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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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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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 활동에 투신하기까지
2. 흥중회 설립과 반청활동의 시작
3. 영국에서 납치되다
4. 성숙해지는 사상, 그러나 연이은 실패
5. 중화민국의 성립
6. 군벌의 난립
7. 최후의 승부수


1. 혁명 활동에 투신하기까지[편집]



파일:1200px-8-1.png

쑨원의 부친 손달성
(孫達成[1], 1813 ~ 1888)


1866년 빈곤한 농가에서 쑨다청(손달성,孫達成)의 5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쑨원은 6세 때부터 소작농이던 부친을 돕던 빈곤한 삶을 살았다. 부친이 1812년 출생. 연령차이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엄청 늦둥이다.

그러다가 9세가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들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도중 1879년 장남 쑨메이(孫眉, 손미, 1854 ~ 1915)가 거주하던 하와이로 건너간다. 하와이에서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Iolani School, 지금도 하와이의 명문학교)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하와이 원주민 출신 아이들과 싸우고 중국 전통 문장을 낭독하는 등의 생활로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쑨원은 서구 문물에 대한 익숙함과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 듯하다. 이후 1882년 이올라니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해 하와이 왕국의 칼라카우아 왕(1836 ~ 1891)으로부터 기념품을 받는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 역시 이때였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싶다는 쑨원에 형인 쑨메이가 반대하며 다음 해 쑨원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서양식 생활에 익숙해진 쑨원은 고향의 신상을 부숴버리는등 현지에서 마찰을 일으킨다. 결국 쑨원은 반년이 채 가기전에 홍콩으로 도피하고 만다.

홍콩에서 역시 영국 성공회 계열의 발췌서원(拔萃書院)에서 의술을 공부하고 스위스의 선교사 찰스 로버트 하거(Charles Robert Hager, 1851 ~ 1927)[2] 에게서 세례를 받고 형 쑨메이의 소개로 루무전(盧慕貞, 노모정, 1867 ~ 1952)과 결혼하게 된다. 한편으로 쑨메이는 쑨원에게 자신의 사업을 잇게 할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이 제의를 거부하고 홍콩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후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서 청나라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협상에서 손해를 본 패배에 가까운 졸전을 벌이자 전통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된다. 이후 1886년 광저우에서 박제의원(博濟醫院)에서 동서양 의술을 공부하는 동안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는 정스량(鄭士良, 정사량 1863 ~ 1901) 등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적 혁명의 발상을 구축하게 된다.

의술을 몇년 동안 공부한 쑨원은 1892년 서의서원(西醫書院) 1기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며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893년 마카오에서 중서약국을 여나 마카오 면허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광저우에서 약국을 열며 만주족 타도를 결의하는 모임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사상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체제 변혁을 꿈꾸는 것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수만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등 원론적인 방법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24년 국민당을 개조시키기 이전까지 쑨원은 중국 혁명을 성공시킬수만 있다면 군주제 복고나 영토할양도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방안도 간혹 검토했었다.[3]


2. 흥중회 설립과 반청활동의 시작[편집]


1894년 6월 쑨원은 이홍장에게 농상업의 개편과 인재등용방법 등 혁신 방안을 담은 상소문을 올린다. 쑨원은 이 상소에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등 나름의 공을 들였지만 결국 상하이의 영자신문에 실리는 것에 불과한 초라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한편 직후 청일전쟁에서 청이 밀리자 마침내 쑨원은 정상적인 방법의 개혁을 포기하고 공화제를 통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 1895년 11월 쑨원은 호놀룰루로 건너가 현지 화교와 연합해 "달로(撻虜: 만주족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여 합중정부를 창립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 흥중회의 선언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당당한 중화가 인접국에 대항하지 못하고 문물, 예절이 이민족에게 경멸당하고 있다. (중략) 어리석은 노예가 국가를 잘못 통치하여 백성을 해함으로서 한번 넘어지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힘센 이웃나라가 구워삶아 (중략) 과분의 위기가 목전에 이르렀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간 쑨원은 3월부터 반년 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나 실행 직전 당국에게 들키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쑨원은 간신히 도망쳤지만, 쑨원의 절친인 루하오둥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루하오동이 역사속에서 남긴 족적은 짧았지만 그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의 당기이자 현 중화민국의 국장인 청천백일기가 바로 루하오동의 작품이다.

