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야구선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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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장훈의 선수 시절 커리어를 다룬 문서.


2.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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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나니와 상고 졸업을 앞두고 킨키 대회와 한국 순회경기 때의 맹활약을 기억하는 프로 스카우터들로부터 뜨거운 추파가 들어왔다.[1] 애초 장훈은 내심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고교 시절부터 장훈은 성품이 거친 선수라는 선입견이 굳어 있었고, 게다가 장훈을 영입하려 했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요미우리 자이언츠 프런트와의 사이가 벌어진 상태여서[2] 끝내 제의를 받지 못했다.

대신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당시로선 거액인 계약금 6백만 엔을 제시하였지만 장훈은 이왕 야구를 하려면 꽃의 에도, 즉 도쿄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토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이던 이와모토 요시유키가 직접 히로시마의 집을 찾아와 장훈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좋은 선수로 키우겠다"라고 간청하여 결국 장훈은 계약금 2백만 엔, 월봉 4만 5천 엔[3]도에이 플라이어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4][5]

장훈은 계약금으로 받은 1천 엔 지폐 2천 장을 신문지에 꽁꽁 싸서 품에 안고 형님과 같이 야간열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고, 어머니는 "도대체 네가 어디서 이렇게 큰 돈을 벌어 왔느냐. 설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라고 거의 혼절할 정도로 놀라워하자 형님은 "훈이가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번 돈이다" 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 계약금 2백만 엔 중 10만 엔만 장훈이 갖고 나머지 금액을 전부 고향 히로시마에 53평 규모의 집을 짓는 데 썼다.[6] 새 집에 이사하던 날 어머니와 형님, 누나가 감격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장훈은 이때 지은 새 집 2층에 자기 방을 만들어 히로시마 원정 경기 때마다 사용했다.

당시 구단주였던 토에이의 사장 오카와 히로시는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7]에 걸려 장훈의 1군 출장이 어렵게 되자 구단주 회의에서 규약 변경을 강력히 주장, 출생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선수[8]는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약을 변경시키는데 앞장섰다.[9] 규약이 바뀌기 이전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귀화하여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은 장훈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어머니께 상의를 드렸다가 "내가 그러라고 야구를 시킨 줄 아느냐?! 그 따위 짓 하려거든 당장 야구 때려치우고 히로시마로 돌아오거라!!" 라면서 불호령만 들었다고(...) 한다. 훗날 장훈이 출연한 KBS의 다큐멘터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봤었다." 라고 증언하였다. 이에 장훈이 귀화할 수 없다고 설명하자 오카와 구단주는 감탄하면서 "역시 한국 여성은 강하다. 그렇다면 외국인이라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도록 해 보겠다" 라며 다른 팀 구단주들을 설득한 끝에 앞에서 얘기한 대로 규약 변경을 실현시켰다.[10] 그리고, 장훈은 2023년 현재까지도 일본으로 귀화를 선택하지 않고 여전히 대한민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입단한 장훈이 첫 전지훈련 때 타격 코치이던 마츠키 켄지로를 만난 것은 장훈으로선 큰 행운이었다.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장훈을 개막전 4번타자로 출장할 수 있도록 만들라"고 지시받은 마츠키 코치는 처음엔 새파란 고졸 신인을 개막전 출전, 그것도 4번타자로 만들라는 얘기에 앞이 캄캄했지만 장훈의 스윙을 보고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예감했다. 한편으로 마츠키 코치는 화상으로 불구가 된 장훈의 오른손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도 스윙 만으로 단번에 "오른손이 약해서 팔로우 스윙이 제대로 안된다"라고 지적하며 오른팔로만 토스 배팅을 시키고 오른손으로 샌드백을 두들기게 하는 등 장훈의 오른손 강화를 중심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마츠키는 고교 시절 나름 슬러거로 이름을 날린 장훈을 "프로에서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슬러거 보다는 중장거리 타입의 타자가 유리하다"고 설득하여 그의 타격 정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동계훈련 내내 장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어깨가 아파 세수도 못할 정도로 훈련에 매달렸고, 그의 근성을 알아본 마츠키 코치도 한 마음이 되어 장훈을 강하게 트레이닝 시키며 마츠키 자신의 주특기이던 광각 타법을 전수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열망에 불타던 제자와 그를 최고의 타자로 키워 보겠다던 스승의 의지가 훌륭하게 결합된 셈이다.

