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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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제5대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Władysław IV Waza


파일: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사진.jpg

출생
1595년 6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워브주프[1]
(現 폴란드 마워폴스키에주 올쿠시군 볼브롬 자치시 워브주프)
사망
1648년 5월 20일 (향년 52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메레츠
(現 리투아니아 알라투스주 바레나구 메르키네)
재위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632년 11월 8일~ 1648년 5월 20일
루스 차르
1610년 7월 19일~ 1613년 2월 21일
서명
파일: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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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바사 가문
이름
브와디스와프 바사
(Władysław Waza)
아버지
지그문트 3세 바사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아나
형제자매
안나 마리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얀 알베르트, 카롤 페르디난트, 알렉산데르 카롤, 안나 카타르치나 콘스탄차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 (1592년 결혼 / 1598년 사망)
곤차가느베르의 마리아 루이사 (1645년 결혼)
자녀
지그문트 카지미에시, 마리아 안나 이자벨라, 브와디스와프 콘스탄티[1]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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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문장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폴란드 역사상 유일하게 짧게나마 루스 차르국차르였다.


2. 생애[편집]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3세 바사[2]와 첫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여 부왕의 독일인 출신 애첩의 손에서 자랐다.

본래 스웨덴의 왕자로서 외가인 야기에우워 왕조의 혈통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출되었던 부왕 지그문트 3세는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패하여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했고, 이후 지그문트 3세의 대외 정책은 연방의 국익과 전혀 상관없이 스웨덴 왕위 탈환에 집중되었다. 루스 차르국동란 시대에 연방이 직접 개입한 것도 단치히에서 해군을 상륙시켜 스웨덴으로, 폴란드령 리보니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루스 차르국에서 핀란드로 진격해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려던 계획의 일환이었고[3], 외교관이자 명장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4]의 활약으로 루스 차르국의 보야르들로부터 차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의 러시아 정교회 개종을 거부했고, 결국 세임의 전비 지출 거부와 맞물려 루스 차르국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로마노프 가문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데울리노 휴전 협정으로 루스 차르국 차르 칭호를 포기했지만 대신 연방은 지그문트 1세때 빼앗겼던 스몰렌스크를 되찾았다.

이후 오스만-폴란드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를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으며, 스웨덴-폴란드 전쟁에서는 오촌 아저씨뻘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연방군이 탈탈 털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1632년 지그문트 3세가 사망하자 연방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기 위해 미하일 1세가 연방을 침공했으나 가볍게 격퇴했고 1634년 2월 폴랴노프 조약을 체결하여 루스 차르국의 차르 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몰렌스크의 영유를 최종 확정지었다. 무능한 부왕의 치세로 고통받은 연방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30년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여 국력을 보존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고 딸 크리스티나가 즉위하자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 1583~1654)를 중심으로 스웨덴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스웨덴 왕위는 되찾지 못했고 대신 연방에 좀 더 유리한 슈툼스도르프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왕자 시절 스웨덴군에 탈탈 털리는 연방군을 보고 군제 개혁에 힘썼으나 정작 연방이 전쟁에 개입할만한 상황이 나오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 봉기가 일어났으며 유일한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하던 차에 반란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사망했고 연방의 왕위는 이복동생 얀 카지미에시가 선출되어 계승했다.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대홍수로 이어져 연방의 본격적인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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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라쿠프 근교에 위치한 소도시.[2] 스웨덴 국왕으로서는 시기스문드(Sigismund).[3] 다만 지그문트 3세는 본심을 숨기고 정교회 이단을 몰아내고 루스 차르국에 가톨릭을 전파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세임(Sejm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4] 나중에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