둘을 내치는 막장스런 프런트와 함께 김정민의 현역 복귀를 자초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나름 이 해에는 장타는 제법 쳐주며 이병규도 없고 박용택도 악재가 겹치며 2007년보다도 막장이었던 팀 타격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페타지니가 들어오고나서야 그나마 팀 타선이 살아난 편.

2009년은 더 심각해서 아예 김정민이 주전으로 낙점되며 아예 1군에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으나, 김정민의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으로 시즌아웃을 맞으면서 풀타임 주전을 결국에는 뛰게 되었다. 알다시피 이 해 심논개 사건을 포함해 조인성에게 안 좋은 일만 겹쳤고, 팀에서 내쳤으면 하는 선수 첫번째로 등극했지만 팀 포수가 절멸한 상황이라 내년에도 기회를 받게 되었다. 다만 나름 타고투저 시즌이라 그런지 몰라도 08-09년은 홈런 수가 타석 수 대비 꽤 많이 증가했다.

장타력도 2003년에 19홈런을 기록한 후로 하향곡선을 탔고, 그나마 꾸준히 2할 5푼정도는 쳐주던 타격도 FA 이후에는 어깨 부상을 달고 살면서 심각하게 쇠퇴하였다. 실종3할 타자증발타격왕, 실종된 홈런 타자[7] 등을 연상케 만든다. 2007년도의 2할 8푼은 어디로 실종되었는지. 그럼에도 딱히 조인성을 견제할 포수진이 나타나지 않으면서,[8][9] 결국 위에서 서술한대로 LG 팬들로부터 조잉여, 잉여킹 등으로 까이기 시작했으며 그 절정이 위에서 소개한 심논개 사건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도루저지에서만큼은 여전히 리그 상위권을 달렸고, 이는 이대형이 4년 연속 도루왕을 달성하는 데 나름 기여를 했다. 또 타석당 홈런 수가 2009년에 제일 많았으나, 타점 수를 보면 나오듯 잉여스런 공갈포...

2003년 이후 타격은 한참 떨어지긴 했으나, 수비에서는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긴 했고, 2006년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바 있다. 이후 2007년에 잠시 타격으로 좋은 성적을 냈으나, 2008년과 2009년에 폭망하면서 2010년의 기대치를 낮추는 원인이기도 했다. 대졸 선수라 나이도 30을 훌쩍 넘겼기에 유망주라 부르기도 뭐했고, 특히 포수가 노쇠화가 꽤 빨리 온다는 걸 감안하면 더 이상 좋은 성적을 내는 건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1.4. 201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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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1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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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40603102023_458502_520_875.jpg
SK 와이번스 시절.

2.1.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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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13 시즌[편집]


이만수 감독의 신임을 받아 박경완이 1군 엔트리에도 제외되고 변함없이 주전포수 자리를 보게 되었다. 일단 개막 2연전은 백업인 김정훈과 함께 포수진을 책임졌다.

3월 31일 경기에서 잇단 볼넷과 역전으로 이어지자 다음 타석에 들어선 정의윤을 파울이 되어서 공이 떨어졌을 때 밀치는 행동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후 정의윤이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냥 장난일 수도 있다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안타로 2013년 SK 와이번스의 첫 타점을 올렸다.

수비로는 여전히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루저지의 경우 상대팀의 도루시도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면모는 여전했다. 이는 단순히 도루저지율이 좋은 것 이상의 효과를 내주었다고 볼 수 있다. 포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탄탄한 블로킹 등의 좋은 기본기와 몸관리를 보여주었다.

다만 타격이 예년에 비해 부진했다. 4월 13일까지의 타율은 고작 0.111였으나 점점 타격감이 살아났고 4월 26일 경기에선 대타로 등장하여 좌중간을 완벽하게 가르는 결승 역전 2루타를 작렬하며 팀의 승리를 견인하였다.

그나마도 6월 6일 경기 종료 후 타율은 .216. 노쇠화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여전히 리그 전반적으로 포수가 기근이고 SK 내에서도 경쟁자인 정상호의 동반부진으로 인해 조인성이 계속해서 주전마스크를 썼다.

