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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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근대 일본의 무사들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관념
2.1. 구 막부의 무사도
2.2. 신 막부의 무사도
2.3. 제국주의 시대의 무사도
2.3.1. 관련 문서
3. 니토베 이나조가 집필한 책
4. 세계수의 미궁 시리즈에 등장하는 클래스
5. TCG 매직 더 개더링의 특수 능력
7. Pride의 대회 중 하나


1. 개요[편집]


부시도는 무사도(武士道)의 일본어 독음이다.

2. 전근대 일본의 무사들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관념[편집]


사무라이라면 지켜야 할 행동 규범 관념.

일단 근본적으로 부시도(武士道, ぶしどう)란 표현은, 사무라이가 한창이던 13~16세기 문헌에서는 쓰인 적이 없다. 무사로서의 이상적인 자세나 사상에 대해서는 쓰여진 것은 적지 않게 있으나, 무사도라는 단어 자체는 후세에 의해 굳어진 단어이다. 다만 제도적으로 무사만이 성씨와 전투용 도검의 보유가 가능했고, 무사의 개념이 예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그 관념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구 막부의 무사도[편집]


가마쿠라 막부 시대는 황실의 방계 혈족과 대귀족 출신으로서 조정의 명을 받아 지방의 무사들을 위무하고 통제해 무사단을 세운 이들이 일본의 중앙집권적 율령체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잡은 시대였다. 당시에는 값비싼 활과 화살과 갑주와 군마를 소유하고 전투를 지원할 사병과 시종들을 거느릴 수 있는 황족, 귀족 출신의 무사들이 무사단의 핵심을 이루고, 일본의 군사 제도가 붕괴한 뒤부터 자기 방어를 위해 칼을 들었던 호족과 부농, 평민 출신 무사들은 주로 무사단의 하부에 속했다. 당장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가문인 미나모토 가문과 그 경쟁 가문이던 다이라 가문부터가 일본 황실의 먼 방계 후손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사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관념과 행동 양태를 보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무사도적 관념에는 이런 것이 있다.

  • 대결은 정당하게 1대1로 일기토(一騎討ち)를 벌여 한다.

  • 대결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신분과 명분을 밝힌다.(나노리, 名乗り)

  • 일단 대결에 임하면 겁쟁이처럼 뒤를 보이지 않는다.

  • 대결할 때 비겁하게 뒤를 치거나 기습하지 않는다.

  • 갑옷에 있는 등 뒤의 틈을 가리는 것은 겁쟁이이다.

한국사의 세속오계나 유럽의 기사도처럼 이런 행동 규범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때의 일본의 무사도는 적어도 남북조 시대까지는, 동시대 유럽의 기사도보다도 철저히 지켜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2.2. 신 막부의 무사도[편집]


무로마치 막부에 들어 이러한 무사도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신흥 비귀족 사설무장세력인 악당이 발호하면서 뒤를 치거나 기습해도 이기는 게 장땡이라는 풍조가 생겼다[1]. 또한 하급가신인 호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상급자인 귀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빈번히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무사도를 지키던 귀족가문들이 하극상으로 많이 멸절당했고 본래 무사도와 인연이 없는, 혈통이 낮은 가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그리고 무사도에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전국시대로, 혼란스러운 전란의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승리와 생존이 우선시되었으므로 과거와 같은 1대1 기마무사간 일기토같은 건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지배층 간의 군비경쟁이 극한까지 치달아 중무장한 아시가루들을 통솔할 무사의 고용수요와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사도는 사치로 여겨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가문의 주군 대신 실권을 잡았는데 번국인 자기 지역에는 태수 관직이 없는 것도 모르고 태수를 자칭할 정도로 막 나갔던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정리하고 태정대신 관백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카슈도(若衆道) 같은 지배층 문화를 하나도 모르는 문맹 하인 출신이었다. 그만큼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교토 조정에 있는 전통적 무사도의 소양을 갖춘 귀족들과는 별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이 혼란을 정리하고 등극한 에도 막부는 사회 안정화를 위해서 소수정예 무사도의 전통을 부활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최소 50만 단위에 달하는 하급무사들을 모조리 해고해서 평민으로 되돌려버렸다. 또한 당시 무사들이 행하던 사적 제재인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斬捨御免) 또는 부레이우치(無礼討ち)도 정식 결투의 요건에 맞지 않으면 못하게 막았다. 사무라이 둘이 서로에게 발검을 하면 둘다 처벌할 정도로. 해서 에도 시대 도성에서는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무사도에 맞지 않게 시비를 거는 평민을 피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사무라이 계급은 특별한 일 없이는 영주가 기거하는 성 인근의 번화가(조카마치, 城下街)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평화시대에 사무라이들이 반란 따위를 꾀할 싹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이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금수저로 격 높은 사무라이거나 가산이 많은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에도 막부시기 내내 사무라이들은 월급쟁이로 빈곤한 삶을 살았다. '평민은 숨만 붙여 놓는다'는 일본의 전근대식 통치방식은 하급사무라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 따라서 위의 다양한 이유에 따라 1)어차피 가는게 더 힘든데 2)억지로 갔다가 잘못 걸리면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데 최소 감봉, 최대 사형+멸문인 위험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2] 그러나 이미 전국시대를 거친 당시에는 무사도가 역사상 가장 쇠퇴해있는 상태였고 여기에 사무라이 본인들도 전쟁이나 무사도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무라이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하여 주군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열한 수를 써도 되는게 무사도라고 왜곡하거나, 그저 죽지못해 안달하는 것을 무사도로 포장하기 시작하였고 이 대표적인 예가『하가쿠레(葉隠)』다.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 (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付けたり) - 『하가쿠레(葉隠)』[3]


