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성강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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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상세
3. 태동
4. 시련
5. 말로
6. 복구 가능성
7. 여담
8.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예성강철교(禮成江鐵橋)는 토해선철교예성강 하류쪽을 연결하는 다리다.


2. 상세[편집]


길이가 623,4m 이고 폭이 11.6m 인 철교로 중앙의 5.2m는 762mm 협궤 단선 철도를 깔아놓았고 철도 양 옆의 3.2m는 우마차 및 인원용인 도로가 깔린 다리다.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진 교량으로 철교로서는 특이하게도 우마차 및 인원 통행용인 인도교를 철도 양옆에 만든 교량이기도 하다.

조선철도주식회사가 1930년 10월에 철교설치를 위한 설계 및 조사를 한 뒤 1931년 5월에 착공하여 1932년 9월에 준공되었다.


3. 태동[편집]


예성강에 놓인 다리 중 특색 없는 철교로 보일 수가 있으나 우여곡절이 많은 다리다.

예성강철교에 대한 구상 자체는 매우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다. 일본 제국조선을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군사용 및 여러가지 목적으로 경의선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경의선 구간을 결정하는 과정이 복잡하였고 이 중에서 조선의 주요 대로인 의주로를 따라가는 방안으로 노선이 결정된 것이다.

의주로를 따라가는 방안은 기존 통로를 이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험지를 통과하는 구간이 많은데다가 산골짜기를 따라가야 하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간지역은 개성시 근방에서 산골짜기로 들어간 후 산골짜기를 빠져나와서 사리원시에 도착할 때까지 제대로 된 도시가 없어서 다용도로 써먹기에는 뭔가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해주시를 거쳐가는 안이 유력하게 나왔는데 해당 방식의 경우 산맥을 넘어가는 것은 1번 정도이고 상당수의 구간을 평야 지역에 설치가능하며 해주항을 이용할 수 있고 곡창지대를 지나가므로 식량 수급 및 수송등에도 유용하게 사용가능하다는 장점이 많았으니 해당 방안이 거부된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경의선이 완전개통한 1906년 4월 3일을 기준으로 볼 때 당시의 일본 제국의 기술력으로는 예성강 하구를 건너는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최신예 기술력을 들여오는 방법도 있었으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고 그럴 돈이 있으면 군사력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했으며 안그래도 일본 본토에도 험지에 교량을 건설해야 할 수요가 넘치는 상황에서 조선에 있는 예성강을 건너는 교량에 막대한 투자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예성강 자체가 교량 건설에는 하류로 내려갈수록 적합치 않은 강이기도 했다. 예성강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폭이 급격하게 넓어지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며 유속도 별로 느려지지 않은 상태가 기본인데 여기에 더해서 갯벌등으로 인해 강바닥도 튼튼하지가 않고 집중호우가 자주 발생하면서 갑자기 강의 유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므로 애를 써서 교각을 만들어놓아도 홍수에 쓸려나가기 딱 좋고 다리를 완성하더라도 교량 자체의 안전성 유지도 힘들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도 1930년대까지 시간이 흘러야 했고 예성강철교를 건설할 때도 철교 설치 지점이 해주와 개성을 잇는 최대의 요충지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가 아니고 그 북쪽인 전포(錢浦)에 건설된 이유도 벽란도 방면이 특히 예성강의 교량 건설하기에는 안좋은 특징이 더욱 강해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사 자체가 난이도가 높았으므로 1932년 9월 1일에 예성강철교가 준공된 날이 토해선의 완공일이었다. 토해선의 다른 곳은 철도를 다 완성해놓고 예성강철교 방면만 남았던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762mm 협궤 철교임에도 불구하고 준공 당시에는 한반도의 주요 교량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평가받았다.

수인선수려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인 을 비롯한 식량수탈용으로 완공되었으나 황해도의 여러 지역과 개성 및 서울과의 물자교류를 원활하게 하여 이 지방의 산업발달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4. 시련[편집]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토해선이 종착지점인 해주시를 상실하며 노선 자체가 최전선 근방으로 전락함에 따라 가끔 협궤 열차나 지나가고 주변 사람들이 통행하는 다리 정도로 예성강철교의 위상이 떨어졌다. 그래도 해당 지역의 거의 유일한 교통로 겸 철도가 지나가는 교량인지라 조금씩 이용객이 다시 늘고 열차도 조금씩이나마 증편해서 많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예성강철교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철교에 손상이 가기 시작했다. 예성강철교를 점령하거나 파괴하면 예성강 서쪽지역에 있는 연안, 청단등의 대한민국 관할 지역의 통행을 사실상 차단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가 1949년 5월 20일에 평화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인데 조선인민군이 예성강철교 부근까지 진격하여 근처에 진지를 건설하고 병력을 배치하며 토해선 열차와 예성강철교를 노리고 한 박격포 사격으로 박격포탄 1발이 예성강철교에 명중했으나 철교 난간에 명중해서 전선 1줄이 끊어진 사소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출처

이러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최전선 근방에 위치한 예성강철교는 개전 1시간만에 배천이 점령당하면서 토해선이 차단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의 후퇴로로도 쓰이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점령당한 터라 교량 자체의 손상은 없다시피 했다.