6월 27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3점 홈런을 날리면서 통산 700타점을 달성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까지 타격은 부진했고, 정상호가 돌아오자 시즌 끝까지 플래툰으로 기용되었다.


3.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082102959_0.jpg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14 시즌[편집]


6월 2일,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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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15 시즌[편집]


한화에서 최고참 선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3월 12일 시범경기에서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어 약 3개월간 재활로 인해 경기를 뛸수 없게 되었다. 이후 재활에 성공하여 5월부터 6월까지엔 정범모의 부진으로 재조명받았다.

7월 부터는 볼배합 문제에다 타격 부진으로 은퇴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으나, 8월 들어 허리 부상이 완쾌하면서 타격과 도루 저지면에서 월등히 향상된 모습을 보이고 에스밀 로저스의 2연속 완투(1완봉)때 배터리를 이루며 투수 리드 관련 부분에서도 나오는 말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주력과 파워가 떨어지기 시작하기도 하였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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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2016 시즌[편집]


타격, 포수리드, 팀케미스트리 등 모든 부분에서 까이고 있으며, WAR이 -2점대[11]로 향하고 있다.

물론 나이 마흔이 넘어 은퇴가 당연시되는 포수를 주전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 한화의 현실이다. [12]

과거 한화의 안방을 책임진 신경현의 노쇠화와 은퇴 이후로 예전부터 한화는 신인 드래프트 때마다 포수 자원을 선택했으나, 기량 부족과 잘못된 육성, 코치진의 무능 등으로 제대로 된 포수를 키워내지 못했다. 조인성만 해도 코칭스태프인 김재현, 신경현과 동갑으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데도 중용되는 이유 중 하나가 후임 포수들의 기량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 당장 작년만 해도 시즌 초 부상으로 빠지고 정범모가 경기를 지배하자 팬들 모두 조인성의 복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 모습과 잉여, 양아들이라 까이는 지금의 모습은 격세지감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차일목, 허도환이라는 대체재가 있음에도 '관록 있는 베테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적지 않은 나이와 피로로 지쳐 보이는 조인성을 계속 쓰는 코치진의 문제 또한 크다. 그러나 이를 고려해도 못해도 너무 못한 탓에 1,900경기 출장, 포수 최고령 홈런 기록 등의 기록이 묻혀버리고 말았다.[13] 주전 자리에서는 확실히 밀려날 듯. 로저스 전담 포수였는데 그 로저스마저 부상으로 퇴출당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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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7 시즌[편집]


상대 주자를 항상 한 베이스 더 보내주는 플레이를 하며 활약하고 있다. 주자가 2루로 도루하면 3루로 보내주고, 주자가 도루할 생각 없으면 공을 흘린 채 안 잡아서 2루로 걸어가게 해주는 등 첫 경기부터 구멍이 되고 있다.[14]

최재훈 영입 이전까지만 해도 차일목을 주전으로 두고 조인성은 백업으로 뛰었는데, 차일목이 선발포수로 나온 경기 대부분에서 타자 차일목 교체 > 대타(주로 강경학) > 대수비 조인성이라는 매우 정형화된 패턴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감독 김성근은 한층 더 까이는 중이다.

결국 6월 23일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 본인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던 듯 하다.[15][16] 아들에게 마운드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현역 연장 의사를 밝혔지만 불러 주는 팀은 없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직후 은퇴를 선언했고, 두산의 코치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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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LG
84
134
.269
36
8
0
2
15
10
0
3
.373
.283
1999
56
142
.254
36
6
0
5
22
23
0
7
.401
.285
2000
100
227
.225
51
5
1
5
33
19
2
20
.322
.282
2001
82
186
.253
47
10
0
5
26
19
1
16
.387
.309
2002
124
362
.268
97
21
2
9
48
36
3
19
.412
.301
2003
132
428
.257
110
20
2
19
58
43
0
23
.446
.292
2004
129
386
.254
98
16
0
8
49
40
2
39
.358
.319
2005
85
201
.224
45
11
0
6
34
22
0
18
.368
.285
2006
112
326
.245
80
18
0
10
38
37
0
28
.393
.303
2007
124
419
.282
118
24
0
13
73
44
1
34
.432
.332
2008
102
330
.227
75
18
1
10
49
25
0
18
.379
.264
2009
95
266
.214
57
10
1
14
36
35
0
29
.417
.290
2010
133[17]
457
.317
145
(5위)
24
1
28
(3위)
107
(3위)
69
2
44
.558
(3위)
.374
2011
117
390
.267
104
14
2
15
59
46
2
47
.428
.345
연도
소속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2
SK
104
284
.271
77
13
0
9
40
32
0
18
.412
.313
2013
88
207
.213
44
10
0
7
29
16
0
9
.362
.244
연도
소속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4
SK / 한화
75
164
.226
37
7
0
7
34
16
0
16
.396
.290
2015
한화
106
276
.232
64
11
0
11
44
33
0
22
.391
.288
2016
76
137
.168
23
2
0
3
7
10
0
3
.248
.186
2017
16
29
.138
4
0
0
0
0
1
0
0
.138
.138
KBO 통산
(20시즌)
1948
5351
.252
1348
248
10
186
801
575
13
413
.406
.303