물론 이러한 무사도 왜곡은 일본 내에서도 식자층에게 미친듯이 까였고, 에도 막부도 주군이 사형을 선고하면 이것을 달게 받아야하는 죠이우치(上意討ち)[4]로 화답한다. 또한 주군에게 불충을 저지르면 할복. 죄질이 악랄한 경우는 참수에 재산몰수/작위박탈/폐서인 콤보를 작렬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다른 건 몰라도 막부에게 개길 가능성만큼은 철저하게 제거해버렸다.[5]

막부의 지배를 받는 번들도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배신하거나, 태어났던 번을 떠나 다른 번으로 옮겨가는 것(탈번)을 시도한 사무라이들을 처형해서 지배층인 사무라이들의 이탈을 철저하게 막는다. 심할 경우 탈번으로 번을 떠났음에도 추격대를 보내 탈번한 사무라이를 살해했다. 심지어 해당 사무라이들이 떠나는 것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도 처벌했다. 이후 개화기 시기 사무라이들을 지배하는 번의 영향력과 힘이 줄어들어 탈번을 막지 못하게 되자 사무라이들이 속속 탈번하게 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사카모토 료마.

2.3. 제국주의 시대의 무사도[편집]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도쿠가와 막부가 쓰러지자 계급사회의 통념인 무사도는 사민평등의 이름 아래 매장되었다. 사무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마녀사냥처럼 없앴으므로 사무라이 정신은 이 시대로 끊긴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일본이 급격히 군국주의 파시즘화하자 주군의 말 한마디에 부하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무사도의 이용가치를 발견한 군인계층이 이것을 발굴해내어 국민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당시 군국주의에 사용된 무사도는 니토베 이나조가 1900년에 영어로 집필해서 미국에서 출판한 Bushido: The Soul of Japan에 근거하였다. 니토베 이나조는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서양인 여성과 결혼한 철저히 서구화한 일본인이자, 퀘이커 교도였는데, 한 서양인 친구에게 "서양에서는 종교 교육에 의해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냐?"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여러 고전 자료와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무사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Bushido: The Soul of Japan>를 영어로 써서 미국에서 발표한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과 서유럽에서 히트를 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심지어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극찬을 하면서 추신구라, 오륜서와 함께 본인의 애독서 목록에 올릴 정도로 유명해진다.[6]

