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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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기간
1455년 ~ 1487년
시기
중세 시대
장소
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전 지역
원인
헨리 6세의 총신인 서머싯 공작과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요크 가문의 갈등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요크의 리처드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
헨리 6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앙주의 마거릿
헨리 튜더
결과
헨리 튜더랭커스터 가문의 승리
영향
튜더 왕조 창건, 요먼, 젠트리 계층의 성장
100여 년의 절대왕정 시작
1. 개요
2. 이름의 유래
3. 배경
3.1. 랭커스터 왕조의 성립
3.2. 요크 가문의 부상
4. 전개
4.1. 요크 공작의 첫 번째 거병
4.2. 요크 공작 리처드의 죽음
4.3.1. 축출과 복위
5. 결과와 영향
6. 동음이의어



1. 개요[편집]


파일:장미전쟁(왕가 계승도)2.png
장미전쟁 시기 왕가의 계보. 왕위에 오른 인물들은 굵은 네모로 강조표시를 했다.

장미전쟁은 랭커스터 가문과 튜더 가문 대 요크 가문이 15세기인 1455년에서 1485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벌인 내전으로, 랭커스터 가문과 튜더 가문이 승리하여 헨리 7세가 즉위했다.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을 놓고 요크 가문랭커스터 가문사이에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진 내전. 전쟁 기간은 30여 년이지만 이 기간 내내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니다. 장미 전쟁의 중요한 시기는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455년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든 때부터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할 때까지가 첫 번째, 1469년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1471년 다시 복위되기까지가 두 번째, 그리고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후 1483년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 이후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하기까지가 마지막 세 번째에 해당된다. 이 분쟁의 시기 중간에는 에드워드 4세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이 장미 전쟁은 사건의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시 잉글랜드 왕실의 계보를 살펴 보아야 한다. 장미 전쟁의 주역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람들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랭커스터 공작(곤트의 존)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이고 4남 요크 공작(랭글리의 에드먼드)이 요크 가문의 시조이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2세가 왕위를 빼앗기고 후사가 없이 사망한 후 랭커스터 가문에서 헨리 4세 - 헨리 5세 - 헨리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요크 가문에서 에드워드 4세 - 에드워드 5세 - 리처드 3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며 마지막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에 속한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시작된다.

장미 전쟁은 헨리 6세의 왕위를 에드워드 4세가 찬탈하면서 시작되고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왕위에 오르면서 끝난다. 좀더 직관적으로 말하면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빼앗기면서 장미 전쟁이 시작되고 랭커스터 방계 가문이 왕위를 되찾으면서 장미 전쟁이 끝난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장미 전쟁이 중세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엘리전 양상을 띠었다는 점이다. 중세 시절 전쟁의 승자는 보통 패한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몸값을 받아내거나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낸 후 풀어주었는데[1], 이 장미전쟁은 영지나 이권 다툼이 아니라 왕위를 놓고 다투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잠재적인 견제세력을 허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패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중요 인물들은 예외없이 살해당했다. 이는 튜더 왕조가 절대왕정이 되는 원인이 된다.


2. 이름의 유래[편집]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VS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이 내전이 장미 전쟁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가문 모두 상징이 장미, 즉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백장미였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용어가 아니라 《아이반호》의 저자인 19세기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만들어낸 것으로 1829년에 그가 집필한 글에 처음 나온다. 스콧이 이런 용어를 쓴 모티브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서 나왔다고 한다.[2]

즉, 요크 가문의 문장은 백장미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색[3] 장미이긴 한데 둘 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것.[4] 흔히 생각하는 겹꽃 장미는 그 당시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겹꽃 장미는 훗날 18세기에 중국에서 월계화 품종과 저 위의 분홍색 장미를 교배시키면서 나온 것이다.[5] 참고로 저 문장은 현재도 요크셔 주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히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는 영주들의 찬탈극같지만 사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전대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이다.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14세기 중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이 플랜태저넷 왕가로부터 갈라져 나와 개창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갈라져 나온 지 100년도 안 되는 셈이니 왕위를 두고 다툰 사람들의 촌수는 대부분 8촌 이내였다고 한다.그냥 서양판 팔왕의 난이다. 근본적으로 왕가의 집안 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6] 그래서 튜더 왕가 이전엔 모두 한 왕조로 친다.


