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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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다하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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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1981[1]
1999
2003




}}} ||
오 사다하루의 기타 직책 역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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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오 사다하루
(1984~1988)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감독
네모토 리쿠오
(1993~1994)

오 사다하루
(1995~2008)

아키야마 코지
(2009~2014)




파일:external/blueazure.jp/oh-1.jpg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 [2]

출생
1940년 5월 20일 (83세)[3]
도쿄부 도쿄시 혼조
(現 도쿄도 스미다구)
국적
[4]
신체
177cm | 79kg | O형[5]
포지션
1루수
투타
좌투좌타[6]
학력
와세다 실업 고등학교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9~1980)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76~1980)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감독 (1981~198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84~1988)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1995~2008)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7]
프런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단장 (2005~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최고고문 (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2009~)
기타
NPB 커미셔너 특별 고문 (2009~)

1. 개요
2. 선수 경력
3. 연도별 기록
4. 지도자 경력
4.1. 초대 WBC 우승 감독
5. 통산 감독 성적
6. 플레이 스타일
7. 시즌 55홈런 저지 논란
8. 기타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화민국 국적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야구감독. NPB 통산 최다 홈런, 타점, 득점, 볼넷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8]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의 회장. 현역 시절 포지션은 1루수.

중국/대만 출신 인물들의 이름을 원음이 아니라 한국식으로 읽는 것이 대세였던 60~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내며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식 독음인 '왕정치'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중화민국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 누나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저장성 출신의 중국인 왕사복(王仕福, 왕쓰푸 / 오 시후쿠, 1985년 사망)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인 오 토미(王 登美, 2010년 사망, 무려 108세까지 장수했다.)이다. 어머니 집안에서 외국인인 왕사복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못 한 상태로 자식을 낳아서 출생 당시에는 어머니의 본래 성인 토즈미(當住)를 따랐으나[9], 2차대전 패전 이후 정식으로 혼인하고 성도 아버지 성으로 바꾸었다.

왕사복은 원래는 돈을 번 뒤에 본토로 돌아가 큰아들은 의사[10]로, 작은아들인 오 사다하루는 전기 엔지니어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나,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1949년에 완전히 공산화되자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11]

오 사다하루는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고 WBC 출정 인터뷰에서 밝혔다.


2. 선수 경력[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


파일:external/www.jiji.com/gpc00201-00735998.jpg

와세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계약금 1800만엔 연봉 144만엔을 받으며 입단했다. 계약금은 전년도에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액수였고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 입단 계약금이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첫 해 겨우 타율 0.161, 7홈런이란 성적을 남겼다, 삼진을 많이 당해서 팬들로부터 그의 성을 딴 "왕, 왕, 삼진왕"이라고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라카와 히로시[12] 코치가 그를 전담 지도하면서 타격 스킬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13] 특히 전설에 남은 외다리(一本足, 잇폰아시) 타법의 힌트를 준 이가 바로 아라카와 코치이다. 결국 피나는 훈련 끝에 오 사다하루는 1962년 38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등극하며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64년에는 이후 50년 가까이 깨지지 않을 단일시즌 55홈런 기록을 달성하며 신화적 지위에 오른다. 22년간의 현역 생활동안 수위타자 5회[14], 홈런왕 15회[*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1962년부터 74년까지 1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것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록이다. 1975년에야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타부치 코이치가 홈런왕을 차지하며 연속 홈런왕 기록 연장을 저지한다. 오는 다음해인 1976년과 1977년 홈런왕을 탈환하며 15차례 홈런왕이 되었으나 이후 야마모토 코지카케후 마사유키 등이 대두하며 홈런왕 왕좌를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 타점왕 13회[*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1971년부터 78년까지 8년 연속 타점왕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록.] , 트리플 크라운 2회[* 1973~74. 특이 사항으로 이 두 시즌 모두 단일시즌 출루율 5할-장타율 7할-OPS 1.250을 넘겼으며 특히 1974년에 기록한 OPS 1.293, 158볼넷, 고의사구 45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이다.]에 빛나며 일본프로야구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확실히 오 사다하루는 일본 야구에서 홈런하면 떠오르는, 일본 리그에서 몬스터급 기록을 남겼던 전설적인 거포이다.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행크 아론을 넘어선 기록이고[15] 일본에서는 오를 "세계의 홈런왕"이라 부를 정도이지만, 당시의 미국과 일본 야구의 레벨 차이와 당시 일본 구장들의 평균 거리와 미국 구장의 평균거리가 거의 10미터 가깝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어 미국 쪽에서는 그다지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16]