보유 기록
5삼진
한경기 최다 삼진(최정, 박석민과 타이)



5. 총평[편집]


신인 시절 LG의 주전 포수였던 김동수가 FA로 풀렸을 때 그를 구단이 붙잡지 않았던 주 원인이었고 이후 LG의 주전 마스크를 썼으나 기대와 달리 성장세는 더딘 편이었다. 2002년 이후 김성근의 집중적인 조련을 받으며 점차 공수 양면에서 기량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2007년 무렵부터 타격도 성장세를 보이면서 본격적인 완성형 포수로 성장했다. 이후 2년간 다시 부침을 겪긴 했지만 2010년부터 부상에서 완전히 탈출하자 날아오르며 최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전성기의 앉아쏴로 대변되는 5할이 넘는 도루 저지와 탄탄한 블로킹 실력은 그가 매번 국대 포수로 선발될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SK 이적 초기에는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타격실력이 만개한 시점이 이미 30대 이후였고 이후 점차 타격이 하락하면서 노쇠화를 보였다.

한화 이적 초기에는 팀의 포수난을 어느 정도 해결해준 선수 였다. 그러나 서술되었다시피 괜찮은 듯 하면서 안좋은 모습이 보이더니, 실책이 늘어나고 부상에 시달렸고, 끝내 방출되었다. 성실함과 현역에 대한 의지에도 끝끝내 나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비록 LG의 암흑기에 주전이었던 탓에 투수 리드로 과도한 비난을 받았으나 수비에선 한국 프로야구에서 손꼽을 역대급 포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타격에서도 거의 매년 두 자리 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장타력을 보였고 만년에 짧고 굵은 커리어하이 시즌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허무하게 내친 LG는 이후 유강남이 주전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기나긴 포수난을 겪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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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에는 팀방어율 3.93으로 1위 3.92의 삼성과 거의 동일한 방어율의 3위, 2003년에는 팀방어율이 3.98로 2위였다. 국가대표에서도 증명하듯 조인성의 투수리드가 형편없어서 LG의 투수력이 나쁜게 아니라는 증거다.[2] 도루저지율이 2002년에 5할, 2003년에는 김상훈과 같이 미친듯이 주자학살을 벌였고, 조인성의 저지율은 0.541. 김상훈의 저지율은 무려 0.560으로 역대 신기록이었다. 그 당시 도루 1, 2위가 이종범, 박용택이었고 이 둘의 소속팀은 각각 기아와 LG, 즉 김상훈, 조인성이랑 같이 뛰었기 때문에 주자 견제를 거의 안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3] 박찬호가 편안하다며 전담 포수로 계속 기용했다.[4] 미국에서도 세이버매트릭스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5] 계약금 12억, 연봉 4억. 3+1이라 원칙적으로 마지막해 4억은 보장이 아니고 24억원까지만 보장이지만, 그때 방출하지 않는 한 보장되는 계약이긴 하므로 실제로는 마지막해에 방출하지 않고 계속 계약을 했었기에 28억원을 보장받았다.[6] 마이너스 옵션은 없고 모두 플러스 옵션이라고 구단이 밝혔고 1년당 2억씩이라고 밝혔지만, 상세내용은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7] 홈런 수가 크게 준 대신 정교함이 상승되긴 하였다. 그리고 2014년 이후 파워까지 되돌아오면서 사기캐가 됐다.[8] 조인성이 주전으로 뛰던 시기에 백업이라고는 김정민이나 최승환밖에 없었다. 김정민은 나름 괜찮았지만 최승환은 2007시즌 내내 백업포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며 조인성이 혹사당하는 원인을 제공했다.