3. 배경[편집]



3.1. 랭커스터 왕조의 성립[편집]


백년전쟁(1337~1453) 중인 1370년쯤에 잉글랜드를 잘 다스리던 군주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을 운영하기가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 중 3남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겼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가 따로 있었다. 후계자는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차기 후력자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였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지휘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의 섭정 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흑태자가 먼저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곤트의 존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평민들에게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와트 타일러의 난). 어찌어찌해서 농민 봉기는 진압했지만, 잉글랜드에서 '곤트의 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7] 그리고 존은 얼마 뒤에 아내의 친정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가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그곳에서 왕을 해보겠다고 잉글랜드를 비웠다.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했던 것인지 그의 첫 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곤트의 존의 섭정 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였고, 결국 내전이 작게나마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8]가 득세한 의회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에서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이 둘을 중재시키며 내전을 종결시켰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존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용히 충성파들의 세력을 단결시킨 리처드 2세가 청원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에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냈다. 심지어 리처드 2세가 자신의 막내 남동생인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살해하는 것도 지켜봤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이로써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찾았으나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곤트의 존이 부재했을 때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과 의심이 많았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실의 영토 등지에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 급하게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1399).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게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9]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이었던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다.[10]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였다. 필리파는 라이오넬이 18세 때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나이 차이다. 가장 큰 이유는 리처드 2세가 흑태자가 38세 때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리처드 2세가 후손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11]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흑태자 에드워드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없이 죽으면, 흑태자 에드워드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곤트의 존이 후계이며, 곤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렸다.[12][13]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고,[14] 사람들의 반응은 "왕이 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정도였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했다. 다행히도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이자 보호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왕위 즉위에 찬성했고, 이 덕분에 잡음은 많았을 망정 직접적인 반대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한 후 헨리 4세는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1413).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캐바른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헨리 5세의 자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 만인 1422년 8월에 전염병으로 급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15] 이후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 등이 등장한 프랑스군에 밀리기 시작해 결국 1453년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마지막 보루였던 보르도가 함락당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다.[16]

헨리 6세는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외할아버지인 샤를 6세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다. 폭력적이지는 않으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섭정들이나 가족 등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보호자의 의견에 그대로 따랐다. 이는 미성년 시기에는 겸허하고 공정하게 신하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평화적인 성군(rex pacificus)의 자질로 포장될 수 있었으나 섭정 기간이 끝나고 1440년대 말에 이르자 그가 나라를 통치하기는커녕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은 이제 왕국 전체에 숨길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점점 야심을 드러내게 된 인물이 바로 장미 전쟁을 일으킨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였다.


3.2. 요크 가문의 부상[편집]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는 헨리 6세의 친척으로,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4남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였다.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버지인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헨리 5세에게 반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제3대 요크 공작의 백부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헨리 5세는 자신의 능력과 건강에 자신이 있었으며, 후계자 리처드가 고작 4세였기에 반역자의 아들인 리처드에게 요크 공작령을 물려주는 선심을 썼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요절한 결과 강력한 왕위 경쟁자에게 힘을 실어준 꼴이 되어버렸다. 리처드는 이후 모계로 모티머 가문의 막대한 웨일스 변경 영지까지 물려받아 왕국 최대의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서머싯 공작 등 헨리 6세의 조언자들은 리처드를 경계했고, 중앙정부의 요직이 아닌 아일랜드 총독직 득 한직으로 그를 몰아냈다. 당연하게도 요크 공작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서머싯 등이 왕을 등에 업고 부패하고 무능하다며 공격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백년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전쟁의 패배 원인을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돌렸다. 1453년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통치 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는 요크 공작이 호국경을 맡아 헨리 6세 및 왕비의 측근들(대표적으로 서머싯 공작 보포트 가문)을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가 정신을 차리고 요크 공작 리처드의 결정을 모두 되돌리며 요크 공작을 호국경에서 파면하고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켰다.