파일:external/www.sanspo.com/mla1202200507004-p1.jpg
개인 통산 756호 홈런을 기록하며 환호하는 모습. 이 홈런으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고, 세계 통산홈런 1위로 올라서게 되었다.[18]

1977년 9월 3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戰에서 오 사다하루가 756호 홈런을 쳐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는 장면.[19] 당시 투수는 스즈키 야스지로[20]였으며, 스즈키는 결국 이 756호 홈런을 맞고 곧바로 강판당하며 이날 패전투수가 되었다.[21] 그러고보니 천조국756호 홈런자이언츠가 쳤다.


행크 아론과의 홈런 더비

이후 행크 아론이 일본에서 그와 홈런 대결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가 1974년. 행크 아론은 40세였고 선수생활을 마감하던 시점(2년 뒤인 1976년 은퇴했다), 오 사다하루는 34세였고 그해 시즌에도 타격 3관왕을 했을 정도로 절정의 기량을 유지하던 때[22] 그러나 체격부터 행크 아론의 압승이고 영상에서 보듯 타구 비거리의 수준이 다르다. 슬슬 휘둘러도 담장을 가볍게 넘기는게 행크 아론. 오 사다하루와 행크 아론의 홈런 개수를 가지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하겠다. 차원이 다른 리그와 구장환경에서 뛰었으니까.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는 일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건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 그만큼 미일 야구의 격차가 크던 시점이다. 오 사다하루는 행크 아론과 우열 비교가 가능한 레벨 자체가 못 된다고 하는게 정답이다.

거기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스타디움은 현재 기준으로도 심하게 탁구장이었다. 공식 발표로 좌우 펜스가 91m/88m(러키존 시절)에 중앙 120m인데 실측결과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23] 더군다나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배트 규정이 강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압축배트를 쓰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오 사다하루도 압축배트를 사용했다.[24] 여담으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쳐낸 양키 스타디움도 좌타자들을 위해 당겨놓았기 때문에 우측펜스까지의 거리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짧은 편이라고 까였는데, 그게 97m로 고라쿠엔 구장과의 차이는 무려 10m.

다만 오 사다하루의 기록의 가치에 대해 논할 때는 197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되어있지 않아서 국가 간 야구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나마 프로리그라도 있던 일본이 당시 미국이나 쿠바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가장 야구의 수준이 높았다. 미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백인천이 40살이 넘는 나이에도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타율 .412에 장타율 7할 4푼을 기록했고, 90년대까지만 해도 한일 슈퍼게임에서 밀렸을 정도로 과거에는 국가 간 레벨차이가 극심했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기록에는 국적과 인종의 차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개인 박물관에 오 사다하루의 방망이를 받아 보관하였다. 홈런 개수만으로 오 사다하루의 역량이 메이저의 유명한 강타자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록이 평가 절하될 까닭은 되지 못한다. 오 사다하루는 같은 조건에서 뛰었던, '슬러거' 소리를 들었던 선수들보다도 2배, 3배에 가까운 홈런 수치를 기록하며[25] 넘사벽의 위업을 달성했다. 심지어 은퇴하는 해에도 30홈런을 쳤는데, 그의 뛰어난 기량과 함께 그 정도의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을 철저한 자기관리도 엿볼 수 있게 하는 기록.

입단 후 은퇴하기까지 22년간 시즌 통산 868홈런[26]을 쳐냈으며, 시즌 외의 기록[27]까지 합치면 100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낸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13년 연속 홈런왕, 8년 연속 타점왕, 8년 연속 40홈런을 치며 기복도 없었고 통산 슬래시라인도 .301/.444/.634 OPS 1.080 [28]로 말 그대로 일본프로야구를 지배한 타자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ON타선을 구축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1965~1973)을 이끌었다. 당연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오 사다하루가 현역 때 달고 있었던 등번호 1번은 영구 결번이다.