[9] 그나마 2000년대 후반 들어서 김태군이 백업으로 자리잡고 조윤준, 유강남이 등장하긴 했으나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팀을 떠난 뒤였다. 이 중 유강남은 2015시즌에 1군 출장을 자주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16시즌에 LG의 최고 주전포수로 등극하였다.[10] 선술된 종아리 근육 부상이 치명적으로 작용해 하락세를 타게 된 듯 하다. 허나 전력 질주가 거의 불가능했음에도 후반기 혼신의 주루를 몇 차례 보여줘 한화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11] WAR -2는 전체 선수 꼴찌를 노려볼법한 성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5년 WAR 꼴찌는 -2.19의 박종윤 [12] 조인성과 비슷한 나이에 은퇴한 박경완, 진갑용의 사례를 대입하면 쉽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굉장히 육성하기 힘들고, 공수를 겸비한 명포수로 남는 것 또한 힘들다. SK, 삼성 팬들의 눈에 후임인 정상호, 이재원, 이지영, 이흥련 등이 전임자만 못해 보였다. 정상호 항목에도 나오지만,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말의 피해자라고 나왔을까.[13] 비슷한 예로는 한화 이글스 올드 팬들의 주적이던 권용관이 있는데 15, 16 시즌 2할 초중반/2할 5푼의 타율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최고령 3루타의 주인공이 되었음에도 대수비 요원이 강경학, 하주석, 최윤석 등 유망주들과 실책 수가 비슷해 수비면에서 팀에 큰 이득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감독의 베테랑 사랑 탓에 주야장천 기용되어 말년에 좋은 소리 못 듣고 웨이버 공시로 쓸쓸히 은퇴.[14] 개막전 선발 비야누에바는 6이닝 2실점에도 패전투수가 되었는데, 포수의 송구 실책 후 3루 진루-희생플라이로 인한 실점이라 모두 비자책점으로 처리되었다.[15] 정작 웃기는 건 이 당시 단장이던 박종훈이 방출 통보일날 조인성에게 전화를 해서 왜 오늘 2군 훈련장에서 훈련 안 받고 가느냐, 운동선수가 그만두는 마지막날까지 운동을 하고 끝내야 선수 아니냐며 수모를 줬다고 한다. 근데 이 사건을 유튜브에서 직접 말한 사람은 심수창. 사실 심수창 역시 박종훈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수모를 꽤 당해봤기에 원한이 많다보니 자기가 박종훈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조인성 얘기도 한 것이라고 한다.[16] 조인성의 은퇴 이후 남아있던 심수창 역시 박종훈의 우롱으로 괴로움이 많았는데, 당시 2군에서 1군으로 나오지 못하던 심수창이 선수생활 연장의 소망을 단장에게 면담으로 말하며 트레이드 의사를 에둘러 돌려 말하자, 단장 박종훈이 "그럼 니가 스스로 다른 팀 단장과 1군 감독들한테 직접 연락하고 요청해서 트레이드를 해 봐라. 그럼 생각해 보지."라면서 수모를 주었다고 한다. 빡친 심수창은 진짜 자기가 아는 5명이나 되는 감독들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데 막상 심수창이 며칠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열심히 노력한 성과로 진짜 제대로 된 협상이 이뤄질만한 상황이 생기기 시작하자, 소문을 들은 박종훈이 그 구단 단장들에게 급히 전화해서 "심수창 걔 피곤한 애니까 심수창과 협상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트레이드 해줄 마음도 없으면서 상처를 주는 우롱 겸 조롱을 박종훈에게 당한 셈이다. 아직도 그 단장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고 하며, 심수창이 한화에서 겪은 상처는 다 다른 사람 말고 박종훈에게 당한 일들 뿐이라고 한다.[17] 2010시즌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