에드워드 2세나 리처드 2세의 선례처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의 '선한 법'을 준수하겠다는 대관식 맹세를 어기고 자의로 권력을 행사하는 폭군은 왕국 공동체의 보호와 그밖에 여러 명분을 붙여서 폐위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측근들의 말만 듣지도 않았고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나이들거나 병들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왕이 폐위당한 전례는 없는데다 헨리는 그저 비정상적으로 우유부단할 뿐 멀쩡하게 걷고 말할 수 있으며 외할아버지처럼 이유 없이 사람을 찔러 죽이지도 않는 등 심신상실 상태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건강할 때는 섭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잉글랜드 중앙 정부를 하나의 파벌이 장악하거나 적어도 파벌 간의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현명한 비공식 섭정들이 그나마 말은 잘 듣는 착한 왕을 조종해서 모든 문제가 당장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유력자들은 폭군도 아니고 단지 멍청해 보인다는 의심만으로 왕을 폐위시킨다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지주권을 보증하는 보통법 제도를 보증하는 왕권의 신성성을 돌이킬 수 없이 훼손할지도 모를 전례 없는 정치적 실험에 합의하기보다는 왕을 보좌하겠다고 나선 정치 파벌들의 동향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히려 독이었다. 요크 공작이든 서머싯 공작이든 마가렛 왕비든 모두 포기나 타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요크 공작이 왕세자 에드워드를 사생아로 몰며 왕의 후계자 자리를 계속 노리는 이상 타협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국왕이 한쪽 파벌에만 힘을 실어주지도, 파벌들을 중재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요크 가문과 헨리 6세의 중신 및 왕비 간에 갈등의 골이 한없이 깊어지자 요크 가문은 '우리도 한번 뒤집어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우리도 못 할 게 뭐냐"는 생각에 따라 요크의 리처드는 자신이 단순히 헨리 6세의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플랜태저넷 왕조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주장은 그의 아들 마치의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다.

이 논리에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되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 또는 그 장남이 왕위 계승자였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제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 따라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4세와 그의 후손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이 앤 모티머의 아들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17]


4. 전개[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39c51a7be81c0cb54682690c50d8e0f.jpg

4.1. 요크 공작의 첫 번째 거병[편집]


1455년 요크 공작은 요크파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남하했다. 이어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는 전투라기에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지만, 요크 공작 리처드는 서머싯 공작 등 랭커스터파 귀족 여러 명을 죽이고 국왕 헨리 6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직후 헨리 6세는 두 번째 광증에 시달리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요크 공작은 다시 호국경에 취임하며, 처가인 네빌 가문과 함께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1456년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회복했고, 요크 공작을 다시 해임하는 한편, 요크 공작 세력과 마가렛 왕비가 이끄는 요크 반대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요크 공작은 회복한 왕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았고, 불안정한 평화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요크 공작이 마가렛 왕비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려고 하는 이상 화해는 불가능했다.


4.2. 요크 공작 리처드의 죽음[편집]


1459년 본격적인 무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칼레의 워릭 백작이 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카스티야 및 한자 동맹의 함대를 공격하자 왕은 워릭과 솔즈버리, 그리고 요크 공작을 조정으로 소환하였다. 하지만 요크파는 체포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고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마거릿 왕비는 이미 요크파에 대비하여 랭커스터파 군대를 소집하고 있었다.

러드포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배하면서 요크 공작과 네빌 가문 등은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했다. 하지만 1460년에 요크파가 장악한 칼레로부터 네빌 부자[18]와 마치의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4세)가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수도 런던을 장악하고, 노스햄튼 전투에서 랭커스터파에 승리하여 다시 헨리 6세를 생포한 후, 정권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있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를 불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크 공작은 악수를 두는데,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아무리 헨리 6세가 결점이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가렛 왕비는 북부 웨일스의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는 등 요크파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요크 공작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1460년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대패했고,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둘째아들 에드먼드,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까지 전사했다.[19] 마가렛 왕비는 숙적인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잘린 목을 요크 성문 위에 내걸고, '요크 공작은 요크 성이나 다스려야 한다'며 조롱했다고 한다.


