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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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1929년 10월 2일 ~ 2009년 3월 31일

북한의 정치인. 내각 총리, 정무원 부총리 등 요직을 지냈으며 유명한 7.1 조치를 취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29년 지금의 평안북도 정주시인 일본 제국령 조선의 평안북도 정주면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방 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프라하 공대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북한으로 귀국한 후 구성공작기계공장 지배인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부장에 임명되면서 1972년 12월 5기 대의원에 선출하였고 1973년 9월 정무원 부총리(~1975) 겸 국가계획위원장(~1977)에 임명되었다.
1978년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면서 1978년부터 3년간 주석부 참사실장으로 있으면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경제 부관으로 활약하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1982년 정치국 후보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원회 위원장을 거쳐 1982년 12월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85년 9월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돌아왔으며 1986년 11월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면서 12월에 정치국 위원, 제1부총리에 임명이 되었다.
1987년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재임명되었으나 계속되는 경제난 속에서 1988년에 한번 해임되는 소동을 겪으며 1989년 11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하였으며 1987~1988년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폴란드, 루마니아를 방문하였다.
1990년 연형묵 내각에서 다시 한번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1992년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고 조선국제합영총회사 이사장에 임명되었으며 1992년 강성산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총리로 유임되었다.
파키스탄, 중국 등을 방문하여 경제협력을 추진하면서 부총리 재임 시 정무원을 강화하려는 김정일의 지원을 받으며 이후 1997년 강성산 총리가 실각하면서 정무원 총리 대리를 거쳐서 1998년 9월 정식으로 개편된 내각 총리직에 임명되었다.
김정일이 임명한 첫 총리였던 것이며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에 각각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위임하였으며 그의 권위는 상당하면서 200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돌 열병식에서 주석단 서열 5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가 임명된 시기는 고난의 행군으로 온 나라가 신음하던 상황이었으며 김정일이 시도하였던 가내작업반 관리운영규정과 분조관리제와 같은 소극적 경제개혁조치와 전통적인 속도전 운동에서는 계속해서 실패하게 되었다.
이에 김정일은 1999년 6월 홍성남 총리에게 내각이 경제를 통일적으로 장악하여 경제관리방식을 과감하게 개편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2000년 6월 3일 경제관리방식에 대한 대담한 개혁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홍성남은 2000년 6월 삼성 대북투자조사단과 만나 삼성의 북한 투자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6.3 그루빠를 조직하면서 2002년, 당,군 경제의 축소와 경제하부기관 조직 개편 그리고 기업 자율권 확대와 번수입에 의한 기업관리과정, 물가와 임금 현실화, 노동 인센티브 보강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김정일이 이 중에서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경제 축소를 제외한 부문을 받아들이며 이에 따라 홍성남은 2002년 역사적인 7.1 경제개혁조치를 시행하면서 북한에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였다.
그의 밑에서 박남기, 곽범기, 저창덕, 박봉주 등 김정일 시대의 주요 테크노크라트들이 부총리,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치면서 성장하였으며 상당한 역사 과정을 변화시키게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공급 부족과 김정일의 선군경제의 집착과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신의주 특구의 실패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홍성남 내각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홍성남은 2003년 3월에 김정일에게 종합시장 장려를 건의하면서 5월에 허락을 받아 농민시장을 국가 유통망으로 흡수하면서 물가 안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계속된 경제 부진에 실망한 김정일은 2003년 9월에 홍성남을 해임하고 화학공업상 박봉주를 새로운 총리에 임명하면서 더욱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이때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의 경제축소과정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내각 총리에서 해임된 홍성남은 함경남도 당 책임비서로 이동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함경남도 당 책임비서를 역임하다가 2009년 3월에 79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되었으며 이때 국가장의위원회가 홍성남 전 총리의 국장을 진행하게 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인물 주요정보』(서울: 통일부, 2020)
  • 홍민 외, 『북한 변화 실태 연구: 북한 시장화 종합 분석』(서울: 통일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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