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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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 제12대 정무원 총리
연형묵
延亨默 | Yon Hyong Muk


파일:연형묵.jpg

출생
1931년 11월 3일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사망
2005년 10월 22일 (74세)
북한 평양직할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학력
파일:800px-Emblem_of_MRS.svg.png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파일:Kim Il Sung University emblem.png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파일:1024px-Czech_Technical_University_in_Prague_logo.svg.png 프라하 공대 (학사)
직업
관료, 정치가
주요경력
최고인민회의 4~11기 대의원(1967~2005)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공업부장(1968~?)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1970~1988)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1967~1974)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1974~1992)
정무원 부총리(1983~1984)
정무원 제1부총리(1984~1986)
정무원 총리(1988~1992)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1992~2005)
자강도 책임비서(1992~2005)
자강도 인민위원장(1992~1998)
국방위원회 위원(1998~2003)
국방위원회 부위원장(2003~2005)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북한의 시장경제 도입 과정
3.1. 가내작업반, 부업반 및 가내편의봉사업 관리운영규정 시행
3.2. 8.3 인민소비품 생산 및 처리에 관한 규정
3.3. 북한 주민의 외화상점 구매 허용 조치 과정
4. 중소형 발전소 건설 및 전국으로의 확대 과정
5. 말년 및 사망 과정
6. 여담
7. 같이보기
8. 경력
9.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김일성 시대에 정무원 총리를 지냈으며 2005년까지 자강도 당 책임비서였으나 10월에 사망하였다.


2. 생애[편집]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1931년에 태어났으며, 체코프라하공대에서 유학한 북한에서 몇 안되는 관료 출신으로 국방위원회 위원 및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중요한 요직을 맡은 북한 고위급 인사이다. 1991년 대한민국 정원식 총리와 <남북기본합의서> 작성에 참여하여 우리 국민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6.25 전쟁 뒤 귀국 후에 군수공장인 65호 공장 기사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65호 공장장이 불량한 성분을 가져서 생산에 사보타주를 한다는 보고가 제출되었는데 연형묵이 불량품이 나온 건 사실이지만 의식적 태업이 아니라고 그를 옹호하는 의견을 제출하여 이에 김일성이 연형묵은 모함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진정한 간부라고 칭찬하면서 1962년 중앙위원회 중공업부 부부장으로 그를 발탁한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8년 중공업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내고 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면서 중공업부 부장에 유임되었으며 1971년 12월, 중공업 담당 비서에 임명되면서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내고 있다.
1974년 12월, 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75년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내면서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이 지휘한 3대혁명소조운동을 가담하면서 김정일 세습 과정을 기여하게 되었으며 그러나 1977년에 뭔가 실수를 저질러서[1] 한번 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어 혁명화를 하기도 하였으나 1979년에 복귀하면서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및 중공업 담당 비서에 다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여 받으면서 1985년 10월 1일, 당정연합회의 결정에 따라 정무원 제1부총리에 발탁되었으며 11월,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위원장도 겸하게 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중공업 담당 비서에 다시 선출되면서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내고 있다.


3. 북한의 시장경제 도입 과정[편집]



3.1. 가내작업반, 부업반 및 가내편의봉사업 관리운영규정 시행[편집]