통산 루타수는 무려 5862루타인데, 스즈키 이치로가 2017년에 미일 통합 기록으로 경신했으나 일본 리그만을 한정한다면 여전히 1위다.[29]

3. 연도별 기록[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59
요미
우리

94
222
31
7
1
7
18
25
3
24
72
.161
.262
.316
.569
0.2
1960
130
502
115
19
3
17
49
71
5
67
101
.270
.375
.448
.823
3.7
1961
127
471
100
25
6
13
50
53
10
64
72
.253
.358
.444
.802
4.5
1962
134
586
135
28
2
38
79
85
6
72
99
.272
.376
.565
.941
7.9
1963
140
609
146
30
5
40
111
106
9
123
64
.305
.452
.640
1.092
10.9
1964
140
599
151
24
0
55
110
119
6
119
81
.320
.456
.720
1.176
10.4
1965
135
575
138
19
1
42
104
104
2
138
58
.322
.490
.666
1.156
10.8
1966
129
549
123
14
1
48
111
116
9
142
51
.311
.495
.715
1.210
10.8
1967
133
566
139
22
3
47
94
108
3
130
65
.326
.488
.723
1.211
9.8
1968
131
580
144
28
0
49
107
119
5
121
72
.326
.475
.722
1.197
10.5
1969
130
576
156
24
0
44
112
103
5
111
61
.345
.472
.690
1.162
10.6
1970
129
553
138
24
0
47
97
93
1
119
48
.325
.476
.713
1.189
10.8
1971
130
565
120
18
2
39
92
101
8
121
65
.276
.435
.597
1.032
8.2
1972
130
572
135
19
0
48
104
120
2
108
43
.296
.435
.654
1.089
7.1
1973
130
560
152
18
0
51
111
114
2
124
41
.355
.500
.755
1.255
11.4
1974
130
553
128
18
0
49
105
107
1
158
44
.332
.532
.761
1.293
10.1
1975
128
523
112
14
0
33
77
96
1
123
62
.285
.451
.573
1.024
5.6
1976
122
536
130
11
1
49
99
123
3
125
45
.325
.479
.725
1.204
7.6
1977
130
570
140
15
0
50
114
124
1
126
37
.324
.477
.706
1.183
7.0
1978
130
566
132
20
0
39
91
118
1
114
43
.300
.436
.611
1.048
5.3
1979
120
506
116
15
0
33
73
81
1
89
48
.285
.415
.565
.980
3.8
1980
129
527
105
10
0
30
59
84
0
72
47
.236
.342
.462
.803
1.6
NPB 통산
(22시즌)
2831
11886
2786
422
25
868
1967
2170
84
2390
1319
.301
.446
.634
1.080
168.5

빨강색은 NPB 역대 1위.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오사다하루감독.jpg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No.89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


은퇴 이 후 후지타 모토시 감독 휘하에서 조감독이충남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이다.을 맡으며[30] 감독 수업을 받은 뒤 1984년부터 5년 간 1군 감독을 맡았다.[31] 그러나 시기가 워낙 교진군은 우승 아니면 죽음 이라는 극단적인 시기여서[32] 5년 동안 리그 우승 1회(1987년)[33]에 그친 책임을 물어 감독직 사퇴,[34]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을때까지 야구해설가, 평론가의 길을 걸었다.[35][36]