이를 토대로 장훈은 비록 4번타자는 아니었지만, 프로 데뷔전인 1959년 4월 10일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시즌 개막전에 6번 좌익수로 선발출장하게 되었다.[11] 데뷔전에서 잔뜩 쫄아있던 장훈은 당대 최고의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를 상대로 첫 타석 스탠딩 삼구 삼진을 먹고 수비에선 평범한 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이른바 만세를 부르는 등 실수 연발로 죽을 쑤기는 했지만[12][13], 다음 날인 4월 11일 개막 2차전에 전날과 같이 스타팅 6번 좌익수로 그라운드에 나선 장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한큐 선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를 날리며 프로 첫 안타를 신고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엔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까지 터뜨리면서 비로소 장훈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이렇듯 장훈은 데뷔 첫해부터 신인답지 않은 비범한 활약을 보이면서 125경기 출장, 115안타, 타율 0.275, 13홈런, 57타점, 10도루의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수상, 프로 무대에 화려하게 첫 발을 내딛었다.

이듬해 1960 시즌, 19세 나이로 최연소 4번타자란 기록을 세우며 3할을 쳤고, 그 다음해인 1961 시즌엔 첫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그리고 1961 시즌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한[14] 명장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드디어 사제관계로 만나 그의 뛰어난 지도 하에 팀은 1962년 구단 사상 첫 퍼시픽리그 우승에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 명장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이끌던 난적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제패했고,[15][16] 장훈은 그 해 퍼시픽리그 MVP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이후로도 장훈은 1963~1965년에 슬럼프로 고생하기도 했지만[17] 이를 극복하고 1967~1970년 시즌 4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1970년에는 .383의 타율을 기록, 16년뒤 랜디 바스가 .389로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타율 기록 보유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후 구단이 매각을 거듭하며 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로 팀명이 바뀌던 어수선한 와중에도 굳건히 팀의 중심타자 자리를 지켰지만, 1974년 구단 사장, 감독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 나카니시 후토시와의 관계가 나빠지면서[18][19] 매년 스토브리그트레이드 후보에 오를 정도로 구단과의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결국 1975년 시즌 종료 후 장훈은 미하라 오사무와의 담판을 통해 "만약 내가 필요없다면 팀에서 내보내줬으면 한다"고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고, 미하라도 "자네를 영입하겠다는 구단이 있으면 보내주겠다"라고 승낙하며 17년간 정들었던 친정팀을 떠나게 되었다.

참고로 장훈은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시절인 1973년 팀 선배였던 도바시 마사유키 감독이 "나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여 플레잉 코치(1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닛폰햄 파이터즈의 유니폼을 벗은 장훈은 당초 본인이 학창시절을 보낸 제 2의 고향인 오사카 부근이 연고지이며 재일 한국인 팬이 많은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당시 감독이던 요시다 요시오와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고 오사카에 집까지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나가시마 시게오의 러브콜을 받고 곧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심했고, 요미우리 V9 시대의 주전투수 타카하시 카즈미, 준레귤러 외야수 토미타 마사루와의 1:2 트레이드로 1976년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된다.[20]

위에 언급한 대로 장훈은 학창시절 미즈하라 시게루의 요미우리 입단 제의를 받았다가 형님의 권유로 계속 학업에 정진하며 미즈하라,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과의 인연을 잠시 접어두었는데, 결국 장훈은 뒷날 미즈하라 감독과 토에이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고 요미우리 유니폼도 끝내 입었으니 인생사 역시 알 수 없는 노릇.

