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카와 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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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카와 큐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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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6
2009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 2011 센트럴 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5, 2006 센트럴 리그 최우수 중간계투

보유 기록(NPB)
연속 홀드 기록
17경기
연일 세이브 기록
6일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30번
알론조 파웰
(1998)

후지카와 큐지
(1999~2001)


요코타 히사노리
(2002)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92번
미야모토 시로
(1988~1992)

후지카와 큐지
(2002~2004)


에스테반 얀
(2007)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2번
마이크 킨케이드
(2004)

후지카와 큐지
(2005~2012)


오승환
(2014~2015)
시카고 컵스 등번호 17번
블레이크 드윗
(2012)

후지카와 큐지
(2013~2014)


토미 라 스텔라
(2015)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21번
카를로스 페냐
(2014)

후지카와 큐지
(2015)


치치 곤잘레스
(2015~2016)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18번
후타가미 카즈히토
(2010~2013)

후지카와 큐지
(2016)


바바 코스케
(2018~)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2번
오승환
(2014~2015)

후지카와 큐지
(2017~2020)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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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카와 큐지
藤川球児 | Kyuji Fujikawa

생년월일
1980년 7월 21일 (43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고치현 고치시
출신학교
고치시립 고치상업 고교 (고치)
신체
185cm, 90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1위 (한신)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99~2012)
시카고 컵스 (2013~2014)
텍사스 레인저스 (2015)
고치 파이팅 독스[1] (2015)
한신 타이거스 (2016~2020)
등장곡
Lindberg -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

1. 개요
3.1. 2013 시즌
3.2. 2014 시즌
3.3. 2015 시즌
4. 일본프로야구 복귀 후
4.1. 2016 시즌
4.2. 2017 시즌
4.3. 2018 시즌
4.4. 2019 시즌
4.5. 2020 시즌
5. 은퇴 후
6. 국가대표 경력
7. 피칭 스타일
8. 단기전 징크스
9. 이모저모
10.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일본의 전 야구 선수로, 포지션은 마무리 투수였다.


2. 일본프로야구 시절[편집]


파일:external/sportiva.shueisha.co.jp/0831fujikawa-001.jpg
1998년에 드래프트[2] 1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원래는 선발투수 자원으로 입단하였고 체격이 일본의 투수치고는 나름 좋은 편이라 구단에서도 그렇게 기대를 한 모양이었지만, 초기의 후지카와는 기대에 못 미치는 평범한 신인이였다. 입단 당시엔 최고 구속도 고작 145km/h였다. 본격적으로 1군에 정착한건 대략 2002년이었는데, 이때부터 2004년까지는 성적이 매우 저조했다.

2004년 초반까지는 1, 2군을 왔다갔다 했는데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 시절 2군 코치인 야마구치 타카시[3] 에게 본격적인 투구폼 개조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기를 이끌던 속구파 투수였던 야마구치는 후지카와의 폼에 쓸데 없는 부분이 많고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 뒤인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 것.[4][5] 원래부터 컨트롤은 좋은 편이였고 구속만 따라온다면 완벽하다고 본 그는 원래 선발자원인 후지카와를 중간계투로 전향시키고 1~2이닝 특화형 투수로 길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이후 후지카와가 던지게 된 전매특허 강속구이다. 2004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중계진의 한축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화한 후지카와는 2005년 대폭발. 한신의 필승조 JFK(한신)[6]의 일원으로서 7승 1패 1세이브 46홀드 방어율 1.36의 후덜덜한 성적을 찍으며 일약 일본 최고의 중계투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무려 80경기 등판으로 일본 투수 등판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최우수 중계투수 타이틀까지 덤으로 거머쥔다.

2006년에는 원래 마무리 투수였던 구보타 도모유키가 부상을 당한 시기에 임시 마무리 투수로 기용된다. 이후 한신의 마무리 투수가 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해 기록한 스탯은 무려 평균자책점 0.68 7승 무패 17세이브 30홀드. 거기다 79이닝 동안 탈삼진 122개를 잡는 등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8년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지 3년만에 통산 100세이브를 기록하여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성장하였다. 이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있던 이병규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이 유일한 패배.

2010 시즌엔 세이브 28개로 세이브 부분 4위 방어율 2.01으로 무난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요미우리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2차전 경기에서 8회초 1점차 상황에 등판해 아웃카운트 2개를 잘 잡아놓고 다음타자인 가메이에게 볼넷, 오가사와라에게 2루타, 라미레스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면서 퐈이야!(...) 덕분에 한신은 가을야구를 광탈하게 되었다. 마무리가 블론세이브 하는 거야 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8월 이후로 페이스가 떨어지며, 제구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2011 시즌엔 통산 100홀드를 기록해 사상 최초로 100홀드-100세이브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4년만에 40세이브 고지에 올라 최종 41세이브로 통산 2번째 세이브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해 FA자격을 취득했지만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한신에 잔류했다.

2012 시즌엔 48경기에 나와 24세이브 47.2이닝 58탈삼진을 기록했으며 해외 FA자격을 취득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했다.


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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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얻어 일찌감치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으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케빈 타워스 단장과 면담을 가지는 등, 여러 팀과 접촉했다.

그리고 시카고 컵스와의 2년 $9.5M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3년차에 컵스가 $5.5M의 클럽옵션을 가지고 있으며 옵션을 실행하지 않을 경우 $500K의 바이아웃을 지불한다.


3.1. 2013 시즌[편집]


4월 1일(현지시각), 피츠버그와의 원정경기에서 3:1로 리드중이던 9회말 2사 주자 1,2루 위기상황에 등판하여 공 2개로 마지막 타자를 외야플라이 처리하며 첫경기에서 첫 세이브를 기록하는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리고 기존 마무리 투수였던 카를로스 마몰이 부진하자 개막 일주일만에 마무리 자리를 따냈지만 후지카와 본인도 막장투를 선보였고, 15일자 DL에 올랐다. 하락한 패스트볼 구위론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제압하기 힘든 모양새. 신시내티 레즈전에서는 추신수와 풀카운트 승부 끝에 팔꿈치에다 패스트볼을 작렬하며 일부 팬들에게 제구 막장이면 볼넷이나 줄 것이지 왜 애꿎은 추신수를 때리냐(...)며 비난받기도 했다.[7] 그리고 5월 말 토미 존 서저리를 요하는 부상을 당했음이 알려졌다. 컵스와 일본인 선수의 악연은 계속 이어지는 듯.


3.2. 2014 시즌[편집]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지 약 1년만인 8월 6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복귀, 1이닝을 몸에 맞는 공 하나를 내주고 무실점으로 막았다.

시즌이 끝나고 5.5M의 클럽옵션 사용이 거부되어 50만불의 바이아웃을 받고 FA로 풀리게 되었다.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1년 1M의 계약을 체결했다. 다르빗슈 유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서로 같은 팀에서 만나게 돼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는듯 하다.

시즌 이후 논텐더로 풀렸을때 발과 허리에 잦은 통증으로 은퇴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3.3. 201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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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에서 컵스와의 경기에서 5실점을 하는등 부진하였으며 사타구니 통증으로 시즌초에 재활을 하였다.

2015년 5월 15일(한국시간) 캔자스시티와의 홈경기에서 3-6으로 뒤진 8회에 등판하여 1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하지만 그 다음 클리블랜드전에서는 5회 2사 후 구원등판해 0⅔이닝 동안 3실점했다. 2경기 평균자책점은 16.20으로 멸망.

5월 18일(한국시간)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며 지명할당되었다. 친정팀인 한신과 라쿠텐이 영입을 계획하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

6월 1일 친정 한신 타이거즈도 다른 일본프로야구팀도 아닌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의 고치 파이팅 독스 라는 팀에 입단하였다. 일단은 고치현 출신인만큼 고향팀에서 뛴다는 의미를 두는 듯.#

11월 14일 결국 한신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등번호는 예전 번호인 22번이 아닌, 야부 케이이치 등 선발 투수들이 달았던 18번.