가내작업반, 부업반, 가내편의봉사망을 포괄하여 가내편의봉사업이라고 하며 가내편의봉사업은 집에서 노는 노동력으로 부산물, 폐기물을 이용하여 생활필수품을 생산가공하는 가공편의업, 생필품을 수선해주는 수리수선편의사업, 미용과 빨래 등 위생편의를 도모하는 위생편의업으로 구분되며 소비품 생산과 편의봉사기능을 수행한다.
8.3 인민소비품을 생산하는 가내작업반과 부업반, 협동조합식당, 가내축산반, 가내편의봉사업은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 뿐만 아니라 노동자구와 동의 인민반에도 조직할 수 있어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의 업종선택의 기본은 주민들의 수요가 많은 일용세소상품, 식료품가공, 편의봉사업종이다.
가내편의봉사업은 가내편의봉사관리소에 등록되어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관리소는 가내편의봉사업의 등록 및 영업허가를 하며 가내편의봉사활동을 감독 및 통제하여 가내작업반 및 가내편의봉사업에 대한 장악과 지도는 도, 시, 군 행정경제위원회가 관할하고 가내작업반, 부업반을 조직하거나 가내편의봉사원으로 등록하려는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와 공민은 소속에 관계없이, 읍, 노동자구, 동, 리 사무소의 합의해야 한다.​
도, 시, 군 행정경제위원회는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을 설립하려는 가내작업반의 영업허가서를 검토하고 승인한 다음 허가증을 발급하면서 해당 가내작업반, 부업반의 성원과 가내편의봉사원에게 증명서를 발급해 이미 승인받은 가내편의봉사업종을 변경하려고 할 경우에는 도, 시, 군 행정경제위원회에 가내편의봉사업종 변경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별도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가내편의봉사원은 건물 또는 시설물을 관리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기관, 기업소, 단체 및 개인과 합의 하에 해당한 건물 또는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가내편의봉사원은 건물 또는 시설물의 사용료를 납부해야 한다.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에 조직되는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은 자기 단위에서 나오는 폐기물과 부산물 등을 이용하는 반면 인민반에 조직되는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은 원료, 자재를 자체로 조달해야 하면서 가내작업반, 부업반 등은 국가계획과 계약에 있는 부산물과 폐기물, 또는 생산계획과 노동력을 별도로 조달해서 생산한 지방의 원료, 자재를 이용하면 안된다.
해당 기관에서 소속 가내작업반, 부업반 성원이 알루미늄 제품, 모포, 가죽구두, 가구를 비롯하여 전문 공장에서 생산하는 지표 등 규정으로 금지된 업종을 전개하는 일이 없도록 통제 사업을 강화하여야 한다.
가내작업반을 하거나 식료품의 가공 및 판매업을 하는 가내편의봉사원은 위생방역과 관련한 법규를 지켜야 하며 가내편의봉사업장에는 가내편의봉사업을 하는 소재지 위생방역기관이 발급한 위생합격증명서를 제시하여야 한다.
가내편의봉사원은 정한 국가납부금을 다음달 10일까지 가내편의봉사업을 하는 도, 시, 군 행정경제위원회에 납부해야만 하며 국가납부금을 납부하고 남은 수입은 임금을 포함한 원가를 제외하고 남은 수입으로 나머지를 상금과 8.3 인민소비품을 확대 재생산과 임금의 지불 원천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수록하게 되었다.
가격은 생산자와 직매점간의 합의에 의한 가격으로 결정하면서 주민의 개별 주문에 의해 서비스할 때 그 가격을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정하면서 가격제정절차는 생산 기업과 직매점과 협의하면서 결정하고 협의가격에 대한 가격승인신청서를 지방가격제정기관에 제출하면서 결정하는 방식으로 한다.
1992년에 제정한 사회주의상업법에 따르면 가내편의봉사원이 무역회사가 수입한 자재를 매입하면서 생산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허용하였으며 2002년 - 2004년 사회주의상업법에서 돈주들이 기업소의 명의를 대여받아 가내작업반 및 부업반을 조직하면서 상업지도기관의 허가 및 승인을 받으면 가내편의봉사원을 정식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상업법이 수정이 되었다.


3.2. 8.3 인민소비품 생산 및 처리에 관한 규정[편집]