3. 영국에서 납치되다[편집]



파일:Dr._Sun_in_London.jpg

런던에서의 쑨원

이후 일본을 거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흥중회 분회를 설립했고 1896년 런던을 체류하였다가 청 영사관에서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청나라 공사관에서는 쑨원의 모든 행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상태였고, 사립탐정소에 의뢰해서 쑨원의 뒤를 계속 밞게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11일 일요일, 교회로 가던 도중 쑨원은 길거리에서 모국어인 광둥어를 사용하는 중국인을 만나게 되고, 먼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와 대화하다가 어떤 건물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청나라 영사관이였다. 쑨원은 그대로 2층 방에 감금되었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고 외부로 연략을 취하려는 시도들은 전부 차단당했다. 이때 좌절하고 있던 쑨원에게 누군가 찾아오는데, 자신을 영사관으로 유인한 광둥어 사용자인 '당'이였다.

그는 불안해하는 쑨원을 다독이며, 영사는 아무런 실권이 없고, 진정한 실세인 영국인 서기 매카트니[4]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쑨원은 이를 믿고 매가트니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당의 제안으로 "내가 공사관을 방문한 것은, 무죄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라는 문구를 넣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부 매카트니의 책략으로, 이 문단 때문에 쑨원은 납치당한게 아니라 제 발로 공사관에 들어온 것으로 되었다.

이를 뒤늦게 눈치챈 쑨원은 전부 끝났다며 절망하지만, 마침 도움의 손길이 있었으니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사환 "콜"이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였던 콜에게 쑨원은 기독교도를 아니꼽게 여기는 청 정부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며 신앙심에 호소했다. 결국 콜의 도움으로 스승이였던 캔틀리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성공한다. 캔틀리 박사는 이 사실을 언론에 폭로하였고 결국 여론에 못 이긴 청 정부는 쑨원을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쑨원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였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어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휘 쑨원(孫文)이 아닌 호 얏센(逸仙)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영향인지 현재까지도 서양에서는 쑨원을 쑨얏센(Sun Yat-sen)으로 부르고 있다.

이후 량치차오와 교류하며 그와 합작할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그의 스승인 캉유웨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900년에는 후이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20,000명의 세력을 확보했지만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당초의 지원계획을 철회하면서 보급부족으로 11일 만에 어이없이 자진해산하고 말았다.


4. 성숙해지는 사상, 그러나 연이은 실패[편집]


1901년경부터 쑨원은 후일 국민당의 혁명론인 삼서론을 최초로 구상시키는 등 자신의 사상을 점차 체계화시켰다. 이후 도쿄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한 쑨원은 1905년 7월 도쿄에서 흥중회와 다른 세력들을 규합시켜 중국동맹회를 창설시킨다. 이후 후일 삼민주의라고 불리는 삼대주의의 사상을 확립시키고 삼서론의 필요성을 강론하고 혁명언론 민보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07년 청 정부의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가 쑨원을 내쫓으면서 문제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쑨원을 출국시키는 대신 어느 정도의 활동금을 지불했는데 민간의 지원까지 합쳐 15,000엔에 달하는 전별금을 겨우 2,000엔만 민보 유지를 위해 내놓고 나머지는 무력봉기를 위해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동맹회 내에서 다시 갈등이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해 9월 광둥성 서부에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17일만에 자진해산시키고 12월 진남관 일대에서 다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다시 실패로 끝내고 만다. 이후 청조의 압력으로 쑨원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체재마저 금지당한다. 이와 별개로 황싱이나 다른 동맹회 회원이 다시 1908년 3월과 5월 광둥, 원난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는 다시 광둥성 일대에서 혁명활동을 일으키지만 1910년 2월의 광저우 봉기도 당국의 사전차단으로 실패로 끝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동맹회 내부는 쑨원의 혁명노선에 회의를 품는 장빙린, 쑹자오런의 비판으로 실질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이후 쑨원은 각지의 화교를 찾으면서 구걸에 가까운 연설로 다시 자금을 모아 1911년 4월 광저우에서의 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로서 쑨원의 정치시대는 완전히 끝나보인 듯 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라는 대사건이 터지면서 쑨원의 정치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5. 중화민국의 성립[편집]