현재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은 선발 투수로 기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 일본프로야구 복귀 후[편집]



4.1. 2016 시즌[편집]


2016년부터 선발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시범경기에서는 3월 6일 요미우리전에 첫 등판을 마쳤으며 그 이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3월 27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NPB복귀 이후 첫 공식경기 등판. 하지만 5이닝 4실점으로 경기내용은 좋지 못했다.

4월 3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2003년 이후 4580일 만의 선발승을 기록하며 시즌 첫 선발승을 따냈다.

4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4년만의 고시엔 구장 선발등판에서 4.1이닝 7실점으로 부진했다. 후지카와의 14년만의 선발등판겸 2012년 이후 4년만의 등판을 보기 위해 4만여명의 관중이 모였으나 직구의 구속이 140Km 초반대에 머무르며 투구수가 조금 많아지더니 4회부터 눈에 띄게 볼이 높아졌고 5회에는 연속 5안타를 맞으며 결국 강판당하고 말았다.

4월 14일 2군에 내려가지 않고 1군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며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을 조건으로 1군 선수등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무너진 투구 밸런스와 잃어버린 직구의 구위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듯 하다.

5월까지의 성적이 5경기 출장 1승 2패 방어율 6.12로 매우 좋지 않은 편 이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2군 경기에도 출장했었지만 선발로서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5월 말 부터 구원투수로 다시 전향하여 마운드에 오를 것 같다.

시즌 종료후 등번호를 예전에 쓰던 22번으로 다시 변경했다.


4.2. 2017 시즌[편집]


필승계투조에 쿠와하라 켄타로-마르코스 마테오-라파엘 도리스의 트리오가 완전히 자리잡아 한때 붙박이이던 승리조 계투로서의 기회는 다소 제한되었으나, 그래도 일본프로야구 복귀 2년만에 50경기 등판을 넘기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왕년의 미친 구위로 엽기적인 탈삼진율을 기록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52경기 56.2이닝을 던져 3승 6홀드 ERA 2.22 71탈삼진 24볼넷의 성적으로 37세의 중간계투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성적을 기록했다.


4.3. 2018 시즌[편집]


53경기에 등판해 54.1이닝 5승 3패 21홀드(26홀드포인트) 방어율 2.32 67탈삼진 37볼넷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4.4. 2019 시즌[편집]


7월 25일 기준 35경기 4승 1패 22홀드(26홀드포인트) 53탈삼진, 방어율 1.54를 기록하며 한신의 필승조로 활약하며 노익장을 발휘하였다. 올스타전 출장은 덤. 7월 하순부터는 원 마무리였던 용병 도리스가 부상과 부진에 빠지며 마무리로 출장했다.

9월 29일 주니치전에서 조정차 올라왔는데, 2홈런을 맞으며 3실점하여 통산 방어율이 2점대가 되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6경기 56이닝 4승 1패 16세이브 23홀드(27홀드포인트) 83탈삼진, 방어율 1.77. 이게 만 39세 투수의 기록이다. 압권인 것은 탈삼진율로 9이닝당 13.34를 기록하여 전성기 때의 탈삼진율과 거의 비슷한 기록을 찍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직 패스트볼 구위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구속은 141~145 정도로 내려왔는데, 아직도 회전수는 2500rpm이 찍힌다.


4.5. 2020 시즌[편집]


작년의 강력했던 불펜진이 존슨과 도리스의 재계약불발, 가르시아의 선발 재전향, 모리야의 가정폭력 추문으로 인한 1군 말소 등으로 1년만에 와해되어서 나이 40살에 클로저 자리에 복귀하게 되었다. 40대 이토이 후쿠도메가 클린업을 치고 40대 노우미가 필승조를 하고 마찬가지로 40대 후지카와가 마무리를 하는 NPB, 아니 전세계 최고 노인정 팀의 현실을 상징하는 기용.

그것과는 별개로 2019년까지 미일 통산 세이브 243개로, 명구회 가입까지 세이브 7개가 남았는데 클로저로 시즌을 출발하며 별일 없으면 올해 명구회 가입이 확실시되었다.

근데 팀이 개막시리즈 피스윕부터 시작해 이기질 못하는데다, 본인도 6월 25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스리런을 얻어맞으며 불을 질렀다. 7경기째 요코하마전에서 드디어 시즌 첫 세이브를 올렸으나, 이때도 만루까지 몰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7월 9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세이브 상황에 등판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자를 쌓더니 결국 카메이 요시유키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또 실점을 했다. 이 안타가 카메이의 통산 1000번째 안타인건 덤. 이후에 추가실점을 하진 않으면서 간신히 시즌 2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그러나 이틀 뒤 요코하마전에선 세이브 상황에 올라왔지만 수비의 도움을 받지못하며 허무하게 실점을 허용했다.[8] 이후 네프탈리 소토에게 역전 2점홈런을 얻어맞으며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고 경기 다음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대체 마무리는 수아레즈.

10일 쉬고 1군에 다시 등록되었는데 강등되어 추격, 패전조로 쓰이고 있다. 일단 추격조로는 4경기 연속 무실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중.

하지만 끝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8월 30일자로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표명했다. 현재까지 미일 통산 245세이브를 기록중인데 과연 한신이 명구회 입성 기준인 250세이브를 달성시켜주느냐에 관심이 집중 될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지금 한신은 수아레즈가 성공적으로 클로저 역할을 수행중이기도 하고 선두 요미우리와 승차가 좀 벌어지긴 했으나 아직 시즌 중반이라 우승경쟁이 완전히 끝난것도 아니기 때문에 개인 기록을 챙겨줄만큼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라 큐지에게 5세이브를 챙겨주고 떠나보낸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타니모토 본부장의 말에 따르면 이미 큐지의 몸 상태는 심하게 망가져서 어깨, 팔꿈치, 허리, 다리 등 성한 곳이 없다고 한다. 은퇴를 표명한 사유도 몸 상태 때문이었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할 단계라고까지 말한것을 보면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그간 좋지 않은 몸으로 던져온 것이 쌓이고 쌓여서 올시즌에 터진 모양. 또한 큐지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표명했으나 구단이 은퇴를 만류해서 올해까지 뛰는 거라고 한다.해당 기사

후지카와마저 250세이브를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면 소위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대로 불리우는 선수들 중에서 명구회에 들어가는 선수는 한 명도 없게 되는 것이 유력해졌다. 마쓰자카를 필두로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나가카와 카츠히로, 타자로는 무라타 슈이치 등 대선수들이 여럿 배출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이후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로 인해 10월중순 급하게 콜업되었다. 일단은 패전조로 던지고 있는데, 1이닝도 버거운지 0.1이닝, 0.2이닝 정도로 끊은 등판이 많지만 그래도 실점은 하지 않고 잘 막고는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진이 시즌 1달여를 남기고 우승을 거의 확정지어 개인 기록을 챙겨줄 여유가 생겼다. 올해는 세리그는 플레이오프도 없어서, 과연 후지카와의 남은 5세이브를 챙겨줄 수 있을지가 잔여시합의 그나마 볼거리.

하지만 더 이상의 세이브를 거두지 못하고, 2020년 11월 10일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은퇴경기를 맞게 되었다. 이날 경기는 무조건 9회 등판이 예정되어 있었고, 0-4로 뒤지던 9회초 마운드에 올라와 직구만 12개를 던지며 1이닝을 막아냈다. 245세이브로 긴 야구인생을 정리하고, 한신 타이거즈의 레전드 투수로 남게 되었다.


5. 은퇴 후[편집]


후지카와 큐지의 정면승부라는 이름으로 유튜브를 시작했고 2021년부터는 야구해설자 겸 평론가로 활동중이다. 후지카와의 해설은 팬들로부터 굉장히 호평받고 있다.