나가시마 시게오가 1974년 은퇴한 후 외롭게 중심타선을 지켰던[21] 오 사다하루에게 막역한 동갑내기 친구 장훈의 입단은 큰 선물이었고 둘은 OH포를 형성하며 요미우리 타선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이 당시 장훈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요미우리 수뇌진은 V9 시대의 주전 좌익수였던 타카다 시게루를 다른 외야 자리도 아닌 무려 나가시마의 자리였다가 은퇴 후 데이비 존슨이 맡던 3루수로 이동시키고 존슨은 2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는 등, 수비 포진을 대거 변경하는 초강수까지 둘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6년 6월 10일, 코라쿠엔 구장에서의 대 한신 타이거스 홈경기에서 통산 2500번째 안타를 치는 장면. 다음 타자였던 오 사다하루가 우월 투런홈런으로 장훈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장훈은 요미우리 이적 후 1976~1977년에 2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 타격 2위를 마크하였고, 1978년엔 무릎 부상[22]에도 불구하고 3할 타율을 지키는 등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1979시즌 초반 중심성 망막염으로 시력이 나빠지는 바람에 시즌의 거의 절반을 말아먹고 말았다. 결국 병에서 회복되어 복귀하긴 했으나 그해 77경기 출장에 60안타, 타율 0.263에 그치며 데뷔 이후 계속 이어오던 연속 세 자리수 안타 시즌은 20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여담으로 요미우리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극성맞은 카프 팬들이 고향 히로시마 구단에 오지 않고 도쿄 팀으로 간 장훈을 배신자 취급하며 요미우리 경기 때 장훈 타석만 돌아왔다하면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


4. 롯데 오리온즈 시절[편집]


파일:/image/295/2012/01/02/%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9%25DA%25B5%25BF%25C8%25F1.jpg
3천안타 달성 당시.[23] 사진 왼쪽에 등번호 2번 선수는 토에이 시절부터 절친한 후배 백인천이고[24] 사즌 오른쪽의 등번호 7번 선수는 친형 레론 리[25]와 함께 롯데의 외국인 중심타선을 구축했던 레온 리이다.

시력 문제와 노쇠화로 인해 부진한 성적에 그친 채 1979년 시즌을 마무리한 장훈은 이듬해인 1980년, 예나 지금이나 부진하면 가차없이 내치는 요미우리으로부터 거의 쫓겨나다시피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26] 3천 안타까지 불과 39개만 남았던 상황이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3천 안타를 기록한 후 은퇴하고 싶어했던 장훈은 크게 섭섭해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롯데에서 3천 안타를 채우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하겠다는 심정으로 이적했다. 비록 나이가 많았고 기량도 하락한 만큼 출장기회를 예전보다 많이 얻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훈은 롯데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결국 그해 5월 28일, 카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홈경기에 출장한 장훈은 6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상대투수 야마구치 타카시[27]를 우월 투런 홈런으로 두들겨 3천번째 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3,000안타 기념사진[28] 또한 같은 해 9월 28일 카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더블헤더 홈경기 1차전에서 1회 말 야스키 쇼지의 대타로 출장하여[29][30] 상대투수 쿠보 야스오[31]의 공을 쳐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로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다.[32]

이후 장훈은 1981년 시즌까지 뛰면서 롯데의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공헌했고, 그해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고 23년간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났다.

현역 말기 시절인 1980년 당시의 롯데 오렌지 주스 광고(2분 3초~17초)

은퇴 후인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기록[편집]


