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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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순철

1. 개요
2.1. 1985 시즌
2.2. 1986~1987 시즌
2.3. 1988 시즌
2.4. 1989 시즌
2.5. 1990 시즌
2.6. 1991 시즌
2.7. 1992 시즌
2.8. 1993 시즌
2.9. 1994 시즌
2.10. 1995 시즌
2.11. 1996 시즌
2.12. 1997 시즌
4. 수상 경력
4.1. KBO
5.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이순철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해태 타이거즈 시절[편집]


파일:역동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던 이순철.jpg}}}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을 기록한 김일권[1]에 이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왕조를 이룩한 해태 타이거즈의 붙박이 1번타자로 활약해[2] 팀의 우승을 8차례에 걸쳐 이끌었으며, 세 번의 도루왕과 네 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호타준족의 선수였다. 특히 외야와 내야 모두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특히 중견수 수비에 있어서는 라면수비의 원조로 유명하며, 역대 최고의 수비능력을 지닌 중견수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2.1. 1985 시즌[편집]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3] .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라는 매우 빼어난 성적으로 선동열[4]이나 이종범[5]도 수상하지 못한,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이자 2021년 이의리의 등장 전까지는 36년 동안 유일했던 신인왕에 등극하였다. 이순철은 현재는 외야수로 유명하지만 입단 당시의 포지션은 3루수로 무주공산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3루를 매꿔줄 내야 유망주로 기대받았다.[6]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 3루수 출신인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영입되자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던 것이다.[7]


2.2. 1986~1987 시즌[편집]


이후 1986년에는 타율 .257 14홈런 19도루를 기록해 홈런 5위, 도루 7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주전으로 안착했으나, 1987년에는 타율 .215에 6홈런 12도루를 기록하며 부진을 겪는다. 그러나 이는 성장통이었고, 포지션 변경으로 인한 적응기였을 뿐이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이순철은 이듬해인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1번타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2.3. 1988 시즌[편집]


1988년에는 .313의 타율에 13홈런 58도루를 해내며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도 홈런 8위에 오르는 뛰어난 타격실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2차전에서 연속으로 1차전 선제홈런 포함 결승타를 때려내 해태가 시리즈 내내 유리하게 가는데 1등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시리즈가 5차전 이내에서 끝나서 문희수가 6차전에 던지지 않았다면 시리즈 MVP를 당연히 탔을 정도.


2.4. 1989 시즌[편집]


1989년에는 .241의 낮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12개의 홈런과 2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1번타자 역할을 무난히 수행한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이 더 높았으나 이 시절에는 타자 = 타율이던 시대였던지라.... 그러나 이 시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철의 존재 때문에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었던 그 김일권이 62도루를 기록하면서 전년도에 자신이 세웠던 도루기록을 깨고 1990년에도 김일권이 48개의 도루로 도루 1위를 기록하며 도루왕 2연패를 달성했다.[8]


2.5. 1990 시즌[편집]


1990년에도 이순철은 1989년과 비슷한 성적인 타율 .249에 12홈런 26도루를 기록하면서 성적이 굳어지게 되나 싶었으나[9] 공갈포 이듬해 각성하게 된다.


2.6. 1991 시즌[편집]


이순철은 1991년 시즌 타율.276 17홈런 56도루를 기록하면서 부활한다. 김광수와의 경쟁 끝에 쟁취한 도루 1위는 물론 리그 홈런 7위까지 기록하며 해태 타이거즈를 6번째 우승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 선수로서 최고의 해를 기록한다.


