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카롤 코드키에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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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Karol Chodkiewicz(얀 카롤 호드키에비치, 1561~1621.9.24)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스웨덴 전쟁
2.3. 러시아 전쟁
2.4. 오스만 전쟁



1. 개요[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원수.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561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뉴스에서 육군 장성 얀 히에로니모비치 호드키에비치와 크리스티나 즈보로프스카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빌뉴스의 성주를 역임했고, 어머니는 즈보르프시의 상인 가문의 여식이었다. 호드키에비치는 1573년부터 빌뉴스 예수회 대학에 재학했으며, 1586년부터 1589년까지 동생 알렉산데르와 함께 독일로 유학가서 잉골슈타트 대학에 재학했다. 또한 이탈리아반도파도바를 방문하여 1590년까지 유학 생활을 보냈다.

159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복귀한 후, 50~1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594년 카자크의 지도자 세멘 날라바이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1] 휘하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한 몫했다. 특히 1596년 4월 14일 카니우프 전투와 타보르 공성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반란 진압 후인 1599년 사모기티아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600년 얀 자모이스키 대원수 휘하에 들어가 몰다비아-왈라키아 전쟁에 참가해, 1600년 10월 15일 플로이에슈티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아군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해 리투아니아 부대의 야전 원수로 임명되었다.


2.2. 스웨덴 전쟁[편집]


1601년 스웨덴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호드키에비치는 자모이스키 대원수를 따라 북상하였고, 그해 6월 23일 스웨덴군과의 코켄하우젠(Kokenhausen)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우익에 배치된 리투아니아 부대를 지휘했다. 당시 스웨덴군은 5,000명에 기병대가 4천 명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3천 명에 기병대 천명이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윙드 후사르를 중심으로 한 1,000기의 기병대를 이끌어 돌격을 감행, 적병 2,000명을 사상시키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폴란드 기병대의 사상자는 100~200명에 불과했다.

1602년 얀 자모이스키가 고령을 이유로 폴란드로 물러난 뒤, 호드키에비치가 실질적으로 지휘를 맡았다. 1603년 4월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스웨덴군을 격파하고 도르파트를 공략하였고, 비아위 카미엔[2] 전투에서 2,000명의 윙드 후사르로 7,000명에 달하는 스웨덴군을 격파했다. 스웨덴군의 사상자는 3,000명에 달했던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피해는 50명 전사, 100명 부상에 불과했다.

이어 1604년 9월 23일 리가에 진군한 스웨덴 국왕 칼 9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스웨덴이 복수를 다짐하며 병력 증원을 단행한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은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칼 9세는 1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킨 반면, 호드키에비치의 병력은 3,600명에 불과했다. 1605년 9월, 양군은 키르홀름에서 결전을 벌였다. 칼 9세는 비록 3배가 넘는 대군을 이끌었으나, 윙드 후사르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경계하여 7~8열의 격자 진형을 편성했다. 호드키에비치는 적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자, 4시간에 걸쳐 거짓 후퇴 전술을 구사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칼 9세는 아군이 여러 차례 벌어진 소규모 접전에서 적군을 물리치자, 지금이 복수할 기회라고 여기고 추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투가 개시된 지 불과 반 시간 만에, 스웨덴군은 윙드 후사르를 위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기병대에게 완패했다.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무려 8,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국왕 칼 9세 역시 부상당한 채 가까스로 도주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피해는 100명 전사, 200명 부상에 불과했다. 호드키에비치는 키르홀름 전투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고, 유럽 각지의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이단을 응징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세임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추가 공세를 하지 못하고, 라트갈레(현 라트비아의 동쪽) 지역에 머물렀다. 그러던 1606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지그문트 3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대귀족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Mikołaj Zebrzydowski)의 반란이 일어났다. 호드키에비치는 국왕으로부터 반란 진압 명령을 받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1607년 7월 6~7일 구주프(Guzów)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하여 반란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1608년 반란군 수뇌부가 국왕에게 귀순하게 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왕권 강화책을 철회하고 귀족들을 사면했다. 이에 왕당파 귀족이었던 호드키에비치는 기껏 반란을 진압했는데 사면해줘서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지그문트 3세를 비판했다.

1608년, 요아힘 프레데리크 폰 만스펠트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리보니아를 재침공했다. 그들은 페르나우를 공략하고 리가를 포위했다. 이에 호드키에비치는 왕명을 받들어 북상했고, 10월 가우야 강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한 뒤 1609년 리가를 구출하고 페르나우를 탈환했다. 이후 소규모 함대를 급조하여 살리스 해전에서 스웨덴 해군을 기습해 타격을 입혔다. 이후 양국은 소규모 전투만 벌일 뿐 교착 상태에 빠졌고, 1611년 칼 9세가 사망한 뒤 공식적으로 휴전이 체결되었다.