프로 데뷔 후 20년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 이상을 기록하였고, 통산 안타는 3085개. 이는 일본프로야구 1위이자 아시아인 프로야구선수의 단일리그 통산 최다안타 기록이다. 통산 타율은 와카마츠 츠토무의 뒤를 이은 역대 4위이며 1967~70년 4시즌 연속 타격 1위를 포함하여 총 7번의 수위타자를 수상하였다(이치로가 타이 기록을 세움). 요미우리로 이적한 첫 해 1976년에 양대리그 수위타자를 달성할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요미우리가 정규시즌을 끝마친 시점에서 타율 1위(.35477)를 지키고 있었으나, 시즌 막판에 주니치 드래곤즈야자와 켄이치타율 .521(48타수 25안타)라는 미친 타격 페이스로 장훈을 추격하면서 결국 요미우리가 정규시즌을 마친 뒤 주니치의 최종전이었던 히로시마와의 더블헤더 1차전(2차전은 결장)에서 4타수 3안타를 기록해 6사(.00006) 차이로 장훈을 제치고 타율 1위(.35483)를 차지하며 장훈의 양대리그 수위타자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181cm, 85kg의 당시로서는 건장한 체격에[33] 발도 빨라서, 1963년에는 41도루로 난카이 호크스 소속이던 히로세 요시노리의 45도루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하여 통산 319도루로 도루성공률도 약 73%로 준수한 편이다.[34] 일본리그에서 통산 500홈런 이상, 200도루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장훈과 아키야마 코지(현 소프트뱅크 감독), 기누가사 사치오 단 3명 뿐이고, 통산 300도루 이상으로 범위를 좁히면 장훈이 유일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타율 3할-3000안타-5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35]뿐이다.[36] 2013년 대만 출신의 양다이강이 도루왕을 차지하기 전까지 전신(前身)구단을 포함해 도루왕을 배출한 적이 없던 닛폰햄 구단 사상 시마다 마코토와 함께 도루 1위 타이틀에 가장 가까웠던 선수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코지 등 여러 명의 강타자를 배출한 히로시마 지역에서도, 그 대표적인 선수는 장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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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은 장훈 이전에는 에노모토 키하치(전 롯데)와 콘도 카즈히코(전 타이요)[37]가 갖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역시 현재에 와서도 「안타 제조기라고 하면 역시 하리모토 이사오이다」라고 하는 평이 절대 우세하다. 또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타구를 뿌리는 모습에서 광각 타법, 스프레이 타법의 대명사로도 알려져 있다. 이 문단 바로 위의 사진에서도 아예 원조 안타제조기 하리모토 이사오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놨다.

반면 공격에서는 S급이었지만 그 빠른 발에도 불구하고 수비는 본인도 인정했을 정도로 너무 서툴러서 거의 최악 수준의 돌글러브였다. 오죽하면 공격에서도 수비에서도 모두 안타 제조기(...)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외야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책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요미우리 시절에는, 장훈이 지키는 좌측 외야 쪽으로 라인 드라이브땅볼이 굴러가면, 유격수였던 코노 카즈마사가 자주 커버를 하려고 따라갔을 정도였다.

토에이 시절 중견수를 보던 백인천좌익수 장훈의 좁은 수비 범위를 커버해주느라 힘들어서 애를 많이 먹었는지 어느 날은 우스갯소리로 "장이형, 형님 연봉 중에서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 라면서 농담을 던졌고, 이에 장훈은 가볍게 꿀밤을 때리면서 "이 놈아, 내가 너 수비 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 해?" 라고 껄껄 웃으면서 받아쳤다고 한다.[38] 장훈은 어린 시절의 오른손 장애 때문에 글러브로 라인 드라이브같은 빠른 공을 잡으면 눈에서 불꽃이 보일 정도로 아팠다고 밝혔을 정도였고, 고등학교 시절엔 투수를 했을 정도로 강한 어깨를 가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강도가 높은 훈련을 받아왔던 혹사 때문에 그 어깨까지 망가지면서 스스로 수비에는 영 자신이 없어했고 부족한 수비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장훈은 약한 수비력 따윈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운 장타 슬러거 능력이 뒷받침을 해줬기 때문에 경기력에서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도 많은 나이에다 노쇠화, 외부 영입 출신이라는 팀내에선 다소 불리한 위치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한 수비력 문제가 가장 컸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리그 소속이고 또한 1루에는 일본 프로야구 최고 스타인 오 사다하루가 있었기에 장훈을 1루수로 전향시킬 수도 없이 계속 외야수비에서도 기용해야 했는데, 요미우리에 왔을 때의 장훈은 노쇠화로 젊었을 때의 스피드도 잃어버리며 더욱 외야수비에 고충을 겪었던 것. 데뷔팀이었던 닛폰햄 파이터즈도 당시 퍼시픽리그지명타자 제도가 1975년에야 처음 생겼기에 요미우리와 같은 고민거리를 가졌었다.

