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의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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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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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출생
1411년 9월 21일
사망
1460년 12월 30일 (49세)
요크셔 샌들 마그나
배우자
세실리 네빌[1]
자녀
앤, 에드워드 4세, 에드먼드, 엘리자베스, 마거릿, 조지, 리처드 3세
아버지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2]
어머니
앤 모티머[3]
형제
이사벨, 헨리
종교
가톨릭
1. 개요
2. 혈통과 어린 시절
3. 백년전쟁 시기
4. 헨리 6세 측근들과의 갈등
5. 앙주의 마거릿과의 갈등
7. 패배와 죽음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왕족.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가인 요크 가문의 수장으로, 동시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영지 및 부를 보유한 대귀족이기도 했다. 랭커스터 왕조헨리 6세에게 맞서 장미 전쟁을 일으켰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 패하고 사망하였다. 에드워드 4세, 조지 플랜태저넷, 리처드 3세의 아버지이며 헨리 8세의 증조부이다. 헨리 8세 이후의 모든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의 왕은 리처드의 후손이다.


2. 혈통과 어린 시절[편집]


리처드는 1411년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앤 모티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앤 모티머는 리처드를 낳은 다음 날 산고로 사망했다.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의 (살아남은) 4남인 제1대 요크 공작 에드먼드의 아들이었다. 앤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증손녀였으니 부모 양쪽에서 에드워드 3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다.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1415년 여름 헨리 5세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백작의 형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는 오히려 1415년 가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 휘하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헨리 5세는 4살밖에 안 된 리처드에게 관대하게 영지와 작위를 인정해 주었고, 리처드는 아버지의 작위에 더해 삼촌 에드워드의 요크 공작위까지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는 왕가로부터 직접 보호받으며 성장했고, 곧 왕가에 적극적으로 로비를 펼친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종자가 되었다. 이 때부터 나중에 처가가 되는 네빌 가문과 연을 맺었다.

앤의 남동생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앤의 아들인 리처드는 라이오넬의 후계자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웨일스 변경을 중심으로 한 모티머 가문의 막대한 영지 또한 리처드의 소유가 되었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갓난아이 헨리 6세가 즉위했다. 리처드는 헨리 6세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는 1426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32년 완전한 성인으로서 영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3. 백년전쟁 시기[편집]


갓 성인이 된 요크 공작 리처드는 백년전쟁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헨리 5세의 정복 성과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고, 프랑스와 협상하여 영토 일부를 양보할 것인지, 아니면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로 섭정 정부 요인들의 의견이 갈렸다. 리처드는 헨리 5세의 동생 베드포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그는 본국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사재를 털어야 했으며, 프랑스군에게 전선이 서서히 밀려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 6세의 측근인 서머셋 공작 보퍼트 가문과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4. 헨리 6세 측근들과의 갈등[편집]


대귀족이자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까지 했던 요크 공작 리처드의 존재는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지체 높은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책을 맡지 못했고, 대신 아일랜드 총독(Lieutenant of Ireland)직을 맡았다. 리처드가 에드먼드 모티머로부터 물려받은 작위 중 하나가 얼스터 백작이었기에 이는 어울리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총독 임기 10년 동안 리처드에게 다른 중책을 맡기지 않을 핑계가 되기도 했다.

1450년대로 들어서자 잉글랜드는 내정에서의 실책과 북프랑스에서의 패배가 겹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에 빠졌다. 리처드는 무능력한 정부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폭력적인 수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의회에서든 물리적으로든 서머셋 공작은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리처드는 의회나 런던 민중들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요 귀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리처드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밀려나는 듯 했던 리처드의 세력은 1453년 헨리 6세가 첫 번째 광증을 나타내면서 전환을 맞았다. 왕비 앙주의 마거릿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국왕의 부재 동안 호국경으로 임명받는 데 성공했고 아내의 오빠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재상으로 앉히는 등 정부를 장악했다. 비슷한 시기 리처드의 처가 네빌 가문은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과 잉글랜드 북부의 주도권을 두고 거의 전쟁에 가까운 충돌을 시작했다. 헨리 6세가 퍼시 가문의 편으로 인식되면서 원래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왕조 양쪽에 연줄이 있었던 네빌 가문이 결정적으로 요크 가문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리처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귀족 지지 세력을 얻었다.

