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쿠라 카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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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kakura_Kakuzo.png

1. 개요
2. 생애
3. 『차의 책(The Book of Tea)』
4. 정한론자
5. 기타


1. 개요[편집]


오카쿠라 카쿠조(岡倉覚三(おかくらかくぞう), 아호 덴신(天心(てんしん, 텐신)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사상가, 미학자이자 작가로 주로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으로 불린다.


2. 생애[편집]


파일:젊은오카쿠라텐신.jpg
▲젊은 시절 텐신.

후쿠이번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고문 및 중국・일본관 큐레이터 등을 역임하였다. 19세기 말 서양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근대 일본의 탈아입구주의에 대항하여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 보전하고자 했으며, 전통 예술 학교를 건립하거나 전통 유물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등 아시아 문화재 보호에 힘썼다.

또한 그는 자신의 미학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도 능숙하여,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영어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차의 책(The Book of Tea)』(1906)은 서양에 동양의 차를 비롯한 일본다도를 소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차의 책』은 오늘날에도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함께 많은 미국인들이 아시아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로 꼽는다.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도 친분을 가졌다.

1903년 미국에 갔을 때, 한 미국인이 오카쿠라 일행에게 "네놈들은 차이니즈냐? 재패니즈냐? 자바니즈냐?"라면서 시비를 걸자 "우리는 일본 신사다. 너야말로 양키냐? 몽키냐? 동키냐?"라며 대응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사람의 양아들 비슷한 관계가 쿄토4철[1]의 일원이며 오늘날 한국 내 칸트 번역 논쟁의 원흉이 되는(...) 쿠키 슈조다.[2]

3. 『차의 책(The Book of Tea)』[편집]


덴신이 미 보스턴 미술관에 근무하던 시절 펴낸 책이다.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1899)로 서양 세계에서 히트를 치자, '어허 그건 죽음의 도리이고 생의 도리인 다도도 있다'면서, '너희 서양인들은 허구한 날 폭력적인 것에만 열광하는데 평화로운 우리 동양 정신을 제발 좀 배워보라'는 자뻑과 훈계조로 작성하였다.

그에 따르면 다도는 동양 정신의 대표인데, 중국 당송대의 도교와 불교가 이 다도 정신의 기원이지만, 송나라가 이민족들에게 박살난 이후 본토에서는 그 정신이 사라져버리고 몽골군을 훌륭히 격퇴한 일본에서만 다도가 보존, 발전, 완성되었다 한다.

1장에서는 다도 정신을 예찬하고 서양 문화에의 대결의식과 정신적 우월감을 내비치며, 2장에서는 일본 다도 성립까지의 차 문화 발달사를 논하며, 3장에서는 다도에 내재한 도교와 불교 선종의 요소를 심화적으로 살펴본다. 4장부터 마지막 7장까지는 각각 다실, 예술 감상, 꽃, 다인(특히 센노 리큐) 등을 중심 주제로 하여 덴신 특유의 미학적 시선으로 해부한다.

다도계에서는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과 더불어 차 문화 연구의 필수 참고서로 보는 듯하며, 국역본도 많다.


4. 정한론자[편집]



일본에서 정한론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아래는 그가 자신의 저서 『일본의 각성(日本の目覚め, The Awakening of Japan)』에서 한국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

Our earliest traditions tell of the god Sosano, brother of our imperial ancestress, settling in Korea; and Dankun, first king of that country, is considered by some historians to have been his son. The third century discloses our Empress Zhingo leading an invasion of the peninsula in order to re-establish our sovereignty, threatened by the rise of a number of small independent kingdoms. Our annals are filled until the eighth century with accounts of our protection over colonies. From this time onward, however, a great change comes over Japan, and all our energy is expended in religious fervor. This age, which witnessed the erection of in numerable monasteries and the casting of the colossal Buddha of Nara, saw the last of our Korean colonies allowed to perish, her appeals for help unheeded by the mother country.

우리의 초기 전통은 우리의 황실 조상(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소사노(스사노오) 신이 한국에 정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나라의 첫 번째 왕인 단군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그의 아들로 여겨진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한 진구 황후가 작은 독립 왕국들의 부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연대기는 식민지에 대한 우리의 보호에 대한 설명으로 8세기까지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에는 큰 변화가 찾아오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종교적 열정에 소비된다. 수많은 수도원이 세워지고 나라의 거대한 불상이 주조되는 것을 목격한 이 시대는 우리의 마지막 한국 식민지들이 멸망하는 것을 허용했고, 그녀는 모국의 관심 없이 도움을 호소했다.