1994년, 퍼시픽 리그에서 한창 막장가도를 달리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직을 제의받은 오 사다하루는 처음엔 요미우리 와의 관계 때문에 취임을 망설였지만 다이에의 GM 네모토 리쿠오가 "거인이란 집안은 이미 장남인 나가시마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 의 라이벌전을 원한다" 라고 간곡히 설득하여[37] 결국 오는 다이에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다이에의 수장이 된 오는 3년 간 필사의 리빌딩 끝에 1998년 무려 20년 만에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를 달성한 후 1999년에 후쿠오카 이전 이후 처음이자 35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38], 이후 감독직에서 용퇴하는 2008년까지 일본시리즈 2회 우승, 퍼시픽리그 3회 우승, 9년 연속 3위 이상을 기록하며 팀을 퍼시픽 리그의 끝판왕으로 환골탈태시킨다. 그리고는 2006년에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체력적인 문제로 더 이상 팀의 지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008년 시즌을 끝으로 지도자를 포함한 현장 일선에서의 야구인 생활을 떠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리그 바닥을 해맸던 호크스를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팀으로 만들어낸 전적 때문에, 후쿠오카 팬들에게 오 사다하루 감독은 그야말로 갓동님. 비록 감독 마지막 해인 2008년에 꼴찌로 시즌을 끝냈지만,[39] "왕감독 까지 말죠. 왕감독 까는 놈 캐뉴비"라는 말이 나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을리 없고 부임 3년 간 팀 리빌딩을 하던 기간 중 1996년 5월 9일에 일본 야구계에 유명한 에피소드인 날계란 투척사건[40] 당하기도 했다.[41] 어쨌든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싶다.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회장과 NPB 커미셔너 특별고문으로 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 구단의 프런트 수장으로서 2010년대, 혹은 2020년대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소프트뱅크 왕조를 이룩함으로써 선수, 감독, 프런트로서 모두 성공한 거의 유일한 야구인이 되었다.


4.1. 초대 WBC 우승 감독[편집]


WBC 1회 대회 때 일본 감독을 역임하여 일본을 WBC 초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WBC 1회 대회 감독 지명 당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대만인에게 일본팀의 감독을 맡길 수 없다'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결국 우승을 해냈고, 요미우리 시절 동료였고 동갑내기 절친인 장훈은 "지금까지 사다짱(오 사다하루의 애칭)을 비웃은 바보들은 전부 머리를 밀고 사죄하라!"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다.(사실 장훈 옹은 다이에 호크스의 3년 리빌딩 시절 때 이 말을 처음 했다.)


5. 통산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4
요미우리 자이언츠
130
67
54
9
리그 3위
-
1985
130
61
60
9
리그 3위
-
1986
130
75
48
7
리그 2위
-
1987
130
76
43
11
리그 1위
JS 패배
1988
130
68
59
3
리그 2위
-
통산
650
347
264
39
0.568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5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30
54
72
4
리그 5위
-
1996
130
54
74
2
리그 6위
-
1997
135
63
71
1
리그 4위
-
1998
135
67
67
1
리그 3위
-
1999
135
78
54
3
리그 1위
JS 우승
2000
135
73
60
2
리그 1위
JS 패배
2001
140
76
63
1
리그 2위
-
2002
140
73
65
2
리그 2위
-
2003
140
82
55
3
리그 1위
JS 우승
2004
133
77
52
4
리그 2위
PO2 패배
200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36
89
45
2
리그 2위
PO2 패배
2006
81[42]
45
34
2
리그 3위
-
2007
144
73
66
5
리그 3위
CS1 패배
2008
143[43]
64
76
3
리그 6위
-
통산
1857
968
854
35
0.531
총계
2507
1315
1118
74
0.540


6. 플레이 스타일[편집]


앞서 말했듯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외다리타법으로 유명하며 한때 이승엽의 주 타법이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외다리 타법으로 스타일을 바꾼 것은 일반적인 타격폼으로는 프로에서 투수들이 던지는 공에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워서 투수가 투구를 시작할 때부터 바로 공을 때려낼 수 있는 자세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자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이되는 왼쪽 다리만으로 투수의 투구동작 내내 온 몸의 하중을 버텨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자세는 아니라는 점에서 타고난 신체조건과 특유의 타격폼을 유지하기 위한 본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루수로서의 수비능력 역시 리그 최고. 시즌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991회(1980년 4월 25일~10월 10일)를 기록,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기록할 정도였다.[44] 1972년 NPB 골든글러브[45]가 처음 생긴 이래로 은퇴시즌까지 9년 연속 수상을 했다.[46]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일본프로야구 1루수 최다 실책 보유자이기도 하다.(165개) 수비가 나빴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주전으로 활동한 기간이 길어서 생긴 기록으로 볼 수 있다.