대개 OB선수들 능력 후하게 주는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에서조차 장훈의 수비력은 E(7), 어깨는 E(6), 에러 회피는 D(8)을 배정했을 정도인데, 이건 과거작 얘기고 최신작 2016에는 수비력 F(29), 어깨 D(52), 포구[39]는 F(36)를 배정해줬다.

장훈이 세운 수많은 기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3085안타이다. 유일하게 깰 가능성이 있었던 스즈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결국 은퇴했고, 일본 리그 내로 한정한다면 앞으로도 거의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다. 본인도 이 최다안타 기록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치로가 내 기록을 넘는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는 일본보다 한 시즌 당 경기수가 많기 때문에 단순한 참고기록 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기록은 나의 것'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훈 자신도 '안타를 때리는 기술만이라면 나를 포함한 누구도 이치로를 이길 수 없다'며 이치로의 타격 기술에 관해서는 인정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16일, 직접 관전하러 온 장훈 앞에서 결국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기록 포함이지만) 3000안타를 넘어서자, "분하지만 어쩌겠나. 같은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치로를 극찬했다.[40]


5.1. 연도별 역대 기록[편집]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59
도에이 플라이어즈
125
454
.275
115
18
5
13
57
48
10
29
.435
.328
.765
1960
106
414
.302[41]
116
25
3
16
56
49
15
26
.508
.351
.859
1961
129
526
.326
159
31
10
24
95
77
18
46
.596
.401
.997
1962
133
528
.333
157
24
4
31
99
89
23
86
.597
.440
1.037
1963
150
626
.280
148
16
7
33
96
90
41
92
.524
.389
.913
1964
129
547
.328
151
21
6
21
72
85
31
78
.536
.426
.962
1965
132
538
.292
133
13
3
23
88
61
29
72
.486
.394
.879
1966
122
493
.330[42]
146
13
2
28
90
67
10
43
.558
.391
.949
1967
120
499
.336
139
18
3
28
88
72
18
66
.597
.439
1.035
1968
114
432
.336
122
12
2
24
65
70
13
61
.579
.437
1.015
1969
129
557
.333
160
27
1
20
67
77
20
71
.519
.421
.940
1970
125
537
.383
176
16
2
34
100
92
16
64
.649
.467
1.116
1971
128
546
.313
150
21
3
26
78
73
18
59
.531
.390
.921
1972
127
548
.358
169
25
4
31
89
93
10
69
.625
.443
1.068
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28
550
.324
143
18
0
33
93
77
12
93
.590
.448
1.038
1974
닛폰햄 파이터즈
120
491
.340
138
20
3
14
62
64
14
82
.507
.452
.959
1975
119
473
.276
113
12
2
15
46
45
6
58
.424
.367
.791
1976
요미우리 자이언츠
130
574
.355[43]
182
35
5
22
93
89
8
51
.571
.417
.998
1977
122
493
.348[44]
153
16
6
24
82
67
3
40
.575
.409
.984
1978
115
456
.309
131
17
1
21
73
53
1
27
.502
.353
.854
1979
77
255
.263
60
7
0
8
32
26
1
23
.399
.333
.732
1980
롯데 오리온즈
102
370
.261
89
9
0
12
39
50
0
26
.393
.317
.710
1981
70
175
.219
35
6
0
3
16
9
2
12
.313
.273
.586
통산
NPB 23년
2752
11122
.319
3085
420
72
504
1676
1523
319
1274
.534
.399
.933

