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위안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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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화민국 임시정부 국장.svg 임시정부 임시대총통
초대
쑨원
제2대
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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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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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위안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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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군벌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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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bgcolor=#b69400><width=15%> 초대 ||<width=35%>
위안스카이 ||<bgcolor=#b69400><width=15%> 임시 ||<width=35%>
리위안훙 ||
||<bgcolor=#b69400><width=15%> 제2대 ||
돤치루이 ||<bgcolor=#b69400><width=15%> 제3대 ||
우페이푸 ||
||<bgcolor=#b69400><width=15%> 제4대 ||
장쭤린 ||<bgcolor=#b69400><width=15%> 제5대 ||
장쉐량 ||




파일:여원홍.jpg
중화민국 계임 대총통
한문
黎元洪
한국식 독음
여원홍
영문
Li Yuanhong

송경(宋卿)
출생
1864년 10월 19일 청나라 호북성 황파
사망
1928년 6월 3일 (향년 63세),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학력
톈진북양수사학당(天津北洋水師學堂)
직업
정치가, 군인
총통
재임 기간

계임 1916년 6월 7일 ~ 1917년 7월 6일
복임 1922년 6월 11일 ~ 1923년 6월 13일
부총통
재임 기간

임시 1912년 1월 3일 ~ 1913년 10월 10일
1대 1913년 10월 10일 ~ 1916년 6월 7일

1. 개요
2. 생애
2.2.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계임
2.3.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복임
2.4. 말년과 죽음
3. 주요 경력
4. 참고 문헌
5. 여담
6. 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청말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북양군벌의 거두로 두차례나 중화민국 대총통을 지냈으나 돤치루이우페이푸를 비롯한 쟁쟁한 군벌들에게 밀려서 실권은 없었다.


2. 생애[편집]



2.1. 신해혁명에서 계축전쟁까지[편집]


1864년 10월 19일, 후베이성 황베이(黃陂)에서 태어났으며 1883년 톈진북양수사학당(天津北洋水師學堂)에 입학, 1889년 졸업했다. 졸업 이후 해군에 복무하여 청일전쟁에 참전, 정원호의 포술장으로 복무했다가 황해해전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지만 다른 수병들이 건져내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종전 이후 육군으로 옮겨 장지동 밑에서 신군건설에 참여했고 1906년 육군 21혼성협통령에 임명되어 우한에 주둔했다.

1911년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무창봉기가 일어났고, 혁명파에 의해 호북군도독으로 추대되었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10월 16일 변발을 자른 뒤 혁명파에 합류했고 위안스카이와 협상했다. 이후 1912년 1월 3일 임시 부총통에, 3월 3일 동맹회 간사로 선출되었다. 차이어, 왕지상, 곡종수 등이 이끄는 통일공화당의 지지를 받으며 위안스카이와 총통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이후 1912년 5월 공화당을 창당하여 장건, 장병린, 오정방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공화당은 민주당, 통일당 등과 합당하여 량치차오를 당수로 하는 진보당으로 합당했다. 1913년 6월, 선후대차관 사건에 반발한 강서도독 리례쥔이 해임된 이후 강서도독을 겸했으며 계축전쟁을 진압했다.

1912년 8월에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여론의 큰 비난을 받았고 위안스카이의 손을 빌려 정적 장전우를 제거하려다가 괜히 역이용당하는 통에 약점이 잡혀 위안스카이의 수하가 되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강서도독, 호북도독 등의 지방관 직을 사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1913년 10월 7일, 중화민국 정식부총통에 당선되었다. 황싱이 참모총장에서 사임한 이후 1912년 4월 13일,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14년 12월까지 재임했다.


2.2.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계임[편집]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된 후 참정원 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영향력을 견제한 위안스카이에 의해 사실상 연금되어 있었고 보신을 위해 정사에 대해는 함구하고 위안스카이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사돈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군주제에 반대하여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일으킨 후 참정원 원장직에서 사직했고 12월 무의친왕에 봉해졌으나 단호하게 고사했다. 이 때문에 황태자가 되고 싶어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그를 미워하여 호북 교섭원 호조동 등을 시켜 리위안훙을 감시했다. 리위안훙은 첩 여본위에게 베이징을 탈출할 것을 얘기했는데 여본위는 호조동에게 포섭된 상태라 이 정보가 새어나갔고 500명의 군경이 리위안훙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리위안훙이 목적지를 밝히지 않아서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이후 위안스카이 앞에서 스스로를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되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운남에서 일으킨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위안스카이의 여러 측근들까지도 위안스카이와 단절하는 지경에 이르자 위안스카이는 전국적인 반발에 못 이겨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요독증으로 사망한 이후에 법률에 따라 6월 7일 대리총통에 취임,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임명했다. 이에 각국 공사단이 방문하여 리위안훙의 취임에 만족을 표시하며 도의적인 지지를 약속했고 특히 일본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원조를 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리위안훙의 계임 근거가 1914년 신약법에 있는지 1912년 임시 약법에 있는지 충돌이 있었으나 남방이 임시 약법의 복구를 강력히 요구하고 펑궈장 등 북양군벌도 임시 약법 지지로 선회하였으며 6월 25일 해군이 임시약법 복구를 요구하며 독립을 선포하자 돤치루이도 임시 약법 부활에 동의하게 되어 남방 군무원의 요구에 따라 1914년의 신약법을 폐기, 임시약법과 6월 29일 구국회 복구를 선포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다. 8월 1일 국회가 복구되자 리위안훙은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하였다.

