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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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영어: First Mithridatic War
파일:비티니아 터키 1.png
시기
기원전 89년 ~ 기원전 85년
장소
소아시아, 발칸 반도, 에게 해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Bithynia.png 비티니아 왕국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파일:attachment/mon_256_5.png 아테네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파일:Bithynia.png 니코메데스 4세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미트리다테스 6세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아르켈라오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네오프톨레모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아르카티아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도릴레이오스
파일:attachment/mon_256_5.png 아리스티온†
병력
군단병 120,000명
그리스 보병 5,000명
기병 2,000명
루쿨루스의 함대
보병 310,000명
아시아 척후병 20,000명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15,000명
기병 7,000명
전차 500대
피해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0,000명 학살
150,000명 전사
결과
로마 공화국의 불완전한 승리. 술라의 내전 발발.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89~85년,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가 소아시아로 뻗어가는 로마 공화국에 맞서 단행한 전쟁이다. 한때 소아시아 전역을 공략하고, 그리스까지 진출했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참패했다. 다만 술라가 정권을 뒤엎은 마리우스파를 무찌르고자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모든 점령지를 반납하는 대신 폰토스의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190년 12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대왕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이래, 로마 공화국은 소아시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르가몬 왕국, 비티니아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은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갈라티아 역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로마의 팽창에 맞설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폰토스 왕국의 군주였던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그는 기원전 116년에서 113년 사이의 시기에 자신을 해치려 했던 라오디케 6세와 동생 크레스투스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뒤, 폰토스를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정복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처음에 흑해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콜키스와 여러 독립왕국들을 정복했다. 또한 스키타이족의 국왕 팔라쿠스를 상대로 대초원에서의 패권을 다퉜다. 크리미아, 타우릭 케르소네소스, 그리고 보스포루스 왕국은 스키타이족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독립을 쉽게 포기했다. 스키타이족은 여러 차례 크림 반도를 침공했지만 미르리다테스 6세는 그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결국 스키타이족은 미트리다테스 6세의 패권을 인정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젊은 왕은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기원전 104년,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와 협의하여 파플라고니아를 분할했다. 그러나 기원전 100년경 카파도키아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니코메데스 3세와 갈등을 벌인 끝에 전쟁을 단행했다.

니코메데스 3세는 폰토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니코메디아에서 포위당하자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9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등의 사절단을 파견해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니코메디아의 포위를 풀고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아직은 로마 공화국과 싸울 생각이 없었던 그는 순순히 따랐고, 사절단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카파도키아 왕국의 새 국왕으로 세우도록 했다. 그러던 기원전 91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지 않는 로마에 불만을 품고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는 이 전쟁을 치르느라 대외 상황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소아시아로의 확장 정책을 재개하기로 했다. 마침 비티니아 왕국의 왕 니코메데스 3세가 죽은 뒤 아들인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곧장 비티니아를 침공해 기원전 91년에서 89년 사이에 니코메데스 4세를 몰아내고 니코메데스 4세의 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왕국도 공격하여 아르오바르자네스 1세를 폐위시키고 자기 영토로 삼으려 들었다. 이에 로마는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폰토스로 보내 두 왕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처음에 로마의 요청에 복종하고, 동맹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중에 니코메데스 4세에게 보상하라는 아퀼리우스의 요청에

"로마의 요청에 따라 프리기아를 공략했으니, 로마 공화국은 내게 빚을 졌다."

라며 거부했다. 폰토스 왕의 태도에 화가 난 아퀼리우스는 기원전 89년 니코메데스 4세를 부추겨 폰토스를 침공해 아마스트리스를 약탈하도록 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펠로피다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항의했다. 그는 프리기아와 카파도키아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니코메데스 3세가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이제는 니코메데스 4세가 아마스트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한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로마가 일방적으로 비티니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니코메데스 4세로부터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비티비아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마침내 로마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편집]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아르켈라오스를 대동하여 프리기아로 진격했다. 니코메데스 4세가 이끄는 비티니아군은 이에 맞서 할리스 강의 지류인 암니아스 강변으로 진군하여 폰토스군과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암니아스 강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낫전차를 동원하여 비티니아군의 보병대를 무차별적으로 살육했고, 비티니아군이 전의를 상실하며 도주한 덕분에 폰토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니코메데스 4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로마군과 합세한 뒤, 프로토파키움 요새로 쳐들어온 폰토스군과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이 프로토파키움 전투 역시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틈타 로마군 진영을 이탈하여 페르가몬으로 도주했고, 진영에 남아있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의 로마 장수들은 니코메데스 4세와 함께 프리기아의 '사자의 머리'로 불리는 요새로 피신해 프리기아인들을 징집하여 훈련시키려고 했지만, 프리기아인들이 비협조로 나오자 포기했다. 카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파메이아로 갔고, 니코메데스 4세는 페르가몬으로 갔으며, 마니우스는 미틸레네로 재차 피신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폰토스 군대를 소아시아 전역으로 파견하여 순식간에 공략했고, 흑해 어귀를 지키고 있었던 로마 함대 지휘관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에 에게 해의 패권도 확보했다.