1455년 1월 헨리 6세는 2년에 가까운 발작에서 일어나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을 해임하고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켰다. 이에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군대를 소집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헨리 6세와 서머셋 공작은 황급히 대항할 군대를 긁어모았지만 이미 무력 충돌을 철저히 대비한 상태였던 요크파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455년 제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는 사실 전투라기에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지만, 서머셋 공작과 노섬벌랜드 백작 등 랭커스터파의 주요 인물들은 요크파에게 살해당했다.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킨 헨리 6세 본인의 신병도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 떨어졌다. 리처드는 이후 헨리 6세가 두 번째로 회복한 1456년 2월까지 정국을 주도했다.


5. 앙주의 마거릿과의 갈등[편집]


서머셋 공작의 사망 이후 헨리 6세 친위세력의 중심이 된 것은 왕비 앙주의 마거릿이었다. 마거릿은 1453년 헨리 6세의 적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낳았는데, 요크 공작은 의회를 압박하여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상태여서 갈등은 불가피했다. 결혼 후 7년이나 지났고 왕이 광증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첫 아들을 얻은 것으로 인해 사생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헨리 6세의 두 번째 회복 이후 마거릿과 랭커스터파는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했지만 요크파는 이미 귀족들의 지지를 상당한 수준으로 획득하여 더 이상 이들을 무시하고 정국을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헨리 6세는 1458년 3월 25일 '러브데이' 행사로 귀족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열고 사면하는 등 랭커스터파와 요크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마거릿과 요크 공작은 파트너로서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의례적인 행사일 뿐이었고, 마거릿은 헨리 6세 주변을 더욱 강하게 장악하기 시작했고 요크 공작은 이에 반발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했다.


6. 장미 전쟁 발발[편집]


1459년 6월 마거릿은 대의회를 소집했지만 리처드 등 요크파 인물들은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곧 이들은 반역자로 선포되었다. 요크파 영지와 군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에 많은 경우 각개격파되었다. 10월 요크파는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패했고 요크 공작 리처드는 아일랜드로, 솔즈베리 백작과 그 아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그리고 요크 공작의 장남 마치의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령 칼레로 피신했다.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 총독직을 오래 역임하여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칼레의 정예병 또한 주둔군 사령관 워릭 백작을 지지했고, 영국 해협 또한 요크파 해군이 장악했다. 워릭 백작은 심지어 칼레에서 아일랜드까지 배로 이동해 요크 공작을 만나러 갔다오기까지 했다. 칼레와 가까운 런던 및 잉글랜드 남부에서도 요크파 지지 여론이 커졌다.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마치의 에드워드는 1860년 6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샌드위치에 상륙해 7월에는 런던에 무혈입성하고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파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다. 요크파는 잉글랜드 중앙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요크 공작을 불러왔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호국경이나 헨리 6세의 후계자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처럼 행동했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깃발을 내걸고 느긋하게 10월에 런던에 입성한 요크 공작은 왕좌에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했지만,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잉글랜드 남부에서 요크파가 내세운 명분은 무능하고 부패한 헨리 6세의 조언자들을 갈아치우고 정부를 개혁한다는 것이었는데, 요크 공작 스스로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반역자라는 랭커스터파의 공격을 스스로가 정당화시켜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솔즈베리, 워릭 등이 귀족들과 물밑으로 협상하여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대신 헨리 6세의 후계자로 다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요크파의 인망 저하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7. 패배와 죽음[편집]


마거릿 왕비는 북부 잉글랜드에서 퍼시 가문, 서머셋 가문 등 대규모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했고, 스코틀랜드제임스 3세의 지원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랭커스터파 주요 귀족들은 그 가족들이 세인트 알반스에서 요크파에게 죽은 경우가 많았기에 요크파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잉글랜드 북부의 주요 도시인 요크 또한 헨리 6세 충성파가 장악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자신의 차남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12월 그들은 요크셔의 요크파 주요 거점인 샌달 성에 도착했지만 전황은 불리했다. 12월 30일 요크 공작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대부분의 전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오는 판단을 했다. 이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파는 대패했고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 러틀랜드 백작은 모두 사망했다. 요크 공작의 최후는 전사였다는 설과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설이 갈린다. 세 사람의 목은 요크 성문 위에 효수되었다.

웨일스에 있던 마치의 에드워드는 아버지 요크 공작의 왕위 주장을 이어받았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해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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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3세의 3남이자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인 곤트의 존의 외손녀다. 존이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3남 1녀 중, 고명딸인 조앤 보퍼트가 두번째 남편 1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이다. 남편인 요크 공작 리처드와는 육촌 관계.[2]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차남이다.[3]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이자 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 4th Earl of March)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