동시에 한신의 특별보좌에 취임하여 팀 운영 및 선수단의 서포트를 담당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6. 국가대표 경력[편집]


후지카와가 각성하여 리그를 호령했던 2005년부터 MLB를 건너가기 전인 2012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 선수들이 출전하는 모든 메이저 국가대표 대회에 출전하였다. 이후, 개최된 메이저 대회인 2013 WBC2015 WBSC 프리미어 12는 구단의 반대(차출 거부) 그리고 2017 WBC는 전년도 성적 부진으로 발탁되지 못하여 본인의 커리어에서 전성기 이후 모든 대회를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성기 시절에는 직구 구위 하나만으로 타자를 찍어누르던 시절이라 그 위력만으로 세계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후지카와가 국가대표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던 당시는, 후지카와의 구위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고 리그내에서도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불펜 투수였기에 일본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 불펜 투수였으며, 중요한 경기에서 자주 등판하였다. 또한, 한국과 자주 마주쳤던 선수로도 한국에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이종범에게 결승 2루타를 내줬던 선수(...)로 더욱 한국팬에게 각인되어있다. 실제로도, 한국과의 경기를 제외하면 그의 국제전 성적은 매우 훌륭한 편이며 한국에게 유독 약했던 것이지 세계 무대에 징크스가 있는 국내용 투수는 아니었다.

후지카와가 프로 선수로서 국가대표에 출전하여 남긴 기록은 통산 13경기 11.2이닝 9피안타 14탈삼진 2볼넷[9] 2실점(1자책) ERA 0.77[10]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단기전 징크스가 있다는 항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국제전에서 만큼은 그는 그의 이름값과 실력에 걸맞는 성적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중요한 경기에서 결승타나 동점타를 내주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기대만 못했던 투수' 혹은 '한국의 수호신'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실제, 통산 한국과의 전적은 통산 5경기 4이닝 4피안타 3탈삼진 2볼넷 1실점[11] ERA 2.25로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12] 하지만, 피칭 내용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2006 WBC 이종범에 의한 '결승 2루타 분식회계'에 베이징에서 이진영에 의한 '준결승전 동점타 허용' 등 한국 야구 팬들에게 결정적으로 각인된 장면이 많아 실제 그가 남긴 국제전 성적에 비해 저평가가 심하다. 한국전 5경기 중 상술한 두 번의 실점 장면 빼고 나머지 세 경기는 승계주자든 본인이 내보낸 주자든 후지카와는 그 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즉, 한국전 5경기 중 세 경기는 실점조차 없었다는 소리. 하지만, 저 두 경기 두 실점 장면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다...

한국과의 기록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국제전에서 그의 통산 기록은 8경기 7.2이닝 5피안타 11탈삼진 1실점(무자책) ERA 0.00으로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과의 경기도 5경기 중 1경기를 빼면 무실점[13]이지만 그 두 경기 임팩트가 워낙 강해 본인 입장에서는 그 두 경기가 매우 아쉬울 듯하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 타자들이 유독 후지카와를 잘 공략했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 후지카와는 국제전 통산 (승계 주자 득점 허용까지 포함된) 실점은 4점[14]이다. 그 중 3점의 실점이 한국 타자에 의한 기록이었다. 유독, 한국 타자들이 후지카와를 잘 공략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기록.

어찌됐든, 성적 상 그가 일본 리그 내에서 보여주던 단기전 징크스가 있다는 항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국제대회 단기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투수였으며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 정도는 보여줬다고 볼 수 있겠다.

즉, 한국전에 유독 약했던 것이지 그가 국제대회 단기전에 약한 국내용 투수라는 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리그 내에서 중요한 경기에 약했던 단기전 징크스를 국제 대회에서는 깨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한국전도 임팩트가 큰 장면을 많이 남겼을 뿐 기록상[15]으로는 못 던졌다고 폄하[16]당할 수준은 아니다.


6.1. 2006 WBC[편집]


후지카와는 대회 전년도인 2005년 기량이 만개하여 46홀드 92와 3분의 1이닝 동안 136탈삼진 ERA 1.36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며 당연하게도 2006 WBC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한다. 이는 후지카와의 프로 데뷔 이래 첫 국가대표 승선이었다. 후지카와는 2004년 후반기부터 프로 1군 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기에 포텐이 터지기 이전에 그의 데뷔 년도인 2000년부터 기량이 만개하기 전 2004년까지를 통틀어 일본의 1군 정예 선수들이 나선 유이한 대회인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2005년 절치부심하여 전성기의 포문을 연 후지카와는 당당히 2006 WBC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였고 왕정치감독은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오츠카 아키노리와 함께 대회에서 핵심 불펜 자원으로 분류하여 중요 경기에서 등판시키겠다고 공표하였다.

  • 후지카와는 1라운드 아시아 시리즈에서 중국과의 첫 경기에는 점수차가 크게 벌어져 핵심 불펜이었던 그는 관리 차원에서 등판하지는 않았다. 이후, 대만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점수차가 꽤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컨디션 점검 차원에서 등판하였고, 한 개의 안타를 내주기는 했으나 삼진 한개를 솎아내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첫 국가대표 등판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이자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한일전 경기에 팀이 3:2로 지고있는 상황[17]에 이시이 히로토시 뒤를 이어 8회초 2사 1루[18] 상황에 등판한다. 이범호 대타로 나온 박용택을 직구로 찍어누르며 삼진을 잡아내었고 승계주자의 득점 허용을 하지 않은 채, 0.1이닝 무실점으로 리그에서 보여줬던 (직구로 타자를 찍어누르는) 그다운 모습으로 최초의 한국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 후지카와는 대회 전 왕정치감독의 공표대로 2라운드에서도 중요경기에 등판한다. 2라운드 첫 경기인 미국전 경기에서 9회말 3:3 상황에 등판한다. 첫 타자 버논 웰스에게 3유간 안타를 맞았다. 후속 타자인 랜디 윈이 희생 번트를 시도했는데 3루수 이와무라 아키노리가 1루로 송구했으나 1루 커버를 들어간 2루수 니시오카 츠요시가 포구할 때, 1루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져있다고 판정되어 무사 1,2루 위기를 내준다. 이는 2루수 니시오카의 실책으로 기록되었다. 다음 타자 마이클 영의 번트가 투수쪽에 강하게 흘렀고, 후지카와가 침착하게 3루에 송구해 2루 주자였던 버논 웰스를 포스 아웃시키고 1사 1,2루로 아웃카운트만 늘렸다. 다음 타자인, 데릭 지터를 초구에 데드볼로 맞추는 바람에 후지카와는 1사 만루의 위기를 맞게된다. 그러나, 후지카와는 그의 주무기인 위력적인 구위의 직구로 후속 타자인 켄 그리피 주니어를 풀카운트 접전끝에 스윙 삼진으로 잡으며 한숨 돌리게 되고 2사 만루로 아웃 카운트를 늘린다. 그런데, 다음 타자인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1-1 카운트에서 키스톤 콤비 사이를 향하는 타구를 맞게되었는데, 유격수인 가와사키 무네노리와 2루수 니시오카 츠요시는 이 타구를 캐치하지 못하였고 그대로 내야를 빠져나가 로드리게스의 끝내기 안타로 기록되며 후지카와는 패전 투수가 된다. 이 날 기록은 0.2이닝 2피안타 1탈삼진 무사사구 1실점(무자책)[19] 패전.