  • 파란색 굵은 글씨는 해당연도 1위 기록, 붉은색 굵은 글씨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기록
[1] 당시 "간토에 와세다 실업고 오 사다하루가 있다면 간사이에는 나니와 상고 장훈이 있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2] 195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끝으로 미즈하라는 더 이상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바로 다음 해인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년 연속으로 숙적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니시테츠 라이온즈에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내줬고,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난카이 호크스에게 4전 전패로 우승을 내줬다. 거기다 1958년과 1959년엔 각각 이나오 카즈히사스기우라 타다시, 이 2명의 투수에게 역사상 유례없는 일본시리즈 4승(즉, 최동원의 원조)을 헌납하며 패배했다. 이러니 우승을 원하던 프런트와의 관계가 결코 좋을 리 없었다.[3] 이사비용으로 30만 엔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4] 프로입문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오 사다하루는 계약금 1천 8백만엔, 월봉 11만 엔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5] 여담이지만 당시 이 인터뷰를 했을때, 그때로 돌아갈수 있다면 어쩌겠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주니치로 갔을거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센트럴 리그퍼시픽 리그의 인기와 위상이 그렇게 차이나는 지는 몰랐다,라면서 웃어넘겼다. 노무라 카즈야의 일화도 그렇고, 당시 퍼시픽 출신들은 센트럴 리그에 비해 성적에 비해 인기가 없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6] 2층은 살림집으로 짓고, 1층에는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운영하던 호르몬야키 가게를 확장하여 새로 냈다고 한다.[7] 당시 규약은 3명 보유에 2명 출장. 이미 도에이는 외야수 잭 래드라와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 1루수 스탠리 하시모토를 보유하고 있었다.[8] 장훈의 출생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9] 여담으로 일본프로야구드래프트 제도가 도입된 초창기인 196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외국 국적을 보유한 선수는 드래프트 참여 대상에 제외된다는 허점을 이용해 아직 대한민국 국적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김일융(일본명 니우라 히사오)을 중퇴시키고 영입한 니우라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학교에 진학한 선수는 국적을 막론하고 모두 드래프트 과정을 거쳐 영입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새롭게 생겼다.[10] 그리고, 이 규정은 1982년에 출범하는 KBO 리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만 국적의 소소경, 유혜정일본 국적의 히로나카 시히로가 그 혜택을 본 대표적인 사례다.[11] 일본 언론에 따르면 2013 시즌 개막전 오타니 쇼헤이 이전 가장 최근의 고졸 신인 개막전 출전이라 한다.[12] 이날 도에이의 이와모토 감독은 만세를 부른 장훈을 곧바로 교체하여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질책 차원이 아닌 루키가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그리고 장훈은 그날 저녁 숙소에서 2군으로 떨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해소하려 밤 새 불 꺼진 방에서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13] 동갑내기이자 같은 해 입단한 한큐의 아다치 미츠히로는 4월 10일 개막전에서 7회에 구원등판하여 3이닝을 잘 막으며 데뷔 첫 승을 올렸다.[14] 1960년 교진군미하라 오사무가 갓 부임한 만년 세리그 꼴찌팀 다이요 훼일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빼앗기자(거기다 다이요는 1960년 일본시리즈에서 니시모토 유키오다이마이 오리온즈를 4전 전승, 그것도 전부 1점 차 승리로 꺾고 우승하기까지 했다!) 빡친 교진군 프런트가 미즈하라를 해임시켰다. 미즈하라는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토에이 감독으로 이적한다.[15] 고시엔에서 열린 7차전, 3승 1무 2패로 앞서고 있던 도에이는 9회까지 한신과 0대 0으로 팽팽하게 맞서다가 연장 10회초 선두타자 안타로 출루하여 3루까지 진출한 장훈을 다네모 마사유키가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불러들이며 1대 0 리드를 잡았다. 