북한의 국영기업에 관련된 경제 개혁안으로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는 생활필수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직장이나 작업반을 만들어 계획과 계약에 맞물려있지 않은 부산물, 폐기물, 지방원료, 자재 등을 이용해 자체적으로 8.3 인민소비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밝히며 상당한 경제개혁안으로 사실상 계획권과 가격제정권 및 판매권, 국가예산납부권, 소득분배권이 인정된 경제개혁안이다.
8.3 인민소비품은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와 가내작업반, 부업반, 가내편의봉사원들이 지방의 유휴자재와 폐기물, 부산물을 동원 이용하여 만든 국가 계획에 없는 제품이며 8.3 인민소비품을 생산하는 조직은 생활필수품 직장과 생필품 작업반,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으로 대별할 수 있다.
8.3 인민소비품을 생산하는 가내생산협동조합, 가내작업반과 부업반 및 가내편의봉사업은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 뿐만 아니라 노동자구, 동의 인민반에서 조직되어 이러한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의 업종 선택의 기본은 주민들의 수요가 많은 생활필수품과 식료품 가공, 가내편의봉사업이다.
부산물, 폐기물, 지방원료, 자재와 생산설비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시, 군 사이 또는 공장기업소 사이에 협동생산조직을 잘하는 것이며 인민반에도 자체에서 원료와 자재를 확보할 수 있다면 편의봉사업의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을 둘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8.3 인민소비품은 국가 계획의 지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중앙의 생산 할당과 원료 조달 등에서 벗어나 있으며 8.3 인민소비품의 공업생산액실적은 합의가격에서 상업부가금과 국가납부금을 빼고 남은 돈으로 계산하여 노동용량실적은 해당 기관, 기업소에서 자체로 정한 작업정량시간에 의하여 계산한다고 되어 있다.
8.3 인민소비품 생산에 기여한 노동자와 관리일꾼들에게 주는 상금은 월가동 정액 생활비의 50%까지 적용하며 판매수입금에서 임금을 포함한 원가를 빼고 남은 수입으로 나머지를 상금과 8.3 인민소비품을 확대 재생산과 임금의 지불 원천으로 사용할 수 있다.
8.3 인민소비품은 해당 거주 지역 시, 군 직매점에서 파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자기 지역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남아서 공급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시, 군 직매점에 유통할 수 있으며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는 생산한 8.3 인민소비품의 30% 범위에서 자체 직매점 또는 시, 군 직매점을 통해 종업원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8.3 인민소비품의 가격은 원가보다 떨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생산자들과 합의하여 결정한다.


3.3. 북한 주민의 외화상점 구매 허용 조치 과정[편집]


북한은 1975년에 외화상점을 개설하였으며 이는 외국인 전용 상점으로서 내국인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으며 이 또한 외화 현금의 북한 내 유통을 엄격히 제한하고 당국이 보다 많은 외화를 흡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김정일은 북송재일교포와 같이 직접 외화를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조차 직접 외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통제하면서 이 카드는 외화상점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외화와 바꾼 돈표가 등장하고 나서 상황이 다시 반전되었으며 그 때부터 재일교포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외화교환소에 가서 엔을 외화와 바꾼 돈표로 교환하면서 그 돈표를 가지고 외화상점에 가서 물품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제는 외화와 바꾼 돈표 자체가 매매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반 주민이든 전문 장사꾼이든 교포들로부터 외화와 바꾼 돈표를 매입해서 이를 북한의 일반 주민에게 환전하는 방식이며 결국 1980년대 중후반 국영상점을 통한 상품의 공급 부족에 시달리게 된 일반 주민들은 외화상점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으며 또한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 입장에서는 주민들이 보유한 외화를 합법적으로 흡수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결국 북한은 1986년 6월부터 내국인들도 외화상점을 이용할 수가 있게 허용하였으며 나아가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군 단위까지 외화상점들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군수공장에서 생산한 생필품과 소비품이 외화상점에서 판매되면서 외국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체제선전을 위한 전시용 상품으로 전시하게 되거나 외화를 소지하고 있는 주민들이나 혹은 조선로동당 간부를 우선 대상으로 하면서 유상배급이 되고 있으며 일반 주민과 당간부의 수요를 충족하고 있다.연합뉴스 기사(1), 연합뉴스 기사(2)[2]
외화의 암거래가 성행하게 되면서 달러당 암시세가 공정 환율의 40배에서 50배로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으며 1980년대 기준으로 1달러가 원화 86원의 가격으로 돈표의 환율은 원화 43원의 가격에 암거래가 진행하고 있다고 증언하게 되었다.중앙일보 기사



4. 중소형 발전소 건설 및 전국으로의 확대 과정[편집]