4.3. 에드워드 4세의 즉위[편집]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왕위 요구는 그의 맏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고, 에드워드는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파 웨일스 병력을 상대로 승리한 이후 런던에 입성하여 '에드워드 4세'를 자칭했다. 런던으로부터 북진한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요크파 군대는 랭커스터파의 주력을 타우튼 전투에서 격파하고, 왕위를 굳혔다. 단,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이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4.3.1. 축출과 복위[편집]


에드워드 4세는 구 랭커스터파 정적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에 치세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인 워릭 백작 몰래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우드빌 집안의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가문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빌 가문과의 관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끌어들여 에드워드 4세를 납치했지만 국왕이 없는 상태의 국정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에드워드 4세를 풀어주었다. 에드워드 4세는 관대하게 두 사람을 용서했지만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사주했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반역자로 선포했고,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부르고뉴 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고자 했고, 자신의 궁정에 있던 랭커스터파의 영수 마가렛 왕비가 구적인 워릭 백작과 화해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이 사주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1470년 가을, 워릭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런던을 점령하여,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려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의 리처드 3세)와 함께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처음에는 에드워드 4세를 지원하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했다. 에드워드 4세의 상륙 이후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하는 등 요크 지지파가 에드워드에게 집결하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을 탈환하고 다시 헨리 6세를 확보한 이후 바넷 전투에서 네빌 형제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전투 승리 직후 헨리 6세는 런던탑에서 의문사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


4.4. 리처드 3세찬탈[편집]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의 형제인 라이온킹스카 필나는 꼽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온갖 악당짓, 수양대군 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인 《리처드 3세》의 이야기이다. 희곡도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다.[20]

에드워드 4세는 숱한 위기 때마다 자신을 충실히 보좌해준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신뢰했고, 죽기 직전 리처드를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어린 에드워드 5세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는 그의 외삼촌이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 앤서니 우드빌, 엘리자베스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호국경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윽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 결혼이 아니므로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한 두 사람의 자식들은 사생아이며, 자신이야말로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이자 정당한 왕이라고 선포했다. 그렇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리처드 3세로 즉위했고,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 3세의 찬탈은 기존 요크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리처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의 생존자들 및 우드빌 가문 등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후계자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21]와 연합하여 리처드 3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처드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조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는데 리처드 3세의 지지층 이탈만 가속시킬 뿐이었고, 헨리 튜더는 자신이 즉위하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을 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4.5. 튜더 왕조 창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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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 웨일스에 상륙한 헨리 튜더의 반란군은 보스워스에서 리처드 3세의 진압군과 결전을 펼쳤다. 전투 도중 후방에 물러나 있던 헨리 튜더를 발견한 리처드 3세는 그를 죽이고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돌진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반란군에 포위당한 리처드 3세는 낙마한 끝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왕관을 헨리 튜더가 쓴 순간을 잉글랜드에서의 중세의 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헨리 7세로서 튜더 왕조를 세운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5. 결과와 영향[편집]


