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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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증손
임창군 | 臨昌君


파일:임창군묘.jpg

경안군 및 임창군 묘 전경
봉호
임창군(臨昌君)[1]

혼(焜)
출생
1663년 8월 3일[2]
사망
1724년 2월 29일[3]
(향년 62세)
능묘
경안군 및 임창군 묘[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1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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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생부 -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생모 - 분성군부인 허씨
(盆城郡夫人 金海 許氏)
배우자
응천군부인 박씨(凝川郡夫人 朴氏)[1]
자녀
슬하 6남 5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차남 -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
3남 -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
4남 - 밀천군 이담(密川君 李墰)
5남 - 밀평군 이집(密平君 李㙫)
6남 - 밀운군 이훈(密雲君 李壎)
장녀 - 신사경(申思敬)의 처
차녀 - 변치은(邉致殷)의 처
3녀 - 박필륭(朴弻隆)의 처
4녀 - 김동정(金東鼎)의 처
5녀 - 신흡(申㬛)의 처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대중매체에서
5. 가족관계
5.1. 후손들



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혼(李焜)[5]. 소현세자 이왕민회빈 강씨의 손자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초명은 이석견)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1663년(현종 4년)에 태어났다.

임창군의 아버지 이석견(경안군)은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사후 할아버지 인조에 의해 4살 때부터 제주도에서 형인 이석철(경선군), 이석린(경완군)과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 이석철과 이석린은 귀양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 죽었는데 그 내막이 석연찮다. 자세한 내용은 경선군, 경안군 문서 참조.

다행히 이석견은 살아남았고 삼촌 효종이 즉위한 후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효종 7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해배[6] 2년 뒤에는 복권받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해졌고 품계가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올랐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후유증 때문인지, 경안군은 1665년(현종 6년)에 22살의 나이로[A] 요절하고 말았다. 그 때 임창군은 불과 3살이었다.[A]

경안군 사후에도 임창군과 그의 형제들은 왕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졌었는지 상당히 잘해주었다.

그런데 '원래 왕이 되었어야했다'는 위치 때문에 항간에서는 임창군을 왕위에 올릴 것이란 유언비어가 돌았고, 임창군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79년(숙종 5년) 3월에 결국 사건 하나가 터졌다. 강화도에서 흉서가 나돌았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흉서를 국청에 내려 제장들에게 보내다

"아! 오늘이 이 어떤 때인가? 혼란이 더없이 심한 날이다. 어지럽던 조정을 혁폐하여 종묘 사직을 붙들어야 할 텐데 합당한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아! 오늘의 위정자(爲政者)는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을 저버려 외구(外寇)를 계도(啓導)하고 백성을 괴롭혀 성을 쌓으니, 이 무슨 심술(心術)인가? 이번 13일은 곧 계해년(癸亥年) 반정(反正)한 날이다. 이날을 기하여 쳐들어갈 것을 의논하였는데, 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나루터 둘이 있으니, 하루 전날 비변사에 정문(呈文)을 올리고 각각 수백 인을 보내되 미리 배와 노를 준비하여 건넌다. 대중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 모인 뒤에 영(令)을 내리기를 ‘사기(邪氣)가 대궐을 범했으므로 중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어 쫓아내야겠기에 급급하게 불러들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손자 임천군(林川君)[7]

은 곧 경안군(慶安君)의 아들인데 지금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다.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또 나라의 종통(宗統)이다. 오늘 당쟁의 화가 이에 이른 것도 다 종통이 순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 치고 그 누가 이 군(君)을 세워 국통(國統)을 바로잡고 붕당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으리요마는, 시세(時勢)에 눌려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제공(諸公)이 만약 이 임금을 세워 종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제거한다면,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한 그 공은 다만 한 때만의 공이 아닐 테니, 어찌 쾌한 일이 아닌가? ...(후략)...“

숙종실록》 8권, 1679년(숙종 5년) 3월 19일 갑인 5번째 기사#

즉, '임창군이 왕실의 종통이니 그를 보위에 올려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러했다. 1678년(숙종 4년) 말부터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수십 개를 축조하게 했고, 공사 시작은 다음해인 1679년(숙종 5년)부터 했는데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공사 진행으로 인해 논밭 경작 등에 꽤 큰 피해를 입었던 듯 하다.# 그래서 반란 세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 흉서를 축성장 이우(李㒖)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고변하여 세상에 알려졌다.[8] 원래 저런 사건이 터지면 본인은 몰랐다하더라도 추대 대상인 왕족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임창군은 숙종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대신 동생 임성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인 1680년(숙종 6년)에는 한성과 가까운 교동으로 옮겨갔고# 그 다음해인 1682년(숙종 8년)에는 해남으로 갔다가 1685년(숙종 11년)에 동생 임성군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났고 직첩을 환수받았다.