쿠로후네 사건 이후 서구문명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일본인 학자가 일본의 정신문화에 대해서 쓴 책이 서구에서 히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일본어로 번역출판하였다. 이렇게 역수입된 무사도를 국민도덕으로 모두에게 주입시켰고, 이렇게 해서 무사도는 국내외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문화가 되었다. 즉 근대화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조작된 전통이다.[7] 이 과정에서 일본의 지배계층은 니토베 이나조가 제창한 부시도 개념 중에서 절대적인 충성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을 특히 강조하는 형태로 변형시키는 바람에 부시도는 사실상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정신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군국주의에 맞는 세뇌 교육책으로 무사도를 선택하여 계획적인 역수입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즉 니토베 이나조가 제창한 무사도의 개념을 일본의 지배계층이 군국주의에 맞춰서 변형한 것이 당시의 무사도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절대적 충성만이 부시도의 모든 내용을 이루지는 않는다.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사대부와 유사해서 충 외에도 효인의예지신을 따라야 하므로, 주군이 이에 위배되는 명을 내리면, 사무라이는 목숨걸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간언을 해야 한다. 칼차고 무식한 무사들이라는 일반인들의 통념과 달리 이미 16세기 이후, 특히 도쿠가와 막부 형성 이후 일본의 사무라이는 일정 수준의 유학 지식을 갖춘 집단으로 변화한 상태였다.[8] 진정한 사무라이라면 주군의 잘못에 맞서야 한다는 게 진짜 전통이었으며, 죽음의 순간까지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야말로 후대에 조작된 전통인 것이다. 그래서 군국주의 시대에 병사들을 사무라이의 후예라고 합리화하며, 여러 가지 막장 행위를 강요한 일본군 수뇌부는 정작 그 부시도가 없는, 명예마저 씹어먹는 막장집단이었다. 당시 실제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사무라이를 자처한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 충의 딜레마로 인하여 군부에 동참하지 않고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정신력으로 기술력이나 병력의 차를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은 압도적인 연합군의 화력과 전략전술의 뒤떨어짐 등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패전으로 군대가 폐지되고 군인계층이 몰락함에 따라 무사도도 다시 한 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설적으로, 역사 속의 사무라이들은 승리를 위해 신식 무기와 신식 전술을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다. 에도 말기만 하더라도 군함이나 대포의 이용에는 꽤 적극적이었고.

이 결과, 미화되고 윤색되고 날조된 파시즘적, 군국적 무사도관이 유서깊은 일본 정통의 무사도관을 구축해버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무사도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많이 남긴 상태.


2.3.1. 관련 문서[편집]



3. 니토베 이나조가 집필한 책[편집]


부시도(Bushido: The Soul of Japan)는 1900년에 니토베 이나조에 의해 집필되었다.

니토베가 유학하던 중, 서양인 친구에게 "서양에서는 종교 교육에 의해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냐?"라는 질문에,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하여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정신이었던 부시도(武士道, 무사도)가 그에 상당하는 개념이라는 내용의 책을 집필했다. 영어로 된 이 책은 일본 최초의 전세계 베스트셀러 책이 되었으며, 후에 1908년,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책 '부시도'에서 다루는 무사도 정신은 바로 위 1번 항목 참조.

책 내용으로는, 예를 들어 여러 문화에 있어서의 의 의미의 차이점을 설명하거나 19세기 말의 철학과 과학적 사고를 이용하면서, 일본인은 일본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 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섬나라의 자연이 무엇이고, 일본 특유의 사계절의 변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 일본인의 정신적 토양이 무사의 생활 태도와 신조라는 모델 케이스에서 양성 된 과정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 책을 읽고 크게 극찬하며 30권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나눠 줬다고 한다.[9]


4. 세계수의 미궁 시리즈에 등장하는 클래스[편집]




5. TCG 매직 더 개더링의 특수 능력[편집]


당연히 모티브는 1번 항목. 일본을 모티브로 삼은 카미가와 블록에 등장한 생물의 격발능력으로, "무사도(Bushido) X"로 표현된다. 이 능력을 가진 생물이 상대의 생물을 방어하거나 상대의 생물에게 방어당할 때마다, 턴이 끝날 때까지 공격력과 방어력이 X만큼 증가한다.
  • 3/4 생물인 Kenzo the Hardhearted는 무사도 2를 가지고 있는데, 이 생물이 상대의 5/5 생물을 방어하게 되면 +2/+2를 받아 그 턴 동안만 5/6 생물이 되어 상대 생물을 제거하고 자신은 살아남게 된다.

공격/방어시 모두 적용이 되는 관계로 후에 Shards of Alara에 나온 고귀(Exalted)보다 방어면에 유리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를 공격할 때 적용되지 않으므로 리미티드 전용. 결국 다음번 카미가와를 다루는 카미가와: 네온 왕조에서는 키워드에서 짤렸다.


6. 기동전사 건담 00미스터 무사도[편집]




7. Pride의 대회 중 하나[편집]


원래는 팀별 대항전 형식으로 시작했다가 시청률이 안나와 폐지 위기까지 갔지만 대회를 웰터급 이하의 경기를 위주로 개편하면서 경량,준중량급의 선수들의 무대가 됐다.


