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가마르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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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정치인.
2. 생애[편집]
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다 17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1913년 키예프로 이사 후 가정교사로 근무했다. 1915년경 우크라이나 SSR의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은 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10월 혁명 당시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됐으나 1917년 10월 31일 무장봉기로 해방에 성공했다. 이후 1918년 여름, 블라디미르 레닌과 인연이 닿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진출했다.
2.1. 복무 생활[편집]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노농적군 정치국에서 육군정치국장과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신문 편집장을 역임했다. 1929년 11월 중앙위원회 총회 당시 우익 정당 탄압에 앞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초대 국방정치국장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명령에 따라 혁명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많은 위원들과 거리낌 없이 지냈지만, 가마르니크는 특히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노농적군 군사력 강화에 관심을 가졌다.[1]
1935년 11월 20일, 노농적군 역사상 최초로 제1사령관으로 진급했다.[2]
2.2. 몰락[편집]
1937년 5월 30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가마르니크가 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했단 이유로 모든 직위에서 강제 추방했다. 당시 질병을 앓고 있던 보로실로프는 부하 장군들을 불러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거주 중인 가마르니크의 체포를 명령했는데,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 가마르니크는 자택에서 총기로 자살했다.[3] 이후 투하쳅스키 처형 재판 당시 가마르니크의 이름과 행적이 다시 언급됐다.
2.3. 사후[편집]
투하쳅스키와 같이 체포된 자들이 가마르니크의 결백에 대한 증거들을 제출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이후로도 치열한 법정 공방전을 치른 뒤 1955년 8월 6일, 소련 제3대 검찰총장 로만 루덴코에 의해 무혐의로 판결됐다. 사후복위는 10월 7일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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