1686년(숙종 12년)에는 품계가 한 단계 올라갔으며#, 1689년 1월[9]에는 장렬왕후의 재궁(관)을 묻을 때 당숙 동평군[10], 동생 임성군과 함께 참석했다.# 1696년(숙종 22년)에는 중병을 앓던 동평군을 대신해 청나라에 정사(正使)로 다녀왔으며# 이후로도 3번 더 다녀왔다.#

1718년(숙종 44년) 4월에는 민회빈 강씨의 신주를 소현세자의 묘당에 합쳐 모실 때 참여했고#, 그해 9월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어기구의 딸(훗날 선의왕후)이 가례를 올릴 때 납채례, 남정례, 고기례, 세자빈 책례 등을 민진원과 함께 행했다.#### 경종이 즉위한 후 경종이 세제 이금(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다른 종친들과 함께 명을 거두어달라고 아뢰었으나 거절당했다.##

이런 일련의 기록들을 보면, 생애 초반에는 역모에 엮이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유배에서 풀려난 후부터는 숙종의 배려로 왕실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실제로 《경종실록》의 〈임창군 졸기〉에 따르면, '만년에는 돌보아 대우함이 더 한층 융숭하여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3. 사망[편집]


1724년(경종 4년) 2월 29일[11]에 사망했다. 향년 62세.[A] 묘는 처음에 다른 곳에 있었다가 1745년(영조 21년)에 아버지 경안군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으로 이장되었다. 경안군과 임창군 묘는 1986년 6월 16일에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로 지정받았다. 얄궂게도 조선 건국 과정에서 처형당한 최영 장군의 묘도 근처에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치 임창군.png}}} ||
〈해치〉의 임창군
2019년 SBS 드라마 〈해치〉 31회에서 등장했다. 배우는 미상. 왕세제 이금(정일우 분)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우려다 역공을 당해 궁궐에 숨어있던 밀풍군(정문성 분)의 과거 회상에서 나왔는데, 가난하게 살았으며 할아버지(소현세자)[12]와 아버지(경안군)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이 마음에 가득 쌓여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밀풍군을 왕재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학대에 가까운 세뇌를 시켰고, 어린 밀풍군이 《소학》을 떼지 못하자 몹시 분노하여 "이러고도 누가 널 왕재로 보겠느냔 말이야!"면서 고함을 지르며 책을 찢어 불에 태웠다. 이후 45회에서 이인좌의 난이 실패한 후 피신해있던 밀풍군이 과거를 회상할 때 목소리로만 다시 등장했다.

5. 가족관계[편집]


  • 부 :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1644 ~ 1665)
  • 모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盆城郡夫人 金海許氏, 1645 ~ 1723) - 사헌부장령 허확(司憲府掌令 許確)의 딸
    • 동생 : 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 1665 ~ ?) - 경선군(慶善君)에게 출계

  • 정부인 :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凝川郡夫人 宻陽 朴氏, ? ~ 1721) - 박징(朴澂)의 딸
    • 장남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1698 ~ 1729)
    • 차남 :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 - 임성군(臨城君)에게 출계
    • 3남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
    • 며느리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홍수주(洪受疇)의 딸
      • 손자 : 이항석(李恒錫) - 밀풍군(密豊君)의 3남
    • 4남 : 밀천군 이담(密川君 李墰)
    • 며느리 : 반남 박씨(潘南 朴氏) - 박필진(朴弻鎮)의 딸
      • 손자 : 이명석(李命錫)
      • 손자 : 이경석(李敬錫)
      • 손자 : 이성석(李聖錫)
      • 손녀 : 임창주(任昌周)의 처
      • 손녀 : 심명진(沈明震)의 처
      • 손녀 : 정익조(鄭益祚)의 처
      • 손녀 : 장석구(張錫龜)의 처
      • 손녀 : 조학섭(趙學燮)의 처
    • 5남 : 밀평군 이집(密平君 李㙫)
    • 며느리 : 낭성 한씨(琅城 韓氏) - 한세량(韓世良)의 딸
      • 손자 : 이위석(李偉錫)
      • 손자 : 이준석(李儁錫)
      • 손자 : 이유석(李儒錫)
      • 손자 : 이휴석(李休錫)
    • 6남 : 밀운군 이훈(密雲君 李壎)
    • 장녀 : 신사경(申思敬)의 처
    • 차녀 : 변치은(邉致殷)의 처
    • 3녀 : 박필륭(朴弻隆)의 처
    • 4녀 : 김동정(金東鼎)의 처
    • 5녀 : 신흡(申㬛)의 처

5.1. 후손들[편집]


그의 자식들도 소현세자 자손들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아들 밀풍군과 밀운군은 영조 시기 역모에 엮여 사사당했고, 심지어 5대손 이명혁(李明赫)과 이명섭(李明燮)도 철종 시기에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유배갔다. 그럼에도 후손들의 대는 겨우겨우 이어졌고 결국 고종 대에 이르러 완전히 복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밀풍군, 밀운군 문서 참조.
[1] 봉호는 경상남도 김해의 옛 지명인 임해(臨海)에서 유래했다.[2] 음력 7월 1일#[3] 음력 2월 5일#[4]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 지정[5] 광해군와 발음이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광해군의 경우 ‘琿’으로 쓴다.)[6] 解配. 유배에서 풀려나다.[A] A B C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7] 임창군을 잘못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임천군에서 훗날 임창군으로 봉호가 바뀐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8] 우습게도 고변한 이우는 상은커녕 축성장 직에서 파면당하고 고문사했다.[9] 음력 무진년(숙종 14년) 12월.[10] 인조의 서장남 숭선군의 장남. 임창군에게는 서당숙이다.[11] 음력 2월 5일.[12] 작중에서는 증조할아버지라고 말했는데, 할아버지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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