2.7. 1992 시즌[편집]


1992년은 이순철은 44도루로 도루왕은 물론 기복이 심했던 타율도 .309를 기록해 리그 9위를 기록했으며 152안타를 기록해 최다안타왕도 달성. 홈런도 장채근을 이어 팀내 두 번째인 21개나 쳐내며 김성한이호성에 이어 20-20 클럽에 가입했다. 거기에 1번타자였음에도 76타점을 쓸어담아 리그8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에 있어서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더욱이 최다안타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한 이들 중 20-20을 이룬 선수는 이순철이 유일하다.[10] 비록 1992년은 돌풍을 일으킨 롯데에게 해태가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으나 이순철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391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팀의 중심 노릇을 톡톡히 했다.[11]


2.8. 1993 시즌[편집]


그러나 1993년 이후 이종범의 등장으로 그의 팀내 입지는 급격히 추락하게 되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이종범은 타격과 스피드, 장타력 등 모든 면에서 이순철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1992년의 이순철과 1993년에 막 입단한 이종범의 위치를 비교하면 분명 이순철이 압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93년 투고타저의 영향과 노쇠화의 영향을 받아 이순철은 .253의 타율과 11홈런 29도루를 기록하면서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남겼다. 그는 .280의 타율과 16홈런 73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에게 밀리게 되며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1번은 이종범의 자리가 된다.


2.9. 1994 시즌[편집]


이후 1994년 .322의 타율과 8홈런 1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폼을 다시 끌어올리는가 싶더니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8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2.10. 1995 시즌[편집]


1995년에는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96게임에 출전할 동안 타율 .201에 7홈런 13도루를 기록하고, 20개의 병살을 기록하면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심지어 출루율도 0.278로 98시즌의 성적보다도 더 나쁜 수준. 이순철의 성적 중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2.11. 1996 시즌[편집]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81v14014.jpg}}}
1996년 역시 이러한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219의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고, 수석코치와 전지훈련 중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팀의 최고참이자 군기반장으로서 선동열의 해외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팀을 결집시켜 팀의 우승으로 이끌었다.[12]


2.12. 1997 시즌[편집]


1997 시즌 또한 .213의 타율로 부진했지만 1996시즌에 이어 팀의 최고참으로서 2년 연속 우승을 함께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성적도 큰 폭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 전 해 전지훈련에서의 사건까지 겹치며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자신의 텃밭이던 중견수 자리에 1997년 김창희라는 좋은 수비실력과 일발장타를 갖춘 유망주가 입단하게 되면서 자리를 뺏기게 되고 끝내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특히 한국시리즈 엔트리 제외는 충격적이었다. 코칭 스태프가 하와이 항명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순철은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해태는 이순철을 자유계약으로 방출해버리며 해태를 떠나게 되었다.


3.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앞서 언급했던 불화로 인해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으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72경기 동안 프로야구 통산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한 것을 제외하면 타율 0.213과 2홈런 3도루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기록하고 1998년 시즌이 끝나자 바로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은퇴하였다. 사실 삼성에는 이미 양준혁[13]을 필두로 그해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신인 강동우와 기존의 최익성신동주라는 걸출한 젊은 외야수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같은 이적생이던 김종훈 역시 0.277을 기록했을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에 사실 이순철의 자리는 백업일 뿐이었다. 그래도 해태시절때 못해본 포수로 수비출전해서 도루저지도 해보면서 포수난에 뒷목잡던 삼성팬들은 이참에 주전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파일:순페이 삼성 시절 포수 출전.jpg}}}
이 사진이 그 유명한 이순철의 포수 출전한 사진이다.[14]

주전에서 밀려 백업으로 시즌을 보냈으나 LG 트윈스와의 1998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신인이자 주전 중견수 강동우가 플라이를 잡다가 대구구장 펜스에 부딪히며 정강이 골절상[15]을 입자 3차전 선발출장하여 결승타 포함 2루타와 3루타로 4타점을 올리며 삼성의 플레이오프 유일한 승리를 이끌었다.


4. 수상 경력[편집]