  • 이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휴식을 취한 후지카와는 2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한일전에 다시 나오게 되고, 이 경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등판하는 핵심 불펜 자원이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과 일본은 각 선발인 박찬호와타나베 슌스케의 호투로 0:0의 균형이 8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8회말, 7회부터 선발 투수 뒤로 마운드를 이어받아 잘던지던 스기우치김민재에게 볼넷, 이병규에게 안타를 내주면서 1사 2,3루의 위기 상황이 된다. 이 때, 일본은 경기의 가장 중요한 승부처에서 스기우치를 내리고 당시 핵심 불펜 자원이자 1라운드 한일전에서 엄청난 직구 구위로 타자[20]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기대감을 충족시켜준 후지카와를 다시한번 등판시킨다. 하지만, 후지카와는 곧바로 첫 타자 이종범에게 그의 가장 자신있는 무기였던 직구를 공략당해 2타점 적시 2루타를 내준다. 타자 주자인 이종범이 3루에서 아웃 되는 바람에 아웃 카운트는 2아웃이 되었으나 승계 주자가 홈을 밟으며 2:0의 스코어로 쫓기게 된다. 즉, 분식회계를 해버린 셈. 이 당시 일본은 1승 1패로 한국전에서 지면 거의 탈락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장 중요한 경기의 가장 중요한 게임에서 분식회계를 해버렸으니, 게다가 직전 미국전에서도 끝내기 패전 투수가 된 그였기에 리그에서 위력적이던 후지카와가 의외로 첫 국가대표 대회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 셈. 이후, 이승엽을 뜬공 처리하며 8회는 더 이상 실점없이 마무리 하였고 9회부터는 오츠카 아키노리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팀은 이후 니시오카 츠요시의 솔로홈런이 터지기는 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하며 2:1의 스코어로 패배한다. 후지카와가 이종범에게 내준 2점은 스기우치의 승계주자였으므로 후지카와는 무자책이었고 패전 투수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임팩트가 컸던 탓인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이 대회에서 후지카와는 감독에게 중용받지 못하며 더 이상 등판하지 못한다. 그런데, 멕시코를 꺾을 것이라 보여졌던 미국이 의외로 멕시코에 지게되며 일본은 미국의 삽질 덕에 가까스로 4강 전에 올라간다. 그렇게 어부지리로 올라간 준결승전에서 우에하라 고지의 맹활약으로 결승까지 가게되며 결국 결승전에서는 쿠바까지 10:6으로 누르고 초대 대회 우승을 하게 된다. 후지카와는 정작 2라운드 중요한 경기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더 중요한 경기인 준결승전결승전에는 등판조차 못했지만, 팀이 우승한 덕에 본인의 커리어에 WBC 우승이라는 업적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경기인 2라운드 미국전, 한국전에서 각각 끝내기 결승 안타와 결승 2타점 2루타를 내주는 바람에 후지카와는 이후 경기에서 더 이상 중용받지 못했다. 2005년 리그에서 위력적이던 모습을 보여주었던 후지카와였지만, 첫 국제대회에서는 그와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 이 대회에서 후지카와의 최종 성적은 2.2이닝 4피안타 3탈삼진 무사사구 1실점(무자책) ERA 0.00으로 성적 자체는 준수하지만 결승타를 두번 내주며 리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단기전에서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피칭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2라운드 미국전과 한국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경기에서 각 한번씩 결승타를 총 2번이나 내주었다는 점에서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의 방화와 더불어 2006년 WBC는 그의 단기전 징크스의 대표적 예시가 되어버렸다. 특히, 한국에서는 2라운드 이종범의 결승타를 내주었던 상대 투수로 기억되며, 그의 NPB에서 탄탄한 성적과 입지와는 달리 이와세 히토키와 더불어 아직까지도 국내 야구팬들에게 두 명은 한국의 수호신(...)으로 불리게 된다. 실제로, 후지카와와 이와세는 일본 내에서도 커리어가 굉장히 좋고 성적도 훌륭했기에 일본 야구팬들에게는 최고의 중간 및 마무리 투수를 꼽을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이 둘은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시켜 준 두 투수들이기에 단기전에서 그들의 모습은 개무시 수준으로 폄하당한다.

6.2.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2007년에도 엄청난 성적[21]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후지카와는 그 해 12월에 대만에서 열린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하게 된다. 당시 한국과의 경기에서 출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감독 호시노 센이치2006 WBC에서 후지카와가 한국에게 결정적 점수를 내줬던던 탓인지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그를 아끼고[22], 마지막 경기인 대만과의 경기에 그를 투입한다.

  • 당시 경기에서 선발 투수는 다르빗슈 유. 다르빗슈는 7이닝 2실점으로 잘 막고 내려왔고, 팀 타자들도 고루 활약하며 7:2 앞선 채로 8회말에 선발 다르빗슈를 이어 마운드에 후지카와가 등판한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잘 잡아내었고, 후속 타자인 3번 타자 펑정민도 범타 처리, 당일 홈런을 기록했던 4번 천진펑[23]도 좌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1이닝 퍼펙트로 대만 타자들을 막아낸다. 이후, 9회초에 아라이 타카히로의 홈런 등으로 3점을 추가한 일본은 10:2로 앞선 상황에서 9회말에 후지카와를 내리고 우에하라 고지를 마운드에 올려 경기를 마무리 시킨다. 이 날 후지카와의 기록은 1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이름값을 해주었으며 직전 대회인 2006 WBC에서의 부진을 어느정도 만회한다.

6.3.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2008년 전반기 엄청난 성적[24]을 올리고 있던 후지카와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승선한다. 이 대회에서도 핵심 불펜 투수로 활약한다. 이 대회에서는 그의 첫 국가대표 커리어였던 2006 WBC 대회에서 부진했던 것과 달리 그의 리그내 성적과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준다.

  • 대회 첫 경기인 쿠바와의 경기에서 팀이 4:2로 지고 있던 8회말에 등판하여 상대 2,3,4번 타자를 모조리 범타 처리하며 1이닝 퍼펙트로 막아내었다. 이 날 기록은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 이후 곧바로 다음 경기인 대만과의 경기에 재차 나서며 연투하게 된다. 이날 경기는 8회까지 일본이 대만을 2:1 한점차로 아슬아슬하게 이기던 상황이었고, 접전 상황에 후지카와가 등판하여 완벽한 투구를 보여주며 그 해 전반기 NPB에서 기록한 성적이 운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엄청난 직구 구위로 상대 타자들을 모조리 삼진 처리하며 1이닝 퍼펙트로 막아내었고, 9회에 마운드를 우에하라 고지에게 넘겨준다. 팀은 9회초에 4점을 추가하며 6:1로 이기게 된다. 이날 후지카와의 기록은 1이닝 무피안타 3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 네덜란드 전한국전에서 휴식을 취한 후지카와는 캐나다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날 경기도 한 점차의 접전상황에서 후지카와는 등판하게 된다. 일본이 이나바 아츠노리의 솔로 홈런덕에 1:0으로 앞서 있던 8회말에 등판한다. 첫 타자를 2루 땅볼로 잡아낸 후지카와는 이후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다시 한번 1이닝 퍼펙트로 마운드를 지켜낸다. 이후 9회에는 우에하라 고지가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팀은 1:0으로 캐나다에게 신승을 거둔다.[25] 이 경기 까지 포함, 후지카와는 3경기 등판 3이닝 5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이름값을 증명해 내고 있었다.

  • 이후,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중국 전져주기 게임논란이 일어났던 미국과의 마지막 예선전에서 휴식을 취한 후지카와는 한국과의 한국과의 준결승 전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날은 팀 타자들이 1회와 3회 각각 1점씩을 뽑아내준데다가, 선발 스기우치 도시야가 1점만을 내주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후 등판한 카와카미 겐신나루세 요시히사가 호투하여 2:1로 앞선 상황에 7회말을 맞이한다. 감독 호시노는 이전 경기들에서 승리의 레퍼토리였던 8회 후지카와 - 9회 우에하라 공식을 깨고 7회에 후지카와를 올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일본 팀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후지카와는 이대호에게 볼넷, 고영민이진영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생각보다 쉽게 동점 1실점[26]을 내주었고 이전 경기에서 지켜온 대회 기간 내내 무실점 기록도 깨지고 만다. 후지카와는 이종욱을 유격수 땅볼 처리하며 7회를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마무리 하였지만, 8회에는 이와세 히토키로 교체된다. 이후, 이와세는 다들 알다시피 이승엽에게 역전 2점 홈런을 내주었고 G.G.사토의 실책, 강민호의 쐐기 2루타 까지 묶어 팀은 무려 4점을 내주며 한국에 6:2로 패배한다. 동점을 내주며 무너진 탓인지, 후지카와는 이후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등판하지 못하였고 팀은 참사급으로 투수들[27]이 무너지며 8:4 더블스코어로 패하여 대회를 노메달로 마무리한다.