미즈하라 감독은 수비 강화를 위해 장훈을 좌익수에서 빼고 대수비 요원으로 교체했지만, 10회말 한신의 후지이 에이지에게 동점타를 얻어맞았고 12회초 공격에서 장훈 대신 타석에 들어선 히모토 사치오가 범타로 물러나자 미즈하라 감독은 덕아웃의 선수단이 다 들을 정도로 "내 잘못이다. 장훈을 (교체하지 않고)좀 더 끌고 갔어야 하는건데"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한마디에 장훈은 '감독님이 나를 정말 신뢰하는구나'라며 감명받았고, 다행히 도에이는 후속 타자 사이온지 아키오가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좌월 솔로포를 뽑아낸 데 이어 에이스 도바시 마사유키가 12회말 한신 공격을 틀어막으며 일본 제일을 차지할 수 있었다. 우승 인터뷰 때 미즈하라 감독은 한번 더 "10회말 수비 때 장훈을 뺀 것은 나의 실수였다"라며 장훈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고 한다.[16] 여담으로 이해 일본시리즈는 양대리그 시행 이후 처음으로 양측 다 센트럴리그(한신), 퍼시픽리그(토에이)를 처음 우승하고 치르는 일본시리즈였다.[17] 슬럼프라지만 이 기간 가장 OPS가 낮았던 1965년에도 .292/.394/.486 OPS .870 23홈런 88타점 29도루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타율 .280을 기록하며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한 63년에는 33홈런-41도루로 30-30 클럽에 가입하고 OPS .913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여전히 정상급 타자였다는 것.[18] 미하라는 닛폰햄 구단 사장에 취임한 후 팀의 체질 개선을 위해 백인천 등의 토에이 플라이어즈 시절 주전을 맡은 고참 선수들을 잇따라 방출시켰는데, 이 가운데 장훈에 대해선 "그는 야구계의 이다"라는 폭언을 날리면서까지 방출에 힘을 썼다. 단 이는 단순한 혐한 발언이 아니라, 당시 토우세이카이정건영과 장훈이 친밀한 관계라는 보도가 나온지라 자칫하다 야쿠자들이 장훈과 같은 스타 선수들과의 연줄을 통하여 승부조작 등에 개입해 검은 안개 사건과 같은 사태가 또 다시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발언이었다.[19] 1975년 퍼시픽리그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했고 장훈의 수비가 오른손의 장애 때문에 리그 최악이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이라 나카니시 감독은 장훈을 지명타자로 돌렸다. 누가봐도 합리적 결정이었지만 정작 장훈은 꺼림찍한 기분이었고 이게 타격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해 장훈은 신인 시즌 이후 규정타석을 채운 시즌 중 가장 최악의 성적인 타율 .275/OPS .791, 15홈런 46타점을 기록하며 안타제조기의 강타자치곤 다소 부진한 시즌으로 1975년을 마무리지었다.[20] 장훈은 요미우리 입단 후 요시다 감독에게 약속을 못지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요시다는 "가고 싶은 곳에 가야지 어쩌겠나" 면서 장훈을 격려했다고 한다.[21] 물론 구단에서도 나가시마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1975년 거물 메이저리거 데이비 존슨을 영입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작 존슨은 입단 첫 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데드볼 부상까지 겹치면서 타율 1할대로 완전히 망해버렸고, V9을 함께했던 다른 선수들도 이전의 ON포의 빈 자리를 메꿀만한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22] 그 해 주루코치로 부임한 요나미네 카나메가 2루로 들어갈 때 야수의 글러브를 발로 차라는 조언을 했다. 야수의 실책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는데 장훈은 경기 중에 요나미네의 조언대로 실행했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23] 3천번째 안타인 홈런을 날린 장훈은 마음 속으로 베이스를 밟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차분히 홈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니 헬멧까지 벗어 던지고 좋아 날뛰면서 다이아몬드를 일주하고 있더라고 털어놓았다. 덧붙이자면 허용투수였던 야마구치 타카시의 눈앞에서 헬멧을 던지며 날뛴 것이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장훈은 나중에 야마구치에게 사과했다고 한다.[24] 백인천은 1980년 시즌 이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해 한 해를 더 뛴 뒤 일본을 떠나 1982년 한국프로야구 MBC 청룡감독 겸 선수금의환향 했다.[25] 1977~1987년까지 11년간 롯데 오리온즈에서 활약하며 통산 타율 1위(.320)를 기록했다. 