7. 시즌 55홈런 저지 논란[편집]


본인이 직접 만들어낸 논란은 아니다만 그의 '한 시즌 55홈런' 기록 등 워낙 일본 야구계에 남긴 영향이 크다 보니, 이 기록을 경신하려는 선수, 특히 외국인 선수에게는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었다. 일본 야구계 일각에서조차 오 사다하루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을 두고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인 55년 체제를 본따 "55호 체제"라 불렀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 긴테쓰의 터피 로즈, 세이부의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있다.

2013년 오랜만에 그의 기록에 도전한 이가 등장했는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그 주인공으로 8월달 월간 18홈런을 쳐내면서 이미 30경기 넘게 남은 시점에서 50홈런을 돌파했다. 더불어 9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서 56호와 57호 연타석홈런을 작렬시키면서 오 사다하루 기록은 49년만에, 이승엽의 아시아 기록은 10년만에 모두 갈아치웠다. 그리고 60호 홈런까지 치면서 아시아 처음으로 60홈런에 도달했다. 위에 열거한 사례들에서처럼, 2013년에 기록을 달성할 즈음 발렌틴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그에게 볼넷만 주는 등 홈런을 칠 빌미를 주질 않자 국내 야구 팬덤에서도 "그따위 기록 하나가 신성하다고 볼로 보내버리냐"는 악평을 많이 들었다. 이 당시 국내외적으로 쓴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에 대해 모 구단 투수코치가 기록을 빼고 생각해도 타율이 .340에 OPS가 1.200 이상인 타자한테 정면승부가 먹혀들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박으로 비난을 잠재웠다.[47]

발렌틴 이후로도 일본인 선수로서[48] 사상 최다 시즌 홈런 기록은 계속해서 유지되어 왔으나 2022년 10월 3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시즌 56호 홈런을 쏘아올리며 오랫 동안 유지되어 왔던 시즌 홈런 1위 기록은 58년 만에 마침내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

8. 기타[편집]


  • 역시 일본 야구계의 대스타였던 장훈과는 매우 친한 사이다. 1940년 용띠 동갑내기에 1959년 프로입문 동기이고 거기다 프로데뷔 전부터 많은 구단의 스카웃 표적이 됐다든지, 국적 문제라든가, 외국인 대접을 받는 타자라든지 등등 공통점들이 많았다. 그렇게 막역지우가 된 장훈과 오 사다하루는 프로 데뷔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친분을 쌓았다. 어느 날은 오 사다하루가 장훈의 히로시마 집에 놀러와서는 장훈의 어머니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고 목욕까지 한 뒤에 자고 갔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오 사다하루가 선수 시절 딱 한번 요미우리 구단에 대든적이 있는데 장훈이 1979년 시즌 종료 후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될 때 였다. 그 해 납회식 때 장훈이 구단주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자 오 사다하루는 발끈하여 "장훈이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칠 수 있게 해달라"고 구단주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그때 구단주가 '자네 술 취했나?' 라며 불쾌해했고 장훈은 오 사다하루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이제 거인에서 내가 할 몫은 없다. 롯데로 가겠다" 라면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이런 깊은 인연 덕택인지, 오 사다하루 감독이 욕을 대차게 먹으며 실시한 리빌딩이 성공해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하자 장훈은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그동안 왕짱(애칭)을[49] 욕한 놈들은 모두 머리를 밀고 사죄해라!"라고 대차게 일갈하기도 했다.

  • 1977년에 처음 생긴 국민영예상을 최초로 받았다. 2020년까지 26명, 1개 단체 밖에 받지 못 한 문화/스포츠 관련 최고 등급의 상훈인만큼 일본의 국민적 영웅[50]으로 인정받았다.

  • 그런 스타인 만큼 그에 대한 기사도 많고 방송출연, 책 등 미디어 활동도 활발했으며 광고도 많이 찍었다. 광고 몇 개를 살펴보면...