기원전 88년 미틸레네에 숨어있었던 마니우스를 체포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를 전쟁의 주범으로 비난하고 당나귀에 묶어서 여러 곳을 돌며 대중 앞에서 미친 척 하라고 강요했다. 이후 황금을 녹여서 그의 목구멍에 붓는 방식으로 죽였다. 소아시아 대부분의 도시들은 폰토스군에게 투항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해방자'로 떠받들었다. 그들은 막대한 속주세를 강요하는 로마의 통치에 지쳤고,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앙했다. 다만 키클라데스, 마그네시아, 카리아, 파플라고니아 등 일부 도시는 여전히 저항했으며, 로도스는 로마와의 동맹을 굳건히 지켜 미트리다테스 6세가 파견한 해군을 격파했다.

이렇듯 기세를 드높이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리스 철학자인 스케프시스의 메트로도로스로부터 로마인들을 학살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메트로도로스는 그렇게 한다면 로마의 소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폰토스 왕국에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의 충고를 따라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에 남아있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학살을 조직적으로 감행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로 인해 무려 80,000명에 달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로도스 섬으로 피신했는데, 그 중엔 카시우스도 있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신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키루스 대왕다리우스 1세의 후예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고 자칭했다. 그는 로마의 압제로 고통받는 그리스인들을 해방시켜주겠다고 선포하고, 기원전 88/87년 겨울 아르켈라오스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델로스를 침공하도록 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주민 20,000명을 학살하여 델로스를 제압한 뒤 아테네에게 돌려줬다. 아테네의 지도자 아리스티온은 즉시 폰토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의 부하였던 메트로파네스는 폰토스에 호응하길 거부한 데메트리아스, 마그네시아, 에우보이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한편, 로마는 동맹시 전쟁을 마무리했지만 후속 조치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 내의 모든 라틴 시민권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수여하기로 했는데,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투표권을 어떻게 줄 지가 문제였다.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고 했는데, 이는 기존의 로마인들이 35개 부족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명백히 불평등한 대우였다.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새 로마 시민들을 기존의 35개 부족에 할당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심한 반발이 일었고, 루푸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도와주는 대가로 미트리다테스 6세를 응징하는 원정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루푸스는 이에 동의했고, 마리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퇴역병들을 로마 시내로 불러들여 루푸스의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원로원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휴일을 선포한 후 모든 시내의 상업을 중단시켰다. 이에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망쳤다. 마리우스는 그를 숨겨주는 대가로 휴일 선포를 취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루푸스는 집회를 연 뒤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를 35개 부족에 배당하는 법안을 가결시킨 후, 놀라 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원정군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준다는 법안을 가결시켰다. 그러자 본래 원정을 이끌기로 되어 있었던 술라는 몹시 분노해 놀라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제1차 술라의 내전) 마리우스는 노예와 검투사를 모아 항전했으나 패배하고 북아프리카로 망명했으며,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 뒤 원로원을 설득해 마리우스와 루푸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게 하고 루푸스가 통과시킨 모든 법안을 철회시켰다. 이후 새 집정관에 선출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법안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러 발칸 반도로 출진했다.

술라는 에피로스(에페이로스)에 상륙한 뒤 아테네로 진군했다. 그는 보이오티아를 통해 아티카로 진군하면서 테베 등 대다수의 도시국가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아테네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뒤 기원전 87년/86년 겨울 내내 공성전을 치르면서도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술라는 아테네가 순순히 복종하지 않자 맹공을 퍼부은 끝에 피레우스 항구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약탈하며 파괴했다. 이후 식량 공급을 철저히 차단해 수비대를 굶주리게 만든 끝에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리스티온은 아크로폴리스로 도망쳤다가 곧 체포된 뒤 아테나 신전 제단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술라는 아테네에 무거운 벌금을 매기는 선에서 마무리했다.(아테네 공방전)

기원전 86년, 술라의 로마군은 북상하여 아르켈라오스가 이끄는 폰토스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에서 맞붙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40,000명인 반면에 폰토스군은 12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폰토스군의 지휘관 아르켈라오스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카이로네이아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술라는 폰토스군이 돌투성이였던 언덕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걸 보고, 적의 장기인 팔랑크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챈 후 곧바로 전투에 응했다. 폰토스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했지만, 술라가 직접 예비대를 이끌고 지원하여 막아냈다. 뒤이어 중앙과 우익에서 로마군이 압도하면서, 폰토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피아노스는 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110,000명에 달한 반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밖에 안 됐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계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치른 지 며칠 후, 맹세를 어기고 술라의 정권을 무너뜨린 킨나가 파견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휘하의 로마군이 술라를 체포하러 접근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했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가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의 휘하로 들어갔다. 결국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길 포기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고자 이동했으며, 술라는 이들을 쫓는 대신 아르켈라오스와 상대하러 출진했다. 당시 아르켈라오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부관이었던 도릴레이우스가 소아시아에서 데려온 80,000명의 병력과 합세하여 군대를 불린 뒤, 보이오티아로 진군하여 그곳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었다. 술라는 전투를 벌일 장소를 물색한 끝에 오르코메노스의 지형이 소규모 병력으로 대군을 상대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여기서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술라는 군대의 좌측면에 호수를 두고, 한쪽엔 참호와 도랑을 파놓았으며 다른 편에 군대를 배치하여 폰토스군과 맞붙었다. 그는 이를 통해 폰토스군 기병대의 측면 공격을 막고자 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술라의 의도를 눈치채고 참호와 도랑을 파는 로마군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병사들이 폰토스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동요하자, 술라가 외쳤다.