후지카와 입장에서는 한국이 천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한국에게 쉽게 공략당하는 모습을 베이징에서 재차 보여주었다. 한국과의 경기 전까지는 3경기 퍼펙트로 막아내고 있던 난공불락의 그였지만, 낮경기라 컨디션 조절을 실패한 탓인지 한국과의 경기에서 또다시 무너지며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이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4이닝 2피안타 7탈삼진 1볼넷 1실점 ERA2.25로 당해 리그에서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이름값은 증명한 대회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무너져도 그가 이 대회에서 출전한 마지막 경기이자 제일 중요한 경기였던 준결승전에서 무너지는 바람에 그의 단기전 징크스가 다시 한번 발현되었다고 일본 야구 팬들은 그를 질책했다. 실제로, 이 대회 직후 일본은 참사 급 패배 및 치욕스러운 노메달 때문에 특집 방송을 편성하여 일본 야구의 문제점을 분석했을 정도로 여론이 난리가 났으며 중요 경기에서 패배의 원인이 되었던 플레이들이 재차 거론되며 선수들은 겁나 까였다. G.G.사토급의 패배의 직접적인 원흉까지는 아니었지만, 준결승전에서 한국에게 동점타를 내주며 역전의 빌미를 제공한 후지카와도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던 셈.

6.4. 2009 WBC[편집]


2008년 베이징을 다녀온 이후, 리그에서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였던 후지카와는 2009 WBC에서도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이전 대회와는 달리 핵심 불펜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이는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하라 타츠노리가 중요한 경기에서 그를 마무리로 쓰지 않고 선발로 데려간 다르빗슈 유를 마무리로 썼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2006 WBC와 베이징 올림픽에서와 달리 후지카와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에 중간 계투로 나오거나 점수차가 이미 많이 벌어진 경기의 마지막 투수로 나와 던졌다.

  • 먼저, 후지카와는 1라운드 중국전에서 처음으로 등판한다. 팀이 4:0으로 이기고 있던 9회초 마지막 경기를 끝내기 위해 후지카와가 올라왔다. 1안타를 내주기는 했으나, 삼진 한개와 함께 무실점으로 경기를 잘 마무리하였다.

  • 이후,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하다가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에 출전한다. 이 날은 선발 봉중근이와쿠마 히사시의 호투로 엄청난 투수전이 벌어졌고 이후 등판한 양팀의 불펜 투수들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9회까지 1:0으로 접전 상황이었다. 9회초에 야마구치 데쓰야가 선두타자 이택근에게 볼넷을 내주어 무사 1루인 상황에 후지카와가 더 이상 실점하지 않기 위해 등판하였다. 당시 타격 컨디션이 좋던 김태균[28]을 1루수 팝플라이 처리, 이후 이대호에게 볼넷을 내주지만 이용규를 병살 처리하며 실점없이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9회말, 팀 타자들이 상대 마무리 임창용에게 막히며 1:0 영봉패를 당한다. 그러나, 후지카와 개인으로는 베이징에서의 아픔을 한국에게 설욕하였다고 볼 수 있다.

  • 후지카와의 컨디션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2라운드에서도 후지카와는 중용받지는 못한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경기인 첫 경기 쿠바전과 마지막 순위 결정전인 한국전에서만 등판한다. 쿠바전에서는 팀이 6:0으로 앞서고 있던 9회말에 등판하여 1안타를 내주기는 했으나 2개의 삼진을 솎아내며 실점없이 경기를 마무리 시켰다.

  • 이후, 중요한 경기였던 한국과의 2라운드 승자조경기와 일본의 4강 진출과 대회 탈락의 당락이 결정되는 엘리미네이션 게임인 패자조 2경기 쿠바와의 경기에서는 등판하지는 못했다. 그 다음에 있던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인 순위 결정전[29]에 후지카와는 등판한다. 팀이 6:2로 앞서고 있던 9회말에 등판한 후지카와는 등판하여 첫 타자 이대호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처리한다. 후속타자인 이범호에게 좌전 안타를 맞지만 이후, 이택근을 좌익수 플라이 아웃 이진영을 3루 땅볼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마무리한다.

후지카와는 이 대회에서 한국과의 순위 결정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등판하지 못한다. 준결승전결승전 모두 등판하지 못하였고, 특히 결승전에는 그 대신 다르빗슈 유가 마무리로 선택되어 등판하는 바람에 헹가래 투수가 되지 못한 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국가대표로 더이상 출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나갔으나, 이는 오보였으며 후지카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정했다. 어찌됐든, 후지카와는 팀의 2연패 덕에 스즈키 이치로, 마쓰자카 다이스케, 후쿠도메 고스케, 와타나베 슌스케, 스기우치 도시야, 아오키 노리치카 등과 함께 2연패 멤버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대회에서 성적도 4이닝 3피안타 3탈삼진 1볼넷 무실점의 좋은 모습으로 그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2006 WBC 대회에서의 수모를 갚았다. 특히, 한국과 치른 두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설욕하며 2006 WBC와 2008 베이징에서 쌓인 '한국에게 약하다'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는 쇄신하였으며 마지막 국가대표 커리어도 마지막 대회 무실점이라는 좋은 기록으로 마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7. 피칭 스타일[편집]




정면에서 본 155km/h 포심 패스트볼[30]


포수 시점에서 본 포심 패스트볼[31]
패스트볼 위주의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였다. 패스트볼의 구사 비율은 70% 언저리고[32] 2010 시즌까지는 포크볼과 커브볼을 섞어썼으며 2011 시즌부터는 포크볼의 구사 비율을 더 늘려 사실상의 투피치 투수가 되었다. 평균 구속 140km/h대 후반~150km/h대 초반, 최고 구속 156km/h의 포심 패스트볼은 당대 일본 야구 최강의 패스트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었을 정도였는데, 구속만 보자면 더 빠른 선수들이 있었지만 구속에 비해 구위가 훨씬 뛰어나다고 여겨졌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가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후지카와의 공이 일반 투수 평균의 1.3배가 넘는 다회전구이며[33] 회전축의 각도도 매우 적기 때문에 볼의 궤적이 중력에 의해 떨어지지 않고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이었다.[34] 때문에 실제 상대해보면 더 빨라보이고 보통 투수의 속구보다 훨씬 위에서 날아온다고 한다. 후지카와 본인은 피칭할 때, 더 스핀이 (공에) 먹어라!는 개념으로 공을 찍어 누르듯이 던진다고 덧붙여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후반부터 종종 과거의 투구폼으로 회귀가 시작되더니 2011년 이후로는 전성기 시절과 하체부분에서 아마추어가 봐도 많은 차이가 날 정도로 투구폼이 변화하면서[35] 속구의 구위가 상당히 줄었다. 전성기시절의 후지카와가 공을 놓는 포인트와 지금의 포인트를 비교해보면 위아래로는 5.5피트가량에서 형성이 되는 것은 비슷하지만 좌우의 변화가 1~1.5피트정도의 포인트에서 릴리즈되던 볼이 2피트정도로 약 한발가량 멀어진 모습이 관찰이 된다. 이로 인하여 스핀앵글도 자연스레 바뀌었는데 과거 4~7도 가량의 차이를 보이며 약 184~7가량으로 형성이 되던 스핀앵글이 현재는 약 195~205도 사이에서 형성이 된다. 약 10~20도가량 차이가 나게 되었다라는 이야기인데, 후지카와의 솟아오르는 듯한 속구는 다회전의 영향도 있었지만 스핀앵글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 했다.[36] 앵글이 멀어진 만큼 대신에 수평 무브먼트는 -1에서 -4정도로 약간 늘긴 했지만 대신에 거의 직선에 가깝다라고 여겨지던 수직 무브먼트가 약 4인치가량 상당히 감소하게 되었고 평속도 140km/h초중반대로 떨어졌으며 여전히 2300이라는 메이저리그 상위권의 회전속도를 자랑하고는 있지만 과거만큼의 회전속도는 아니기에 예전만큼의 위력적인 속구는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낙폭이나 좌우변화는 역시나 크지 않지만 후지카와가 던지는 속구에 비하여 약 9인치정도 떨어지는 포크볼로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이 포크볼에 의한 헛스윙율이 상당히 높은데다가 좌우변화가 속구와 거의 차이가 없기에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속구와 속도도 약 15km 정도 차이나기에 타이밍 빼앗는데도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다.