1993년 제3차 7개년 계획이 실패하고 1년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결국 혼란기가 찾아오게 되면서 이때 수송능력이 거의 상실되고 전력은 부족하며 대부분의 배급이 끊기게 되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자강도 지역이 가장 모범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 연형묵 전 총리가 주도하면서 김일성이 중소형발전소를 많이 건설하게 되어 전력 부족량을 보충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린 그 말을 따라 자체적으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1997년에만 하더라도 500여개의 발전소를 건설하였으며 특히 김정일이 명령을 내린 토지정리사업을 통하여 많은 토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연형묵 전 총리는 자강도당 책임비서이면서 자강도 인민위원장으로써 도당책임비서 직권으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였으며 이때 흥주청년1호발전소와 장자강발전소 등 상당한 중형발전소는 물론 소형발전소까지 건설을 지시하며 연형묵 전 총리가 김정일과는 달리 정말로 보리밥에 무만 먹는 것을 본 김경희가 김정일에게 보고하면서 김정일이 강계까지 직접 현지지도를 가게 되었다.
이때 연형묵은 김정일에게 죽을 각오로 직언을 하게 되었으며 인민들이 굶어죽고 있어 탈북을 이어가고 있다는 보고와 함께 인민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직언하게 되었다.[3]
특히 김정일은 가내작업반 관리운영규정을 개정함과 동시에 사적생산단위로 인정함으로 중국에 원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무역회사에 독촉하게 되었으며 무역법을 제정하면서 자본만 있다면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자재를 수입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다.
돈주들은 이 기회를 삼아 와크를 허가받으려고 김정일에게 많은 자원개발을 하면서 국가예산을 납부하겠다는 움직임과 함께 몇배로 수입하면서 어느정도 제조업이 육성되고 양어법을 제정하여 무역회사들이 투자하는 돈주들을 양어사업소를 건설하도록 독려하면서 외화벌이 사업소장으로 발령을 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양식된 열대메기나 룡정어, 철갑상어를 통하여 많은 호텔이나 혹은 옥류관에 공급하거나 혹은 수출용으로 삼게 되면서 많은 수익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때 도급 무역회사들은 원자재를 수입하면서 대부분 발전소용 자재를 수입하여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와 룡성기계연합기업소 등 상당한 공장기업소에 발전설비를 주문하면서 그것을 통해 전국적으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게 된다.
1998년만 해도 대부분 소형발전소로 볼 일은 없으며 1999년 이후부터 중형발전소 건설로 전환되어 성하발전소와 임산-2호 발전소를 건설하였으며 전력 용량이 500kw 수준으로 건설되어 있으며 장림-1호 발전소 역시 1,000kw의 중형발전소로써 상당한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다.
장선강청년발전소 역시 500kw의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성천강계단식발전소도 성천강-1호 발전소만 하더라도 1,000kw의 중형발전소에 33개의 발전소들중 보통이 500kw 수준의 중소형발전소로써 상당한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다.
수성천계단식발전소 역시 수성천-1호 발전소만 1,000kw에 계단식 발전소 중 보통이 600kw의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어 상당한 중형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으며 수성천에서 건설한 형제-2호 발전소 역시 600kw가 넘어가는 전력용량을 자랑하며 상당한 계단식 발전소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가장 큰 전력용량을 자랑하는 중형발전소는 강계에서 건설된 흥주청년1호발전소로써 10,000kw의 전력용량을 자랑하며 특히 흥주청년2호발전소도 건설되고 있음이 알려지고 있다.
2000년에는 자강도 우시군에 하창청년발전소를 건설하고 전력용량 역시 200kw 수준의 소형발전소가 건설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내평-1호 발전소 역시 건설이 되어 전력용량만 하더라도 2,000kw 이상의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다.
부남-2호 발전소와 용산군민발전소를 건설하여 역시 200 - 300kw 용량의 전력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4월 5일 발전소 1호기와 2호기를 완공하여 1호기는 1,000kw 정도의 중형발전소를 2호기는 500kw의 소형발전소를 건설하며 상당한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다.
연탄호 발전소는 1,400kw의 전력용량을 신평읍 발전소는 3,000kw의 전력용량이 은파호 발전소는 5,200kw의 중형발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흥호 발전소는 5,000kw 규모의 중형발전소로 이루어져 있다.
2002년에는 단천군에 위치한 단천청년발전소를 완공하였으며 전력용량만 하더라도 1,000kw의 전력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상원군민발전소는 3,000kw의 전력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리명수-12호 발전소 역시 1,000kw 정도의 중형발전소를 자랑하고 있다.
2005년에는 2,000kw의 전력용량을 자랑하는 라선청년발전소와 함주군에 위치한 금진강흥봉청년발전소를 건설하여 10,000kw의 전력용량을 자랑하고 있어 상당한 중형발전소 위주로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5. 말년 및 사망 과정[편집]