"로마 시민들이여, 후대에 누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오르코메누스라고 답하라!"

병사들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폰토스군을 상대로 맹렬히 저항해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아르켈라오스의 의붓아들인 디오게네스가 용맹을 떨쳤으나 결국 전사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기병 돌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르켈라오스는 낫이 달린 전차를 전면에 두고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그 뒤에 배치해 로마군을 정면에서 돌파하기로 했다. 술라는 이에 맞서 군대를 3열로 배치했지만, 경보병과 기병의 대열 사이에 공간을 두었으며, 최전선에 배치된 부대는 후방에서 편성된 군대보다 밀집되었다. 이윽고 폰토스군의 낫전차가 돌진하자, 로마 군단병들은 대열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낫전차들은 로마군이 열어준 공간 사이로 들어갔다가 사전에 설치된 말뚝에 걸려 굴러 떨어졌다. 용케 말뚝을 피한 낫전차들은 로마군의 필룸 세례를 받았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낫전차들이 무력화되었고, 살아남은 낫전차는 후방으로 도망치다가 폰토스군의 팔랑크스 대열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술라는 이때를 틈타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아르켈라오스는 보병대가 혼란을 진정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기병대에게 진군하는 로마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술라는 이를 예상하고 수적으로 열세한 로마 기병대에게 폰토스 기병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결국 로마 기병대는 폰토스 기병대의 돌격을 막는 데 성공했고, 로마 군단병들은 이 틈을 타 여전히 재편성 중이던 팔랑크스들을 밀어붙였다. 결국 폰토스군은 참패한 뒤 진영으로 도망쳤지만, 로마군은 적 진영까지 쳐들어가서 방벽 일부를 허물고 쏟아져 들어왔다. 폰토스군은 진영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상당수가 늪에 갇혀 학살당했다. 이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사상자는 100명에 불과했고,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술라는 에게 해에서 암약하는 폰토스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 새 함대를 조성하기로 하고,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함대를 모집하라고 명령했다. 루쿨루스는 로마의 동맹국들을 잇따라 방문해 전함을 받아냈다. 키레네에서는 7년간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루쿨루스는 이곳에 방문해 내전의 당사자들을 중재하여 평화를 맺게 하고 원조를 받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리던 이집트에도 찾아가 선박 원조를 받아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와 폰토스 중 한쪽을 택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기에 무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함대를 편성하는 데 성공한 루쿨루스는 로도스 인근 해역에서 폰토스 해군과 맞붙어(로도스 해전) 격파한 뒤 크니도스와 코스 섬을 확보한 후 키오스 섬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군대를 재차 물리치고 사모스 섬을 공략했다. 뒤이어 렉턴 곶 해전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으며, 테네도스 섬에 집결한 네오프톨레모스 장군 휘하의 미트리다테스 함대와 대규모 해전(테네도스 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폰토스 해군은 소멸되었고, 로마군은 소아시아로 넘어갈 발판을 마련했다.

기원전 85년, 발칸 반도의 통치 체계를 재확립한 술라는 그리스 섬들을 공략하는 데 전념했다. 한편 플라쿠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마케도니아에서 헬레스폰트 해혐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플라쿠스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토스군을 맹추격하길 원했고 그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토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지만, 핌브리아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기에 플라쿠스를 배신했다. 플라쿠스는 달아나다가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핌브리아의 군란)

핌브리아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잔존 병력을 격파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여 페르가몬 시에서 포위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배를 타고 피타네 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어서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피타네에서 배를 타고 빠져나온 뒤 기원전 85년 하반기에 다르다누스에서 술라와 만나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3,000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며 70여 척의 함선을 술라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술라는 포로가 된 폰토스군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폰토스의 왕위를 계속 맡는 걸 용인했다.(다르다누스 강화조약)

그렇게 해서 폰토스와의 전쟁을 종식시킨 술라는 핌브리아를 상대하러 이동했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술라의 군대와 대치하여 회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했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했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튀르키예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그 후 여러 신전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은 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제2차 술라의 내전을 벌인 끝에 정권을 다시 장악하고, 정적들인 민중파(포풀라레스)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4. 이후[편집]


술라가 로마로 돌아간 뒤, 그의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는 소아시아에 남아 미트리다테스 6세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기원전 83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무레나는 카파도키아를 가로질러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속한 코마나를 공격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당시 콜키스인과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간 상황이라서 코마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사절을 무레나의 로마군에 보냈다.

그러나 무레나는 술라가 그리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화 협정을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조약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며 공세를 이어나갔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반격을 가하면서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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