"나는 7년 전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새끼 고양이가 지배하던 궁궐은 힘든 곳이었다'란 말을 기억한다. 성경도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왕인 나라에 슬픔이 있을지니!' 그러니 그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한 명의 폭군을 제거한 결과가 가져오는 해악과 슬픔보다는 작은 손실이 더 나으니까. 궁궐의 고양이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시궁쥐들은 사람들의 옷가지를 씹고 우리 생쥐들은 맥아를 먹을 것이다."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죽어나가면서 '튜더 절대왕정'으로의 길이 열렸다는 믿음은 중세 후기 정치 사회 연구자인 K.B.맥팔레인(1903-1966)에 의해 오래 전에 폐기되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귀족들의 사망률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으로 대가 끊긴 귀족이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1436년 소득세 평가에 따르면 잉글랜드 전역의 젠트리 7133가구가 연수입 150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귀족 51가구가 연수입 45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이 시기 평신도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의 약 70%는 젠트리 소유였다. 이때의 100년 전인 14세기초부터 적어도 재력이나 동원 가능한 인력의 총합 부분에서 젠트리와 부르주아들은 이미 귀족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지주들의 권력은 토지 소유에 기반했고, 따라서 토지 소유권의 안전을 보장하는 왕의 법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즉, 지주들은 지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이 필요했다. 현대의 공장 화재와 달리 전쟁으로 황폐화된 중세 경작지의 손실은 보험금으로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이라는 더 나은 대안이 있는 한 스스로의 무력으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주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모든 지주들은 질서가 무너져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헨리 6세 같은 심신상실자가 왕좌에 앉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계약은 국왕법정의 성장, 분할상속, 화폐경제와 토지시장의 발전 등으로 13세기 전후에 유명무실해졌고, 이 시기 귀족들의 권력은 부분적으로는 화폐를 매개로 한 보다 비공식적인 주종관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방 유력자이자 토지거래의 신뢰를 보증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 등 필수적이지만 중앙에서 일일이 통제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지방행정의 민간 보조자로서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귀족층의 권력 기반은 보기보다 확고하지 않았고, 꼭 장미전쟁과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귀족 권력의 쇠퇴와 젠트리의 부상이라는 결과는 언제든 어떤 계기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전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더 얻을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귀족들과 달리 대다수의 소지주들에게 장미전쟁과 같은 내전은 광기어린 재난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젠트리들은 왕을 감시하고 교섭하는 역할을 지방 유력 귀족들에게 맡기는 대신 스스로 하기를 원했다. 귀족들이 샤이어 내부에서 리더십을 상실하면서 국왕은 그들을 따돌리고 젠트리와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샤이어의 문지기이자 지방민들의 대변인이라는 고유한 지위를 박탈당한 귀족들은 이전보다 취약한 위치에 놓였다. 그들은 이제 엄격한 통제를 받았고, 모호한 구실로 토지를 압류당할 수 있었고, 불확실한 혐의로 처형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미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유일한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세웠다.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22]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및 이후 영국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명시적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국왕에게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랭커스터 공작령(Duchy of Lancaster)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어 있고, 관행적으로 국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있다. 특히 랭커스터에서...[23]

반면 랭커스터 가문의 맞수였던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Duke of York) 칭호는 용도가 바뀌어서 주로 잉글랜드·영국 국왕의 차남에게 부여하는 칭호가 되었다. 이 관행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요크 공작의 칭호를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약 20명의 역대 요크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후손에게 물려 준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앤드루 왕자 또한 남성 상속인이 없기 때문에 추후에 윌리엄 왕세자가 즉위한 후 윌리엄 왕세자의 차남인 루이 왕자가 받을 가능성이 높다.

랭커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가 정기전을 치르는데, 서로의 특수한 관계성 때문에 장미전쟁의 영향을 받아 정기전 이름은 'Roses'라고 부른다.

조지 RR 마틴이 장미 전쟁에서 영감을 얻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의 《다섯 왕의 전쟁》의 설정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전에 스타크 가문라니스터 가문의 이름부터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에서 따왔다.

현존하는 영국 귀족 가문들 중 가장 오래된 가문들은 이 시대와도 관련이 깊다. 영국 귀족 서열 1위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리처드 3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존 하워드가 하사받은 공작위에서 기원하며,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네빌 가문은 리처드의 숙부의 계보인 애버개브니 후작으로, 네빌 가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은 모계 계승을 거쳐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이어졌다. 랭커스터 왕조의 사생아 분파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서머셋 공작 보퍼트 가문은 다시 사생아를 통해 가문이 이어져 보퍼트 공작 서머셋 가문이 되었다. 이외에도 헌팅던 백작 헤이스팅스 가문, 데본 백작 코트니 가문, 더비 백작 스탠리 가문, 슈루즈버리 백작 탤벗 가문 등이 있다.


6. 동음이의어[편집]



6.1.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편집]


1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건.

팬드래건 왕국의 성왕 라시드 팬드래건 사후, 당시 태자였던 헨리가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로빈의 신분 문제,[24] 그리고 우드스톡의 실종에서 비롯된 첫째 왕자가 아닌 둘째 왕자의 왕위 계승 등으로 인해 올리비아에게서 태어난 왕자 및 그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이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전쟁.[25]

로빈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콘웰파는 붉은 장미를, 올리비아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버몬트파는 백장미를 사용하여 장미 전쟁이란 명칭이 붙었다.

