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휴

최근 편집일시 :



[ 펼치기 · 접기 ]
1세
2세
3세
4세
시조고
이자연
이천상
이광희
5세
6세
7세
8세
이입전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9세
10세
11세
12세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13세
14세
15세
16세
이진유
이궁진
이용부
이린
17세
선조고






조선 시조고의 내손자
이긍휴 | 李兢休

관직
<white,#000> 사공(司空)
본관
<white,#000> 전주 이씨

<white,#000> 긍휴(兢休)
부친
<white,#000> 이입전
모친
<white,#000> 백씨(白氏)
부인
<white,#000> {{{#000000,#fff 이씨(李氏)[1]
}}}
자녀
<white,#000> 이염순 외 6남[2]
17대손
<white,#000> 태조
생몰년도
<white,#000> 미상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조선국성 전주 이씨시조 이한의 내손자.


2. 상세[편집]


이입전의 아들로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아들은 장남 이사육(李四六), 차남 이사오(李四五), 3남이 있었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이긍휴는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이긍휴가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긍휴는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1]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2] 둥국세기, 충효전에서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12-15 19:23:42에 나무위키 이긍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5:11:54에 나무위키 이긍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