쑨원이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주동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1911년 말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게다가 막상 봉기가 일어나던 타이밍에는 너무 피곤해 그 다음날이 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아마 본격적인 상황을 잘 몰랐기에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면서 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청조에 대한 차관 지원을 중단시키는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12월 25일 대중의 환호 속에서 상하이에 상륙한다. 이때 혁명군은 쑨원이 대량의 차관이나 해군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쑨원 본인은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왔다."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쑨원은 1911년 12월 27일 중화민국 초대임시총통에 선출된 뒤 태음력을 폐기하고 태양력을 사용할 것을 결의한다. 중국 전통사상에서 역법에 대한 관장은 군주의 고유권한이다. 즉, 달력을 개정한다는 의미는 청조 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초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한다. 그 당시에 중화민국 연호, 서력기원도 덤으로 도입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방 유력자들이 선출한 얼굴마담 이상의 의미는 없었고, 전국 각지로 번져가던 혁명도 청조의 뒤늦은 조치로 점차 소강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쑨원은 북방에서 혁명군과 대치 중이던 위안스카이와 타협한다. 이미 쑨원이 중국에 오기 전부터 혁명군 관련자들이 협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혁명군 입장에선 북양군과 맞짱뜨는게 부담스러웠고, 위안스카이 역시 청 황실의 진압 명령을 받긴 했지만 황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진압 초기부터 주중 영국 공사를 통해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쑨원은 청을 무너뜨리지만 기존 황실을 대우해주고, 임시 대총통은 위안스카이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그해 4월 대총통직을 사임하고 만다.

이 협상은 결국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진 성공시키지만, 중화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가 독재자로 돌변해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내각책임제를 유지하려는 국무총리 탕사오이를 축출하고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내세워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기획하며 독재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쑨원은 계축전쟁으로 맞섰으나 진압당하고 만다. 이후 쑨원은 쑹자오런의 국민당의 후신을 자처하는 중화혁명당을 구성하나 지나치게 쑨원 개인에게 의존하는 체제로 인하여 오히려 구 동맹회 회원에게도 외면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초급총통제를 실시해 황제적 총통제를 구축한 다음,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굴욕적으로 퇴위하고 몇개월 안가 결국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리위안훙은 국회와 구약법의 회복을 선언했다.


6. 군벌의 난립[편집]