전쟁 초반 헨리가 버몬트파의 장남 조지를 살해하면서 콘웰파가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버몬트의 차남 윌리엄, 그리고 삼남 리처드가 어머니의 고국인 비프로스트로 도망쳐서 이 나라의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와 반격하여 결국 헨리가 윌리엄에게 살해당하고 콘웰성이 함락당하면서[26] 버몬트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윌리엄이 새로운 팬드래건의 왕위에 오르며 장미 전쟁은 일단 종결된다. 그리고, 이 일 때문인지 차후 왕이 된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도 받았고 비프로스트에 좋지 않은 감정도 있어서 차후 제국이 비프로스트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일절의 도움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잔당토벌에 도움을 주게 된다.[27][28]

한편, 우드스톡의 아들로 본래 콘웰파였으나, 한족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모두에게 배척받았던 클라우제비츠만이 콘웰파 왕족의 남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국으로 망명한다. 클레어 팬드래건은 행방불명이고 켈리 팬드래건은 아예 언급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윌리엄이 죽고, 리처드가 그의 장자인 필립을 몰아내고 국왕에 즉위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기가 팬드래건의 국왕이 되면 버몬트파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발언을 한다. 또한 리처드 역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한다.[29] 이에 엘리자베스는 장미의 전쟁을 종식시킬 열쇠로 여겨져 장미의 신부로 불리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과 지방 영주들을 설득해 리처드에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장미 전쟁의 승리자가 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장미 전쟁은 진정한 종결을 맞게 된다.

다만, 이때 귀족들이 콘웰파와 버몬트파로 나뉘어 싸운 것이 차후 버몬트 대공과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의 내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전3 메뉴얼의 내용에 따르면 버몬트에게는 구 콘웰파 귀족들이, 헤이스팅스 공작에게는 구 버몬트파 귀족들과 리처드 잔당들이 가세했다고 한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 공작과 언쟁할 때 버몬트와 친분이 있는 아델라이드 우드빌이 대공을 비호하자 헤이스팅스 옆에 있던 노포크가 '흥! 이래서 콘웰파는 어쩔 수 없다니까!'고 말한 것을 보면 서로 앙금이 상당히 오래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버몬트 대공이 내전이 끝난 후 헤이스팅스편에 섰던[30] 귀족들은 사피 알 딘이 살라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줄을 잘못 선 버몬트파 귀족들은 멸족당했다.[31] 다만, 이 결과는 왕국과 안타리아 동부의 장래에 있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는데, 버몬트 대공이 추진한 투르 원정은 표면적으로는 아스타니아에서의 복수를 내걸었지만 진짜 의도는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 게 목적이었고, 아스타니아 멸망은 어차피 남의 나라 일인 데다 실버에로우 동맹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국익의 관점에서도 득이 안되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군수산업 종사자인 크리사오르 영지의 케이트 호크도 '우리도 막대한 이익을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겠지만 무의미하게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습니다'하고 반대한 바 있었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를 처형한 후, 커티스를 멸망시키고[32] 투르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력이 소비되었고, 버몬트 대공도 백치가 되어버린 결과를 보면 헤이스팅스가 반대한 것에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33]

1에서 모티브를 따온 만큼 겹치는 설정과 인물이 많은 편. 실제 역사상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 랭커스터 가문 - 콘웰파
  • 요크 가문 - 버몬트파
  • 헨리 4세 ~ 헨리 6세 - 헨리 팬드래건
  • 에드워드 4세 - 윌리엄 팬드래건
  • 리처드 3세 - 리처드 팬드래건
  • 에드워드 5세 - 필립 팬드래건
  • 요크 공 리처드[34] - 존 팬드래건
  • 헨리 7세 - 클라우제비츠 팬드래건
  • 요크의 엘리자베스[35] - 엘리자베스 팬드래건


6.2. 온라인 게임[편집]


1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 내에서 사냥을 다니거나 나라를 세워 왕노릇을 하거나 타 유저의 나라에 들어가 정치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


6.3. 축구 더비 매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즈 라이벌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즈 유나이티드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일컫는 말. 이름의 유래는 1번.


