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호(1926)

덤프버전 :


前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전병호
全炳浩 | Jon Pyong Ho


파일:3차 당대표자회 전병호.jpg

출생
1926년 3월 20일
평안북도 강계군
사망
2014년 7월 7일 (향년 88세)
평양시
학력
모스크바대학교 (금속기계공학 / 학사)
수훈
김일성훈장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수훈
5. 여담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가. 군수공업의 전문가로 오랫동안 군수비서를 지냈으며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상징적 인물 중 한명이었다.

2. 생애[편집]


1926년 평안북도 강계군(현 자강도 전천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안도 보위부에 입대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김일성으로부터 똑똑한 청년들을 모아 경위분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은 안길이 평안도에 와서 전병호를 비롯한 6명을 중앙경위련대로 스카웃해가게 되었다. 이때 전병호는 이미 장가를 간 상황이었으나 숨기고 경위련대에 입대했고, 1946년 5월에 전병호의 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전병호 면회를 오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고 한다. 경위련대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전병호를 가엾게 여긴 김정숙이 누룽지를 빚어다가 전병호에게 주곤 했는데, 1946년 가을, 전병호는 자신을 아껴주던 김정숙에게 자신도 유학을 가게 해달라고 졸라서 모스크바 종합대학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전병호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에는 농업을 배우고 싶었으나 김정숙이 산업 발전을 위해서 야금술을 배워오라고 하여 금속기계공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군수공장의 금속기사로 배치되었다. 이후 26호 공장 부기사장을 거쳐 국가계획위원회 부장을 하다가 1960년대에 강계 뜨락또르공장 기사장에 이르렀고, 1970년 8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중앙으로 진출,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회 서기부로 선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에 당 경공업부장 및 상업부장을 지냈으며 자신이 맡고 있던 상업재정부가 없어지면서 군수공업부로 옮겨 군수공업을 담당했다. 이후 제2경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 제1부위원장 겸 제2경제위원회 당위원회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가 열리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2년 4월에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그해에 7기 대의원에 선출,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제2경제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김일성 훈장을 받은 후 1982년 8월, 조선로동당 6기 6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11월, 8기 대의원으로 재선되는 한편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군수비서 리근모가 정무원 총리로 이동하면서 후임 군수비서로 임명되었다. 1987년에 연형묵에게 군수비서를 내주고 중공업비서로 옮겼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11월 조선로동당 6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21년이나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내게 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적극 참여한 것 때문에 2010년 1월 장성택 등과 함께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에 올랐었다.2013년에는 주규창, 박도춘 등 다른 군수공업 전문가들과 함께 유엔제재 대상에 올랐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8, 9, 10, 11, 12기 대의원을 지냈으며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 2003년에는 자격심사위원장에 피선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2010년 6월, 내각 정치국장 겸 내각 당위원회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2010년 9월, 김정은의 후계세습 준비를 위해 열린 3차 당대표자회에서 24년간 역임해왔던 비서국 비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정치국 위원에는 재선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1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12기 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에서 소환되어 박도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2012년 3월, 내각 정치국장 겸 당위원회 책임비서에서 물러났다.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되었으며, 2012년 5월 7일, 김정은의 배려 조선인민군무장경비관 명예관장으로 임명되면서 은퇴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2014년 7월 7일 19시에 88세를 일기로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전병호가 죽기 직전까지도 다음날이 김일성의 제삿날이니 수령님에게 가야 한다고 횡설수설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7월 8일이 김일성 기일이기 때문에 요란하게 국장을 치르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사회장을 치르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김정은이 국장을 거행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국장이 거행되었다.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전병호동지는 당과 수령의 선군령도를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온 로혁명가이다. (...) 전병호동지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선군혁명전우로서 오랜 기간 국방공업부문의 중요직책들을 력임하면서 인민군대를 현대적인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을 갖춘 최정예혁명강군으로, 우리 조국을 인공지구위성제작 및 발사국, 핵보유국으로 전변시키는데 특출한 공헌을 하였다. 전병호동지는 주체혁명위업수행의 중대한 력사적시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철저히 확립하며 군수공업의 주체화,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홛롱하였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방공업부문에 쌓아올리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빛내이기 위한 사업에 모든것을 다 바쳤다. 전병호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 혁명적원칙성과 소박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의 높은 신임과 인민군 군인들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선군혁명의 생명선인 군수공업전선에서 오랜 기간 당의 위업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전병호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전병호를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수훈[편집]



5. 여담[편집]


  • 북한 사람 치고는 의외로 술에는 입에도 대지 못했으나 담배는 엄청난 골초였다고 한다.

6.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 인민들 속에서 100(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12)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23:50:53에 나무위키 전병호(1926)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