[51]


  • 2010년 7월 3일 후쿠오카 돔에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뮤지엄"이 개관했다. 현역시절 받은 각종 트로피 및 상패 등을 비롯하여 현역시절 쓰던 유니폼, 스파이크, 미트, 배트, 756호 홈런을 쳤을 때 썼던 배트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혹시 야후돔 갔다가 시간 남으면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입장료도 1천엔으로 크게 비싸지는 않다.

  •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 중 하나인 스티브 칼튼의 각성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968년 당시 칼튼이 소속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일본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와 칼튼이 맞붙었는데, 오가 홈런을 치자 칼튼은 다음 타석에서 그를 위협하려고 처음으로 몸쪽 슬라이더를 던져 봤다고 한다. 이때 오 사다하루가 어깨쪽으로 날아오는 그 공을 보고 몸을 뒤로 피했는데, 공의 궤적이 휙 변해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걸 보고 칼튼은 '내가 멋진 슬라이더를 가졌구나'라고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고.

  • 요미우리 감독시절에 주니치 드래곤즈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카리스마로 유명한 오 사다하루였지만 상대감독이었던 성질머리 고약한 호시노 센이치가 오 사다하루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 님 나랑 맞짱뜰거삼?'하고 도발을 하자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당시 팬들이 조금 실망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실제 상황을 설명하자면 <돌격 크로마티 고교>로 유명한 요미우리의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쥔 제스쳐를 취하며 "주먹으로 치는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호시노는 안티 요미우리로 유명하지만 나가시마나 오 사다하루 같은 선배격에게는 굉장히 깍듯하다고 한다.

  • 홈런을 치고도 절대로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홈런을 치고 환호하던 사다하루의 모습을 지켜본 형 데쓰조가 “홈런을 맞은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봐라”라고 꾸짖은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크 애런의 통산 홈런 기록을 갱신했을 때 딱 한 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호를 했다고 한다.

  • 팬 서비스가 아주 확실했던 선수로도 꼽힌다. 현역 시절에도 팬들의 요청에 인상 찌푸린 적이 없었으며, 당시 팀 동료였던 도이 쇼조가 "왕이 싸인 안하고 연습만 했으면 홈런 1000개는 더 쳤을 것이다. 다만 싸인도 홈런도 성실히했으니 기록과 기억 모두 가져간 남자가 됐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시절, 당시 신인이었던 고쿠보 히로키가 팬들의 사인 요구에 힘들다며 "경기전에는 악수나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왕이 "바보같은 자식, 너에게 부탁하는 팬의 용기를 생각해라!"라고 불호령을 내린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핑계 대면서 사인 거부하는 모 리그 선수들에게도 좀 해주시지. 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때 고라쿠엔 구장 앞에서 퇴근하는 거인 선수들에게 싸인을 요구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본 척도 안하고 지나갔으나, 요나미네 카나메 선수가 미소를 띄며 싸인을 해 주었고, 이 요나미네를 보고 감명을 받아 나중에 스타가 되면 웬만해선 팬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잘 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도 팬들의 사인 요청에는 기분 좋게 응하지만 최근 유명인의 사인을 받아서 인터넷 경매에 내놓는 세태를 의식한 듯 사인을 하면서 "난 (현역시절부터) 하도 사인을 많이 해서 내 친필 사인이라고 해도 워낙 흔하기 때문에 인터넷 경매에 내놔봐야 1엔의 가치도 없단다."라고 했다 카더라. 박용택이 이 분을 벤치마킹 한 모양이다