한때 아오키 노리치카가 기록을 갱신했으나 이후 노쇠화로 성적이 하락하며 현재 다시 1위 자리를 되찾았다.[26] 이후 절친인 오 사다하루도 1980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하였다.[27] 1975년 퍼시픽리그 신인왕이자 그 해 일본시리즈 MVP.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에서 어느 야구소년을 리그 최강급 구원투수로 키워냈다.[28] 사진 오른쪽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은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인 야마우치 카즈히로. 장훈과 프로 선-후배 사이로 타격왕 자리를 놓고 다투던 라이벌이었다. 코칭 시 타자를 붙잡고는 쉴 새 없이 타격 이론을 설명한다고 해서 별명이 갓파 에비센이었다.[29] 1회 말 대타였던 이유는 선발 출장한 타자가 갑자기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닌, 상대 선발멤버진 정찰용(즉, 위장오더)으로 선발 타자를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엔 선발투수 예고제 등이 없었던 시기라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를 위장오더로 선발 멤버로 내보낸 후 상대의 선발진을 확인하면 바로 첫 타석에서 대타 교체를 하는 것이 흔했다. 이렇게 위장선발로 주로 나서던 선수의 대표적인 예가 송일수.[30] 애초에 야스키 쇼지는 투수였다(…). 16년간 1군에서 뛰었던 선수로 주로 중간계투로 뛰었으나 종종 선발로도 나왔다. 특출나진 않았지만 가늘고 길게 잘 뛴 선수. 통산 445경기 89선발 33승 51패 4세이브 ERA 4.33.[31]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한신 타이거스에서 선발투수, 중간계투 등으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 킨테츠, 한신, 소프트뱅크, 두산 베어스 등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현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재임 중이다.[32] 최초 달성자는 노무라 카츠야, 2번째 달성자는 오 사다하루다.[33] 현대 야구에 오면서 점점 체격이 커져서 기준이 올라가 힘 좀 쓴다 하는 타자들은 거의 전부 엄청난 거구들이 되어서 그렇지, 장훈 정도면 결코 스피드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다. 단 지금의 기준이 아니라 평균 체격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웨이트 트레이닝 기법도 거의 전파되지 않았던 1950년대~70년대 일본인들을 기준으로 하면 그들 사이에서 장훈은 엄청난 거구이기는 했다. 게다가 저 키와 체중은 프로 입단할 때 측정한 것이고 나이 들어서는 183cm, 90kg 정도였다고 한다.[34] 장훈의 역대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즌에 30-30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율이 0.280에 그치는 바람에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에는 미치지 못했다.[35] 스탯은 여기에 있다.:# 기록은 타율 3할 2리, 안타 3283개, 홈런 660개, 도루 338개.[36] 참고로 알렉스 로드리게즈도 안타 3115개, 홈런 696개, 도루 329개를 기록했지만, 타율이 2할 9푼 5리로 3할에서 단 5리 부족했다. 스탯은 여기에 있다.: # [37] 텐빙(저울) 타법이라는 타격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자다. 배트를 거의 눕히다 못해 아래로 내리는 자세에서도 신기하게 갖다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박정태보다도 더욱 해괴한 타격 폼의 소유자였지만, 그럼에도 매년 130안타 이상은 꼬박꼬박 찍었다.[38]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절친한 사이라서 '장이형' 이라고 불렀다.[39] 2013 이전의 에러 회피(エラー回避)에 해당되는 능력치.[40] 사실 장훈은 야구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능만 믿고 노력을 안 하는 선수들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며, 이와 반대로 끝까지 일관성있게 언제나 노력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은 장훈 자신도 평생 그래왔던지라 매우 좋아한다. 이치로는 바로 자신의 재능만 믿지않고 항상 뼈를 깎는 노력까지 했는지라, 장훈의 성향이나 그동안 그가 해설을 하면서 가져온 선수 평가 관점에서도 사실 좋아하면 좋아했지 비난할 여지도 없는 선수가 바로 이치로이다. 비난은 아니지만 좀 츤츤거리는 감은 없지않아 있다[41] 타율 4위[42] 타율 2위[43] 타율 2위 - 1위와 단 1모 차이[44] 타율 2위 - 1위와 1푼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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