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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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기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양형섭
楊亨燮


파일:양형섭.jpg

출생
1925년 10월 1일
함경남도 함흥군
사망
2022년 5월 13일 (향년 96세)
평양시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매체에서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한때는 처5촌조카인 김정일 시대의 주요 엘리트 중 한명으로 학자 출신 정치인이다.

8,90년대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을 역임하고 1998년부터 2019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925년 10월 1일 함흥에서 소학교 교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의 행적은 다소 불분명한데, 일부 기록에서는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지만 통일부는 양형섭이 중국 청도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하여 초급간부가 되었으며 청년동맹의 추천으로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조선사학과에 입학했다. 정확한 졸업 시점은 알 수 없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으며,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부로 유학하여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종전 직후 귀국하여 선전선동부 지도원이 되었으며 김일성의 큰고모의 장녀 김신숙(金信淑)과 결혼함으로 김일성의 고종매부가 되었다. 1954년 인민경제대학 교육학부 부장에 임명됨으로 교육자,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60년 12월, 중앙당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이후 정치에도 입문하여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배치, 과장을 거쳐 조선로동당 과학교육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67년 1월까지도 중앙당학교 교장으로 일했으며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고등교육상에 임명되었으며 1968년 홍명희 장의위원에 위촉, 1969년에 조선-탄자니아 친선협회 위원장을 겸하였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겸 비서국 비서에 선출되었다. 1971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자 5기 대의원 및 새로 구성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74년에는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1년 5월, 박문규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장,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중앙인민위원회 법제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에 사회과학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7기 2차회의에서 황장엽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에 선출됨으로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소집 이전까지 연임하며 북한의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를 책임지게 되었다.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11월에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홍기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3년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외교활동도 매우 열성적으로 해왔는데 1969년 조선-탄자니아 친선협회 위원장에 초빙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소련, 아프리카를 두루 순방하였고 특히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와 이사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1991년에는 85차 IPU 총회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대남문제에도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공동의장, 조평통 부위원장을 지내면서 어느 정도 관여하였다.

김일성 사후 1998년 김정일 체제를 다지기 위한 김일성 헌법이 입헌되자 상설회의 의장에서 물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함 역시 무려 21년을 유지했다.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7월, 김병식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맡았다. 김정일 정권 말기인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됨으로 정권에 무게감을 주었으며 김정은 체제가 선포된 2016년 7차 당대회에서도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정권의 얼굴마담 중 한명이다 보니까 주요 장례식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의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 2016년 11월, 류미영 장의위원장,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 2018년 12월, 김철만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학자 타입의 인물이라서 외교계의 얼굴마담 및 선거문제의 행정직으로 주로 활동하였고 이 때문에 차지하는 직위에 비해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실권이 그렇게 강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김영남황장엽을 합친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90이 다 될때가지 북한 정권에 부려먹히다가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대의원으로는 당선됐지만 4월 1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되었고,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는 마침내 물러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도 정권의 원로로 큰 행사가 있으면 불려다니고 있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 2021년 7월, 7차 로병대회 등에 등장했다. 95세의 고령 때문인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휠체어에 타서 실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신은 온전한지 김정은의 손을 잡으면서 열성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일:양형섭 조문.jpg
2022년 5월 13일 22시 40분 96세의 나이로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코로나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도 김정은이 마스크를 쓰고 직접 조문하였다. 정치국 상무위원들인 최룡해, 조용원, 김덕훈, 박정천, 리병철, 그리고 정치국 위원인 리일환 등이 동행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양형섭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각별한 보살피심속에 생의 말년까지 우리 당과 국가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적극 공헌한 로혁명가이다. (...) 동지는 오랜 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위대한 장군님의 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백방으로 다지고 가장 우월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법적토대를 강화하는 사업에 특출한 기여를 하였으며 능숙한 외교활동으로 공화국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주체혁명위업수행의 중대한 력사적시기에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위대한 수령님들의 혁명사상과 위업을 굳건히 이어나가는데서 당과 국가의 로간부로서 훌륭한 모범을 보인 동지는 왕성한 정력과 줄기찬 저술활동으로 많은 위대성도서들을 품위있게 집필하여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우리 국가제일주의시대 사회주의건설의 새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로 고무추동하였다. 양형섭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의 위업에 충실하였으며 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하고 소탈한 품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일편단심 당과 수령을 신념과 의리로 받들며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적복무에 무한히 성실하여온 양형섭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 국가에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 양형섭동지는 비록 서거하였으나 당과 혁명을 위하여, 국가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바친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공적은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상당히 좋게 말해주었으나[1] 코로나로 북한 상황이 난장판이 난 탓인지 국장은 따로 거행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현철해도 죽었는데 현철해도 위독한걸 보고 국장을 동시에 2개 치를 여력이 안되어 현철해에게 우선순위가 부여된 것일수도 있겠다.

3. 여담[편집]


  • 허담과는 동서지간이었다. 양형섭의 아내 김신숙이 허담의 아내 김정숙의 언니이다. 그 김신숙은 당연히 김일성과는 고종사촌여동생이기도 하다. 김신숙은 1987년에 사망했고, 양형섭은 1988년에 40대 과부와 재혼했다고 한다.

  • 2001년 한덕수 조문을 위해 방일하면서 김용순이 가지고 있던 일본을 방문한 북한의 최고위급 인물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 형 양형만은 국가과학원 교수로 사업했으며 2009년 5월에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4. 매체에서[편집]


  • 1980년 김정일의 이야기를 100분 동안 다룬 KBS 드라마 붉은왕조에서는 김인태가 양형섭을 연기하였다.
  • 1982년부터 1985년까지 KBS에서 방영한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백일섭이 양형섭으로 분했다.

5.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 인민들 속에서 100(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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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고에서 쓰인 표현만 보면 거의 국장이 치러지는 급이다. 그리고 국장이 거행되지 않아 략력이 발표되지 못하는 것을 감안했는지 부고에서 양형섭이 역임한 직위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