8. 독일래퍼[편집]


본명은 아니스 모하메드 유세프 페르치치. 예명은 1번 항목에서 따왔으며 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랍계로 그의 아버지는 튀니지 인이며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부시도가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지속적으로 폭행했으며, 김나지움 재학 시절 마약 소지 및 반달리즘 행위로 미술 심리 치료와 감옥행 중 한 쪽을 택하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이 때 미술 수업을 받으며 훗날 역시 래퍼가 되는 Fler 를 만나 그래피티 아트와 힙합에 빠져들게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갱스터 랩 아티스트로 분류되며 아랍계이자 무슬림답게 반-이스라엘 정서를 공공연하게 노출하여 독일 내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10] 이 외에도 극우적 성향과 여성, 동성애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사로 인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다. 또한 매니저인 아라파트 아부 차커는 레바논 마피아 두목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상당히 유명한 암흑가의 거물이기도 하다.

또한 저작권에 대해서도 굉장히 무신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네오 클래시컬 다크 웨이브 밴드인 Dark Sanctuary의 음악을 무려 16곡이나 무단도용해서 샘플링으로 사용했으며, 결국 독일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해당 곡이 포함된 앨범 및 싱글은 전부 판매중지 혹은 폐기처분 당했다. 다크 생츄어리 이외에도 동일한 장르의 Nox Arcana와 Sopor Aeternus의 곡들 역시 도용당했으며, 심지어 블랙메탈 밴드인 Dimmu Borgir의 멜로디를 한번도 아니고 6년에 걸쳐 두번이나 표절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어째 다 어둠에 다크한 밴드들이다

2012년 이후로 안나 마리아 라거블롬[11]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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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무로마치 막부보다 훨씬 이전의 겐페이 전쟁 때에도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의 무사들은 서로를 향해 속임수나 기습을 태연하게 사용했다.[2] 만약 부레이우치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만 나더라도 사무라이에게는 처벌의 빌미가 되었지만, 거꾸로 사무라이가 상대를 죽였을 경우 (1)반드시 이것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이 필요했고 (2)전후를 기록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으며 (3)사용한 칼은 증거품으로서 일시적으로 압류되었고 (4)얼마간의 자택근신을 명령받았다. 만약 증인이 없을 경우 단순한 살인이라고 여겨져 할복을 명령받거나 심각할 경우 참수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노동력=국력이라고 여겨져 소중한 일손을 죽여 낭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막부와 각 번들의 정책의 일환이었고, 평화시대에 칼 휘두르며 치안을 악화시키는 행위에 학을 뗀 막부의 대처법이기도 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에도 시대 평민들은 사무라이를 놀려먹은 다음 사무라이가 자신에게 칼을 뽑기 전에 신속하게 도망치는 일종의 치킨 레이스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싸우지 않는다고 평민이 처벌받는 일은 없기 때문에 발이 빠르다면 해볼 만했다.[3]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에도 막부 시절 사람인데다 사무라이 계급도 아니었고 전쟁은 커녕 군인 생활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책의 내용은 엄연히 작가의 창작이다.[4] 그 밖에도 주군의 명을 받아서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도 포함된다.[5]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와 하급 사무라이간의 의식 차이가 컸고 그래서 논란이 벌어진 사건이 추신구라 사건이다.[6]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유명한 일빠로 그의 임기중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다.[7] 이런 행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보인다. 전국민에게 "우리는 같은 XX인"이라는 관념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과거의 몇 사례를 선택적으로 조합하고 편집해서 마치 우리가 고대부터 수백-수천년 동안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8] 유학을 공부한 농업국가의 귀족 계층이란 점에서 한국의 사대부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9] 참고자료: 이상각, 효형출판. <1910년 그들이 왔다> 니토베 이나조 편.[10] 독일은 역사적인 이유로 인하여 반 유대인/반 이스라엘적 발언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시각을 가진 국가이다. 미국이나 한국 같은 국가에서는 용납될 수 있거나 오히려 타당하게 여겨지는 수준의 팔레스타인 옹호 및 이스라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도 독일에서는 충분히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행동이다.[11] 그와 결혼을 해서 현재 법적인 이름은 안나 마리아 페르치치이다. 독일 유명 축구선수인 메수트 외질의 전 여자친구였으며 그 이전에는 핀란드 축구 선수인 페카 라거블롬의 배우자였다. 또한 독일 팝 가수 사라 코너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이 결혼은 그녀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다.(첫 남편은 Pravit Anantapongse라는 남성이며 모델 겸 댄서로, 언니 사라 코너의 투어 멤버 출신이다. 그리고 페카 라거블롬이 두 번째 남편이다.) 안나 마리아는 메수트 외질과 교제하던 당시에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