제구력도 뛰어난 편이다. 보통 후지카와의 경우 대체로 구위에 주목을 많이 하는 편 이지만, 투구추적을 해 보면 커브의 딜리버리는 조금 불안정한 감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릴리즈포인트가 거의 일정하다라고 할 정도로 딜리버리 컨트롤이 매우 뛰어나다. 보통 투수들의 경우 늦게 배운 구종 혹은 자신이 잘 던지지 않은 서드피치같은 경우 조금씩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지만 후지카와의 경우 잘 던지지 않는 커브조차도 릴리즈포인트가 위아래 그리고 양 옆 으로 1피트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투구폼이 상당히 안정됐다.[37] 게다가 패스트볼로 유명한 투수답게 변화구의 경우 스핀앵글이 약간 불안정하지만 패스트볼의 경우 스핀앵글이 거의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패스트볼에 한정한다면 일본내에서 후지카와보다 안정적으로 던지는 투수도 드물 정도라고 한다.


8. 단기전 징크스[편집]


이와세 히토키G.G.사토, 아베 신노스케의 고마워요 시리즈에 묻혀 잘 언급되지는 않는데, 은근히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수호신 노릇을 톡톡히 했다.(...) 2006 WBC 대회 8강 리그에서는 이종범에게 2타점 결승타를 얻어맞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에서는 세번째 투수로 한국전에 등판. 이대호, 고영민, 이진영이 간단하게 공략해서 동점타를 뽑아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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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대회

WBC 2회 대회 때 준결승, 결승에서 마무리 투수가 올라가야 할 상황에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정작 마무리로 데려간 후지카와는 캐무시하고 선발 투수로 데려갔던 다르빗슈 유를 올렸다. 이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차후 국가대표로 나오지 않겠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후지카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런 보도를 완전 부정했다.

하지만, 한국전에 유독 임팩트가 큰 장면이 많았을 뿐이지 정작 후지카와의 통산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은 엄청났다. 후지카와가 프로 선수로서 국가대표에 출전하여 남긴 기록은 통산 13경기 11.2이닝 9피안타 14탈삼진 2볼넷 2실점(1자책) ERA 0.77[39]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단기전 징크스가 있다는 항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국제전에서만큼은 그는 그의 이름값과 실력에 걸맞는 성적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한국과의 기록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국제전에서 그의 통산 기록은 8경기 7.2이닝 5피안타 11탈삼진 1실점(무자책) ERA 0.00으로 국제용 투수같은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과의 경기도 5경기 중 1경기를 빼면 무실점[40]으로 틀어 막았다. 통산 한국전 기록도 5경기 4이닝 4피안타 3탈삼진 2볼넷 1실점 ERA 2.25으로 못 던졌다고 볼만한 기록은 아니다. 다만, 한국과의 경기에 이종범에의한 분식회계나 이진영에의한 동점타를 내주는 등 비교적 약했고 쿠바나 미국 등 다른 나라의 타자들에게 유독 극강의 모습을 보이며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한국전에서 5경기 중 3경기는 아예 점수를 내주지도 않았다. 후지카와 입장에서는 저 두 장면이 매우 아쉬울 듯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국내에서 정규시즌에서는 리그를 씹어먹다 포스트시즌만 가면 얻어터지는 일이 잦았는데,

1. 2005년 시즌 방어율은 1.36, 허나 일본시리즈 방어율은 9.00[41]
2. 2008년 시즌 방어율은 0.67. 거기에 시즌 1패는 이병규에게 얻어맞은 끝내기 홈런 밖에 없었지만[42],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이 6.00에 타이론 우즈에게 결승 2점홈런을 허용해 팀의 광탈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3. 2010년 시즌 방어율은 2.01,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은 9.00! 역시나 탈락에 공헌(...) 다만 이 문제는 시즌 후반부터 체력 문제로 연일 불질을[43] 일삼았던 터라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결국 시즌 성적은 낮은데 통산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이 7.88이란 엽기적인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동일기간인 2005 - 2010시즌까지의 통합방어율은 1.26이다. 시즌에는 끝판왕 포스가 철철 넘치는데 이상할 정도로 클라이막스 시리즈와 국제전에서만 두드려 맞는 것을 보면 단기전에 대한 울렁증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시즌에서의 나쁜 성적은 정규시즌 중의 혹사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서 생긴 문제라는 견해가 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13년간 활약한 포수 야노 아키히로의 은퇴식이 예정된 경기에서 9회 2아웃을 잡아놓으면 대기명단에 있던 야노 선수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팀의 3:1 리드상황을 지키지 못하는 3점 홈런을 맞고 본의 아니게 대선배의 은퇴식을 망쳐버린 일도 있었다.[44][45] 공교롭게도, 본인의 은퇴식때 야노가 감독으로 재직하는 상황이 되었다. 노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야노가 홈플레이트에서 마지막 공을 잡아주며 10년만에 이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백넘버 후임인 갬블러오승환은 단기전에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숙적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업셋시키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를 먹었다.[46]


9. 이모저모[편집]


  • 야구소년이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의 한자[47] 때문인데, 저런 이름을 지은 이유는 아버지가 아마 야구팀 투수인데 그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다음날 태어나서 아무 생각 없이 붙였다고 한다(...). 다만 지금 와서는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다.

  • 오승환의 아시아 최다 세이브 타이틀에 도전하는 것이 본인의 목표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로 2007년 46세이브를 기록하며 기록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파일:external/blogimg.goo.ne.jp/b51ec769a6bf7388857a93fe794c9eed.jpg
  • 히로스에 료코와는 중학교 동창인데 후지카와에게 못생겼다고 엄청 갈궜다고 한다..(..) 그래도 한신에 입단할 때 격려편지를 보내는 등 나름의 친분은 있었는 듯. 지명된 직후 토크쇼에서 큐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 NPB시절 테마송으로는 LINDBERG의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를 사용했다.[48] 부인과의 추억이 담긴 곡이라고 한다.



  • 테마송과 함께 등장신. 화면에 나온 여성은 그냥 팬이 아니라 이 테마곡을 부른 LINDBERG의 보컬 와타세 마키로, 자신의 노래를 테마송으로 써주는것에 대해 후지카와에게 감사하다고 개인적으로 싱글 CD를 전달한다던가 코시엔에 시합을 보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 2007년 9월 경기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던 이승엽의 타석때 첫구를 백네트로 던지면서 고의성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고 이때 이승엽도 상당히 벙쪘었던듯. 그래서인지 그후 방한잠실야구장에서 만나서 대담을 나눴을때 후지카와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하자 이승엽이 "백네트에 공을 던진 선수로 기억하지^^" 라고 화답해줬다. 예상대로 그건 고의가 맞기는 했는데 이승엽한테 화가 난것이 아닌 당시 타임을 받아준 심판때문에 투구동작을 멈추다가 부상 당할뻔 해서 재차 초구를 던질때 그렇게 했다고 한다.(...)