4.1. KBO[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이순철의 KBO 수상 경력

1985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 신인왕
1986
한국시리즈 우승
1987
한국시리즈 우승
1988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도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1989
한국시리즈 우승
1991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도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1992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도루 1위 / 안타 1위
1993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1996
한국시리즈 우승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해태
99
369
.304
112
18
5
(3위)
12
50
67
(1위)
31
(3위)
37
.477
.365
1986
88
319
.257
82
14
3
14
(5위)
40
53
19
33
.451
.325
1987
98
265
.215
57
12
1
6
29
34
12
29
.336
.291
1988
108
406
.313
127
(2위)
26
(1위)
2
13
52
81
(1위)
58
(1위)
64
(2위)
.483
.404
1989
101
373
.241
90
13
1
12
46
58
24
52
.378
.333
1990
114
381
.249
95
20
0
12
51
65
26
(2위)
64
(4위)
.396
.356
1991
115
434
.276
120
21
3
17
50
83
(3위)
56
(1위)
69
.456
.373
1992
122
492
.309
152
(1위)
22
3
21
76
101
(2위)
44
(1위)
67
.494
.389
1993
102
367
.253
93
12
3
11
44
47
29
(3위)
51
.392
.341
1994
85
314
.322
101
19
2
8
54
42
18
34
.471
.386
1995
96
328
.201
66
12
2
7
30
36
13
36
.314
.278
1996
111
351
.219
77
13
2
5
41
49
26
(5위)
44
.311
.304
1997
77
216
.213
46
6
2
5
28
31
12
26
.329
.29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삼성
72
160
.213
34
9
1
2
21
21
3
19
.319
.291
KBO 리그 통산
(14시즌)
1388
4775
.262
1252
217
30
145
612
768
371
625
.411
.348

[1]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등으로 김일권과 앙금이 쌓였던 김응용 감독은 대체 자원으로 이순철이 등장하자 그를 차기 리드오프로 점찍은 이후 김일권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그런 이순철도 나이들고 이종범이 등장한 후 기량이 저하되고 하위 타선을 맴돌다가 1997년 김창희가 들어오자 숙청되었다. 사실 하와이 항명사건이라는 대형 사고의 시발점이 이순철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김응용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서로 만나고 존중하는 말을 할 정도로 풀어졌다.[2] 다만 1993년 이후부터는 1번 타순을 이종범에게 내주게 된다.[3] 다만 학창시절의 유급으로 인해 입단이 1년 늦었다.[4] 성적은 더 뛰어났으나 입단 전의 잡음과 후반기부터 등판했다는 점에서 밀렸다.[5] 유격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지만 MVP급 활약을 한 양준혁에 밀렸다.[6] 198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3루는 뚜렷하게 주인이라 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1루수인 김성한이나 외야수인 김종모가 종종 투입되었을 정도.[7] 대학 시절에도 외야수를 본 적이 있었고, 1984 LA 올림픽에서 코너 외야수로 차출되는 등 외야 수비 경력은 이전부터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순철 본인도 외야 수비 적응이 빨랐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이 때는 그저그런 편에 속했다.[8] 이후 1993년 전준호가 75개 도루로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이듬해인 1994년 이종범84개 도루를 기록해 정상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10년대에 접어든 후로도 깨지지 않고 있다.[9] 그래도 출루율은 무난하게 3할대였다.[10] 이종범은 1994년에는 홈런 한개가 모자랐고 2003년에는 박한이에게 최다안타왕을 내주었다.[11] 여담으로 1992년의 이순철과 가장 비슷한 성적을 올린 선수는 1997년 최익성으로 이 둘은 20-20클럽 달성과 높은 출루율로 팀의 1번타자로 활약하면서 시즌 뿐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했지만, 당시 2승3패로 팀이 한국시리즈 티켓을 놓친 것까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12] 당시 이순철은 팀 내에서는 김성한의 대를 잇는 유명한 군기반장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해태 2군 감독으로 있던 김성근조차 어떻게 하지 못한 임창용의 머리 염색을 하루 아침에 다른 2군 선수들과 함께 스포츠 머리로 바꾸도록 만들었을 정도.[13] 이 해 주장으로 이순철도 혀를 내두르는 군기반장이었다고 한다. 양준혁 본인도 신인때 갓동님에게 많이 얻어맞았다고(...)[14] 1998년 8월 8일 친정팀인 해태와의 대구 경기에서 대수비로 포수로 출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다음 날, 이강철KBO 사상 첫 10시즌 연속 10승 달성에 성공했다.[15] 이 부상으로 강동우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에서 하차했을 뿐만 아니라 2년간이나 재활에만 몰두했고 복귀 후에도 그저 그런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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