결국 강계정신을 통한 지방산업공장과 가정 그리고 군수공장을 공급하고도 남을 전력량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중소형발전소는 계속 건설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를 기준으로 연형묵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복권이 되었다.
특히 2001년에 김정일이 중국의 발전상황을 관찰하면서 10월 3일 담화를 발표하면서 7.1 경제개혁조치를 시행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였으며 이것의 영향은 연형묵이 중국에서 김정일 보좌와 함께 직언함으로써 2002년 장성택과 박봉주, 박남기 등 상당한 거물들이 방남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봉주장성택, 박남기, 로두철 등 상당한 인물들이 관람하면서 김정일에게 보고할 내용들을 작성할 때 상당한 보고용을 작성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박봉주와 박남기, 로두철은 상당부분을 개혁에 관련된 내용을 김정일에게 보고를 제출하였다.
그전에 김정일은 특히 박봉주를 포옹하며 환영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가장 총애한 인물중에 한명으로써 로동신문과 조선중앙TV에서 밝히고 있다.[4][5]
특히 박봉주의 보고를 듣고 7.1 경제개혁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내각 총리에 취임한 박봉주는 2003년을 기준으로 종합시장의 발달을 본 대한민국의 반영을 정확히 하면서 연형묵이 김정일의 지시를 박봉주에게 대신 전하게 되어 경제개혁조치를 발판으로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북한은 이때를 기준으로 상당한 식량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이것을 발판으로 사회주의 상업법과 무역법 그리고 양어법, 가격법 등 상당한 법안들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제정되거나 개정이 되었다.[6]
그리고 이때의 북한의 사유화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은 10% 규모로 외화벌이 사업소는 30%대이며 상점과 식당 혹은 편의봉사업은 대부분 50% 이상이 초과하였으며 이는 박봉주와 연형묵이 있었기에 가능하면서 이때 김정일은 박봉주를 신임하게 되었으며 연형묵은 박봉주의 뒤를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연형묵도 온전할 수가 없었으며 특히 2004년에 췌장암에 발병되면서 결국 1998년에 자강도 인민위원장을 사임하고 2005년에는 췌장암으로 인하여 박도춘에게 위임하면서 김정일이 수술을 받으라 권유하고 유럽으로 보내서 수술을 받게 하였다.[7]
결국 2005년에는 결국 자강도당 책임비서도 결국 그만두며 결국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결국 10월 22일 결국 사망하게 되면서 연형묵의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하게 되어 김정일과 박봉주, 김영남, 조명록 등 상당한 거물들이 조문을 왔으며 김정일이 연형묵이 쓴 글을 보고 연형묵의 시신을 만지며 슬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8]


6. 여담[편집]


  • 연형묵은 검소하게 살기로 유명한 사람이며 3명의 아이를 입양하면서 친자식처럼 키운다고 알려져 있어 박봉주 못지 않은 직언가에 청빈함으로 유명하다.해당 기사

  • 김정일이 박봉주 역시 신뢰하는 면이 큰 만큼 연형묵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그래서 김정일이 항상 연형묵에게 별명은 나의 친구나 다름 없다는 신뢰를 보내고 있다.

  • 1998년 김정일이 자강도를 현지지도 하였을 때 연형묵이 인민이 굶고 죽는 상황이니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하게 건의하였으며 호위병이 연형묵에게 권총까지 겨누었으나 김정일이 제지하면서 오히려 연형묵을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으며 이때의 김정일은 내앞에서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연형묵 뿐이라는 평가가 전해지고 있다.해당 기사


  • 현재의 연형묵의 대한 평가는 상당히 후한편이며 박봉주 다음으로 생전의 연형묵 전 총리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부정부패가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배짱이 있고 바른 소리, 쓴소리를 잘해 주민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연형묵과 박봉주는 대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해당 기사