  • 2010년 같은 성의 후지카와 슌스케가 입단하면서 한동안 이름이 후지카와 큐(藤川球)까지 쓰였다가[49] 계약시 본인의 강한 요구에 따라 큐지가 후지카와(藤川)로 슌스케가 후지카와 슌(藤川俊)까지 표기되는 것 으로 일단락되는 듯 하였으나 스포츠기사에서는 오히려 큐지가 후지카와 큐(藤川球) 혹은 큐지(球児)로 표기가 되었고 슌스케가 후지카와(藤川)로 표기가 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다행이 2011시즌부터 슌스케가 등록명을 슌스케(俊介)로 바꾸면서 일단락 된 듯.

  • 한신의 등번호 22번은 원래 '미스터 타이거스' 타부치 코이치를 필두로 포수들이 착용했던 번호였지만[50], 후지카와의 맹활약으로 현대 한신 팬들에게는 마무리 투수의 등번호로 주로 인식되고 있다. 그 등번호를 이어받은 게 오승환이었고, 후지카와가 쌓은 등번호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 유튜브 Q&A에서 거인팬이라고 밝혔다.

  • 2006년 NPB 올스타전에 등판해 직구만 던지겠다는 사인을 보인뒤 타자들을 상대했다. 타자는 이에 호응해 풀스윙했으나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당시 상대했던 타자는 일본에서 2001년부터 03년까지 150홈런,이후에도 꾸준히 30홈런을 때린 알렉스 카브레라,검객이라 불렸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다음날은 기요하라 가즈히로였다

  • 이진영은 자신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본 가장 좋은 직구를 가진 사람이 후지카와라고 밝혔다. 만화처럼 공 뒤에 잔상이 생길 정도로 무브먼트가 좋았다고. 그런데 그 공을 자기가 쳐서 안타로 만들었다. 정확히는, 이진영이 공략에 성공해 낸 공은 포크볼이었다. 쿠세를 읽어 포크볼이 올 걸 알아 칠 수 있었다고. 국제전에서 후지카와의 직구를 상대로 안타를 만들어 낸 한국 타자들은, 2006 WBC 이종범과 2008 베이징 고영민 둘 뿐이다.

10.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51]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00
한신 타이거스
19
0
0
0
-
-
4.76
25
21
25
22⅔
2002
12
1
5
0
-
-
3.71
56
30
64
68
2003
17
1
1
0
-
-
3.38
28
13
19
29⅓
2004
26
2
0
0
-
-
2.61
26
11
35
31
2005
80
7
1
1
46
53
1.36
57
21
136
92⅓
2006
63
5
0
17
30
35
0.68
46
24
122
79⅓
2007
71
5
5
46
6
11
1.63
50
22
115
83
2008
63
8
1
38
5
13
0.67
34
16
90
67⅔
2009
49
5
3
25
3
8
1.25
32
17
86
57⅔
2010
58
3
4
28
5
8
2.01
47
22
81
62⅔
2011
56
3
3
41
5
8
1.24
25
14
50
51
2012
48
2
2
24
2
4
1.32
34
16
58
47⅔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13
시카고 컵스
12
1
1
2
1
-
5.25
11
2
14
12
2014
15
0
0
0
0
-
4.85
18
8
17
13
통산
27
1
1
2
1
-
5.04
29
10
31
25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16
한신 타이거스
43
5
6
3
10
14
4.60
58
33
70
62⅔
2017
52
3
0
0
6
9
2.22
41
29
71
56⅔
2018
53
5
3
2
21
26
2.32
29
38
67
54⅓
2019
56
4
1
16
23
27
1.77
29
32
83
56
통산
766
59
35
243
162
216
2.02
617
361
1205
922