The attempted Mongol invasion of the thirteenth century kindled in us a feeling of animosity toward the Koreans who led the Chinese vanguard. Our only act of retaliation, however, consisted in the unique expedition of the Taiko Hideyoshi, who, in the sixteenth century, led an army into Korea to measure swords with those whom he considered as his hereditary enemies.

13세기 몽골의 침략 시도(여몽연합군)는 우리에게 중국 선봉대를 이끌었던 한국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보복은 16세기에 군대를 이끌고 한국으로 들어와(임진왜란, 정유재란) 그가 대대로 이어진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검을 맞춘 타이코 히데요시의 독특한 원정뿐이었다.


Any hostile power in occupation of the peninsula might easily throw an army into Japan, for Korea lies hke a dagger ever pointed toward the very heart of Japan. Moreover,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Manchuria is economically necessary to the preservation of our race, for starvation awaits our ever increasing population if it be deprived of its legitimate outlet in the sparsely cultivated areas of these countries.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적대적인 강대국들은 일본에 군대를 쉽게 보낼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심장부를 겨누는 비수처럼 누워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만주의 독립은 우리 민족의 보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들 국가의 희박한 경작지에서 정당한 배출구를 박탈당할 경우 계속 증가하는 우리 인구로 인해 기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Under these circumstances, we are compelled to regard our ancient domain of Korea as lying within our hnes of legitimate na- tional defense. It was when the independence of the peninsula was threatened by China in 1894 that we were compelled to go to war with the latter country. It was for this same indepen- dence that we fought Russia in 1904.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대 영토인 한국이 정당한 국방의 영역 내에 있다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1894년 중국이 한반도의 독립을 위협하면서 우리는 중국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청일전쟁) 우리가 1904년에 러시아와 싸운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독립을 위해서였다. (러일전쟁)


There were several occasions when we might have taken possession of Korea, but we forbore, in the face of strong provocation, because our wishes were f oij peace. We must remember that the historic spirit that created the Restoration also recalled the fact that Korea was originally a Japanese province, and in the Tokugawa days paid tribute to the shogunate.

우리가 한국을 점령할 수 있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강한 도발 앞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평화였기 때문에 포기했다. (메이지) 유신을 만든 역사적 정신은 한국이 원래 일본의 지방이었고 도쿠가와 시대에 막부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도 상기시켰음을 기억해야 한다.[3]



5. 기타[편집]


  •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오카쿠라 텐신은 '용기는 생명의 열쇠'라고 했습니다. 25년 전 한일 양국의 정치인이 용기를 내어 새시대의 문을 연 이유가, 후손들에게 불편한 역사를 남겨줘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
2023년 3월 윤석열 대통령 일본 순방 당시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초청되어 강연자로 나서서 강론할 적에 오카쿠라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이에 대해서 제국주의 사상가를 인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종문 한신대학교 교수(일본학)는 인터뷰에서 "오카쿠라 덴신은 전형적인 한국 멸시론과 침략론의 소유자이고 식민지배에 적극 찬성한 인물"이라며 "대통령과 보좌진의 역사인식과 일본 시각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
민주당에서도 해당 인물이 경술국치에 찬동하고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간주했다고 윤 대통령의 해당 인물 발언 인용을 비판하였다. 민주당 안호영 수석대변인은 18일에 논평을 내고 “윤석열 대통령이 게이오대학 연설 중 인용한 오카쿠라 덴신은 ‘조선은 원래 일본 영토’라던 한국 멸시론자”라며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떻게 식민지배에 적극 찬동했던 침략론자의 발언을 인용할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안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3.1절에도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며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했다”며 “일본에 국익과 국민 자존을 팔아버린 것도 부족해서 조선 총독이라도 자처하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한편 조선일보는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며 오카쿠라 덴신을 침략론자보다는 아시아론자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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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쿄토학파로 불린 근대 일본의 유명 철학자 넷, 니시다 키타로, 와츠지 테츠로, 미키 키요시, 쿠키 슈조.[2] 오카쿠라가 유부녀였던 쿠키 슈조의 어머니랑 썸을 타고 같이 사는 바람에(...) 쿠키 슈조는 어렸을 적 덴신이 아버지인 줄 알았다 한다.[3]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간의 기유약조와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조공을 바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