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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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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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의 후궁
숙의 곽씨 | 淑儀 郭氏

출생
미상
사망
1522년 이후
재위기간
조선 양원
1491년 12월 13일 ~ 1495년 2월 3일 이후
조선 숙의
1495년 2월 3일 이후 ~ 1522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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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현풍 곽씨
부모
부친 - 곽인(郭璘)
모친 - 안동 권씨 권치중(權致中)의 딸[1]
배우자
연산군
자녀
없음
봉작
양원(良媛) → 숙의(淑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연산군간택 후궁. 아버지는 곽인(郭璘)이며, 어머니는 권치중(權致中)의 딸 안동 권씨로, 양녕대군의 외손녀이다.

슬하에 자식은 없다. 말년을 정업원의 주지로 보냈다.


2. 생애[편집]


1491년(성종 22) 당시 왕세자였던 연산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양원(良媛)[1]으로 봉작되었다.[2] 그러나 본래 곽인의 집은 좋지 못한 행실로 유명하였다. 곽인의 어머니는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풍류를 좋아하여 여종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춤을 추게 하는 등 절개가 없었다. 곽인 역시 술을 좋아하고 행동이 경박한 사람이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곽씨는 원래 간택에 한 번 떨어졌다가 다시 뽑혀서 입궁하게 된 것이라 당시 이세좌[3]의 집안과 납채(納采)[4]까지 끝난 상황이었다.[5] 이때문에 조정 대신들과 성종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었다.

결국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숙의 곽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1522년(중종 17) 《중종실록》에서는 곽씨가 정업원의 주지로 있다고 나온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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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명부 종3품 세자 후궁. [2] 성종실록 259권, 성종 22년 11월 4일 병자 1번째기사. # [3] 훗날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 사약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연산군에 의해 자진하라는 명을 받는다. [4] 신랑 집안에서 예를 갖추어 청혼서를 신부 집안으로 보내는 것. [5] 성종실록 258권, 성종 22년 10월 20일 계해 2번째기사. # [6] 중종실록 44권, 중종 17년 3월 3일 경술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