6.4. 학교대사전[편집]


학교대사전에서 교사들끼리 서로를 증오하여 벌이는 사투를 일컫는 말. 이들은 수업시간에 서로를 욕하는데 학생들은 이들 선생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한다. 유래는 1.

비슷한 말로는 영역싸움[36]이 있다.


6.5. TPS 게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War of the Roses: Kingmaker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6. 장미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미전쟁(보드 게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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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유럽이 군웅할거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관행이 일반화되었던 것인데, 패자를 섣불리 죽이거나 가혹하게 대할 경우 나중에 자신들도 똑같이 복수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 협력했던 주변의 세력들이 이런 잔인한 행동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돌아설 우려도 있었다.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하니 밑의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얼마든지 편을 바꿔탈 수 있었다.[2]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는 왕궁의 정원에서 요크 가문의 수장 요크 공작과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인물인 서머셋 공작이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요크 공작이 흰 장미를 꺾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흰 장미를 들어 지지를 표시해달라고 요청하고, 서머셋 공작은 붉은 장미를 꺾어 이에 대응하는 장면이 나온다.[3] 실제 꽃 색깔은 연분홍색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보이듯 문장 색깔은 새빨갛게 했기 때문에 붉은 장미란 말이 돈 것이다.[4] 어떻게 보면 해당화찔레꽃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5] 여기에 대해서는 장미 항목을 참고바람.[6] 랭커스터요크가 모두 지명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자 중에서 플랜태저넷 본가(잉글랜드 왕위)를 잇지 못한 차남 이하의 왕자들이 요크(요크셔 지역의 중심도시)와 랭커스터(랭커셔 지역의 중심도시)의 영지를 받아 분가하여 탄생한 가문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인 것. 즉, 동양식 성씨 개념으로 보면 요크 가문이든 랭커스터 가문이든 모두 플랜태저넷씨의 요크파와 랭커스터파 정도 되는 셈이다. 다른 예로 프랑스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를 보더라도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법정에서 호명한 이름은 '루이 카페'였다. 카페 왕조 역시 카페 왕조의 왕자가 발루아와 부르봉의 영주로 분가하면서 부르봉 가문과 발루아 가문이 탄생하고, 이후 카페 본가의 대가 끊기자 두 분가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실제로 유럽사를 보면 네임드 왕조는 왕조 창시자의 이름이나 별명을 따와 그 후손들이 '나는 아무개의 후손'으로 지칭하고(프랑스 카페 왕조위그 카페나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러시아 류리크 왕조류리크나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의 아르파드,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피아스트 등의 사례가 있다) 거기서 분가해 나간 왕조들은 자신이 받은 영지의 이름을 따서 분가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7] 참고로 와트 타일러의 난 때 곤트의 존은 프랑스에 있었는데 화가 난 시위대가 존의 거주지였던 성을 불태웠다.[8] 청원파의 목적이 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원파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리처드 2세 및 헨리의 막내 숙부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필두로 한 왕의 친척들이 대세였다. 왕권이 약화되면 왕과의 혈연이 권력 기반인 그들의 권위도 낮아질 테니 이들은 도리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청원파는 왕이 방계 왕족을 못살게 구는 것을 견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 권신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파벌이었다.[9] 참고로 할아버지인 제3대 마치 백작의 이름도 에드먼드였고, 숙부의 이름도 에드먼드였다.[10] 이 사람도 오래는 못 살고 29세 때 요절했다.[11] 참고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3남인 곤트의 존의 장남이었다.[12] 이론적으로 완전 부정은 아니나 사실상 부정이나 다름없다. 실제 이 규칙이 적용된 프랑스 왕실에서는 1,0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13] 하지만 이 규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문화되어, 곤트의 존의 5남의 손녀의 아들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14] 당장 《살리카법》은 외손자의 왕위 계승은 인정한다.[15] 이때 '광인왕 샤를 6세도 10월에 잇따라 죽었지만 아들 샤를 7세가 조약을 깨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사실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자기보다 훨씬 일찍 죽을 것 같아서 맺은 조약이었는데.