  • 특히 연형묵 총리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면 결국 1990년대에는 김용순, 허담, 연형묵이면서 2000년대에는 김용순, 리용철, 연형묵으로 상당부분 김용순과 함께 김정일이 두번씩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중에 한사람으로 연형묵이 거론되고 있다.[9]


7. 같이보기[편집]




8. 경력[편집]


2005.06 자강도 당 책임비서(해임)
2003.09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2003.09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1998.09 국방위원회 위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1995.02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4.07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3.04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92.12 정무원 총리(해임)
1992.12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강등)
1992.12 자강도 당 책임비서
1992.12 인민위원회 위원장
1990.05 정무원 총리(유임)
1990.04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88.12 정무원 총리
1986.12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1986.11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5.11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회 위원장
1985.10 정무원 제1부총리
1982.02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
1980.10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정치국 위원
1980.10 비서국 비서
1977.12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74.12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보선)
1972.12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2.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71.12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1970.1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0.1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1968 조선로동당 중공업부 부장
1967.11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62 조선로동당 중공업부 부부장


9. 참고 자료[편집]


  • 북한 8월 3일 인민소비품생산운동 연구 - 윤경은 | 북한대학원대학교 | 2017.12
  • 북한의 1990년대 경제위기와 기업 행태의 변화 - 이석기 | 서울대학교 | 2003.08
  • 북한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전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1.12
  • 북한의 기업관리체계 및 기업행동양식 변화 연구 - 이석기 | 산업연구원 | 2003.12
  • 북한의 제2경제 - 최수영 | 통일연구원 | 1998.02
  • 북한에서 시장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경제구조의 변화 - 정은이 | 아세아연구 | 2011
  • 민주조선 | 1989.08.11 ~ 1989.08.21
  • 민주조선 | 1989.05.27
  • 북한의 상업활동 변화와 2000년 이후 상업법 개정 - 김영희 | 통일연구원 | 2015.09
  • 북한의 군수산업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 분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0.11
  • 북한 군사경제 비대화의 원인과 실태 - 오경섭 | 통일연구원 | 2018.12
  • 북한 외화 통용 실태 분석 - 이석기 | 산업연구원 | 2012.12
  • 정창현, 인물로 본 북한 현대사(서울: 선인, 2011)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2009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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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섹스 스캔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 연합뉴스 기사가 결국 날라가서 결국 이를 대체할 기사로 교체하였으며 실제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간 군수공장에서 생필품을 생산한 종류를 소개하는 글로 대체하도록 한다. 연합뉴스가 날라갔다니[3] 이때 호위병이 연형묵에게 총을 겨누었으나 김정일이 제지하면서 오히려 연형묵을 칭찬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4] 이때 가장 환영을 잘받았던 인물이 바로 박봉주였으며 김정일도 박봉주를 환영하며 가장 박봉주를 신임하게 되었다.[5] 그 반대로 폭탄주를 즐겼다고 소문이 났던 장성택은 세번째 숙청을 당하게 되는 이유였으며 가장 핵심적은 박봉주 총리한테 항명한 신기남과 더불어 혁명화를 다녀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6] 이것을 계기로 돈주들이 대부분 무역회사를 설립하면서 승인을 받고 건설이나 혹은 제조업을 키우게 되거나 혹은 상점 혹은 식당을 만들거나 가내작업반을 설립하면서 공장제 수공업을 키우게 된다.[7] 하지만 연형묵의 췌장암은 이미 늦었다고 밝히고 있다.[8] 그 이유는 연형묵이 김정일에게 항상 건강하라는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항상 북한을 걱정하는 그러한 생각이라는 의미라고 밝히고 있으며 결국 이것이 현실화가 되어 결국 박봉주 총리가 박남기에게 밀리는 결과와 함께 내각이 당과 군에게 결국 권력투쟁에서 밀리는 결과가 나왔다.[9] 김용순은 대남비서로써 상당부분 유명한 사람이면서 허담은 국제담당비서 혹은 외교부장으로써 상당부분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던 인물 중에 하나이다. 특히 이용철은 박남기가 처형되는 일화를 조직지도부의 문서로 간직하였던 일명 데스노트에 나오는 그러한 악마로 비유되는 그러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