한편, 당시 국무총리였던 돤치루이와 1차세계대전 참전문제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는데 이를 부원지쟁이라 한다. 1917년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면직시켰다가 돤치루이가 임시 정부와 임시 의회를 수립하여 안휘의 니쓰충,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봉천의 장쭤린,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등에게 지시, 각 성의 독립을 선동하는 식으로 저항하자 겁을 먹고 장강순열사 겸 안휘독군 장쉰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베이징에 입성한 장쉰은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강요하였으며 이 때문에 6월 12일 국회를 해산해야 했다. 장쉰은 급기야 7월 1일 장훈복벽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임시 약법 체제를 폐기하였다. 리위안훙은 일등공작에 봉해졌지만 장쉰과 그의 오합지졸 군대의 막나가는 복벽에 동조하지 않고 돤치루이를 7월 2일에 다시 국무총리로 복직시키고 부총통 펑궈장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준 후 자신은 일본공사관으로 도주했다.

이후 돤치루이가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을 토벌하고 복벽을 취소하였으나 량치차오의 중화민국은 이미 망했으니 새로 건설해야 한다는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는 것은 거부하고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등 독재를 일삼았다. 돤치루이의 독재에 반발한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일으켰다. 쑨원은 리위안훙에게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운동에 참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리위안훙은 복벽 진압 후 대총통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펑궈장의 제의에도 대총통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대원수로 추대되어 호법정부를 구성하였는데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감행하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호법전쟁은 북에서 주화파가 득세하고 남에서 쑨원이 축출되는 혼란 중에 흐지부지해졌다. 1920년 돤치루이안휘군벌우페이푸직예군벌, 장쭤린봉천군벌의 연합이 안직전쟁을 벌여 안휘군벌이 몰락하고 천하는 직예군벌이 장악하게 되었다. 남방에서는 쑨원이 근성있게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2년 천중밍영풍함 사건으로 쫓겨나는 등 큰 소득은 없었다.


2.3.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복임[편집]


1922년 1차 직봉전쟁직예군벌의 승리로 끝나자 우페이푸는 안복국회에서 선출된 쉬스창을 몰아내기 위해 안복국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법통중광' 즉, 구국회 복구를 주장했다. 이러면 쑨원의 호법운동도 정통성을 잃을 것이니 중국 내부의 다른 정권들을 견제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우페이푸의 논리였다. 량치차오와 정학회, 익우사, 헌정연구회 등의 국회의원들도 동조하였다. 우페이푸가 비밀전문을 보내 위협하고 국회의원들이 베이징에 모여 쉬스창의 퇴진을 요구하자 쉬스창은 6월 2일 칭병하여 퇴진하고 톈진의 사저로 돌아가버렸다. 절강독군 루융샹안휘군벌의 잔여세력은 리위안훙의 추대가 직예군벌의 득세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두세사람의 군인의 논리로 법률을 변경할 수 없으며 두세사람의 의원의 주장이 전체 국회를 대변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전문을 보냈지만 쑨원 역시 우페이푸의 법통회복 주장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하는 등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1922년 6월 11일 다시 대총통에 선출되어 6월 13일 구국회 복구를 선언했다. 8월 1일 국회가 개막하고 이후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나 황옌페이, 우페이푸, 탄옌카이 등 주요 내각 구성원들이 취임을 거부하였는데다가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내각 불신임을 천명하면서 1922년 8월, 구국회 개막과 함께 붕괴되었다. 8월 6일, 리위안훙은 신임 국무총리로 탕사오이를 임명하였으나 탕사오이 본인이 취임을 거부하였는데다가 우페이푸가 탕사오이의 임명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이 임명동의안 심의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9월 14일, 탕사오이 내각도 붕괴되었다. 그 다음을 이은 총리는 탕사오이 집권 시기에 국무총리를 대행하고 있던 왕충후이의 내각이었는데 왕충후이는 우페이푸의 친위파벌인 낙양파와 더불어 뤄원간 등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입각시켜 낙파내각, 호인정부라 불렸다.