[1] 독립리그 팀. 텍사스에서 부상으로 지명할당된 이후 고향에 있는 팀에서 잔여 시즌을 뛰었다.[2] 동기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로 인해 이 드래프트 지명자들을 마쓰자카 세대라 일컫는다.[3] 일본프로야구 최다안타(3,085개) 기록 보유자인 장훈에게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했다.허용투수[4] 유투브에 후지카와의 수정 전/후 투구폼이 나오는데, 공 릴리스 시 오른 쪽 다리가 일찍 구부려져 낮은 점을 발견하여 다리를 펴게 해 릴리스 포인트를 높이게 한 것이 적중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잘 안 알려졌으나 이 이후에도 2010년 후반기등 종종 이 시절의 폼으로 회귀하는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구위가 여지없이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5] 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로 인해 구위를 잃어버렸던 기쿠치 유세이의 경우도 비슷한 교정으로 구위를 되찾았다.[6] 제프 윌리엄스-후지카와 큐지-쿠보타 토모유키.[7] 웃긴건 2년뒤에 한솥밥을 먹었다는거다.[8] 쿠와하라의 안타타구를 중견수 우에다가 뒤로 흘려버리는 바람에 1루주자 카지타니가 득점.[9] 여담이지만, 후지카와가 내준 국가대표 통산 두 번의 볼넷은 모두 한국의 이대호를 상대로 내준 것이다.[10]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1이닝 무실점)과 2009 WBC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1이닝 무실점)까지 포함하면 국제대회 통산 15경기 13.2이닝 2실점(1자책) ERA 0.66 기록.[11] 한국전에서의 자책점이 후지카와의 국제대회 통산 유일한 자책점이다.[12] 물론 리그내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각 대회 시작 전에 그에 지레 겁을 먹은 한국 언론이 설레발을 떨었던 것에 비해 실전에서는 기대보다 못한 피칭 결과를 보여줬다는 평이 우세하기는 하다.[13] 실제, 이종범에게 내준 실점도 후지카와 본인의 실점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한국과의 경기에서 실점은 따지고보면 베이징때 이진영에게 내준 1실점 뿐이다.[14] 본인의 실점으로 기록된 실점은 2점이다. 나머지 2점은 한국 야구팬이라면 다 아는, 2006 WBC 이종범에 의한 '결승 2루타 분식회계'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후지카와 등판 전 8회에 스기우치 도시야가 두 명의 주자를 남겨 둔채 마운드를 내려왔고 후지카와가 그 상황에서 마운드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곧바로 이종범에게 결승 2타점 2루타를 맞았다. 타자 주자 이종범은 3루까지 무리하여 진루하다가 아웃되었고, 이후 타자인 이승엽도 내야 뜬공 처리해 이닝을 마무리했고 후지카와 본인의 실점은 없었다. 즉 분식회계를 저지른 셈. [15] 5경기 4이닝 4피안타 3탈삼진 2볼넷 1실점 ERA 2.25[16] 한국에서 후지카와는 이와세와 함께 도매로 묶여 한국의 수호신이라고 그들의 국제대회에서의 모습을 두고 까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와세는 통산 한국전 5.1이닝 7실점(4자책) ERA 6.75로 애초에 후지카와와 비교대상이 될 성적도 아니거니와 도매로 한데 묶여 국제대회에서 약했던 인물로 격하당하기에는 후지카와는 성적상 비교조차 매우 억울한 정도다. 이뿐 아니라, 이와세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경기를 모조리 고려하면 통산 14.1이닝 ERA 4.4로 국제전에서 매우 약했다. 여러모로 국제전에서 이와세는 후지카와의 비교대상조차 못된다. 다만, 후지카와는 한국전에서 결승타를 많이 내줬기에 한국에서 이와세와 한데 묶여 한국의 수호신(...)으로 취급 당할 때가 많은 것.[17] 전 투수인 이시이가 이승엽에게 역전 투런 홈런을 내주었던 상황이었다.[18] 이진영이 이시이 히로토시에게 볼 넷을 얻어냈다.[19] 니시오카 츠요시의 실책으로 인해 출루한 랜디 윈이 홈을 밟아 끝내기 점수가 되었기 때문에 무자책이었다.[20] 박용택[21] 46세이브 6홀드 83이닝동안 115탈삼진 ERA 1.63 기록. [22] 대신 한국전에는 호시노 센이치는 불펜으로 이와세 히토키우에하라 고지를 투입하였다. 우에하라 고지는 전년도 대회 2006 WBC에서 한국에게 엄청나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이와세 히토키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그의 모습 때문에 잘 모르는 사실이나, 베이징 올림픽 이전까지는 '사신'이라는 리그내에서의 별명에 걸맞는 활약을 국제대회에서도 보여주었다. 실제로 베이징올림픽에서의 성적을 제외하면 이와세는 9.2이닝 4피안타 12탈삼진 3사사구(2볼넷 1사구) 1실점(무자책) ERA 0.00을 기록했다. 여기에 삿포로 참사 당시 중간 계투로 나와 한국전에서도 호투한 바 있다. 이 때문에 2007년 당시에 이와세는 한국전에 후지카와보다도 더 호시노에게 신뢰받는 투수였을 것이다. [23] 2007년 당시 천진펑은 LA 다저스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진작에 2006년부터 대만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던 중이었다.[24] 3승 1패 32세이브 44이닝 동안 64탈삼진 ERA 0.82 기록. 게다가 실점(자책점) 단 5실점(4자책점) 밖에 없었다.[25] 여담이지만, 한국도 이 대회에서 류현진의 호투와 정근우의 솔로홈런을 앞세워 캐나다를 1:0 한점차로 잡아낸다.[26] 이는 후지카와의 국제대회 통산 유일한 자책점이다.[27] 와다 츠요시카와카미 겐신이 각각 4실점 하였다. [28] 당일 경기 유일한 타점의 주인공이다. 4회 1사 1,2루 상황에서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3루 선상을 흐르는 좌전 적시타를 기록했다.[29] 양팀 모두, 주전 투수들을 투입시키지 않았고 지금까지 경기에 많이 등판하지 못했던 투수들 위주로 경기에 내보냈다.[30] 2007년 9월 14일 주니치 드래곤즈전, 타자는 타이론 우즈.[31] 2010년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 공을 받는 포수는 조지마 겐지.[32] 오승환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2009~2012시즌 중 후지카와의 속구 비율 최대치는 2010시즌의 74.8%였고, 2014시즌 오승환의 속구 비율은 70.79%였다.[33] 일반적인 아시아 선수들의 공 회전속도는 1900대에서 형성이 되는 반면에 후지카와의 전성기시절 회전속도는 평균 2400~2500대였다. 일본 야구 투수들 중 최고의 패스트볼 수직 무브먼트를 보유한 투수 중 한 명인 우에하라 고지가 평균 약 2300~2400대에서 형성된다.[34] 이것은 과거의 오승환의 속구가 위력적인 이유와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오승환의 속구 또한 엄청난 회전수와 적은 회전축 각도가 구위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것은 2012년에 스포츠 운동화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다.[35] 일본 내 피칭 인스트럭터 및 코치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과거처럼 하체가 주저앉으면서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많이 쏠리는 모습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투수의 경우 나이를 먹으면 팔 각도가 내려오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노화현상 혹은 혹사로 인한 영향 보는 측면도 없지않아 있다.[36] 일반적으로 속구의 경우 손가락으로 찍어누르는 방향으로 휘어지게 되어있다. 과거의 후지카와의 경우 수평을 180도라고 봤을때 약 4~7도 사이이내에서 아래로 찍어 눌렀기에 좌우의 변화는 적었지만 위로 솟아오르려는 힘이 강한 구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따라서 후지카와의 솟아오르는 속구는 스핀앵글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수평에서 20도정도 벗어난 위치에서 누르기 때문에 공도 자연스럽게 20도 정도 대각선으로 휘어지려고 하게 된다.[37] 흔히 투구폼 겹쳐놓기 움짤로 유명한 다르빗슈 유가 위아래로 1피트 그리고 양 옆으로 2피트 이내로 딜리버리 컨트롤을 하는 투수라는 걸 떠올려보면 굉장히 딜리버리 컨트롤이 뛰어난 선수라는 이야기다.[38] 이 실점이 후지카와의 국제대회에서의 유일한 자책점이다.[39]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직전 호주 대표팀과의 평가전(1이닝 무실점)과 2009 WBC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1이닝 무실점)까지 포함하면 국제대회 통산 15경기 13.2이닝 2실점(1자책) ERA 0.66 기록.[40] 실제, 이종범에게 내준 실점도 스기우치 도시야의 승계주자였고 그 쌓아놓은 장작을 처리하다 이종범에게 적시타를 맞은 것이기에 후지카와 본인의 실점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한국과의 경기에서 실점은 따지고보면 베이징때 이진영에게 내준 1실점 뿐이다.[41] 수정 전 플레이오프 성적이라 기록되어 있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세리그에 도입된 건 2007년부터다. 따라서 2007년 전까지 센트럴리그가을야구일본시리즈뿐이었다.[42] 거대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라뱅쓰리런의 시초가 되었으니까... 고마워요 후지카와?[43] 시즌 중반까지 1.30이던 방어율이 시즌 종료때는 2.01까지 수직상승했다.[44] 경기 영상. 상대는 당시 최약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홈런을 친 선수는 무라타 슈이치였다. 경기 해설자가 홈런 허용 순간 "(외야 펜스를 넘어) 가지마! 가지마! 날아가지마!" 를 외치는 장면이 압권.[45] 다만 이 사건에 관해서 유튜브 영상 댓글 등을 보면 무라타는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고 오히려 "대선배의 은퇴경기라고 대충 플레이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라며 칭찬하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 반면, 해설자에 관해선 "돈받고 일하면서 그딴 편파적인 해설을 하냐" 란 식의 비난이 엄청 많다. 그도 그럴 게, 유튜브에서 야노의 은퇴경기 영상을 찾아보면 해설자가 무라타의 타석 때 "뭐 분위기 읽을 줄 알면 여긴 헛스윙으로 삼진 당했으면 좋겠네요ㅋㅋㅋ 분위기 읽고 연출 좀ㅋㅋㅋ" 이런 식의 수준 낮은 소리를 해대질 않나, 무라타가 파울을 날리자 "분위기 읽을 줄 아는구만유ㅋㅋㅋ" 하질 않나, 그리고 결정적인 게 바로 위의 저 발언. 이런 수준 낮은 편파해설을 해대니 비난을 안 받는 게 이상하다. 당장 위의 의견도 한신 팬들 사이에서 꽤 나온 것. 다만 변론을 하자면 해당 방송중계는 전국방송이 아니라 선 텔레비전 중계로 간사이 지역을 대상으로 한신 경기를 전속으로 중계하는 방송사이다. 일본프로야구(+메이저리그) 중계는 온갖 지역방송들의 각축장이라 한국처럼 전 경기가 전국단위 채널로 방송을 타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한신 팬의 입장에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정작 무라타도 "가지마! 위험해! 위험해!"라고 생각한건 덤.[46] 오승환의 한일통산 300세이브 허용구단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다. 하라보살이 괜히 오승환을 탐냈던게 아니다.[47] 공 구(球)자에 아이 아(児)자[48] 노래가 나오면 한신팬들은 메가폰을 들고 좌우로 박자를 맞춰 떼창을 불렀는데 보통 마무리투수들이 빠른 템포의 노래를 사용하는 것 과는 다르게 조금 독특한 풍경. 덕분에 2007년에 후지카와의 사진을 재킷에 담아서 야구소년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재발매 되었었다.[49] 형제가 고시엔에 배터리로 출전했을 당시 형제 구분을 위해서 쓰던 등록명[50] 1985년 우승 당시의 주전 포수 키도 카츠히코의 등번호로도 유명했다. 이후로도 포수 유망주였던 세키카와 코이치주니치로 이적하기 전까지 이 번호를 쓴 적도 있었다.[51] 홀드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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