위안스카이의 사후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키면서 중화민국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정부 안에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국회 내부에서는 연구계, 교통계, 헌정상각회가 헌법 제정 문제로 격렬히 대립했다. 결국 장훈복벽 이후 국회가 해산되면서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다. 주로 돤치루이, 쉬수정안휘군벌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등의 직예군벌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호법전쟁 시점에는 장쭤린봉천군벌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둥, 광시, 윈난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 와중에 쑨원은 1차 호법운동을 벌여 광동, 광서, 운남의 탕지야오, 루룽팅계계군벌, 전계군벌들과 협력해 1917년 광둥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호법전쟁을 통해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1918년에는 그를 실각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모든 직위를 포기하고 상하이로 이동한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쑨원학설을 저술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1919년 2월 열린 남북화의가 5월에 결렬되고 1919년 5.4 운동 발발로 북양정부의 힘이 쇠퇴하는 등 쑨원은 다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된다. 이에 1919년 10월에 중화혁명당을 개조해 국민당을 창설한다. 1920년 탕사오이 등 익우사 정객들의 광저우 군정부 부정 이후의 합류로 다시 정통성을 회복한 쑨원은 광동군벌 천중밍의 협력으로 광저우로 복귀해 1921년 4월 27일 2차 군정부의 비상대총통에 취임한다. 국회의원이 전원 참석하지 않아 완전한 정통성이 없어 비상대총통이라고 했다. 이후 5월에는 군정부를 취소하고 정식 대총통에 취임하여 2차 호법운동을 전개했으나,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축출당하면서 또다시 쫓겨나게 된다. 이때 거의 죽을뻔한 쑨원을 살려낸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장제스다. 이 일을 계기로 장제스는 쑨원의 주요 심복 중 하나가 되었고, 쑨원 사후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하여 국민혁명을 이끌게 된다. 이때의 중산함이 바로 천중밍으로부터 쑨원을 구해낸 그 영풍함이었다.


7. 최후의 승부수[편집]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 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연이은 소련의 해외 기득권 포기 및 약소민족 지원 선언이었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소련의 노림수가 있었다. 소련의 특사 마링(Maring)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1923년 북벌군을 재조직해 광저우를 회복한 이후 쑨원은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해 임시적인 정부로 삼았다. 이후 소련과의 논의 끝에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광둥성에 남아있는 몇몇 군벌들과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쑨원 본인은 2년 안에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성은 아무래도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펑위샹이 정변을 일으켜 돤치루이를 축출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쑨원을 초빙하자 대원수 직위를 후한민에게 맡기고 북상하였다. 도중에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에 대해서 연설한 것이 나름 유명하다. 다만 해당 연설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은 세계 문화의 미래를 위해 서양 패도의 번견이 될 것인가, 동양 왕도의 아성이 될 것인가'를 물은 것은 해당 연설이 아니라 해당 연설의 기록 말미에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하기 직전 병으로 쓰러진 쑨원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곧바로 입원하였다. 당연히 전후 협상은 쑨원을 사실상 배제한채 이루어지고 말았다.

1925년 1월, 사실상 그의 죽음을 예감한 수행원들이 유언을 남길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 본인은 "유언을 남기면 뒷사람들이 그것을 악용할 것이기 때문에 안 남기는 것이 좋다."라고 거절했다. 실제로 그가 죽은 후 왕징웨이, 후한민, 쉬충즈, 다이지타오, 랴오중카이 등이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1925년 2월이 되자 왕징웨이가 쓴 총리유촉(總理遺囑)을 공식 유언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후 한달간을 더 앓던 쑨원은 3월 11일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된다.

"내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지반을 포기함으로서 평화통일을 꾀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십수년에 거쳐 국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품어온 주의를 결국 완전히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동지 제군이 고군분투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케 하여 삼민과 오권의 주장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자신의 유해를 난징 쯔진산에 묻고 그것을 영구보존해달라고 당부한 뒤 그 다음날인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쑨원은 사망한다.

[1] 쑨다청, 광동어 독음: 쑨닷셍.[2] 나중에 중화기독교회공리당(中華基督教會公理堂)의 초대 총무가되지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사하게 된다.[3] 영토 할양은 현대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극단적이지만, 당대에는 그렇게 이상할 정도는 아닌 발상이었다. 신해혁명중화민국 군사정부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던 철혈십팔성기만 보더라도 한족이 거주하는 18개 성만을 의미하고 만주, 티베트 등은 뜻하지 않은 깃발이었다. 물론 쑨원도 이후에는 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민족 화합을 상징하는 오색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지지하게 된다.[4] 2차 아편전쟁 무렵부터 중국에 들어가 태평천국의 난 진압과정에서 결성된 영국인 + 중국인 혼성의 상승군 소속으로도 활동하고, 이홍장의 외국인 측근으로서 활약했다.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중국 정부를 대변하는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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