왕충후이는 후스로부터 연성회의를 즉각 소집하여 남북통일과 군축을 실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직예군벌의 눈치를 살피느라 실행에 옮기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지식인들로부터 군벌의 똘마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1922년, 량스이 내각의 붕괴 이후로 겉잡을 수 없던 북양정부의 국고 고갈이 절정에 달하여 교직원, 군인, 공무원들이 모두 파업을 선언하는 등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왔다. 결국 중의원은 우페이푸의 측근인 내무총장 손단림과 교통총장 고은홍을 낙하산 출신이라는 이유로 탄핵했다. 하지만 우페이푸의 비서장 손단림의 입각은 왕충후이 내각이 우페이푸의 지지를 받는 결정적 증거요 상징이나 마찬가지였고 왕충후이는 내각임명동의안을 아예 제출하지 않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려 했으나 결국 국회의 분노를 사서 10월 중순에 총사퇴했다. 리위안훙은 왕충후이를 설득하여 사퇴를 막았으나 중의원의 계속된 공격과 조각문제에 시달리던 왕충후이가 자신은 정식 내각이 아니라면서 뤄원간 사건 후인 11월 25일에 불명예스럽게 총사퇴해야 했다. 이 시기에 그와 큰 관련은 없지만 2.7 사건임성 사건이 일어난 바가 있다.

이후 차오쿤을 옹립하려는 직예군벌의 보정파는 헌법 제정을 위해 리위안훙의 중임을 요구하는 제헌파와 리위안훙을 물리치기 위해 리위안훙을 수비하는 경비대를 철수시키고 수도와 전화를 끊어 외부와 연락을 끊게 했다. 이어 육군검열사 펑위샹이 군비를 달라고 리위안훙을 위협하고 세관을 점령해 정부의 수입을 끊었다. 이어 공민단이 리위안훙의 집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각국 외교관들이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애초에 군비는 직예군벌이 장악하고 있는데 재정권도 없는 리위안훙에게 군비를 달라고 위협한 것부터가 리위안훙을 쫓아내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짓이었다.

노골적인 하야 압박에 분노한 리위안훙은 1923년 6월 13일 하야하여 톈진으로 떠났고 하야 직전, 직예군벌에 대한 보복으로 국무총리 장소증을 면직시키고 농상총장 이근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후 총통의 직인을 프랑스 병원에 숨겨버렸다. 이에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 고능위는 직예성장 왕승빈에게 지시하여 6월 13일 톈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 있던 리위안훙을 기차 안에 구류시킨 후 직인이 있는 곳을 실토하게 한 다음에 6월 14일 새벽 4시에야 기차에서 내리게 해주었다. 이후 고능위가 총통 권한대행을 한 후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선거를 통해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2.4. 말년과 죽음[편집]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톈진의 영국 조계에서 사업을 하며 풍족하게 살았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이 펑위샹과 결탁, 우페이푸를 축출하고 차오쿤을 대총통에서 쫓아낸 후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옹립하였는데 돤치루이는 선후회의를 소집하여 쑨원의 국민회의에 맞서고자 량치차오, 탕사오이, 장병린과 더불어 리위안훙을 초청했지만 리위안훙은 참가를 거절했다.

이후 테니스, 투자 등을 하면서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고 1926년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회복되었는데 1928년 6월,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서 경마를 구경하던 중 쓰러져 1928년 6월 3일 사망했다. 국민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그의 죽음을 기렸다.


3. 주요 경력[편집]


중화민국 역대 임시 부총통
파일:중화민국 임시정부 국장.svg
신해혁명

1대

중화민국 건국
리위안훙
(1912년 1월 3일 ~ 191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역대 대총통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1대

2대

3대
위안스카이

리위안훙
(1916년 6월 7일 ~ 1916년 7월 6일)

펑궈장

4대

5대

권한대행
쉬스창

리위안훙
(1922년 6월 11일 ~ 1923년 6월 13일)

가오링웨이



4. 참고 문헌[편집]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제1차 직봉전쟁후 자유주의지식인의 북경정부관 - 호인정부론과 나문간사건을 중심으로,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6호, 동양사학회.


5. 여담[편집]


  • 부총통 재임 기간이 4년 5개월로 북양정부에서 최장기 재임 부총통이다. 그래봤자 자신을 제외하면 부총통이 펑궈장 밖에 없으니 무의미하다.

  • 유일하게 두번에 나눠서 임기를 수행한 북양정부 대총통이다. 국민정부와 헌정 시기까지 확대해도 총통 임기를 두번에 나눠서 수행한 인물은 리위안훙이 유일하다.[1] 다만 리위안훙의 두번째 임기가 새로 선출된 것이 아니라 1917년 장훈복벽으로 정지되었던 임기를 마저 수행한 것이라는 관점에 따른다면 장제스리쭝런의 사례의 선배가 된다.


6. 매체에서[편집]


파일:건당위업여원홍.jpg
영화《건당위업》에서 중국 배우 범위가 분했다.


7. 관련 문서[편집]


[1] 국가원수 대행으로는 국무총리 중에 몇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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