[16] 다만 북부의 칼레는 남아있었다.[17] 참고로 앤 모티머와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6촌 친척이었다. 앤 모티머는 친척 할아버지뻘에게 시집간 셈이다. 실제 나이 차이는 많이 안 나서 리처드가 15세가량 연상이었다.[18] 요크 공작 리처드의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그 아들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19] 요크파가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한 나머지 무지개 색깔을 외우는 방법 중 하나인 '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ein'(요크의 리처드가 전투를 헛되게 내주었다)이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20] 이에 대해 리처드 3세를 지나치게 추남에 악마화한 것은 내전의 승자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를 띄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1] 어머니 혈통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파인 보퍼트 가문이긴 했지만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들로 이루어진 집안이었다. 나중에 존과 캐서린은 정식 결혼을 했고, 이로써 사생아들도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헨리 4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등, 정상적으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22] 여성 공작일 경우에도 그냥 Duke를 쓴다. 여성형인 Duchess로 쓸 경우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남성형을 쓰는 것이다.[23] 랭커스터에서는 종종 God Save the King 1절 첫 부분 "God save our gracious King, long live our noble King"에서 noble King을 noble Duke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가사 내의 모든 King을 다 Duke로 바꾸는 건 아니고 딱 저 부분만.[24] 사이럽스의 도적 출신이었다. 하지만 창세전쟁 당시 왕국군의 주력이 용병단이었다보니 로빈이 이들의 지지를 받아 왕비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25] 원래 팬드래건 왕국의 기존 귀족들은 이올린 왕녀가 게이시르 제국 원정을 갔다가 상당수가 갈려 나갔고 그 공백을 메꾼 것이 바로 그레이 스케빈저가 이끌던 용병 기사단이다. 즉, 버몬트 파는 기존 귀족 세력이 많고 콘웰 파는 용병 기사단에서 공을 세운 신흥 세력이다. 로빈 왕비 역시 용병 기사단 출신이지만 사실은 사이럽스에서 제국군에게 도적질하다 튄 기사이다. 반대로 올리비아 왕비는 비프로스트의 왕녀다. 다만, 이 전쟁의 도화선 및 1차적인 명분은 라시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헨리 팬드래건(라시드 팬드래건의 차남, 콘웰 파)이 투르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26] 템페스트 시점에서 콘웰성에 가면 폐허가 되어있다.[27] 원래 게이시르 제국은 팬드래건 왕국의 오랜 적이었고 비프로스트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비프로스트의 공왕 모젤 3세가 공국의 확장을 명분으로 제국과 왕국의 내전에 끼어들었던 적이 있어서 양국의 미움을 사게 된 것.[28] 모젤 3세의 외교(?)는 매우 화려한 전력은 가지고 있는데 팬드래건 왕국의 내전에서는 버몬트파를 후원했고 게이시르 제국의 체사레 보르자와 동맹을 맺고 제피르 팰컨과 크리스티나 프레드릭을 공격했다. 또 거기에 더해 자국 내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발키리 상당수가 왕국과 제국으로 망명했을 정도. 이들 중 왕국에 투항한 인물이 캐서린 스펜서, 제국에 투항한 인물이 죠안 카트라이트. 비프로스트의 멸망 후에도 기즈 공작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제국을 어지럽혔다.[29] 이 부분이 템페스트의 시작 부분이다.[30] 물론, 버몬트 대공은 헤이스팅스 공작과의 최종결전전에 싸움에서 빠지거나 항복한 자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헤이스팅스와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은 도망친 그리피스를 빼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31] 물론 케이트 호크처럼 줄을 갈아타서 살아남은 버몬트파 귀족들도 많다. 다만 호크 가문은 원래 콘웰파였다.[32] 이 일 이후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던 실버에로우는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33] 물론, 버몬트 대공은 그 이전부터 록슬리와 함께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는지라, 그 점에 있어서 헤이스팅스파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있긴 했다.[34] 에드워드 5세의 동생으로 리처드 3세에 의해서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35]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의 누이. 후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헨리 튜터와 결혼하면서 장미 전쟁이 끝나게 된다.[36] 육식 동물들이 자신의 고유 영역을 지키듯 수업시간에는 교실이 교권 신수설에 의해 그 선생의 것이다. 이를 다른 선생이 침범하면...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이면 신경전이 더더욱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