예성강철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개성시 북방의 험준한 산맥과 삼팔선 일대에 미리 건설해놓은 진지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인민군의 잔여병력중 장비가 충실하고 조직적으로 훈련된 마지막 정예군이 유엔군과 싸우면서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미 제1기병사단의 제7기병연대가 토해선의 예성강철교가 멀쩡한 것을 보고 강행돌파한 다음, 배천군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경의선이 예성강을 건너는 지점인 한포역 근방의 한포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조선인민군이 포위망에 걸려버렸고, 결국 포위망 안의 조선인민군이 T-34 전차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사람만 간신히 원산시 방면의 산악지대로 도망치는 바람에 더 이상 조선인민군은 조직적으로 유엔군을 막을 수 없었던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예성강철교는 소총탄 명중 등으로 인해 약간 손상은 있었으나 열차, 우마차, 사람의 통행은 지장이 없던 수준이었다고 한다. 교량의 트러스 구조물도 소총탄을 막아주는 은엄폐용 구조물로 사용이 가능했으므로 교량 근처에서 교량 통과를 방해하려는 목적의 간헐적인 소총 사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7기병연대의 돌파가 손해가 거의 없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북진작전으로 토해선 전체와 예성강철교를 되찾았으나 1.4 후퇴로 다시 북한에게 해당 지역을 상실하면서 토해선 전체와 예성강철교가 북한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5. 말로[편집]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후에 북한에서는 토해선의 일부 노선을 변경하고 예성강철교의 경간 중 일부를 끊어놓아서 철도 교량으로서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예성강철교가 군사분계선에서 너무 가까운데다가 앞서 언급한 강행돌파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파괴된 경간은 서쪽을 기준으로 해서 3번, 5번, 7번이며 트러스 구조를 포함해서 경간 자체가 완전하게 사라졌고 파괴된 경간부위에는 교각과 교각 사이에 출렁다리를 놓아서 소수의 인원만 도보로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출렁다리는 허술하게 만들어져서 자전거조차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사실상 다리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성강철교가 끊어짐에 따라 토해선의 토성역(개풍역) - 예성강역 - 성호역 구간이 사라졌으며 성호역은 위치를 북쪽으로 이설해서 은빛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토해선도 배천선으로 이름이 변경된다.

예성강철교의 잔여 구간은 철로를 걷어내고 도로교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1988년 북한에서 작성한 배천선 관련 자료에 예성강철교의 복구와 배천선과 평부선 간 접속에 관한 계획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도 철도 연결을 재추진했다가 모종의 이유로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짐작된다.출처

철교는 끊어졌으나 교각은 아직 제대로 남아있고 NLL 대화록 논란 와중에 공개된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철교를 조금만 손보면 복구가 가능하며, 예성강철교와 토해선을 이용해서 해주항개성공단의 물자 수송에 쓸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도 계획으로 끝났고 2023년의 시점에서도 예성강철교는 경간 중 일부가 끊어진 상태로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6. 복구 가능성[편집]


북한적화통일을 확실하게 포기하고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되어야 일단 사업시작을 위한 검토를 할 환경이 만들어진다. 그 전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예성강철교를 조금만 손보면 복구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북한의 철도 환경을 생각해본다면 국제적인 기준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표준궤로 북한이 개궤배천선도 다시 처음부터 신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철도를 깔아야 한다.

일단 예성강철교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표준궤 복선이 지나갈 수준은 되어야 하고 철도의 선로 구성 방식을 생각해보건데 최소한 복복선 수준쯤 되어야 할 것이다. 2013년에 제안된 경의고속철도가 예성강을 건너서 해주시를 경유하기 때문에 고속선과 일반선 교량을 따로 만들거나 양자를 통합해서 매우 튼튼하고 거대한 교량을 만들 필요까지 있다.

그리고 중량물을 적재한 화차(철도)을 충분히 많은 수량으로 연결한 화물열차가 무리 없이 교량을 건너갈 수 있어야 하고 고속열차가 고속으로 교량을 통과해도 무리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기존의 예성강철교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의 기술력 기준으로 762mm 협궤 단선 철도가 지나가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데다가 다리가 끊어진지 오래되었고 교각을 비롯한 주요 구조물도 제대로 점검이 안된 오래되고 낡은 구조물인데다가 위성사진으로 살펴봐도 도색도 벗겨져서 철교의 주요 구조물인 트러스 구조물에 까지 발생한 것이 보일 정도이므로 실제 철도가 다니는 교량이라는 목적으로 복구하는 것은 무리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볼 때 기존의 예성강철교는 그냥 도로교 겸 관광상품으로 사용할 목적 정도로만 점검 및 복구해놓고 주변에 새롭게 신(新) 예성강철교를 거대한 규모로 건설해야 할 것이다.


7. 여담[편집]


예성강 하구를 건너는 철교라서 열차에서 보는 경치가 좋았다고 하며 예성강철교 사진이 있는 우편엽서도 있었다고 한다.


8.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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