  • 아직도 입만 떼면 현역들의 나약함을 까면서 "우리 때 선수들이 더 대단했다"면서 "너희들 중에 오처럼 통산 800홈런 칠 수 있는 선수 있어?", "우리가 현역 때 기량이면 지금 현역 너희들하고 붙어도 다 쳐바름"이라고 주장해대는 NPB의 원로급 및 올드비꼰대들이 꽤 있는 데에 대해 정작 본인은 "그 때와 지금은 구장의 크기도 달라지고 야구 수준에 차이가 있다. 현역 때의 내가 그 모습 그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그 때처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면서 현대의 야구가 발전해 있음을 인정하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다만 "그 때와 지금은 경제력, 장비, 시설, 기술, 훈련법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만큼 소년 시절부터 지금 시대의 영양 섭취, 훈련법, 야구 이론 공부 등으로 내가 트레이닝을 한다면 지금 현역들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충분히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한 스펙을 가진 위인이기도 하고. 감독-회장으로 구단 업무 현업에 오랜 기간 종사하며 야구의 발전상을 세밀하게 지켜본 위치에 있는만큼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야구의 국제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이지만 각종 국제대회나 올스타전에 1타로 선발된 덕에 스프링캠프, 친선전 등을 포함해 공식기록으로만 통산 110경기 338타석이나 미국과 시합을 했다. 이정도면 1시즌의 2/3 정도의 기록. 이 338타석에서 25홈런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풀타임을 뛰면 40홈런도 가능하단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상대한 미국도 선수들의 수준도 높아서 폄하할 기록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은 미일 친선경기가 주로 메이저리거들의 일본 원정으로 치러지다보니 구장 크기가 작은 일본 야구장에서 경기가 벌어졌고, 오 사다하루는 당시에 압축배트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의 수준을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미일 친선경기의 활약만 보고 그가 메이저리그에 갔었어도 거기서 홈런왕 경쟁을 할 수 있었으리라 보기는 힘들다. 미국이 지금은 (특히 내구성에 민감한 투수들은) 마이너리거나 내보내지만 당시는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국제교류 자체가 드물어 겸사겸사 해외여행도 가 볼수 있는 기회고 하다 보니 에이스들도 많이 가서 돈 드라이스데일, 톰 시버 등등 당대 MLB 레전드 투수들을 상대로 낸 기록. 덕분에 당시엔 미국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일본 야구선수였다.

  • 톰 시버가 평하기를 메이저리그에 와도 25~30홈런은 칠 만한 타자라고 평했고. 다른 투수들도 공통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타자라며 왕을 추켜세웠다.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6,70년대 메이저리그는 극심한 투고타저여서 저 정도 성적이면 충분히 슬러거로 인정할 수 있다. [52]

  • 유일한 요미우리 로컬보이이기도 하다.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 있는 와세다 상업고를 나왔고 다이에로 안갔으면 요미우리에서만 선수,코칭 스탭을 보낸 자이언츠 맨으로 남을 수 있었다.

  • 파랜드 스토리 6에 등장하는 허그의 최종무기가 오즈 배트(Oh's bat)인데 그 오가 바로 이 오 사다하루이다.

  • 은혼사다하루는 이 사람에게서 모티브를 땄다. 미묘하게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다던지, 야구장에 가서 진정이 됐다던지. 사다하루 장편 에피소드에서 야구장이 나온 건 바로 이 때문.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도 있다.(61189 Ohsadaharu)


  • 위에 나오듯 행크 애런과 홈런 더비를 펼치기도 했는데, 두 명이 모두 은퇴한 후인 1990년엔 둘이 함께 캔커피 CM을 찍었다.


  • 1966년에 결혼해서 3녀를 낳았고 첫부인이 2001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2018년에 후쿠오카 고급식당 여주인이랑 재혼한다. 감독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 선수시절 요미우리를 함께 이끈 나가시마 시게오, 후배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성화 봉송자로 나섰다. 8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쓰이의 부축을 받고 이동해야할 정도로 거동이 힘든 나가시마와는 다르게 상당히 건장한 모습으로 나왔다.[53]

  • 중화민국 훈장을 두 차례 수여받은 바 있으며 핏줄로는 대만과 관련이 없지만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의 명예시민으로 예우 받고 있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며 한국 국적을 계속 유지했던 장훈과 달리, 오 사다하루는 부친은 중국인이며 모친은 일본인인 혼혈임에도 중화민국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인 아내와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 또한 모두 왕씨 성을 사용하고 있고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신주 시립 야구장은 건립 당시 신주 현립 왕정치 야구장으로 정식 명명될 계획이었으며[54], 1991년 이래 왕정치배전국청소년야구대회가 개최되는 등 대만에서도 꽤 존경 받는 야구인이다.


9. 관련 문서[편집]




10. 둘러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