2.3. 러시아 전쟁[편집]


한편, 지그문트 3세는 가짜 드미트리를 이용하여 루스 차르국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 리투아니아의 대귀족들은 국왕의 이같은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호드키에비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강하게 직언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왕실의 신임을 잃었다. 1611년 국왕과 화해한 뒤 그해 가을 모스크바 공략전에 파견되어 모스크바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침략자들에게 비협조로 일관해 식량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진 데다, 2천 명의 병사들이 봉급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를 떠나 스몰렌스크로 후퇴했다.

그는 이로 인해 지그문트 3세와 다시 소원해졌고, 1613년 세임으로부터 작전 실패를 비판받았다. 이후 1613년에서 1615년까지, 스몰렌스크 일대에서 루스군을 상대하였고, 리투아니아에서 발생한 봉기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617년 브와디스와프 왕자의 증원군과 합세하면서 전력을 재충전한 뒤 1617년 10월 11일 도로호부슈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12월 모스크바를 재공략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폴란드로 철수해야 했다. 161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루스 차르국이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2.4. 오스만 전쟁[편집]


1619년,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군 10,000명을 에르데이 공국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하게 했다.[3] 베틀렌 가보르는 이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주군이자 오스만 제국파디샤 오스만 2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상으로 보복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하게 했다. 폴란드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세임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세임은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를 거절했다. 다만 상원의 비밀 평의회가 일부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자금을 풀어서 8,000명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1620년 9월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와 함께 오스만군이 침공한 몰다비아 공국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0일 이아시 근처의 체초롱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과 오스만군이 격돌했다. 주키에프스키와 코니에츠폴스키는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기가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수적 열세를 버티지 못하고 둘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2세는 1621년 봄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코스탄티니예를 출발해 폴란드로 진군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지그문트 3세는 급히 호드키에비치를 남쪽 국경으로 보내 오스만군을 막게 했다. 세임 역시 현실을 깨닫고 군자금을 대폭 지원하였다. 호드키에비치는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9월에 드네스트르강을 건넌 뒤, 태자 브와디스와프 바사가 이끌고 온 10,000명과 합류했다. 또한 코자치의 지휘관 페트로 코나셰비치가 이끄는 25,000명도 가세했다. 여기에 국경의 병력까지 규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병력은 63,0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2만이 넘는 적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그는 60세의 고령이었고 중병을 앓고 있어서 운신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드니에스트르강(루마니아어로 니스트루강, 우크라이나어로 드니스테르강)을 뒤로 한 채 코침 요새에 전군을 집결시켰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진형은 드니에스트르강을 등진 반원 모양이었고, 3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오른쪽은 호드키에비치 본인이 맡았고, 중앙은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맡았으며, 좌측은 부사령관인 스타니스와프 루보미르스키에게 맡았다. 전면에는 코자치와 용병 기병대인 리소프치치가 배치되었다.

오스만군은 9월 2일 코침 요새 근방에 진을 친 뒤 9월 3일부터 공세를 감행했다. 호드키에비치는 장병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오스만군은 좀처럼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9월 7일 오스만군의 네 번째 공세 때 폴란드군의 진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호드키에비치가 친히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반격을 감행했다. 오스만 군의 시파히 기병대는 윙드 후사르에게 완패하였고, 오스만군은 사기가 뚝 떨어진 채 패주했다. 이후 오스만군은 정면 공격을 해봐야 소용 없다고 판단하고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코자치와 윙드 후사르의 연이은 기습과 교란 작전에 말려 실패했다.

호드키에비치는 9월 7일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뒤 병마로 쓰러졌고, 9월 24일 진중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원수봉을 스타니스와프 루보미르스키에게 넘겨줬다. 이후 루보미르스키는 태자 브와디스와프와 함께 오스만군의 공세를 연이어 물리쳤고, 오스만군은 9월 28일 이후 공세를 중단했다. 양측은 10월 9일 호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했다.

호드키에비치의 유해는 카미야네치포딜스키로 보내졌고, 1621년 10월 14일에 묻혔다. 1622년 여름에 그의 미망인이 유해를 발굴하여 오스트로그에 있는 새 예배당으로 옮겼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 때 오스트로그에서 유해가 옮겨졌다가 1654년 돌아왔고, 1722년 오스트로그의 새 무덤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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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중에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퇴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2] 현재 에스토니아 파이데.[3]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지그문트 3세의 매형인 페르디난트 2세의 의뢰에 따른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에르데이 공작 베틀렌 가보르가 자신을 위협하자, 그를 꺾어놓기 위해 지그문트 3세에게 부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