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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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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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 愼嬪 金氏


파일:신빈김씨묘역.jpg

신빈 김씨묘 전경
출생
1406년
사망
1464년 10월 13일(음력 9월 4일)
(향년 59세)
묘소
경기도 화성시 남양리 산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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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주 김씨(淸州 金氏)
부모
부친 - 김원(金元)
모친 - 삭녕 고씨
배우자
세종
자녀
슬하 6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계양군(桂陽君, 1427 ~ 1464)
차남 - 의창군(義昌君, 1428 ~ 1460)
3남 - 밀성군(密城君, 1430 ~ 1479)
4남 - 익현군(翼峴君, 1431 ~ 1463)
5남 - 영해군(寧海君, 1435 ~ 1477)
6남 - 담양군(潭陽君, 1439 ~ 1450)
장녀 - 옹주 (? ~ 1426 조졸)
차녀 - 옹주 (? ~ 1429 조졸)

봉작
소의(昭儀) → 귀인(貴人) → 신빈(愼嬪)

1. 개요
2. 생애
2.1. 후궁의 삶
2.2. 불교에 대한 믿음
2.3. 세조의 배려
3. 대중 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세종후궁. 아버지는 김원(金元)이며, 어머니는 삭녕 고씨이다. 본래 내자시(內資寺)[1]의 공노비였는데, 나이 13세에 원경왕후의 눈에 띄어 소헌왕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가 세종의 후궁이 되었다.

슬하에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익현군 이연, 영해군 이당, 담양군 이거, 그리고 두 옹주를 낳아 6남 2녀를 두었다.[2] 세종의 여러 후궁 중 압도적인 다산을 자랑한다.[3]

또한, 세종의 많은 후궁들 중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덕분에 현재 경기도 화성시 시청사 인근에 조성된 신빈 김씨의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관리 중이다.

2. 생애[편집]



2.1. 후궁의 삶[편집]


1427년(세종 9)에 계양군을 낳았다.[4][5] 이때 '궁인 김씨'가 낳았다고 썼으나 1439년(세종 21) 담양군을 낳았을 때는 '소의 김씨'라고 썼으므로 여러 아들들을 낳는 동안에 후궁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막내 아들 담양군을 낳은 그 해에 종1품 귀인으로 품계가 올랐고 이어서 신빈(愼嬪)으로 봉작되었다.[6]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內資寺) 여종[婢]이었으나, 무술년에 내가 처음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모후(母后)께서 뽑아 중궁으로 보내었고, 그때의 나이는 13세였었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함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하였겠느냐."

세종실록》 세종 21년 1월 27일


신빈 김씨는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근신하여 윗사람을 잘 모셨던 데다가, 소헌왕후의 신임을 받아 소헌왕후 소생의 수양대군을 돌보았고, 어린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맡았다.

덕분에 훗날 세조와의 인연으로 자식들이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어 살 수 있었고, 자손이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같은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단종을 지지해서 아들들과 친정이 다같이 몰살당한 것과 비교된다.

사실 1437년(세종 19) 장남 계양군이 한확의 딸과 혼인하면서 세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된 영향도 있다.[7] 한확은 조선 초기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면서 세도가 가장 드높았으며, 둘째 딸은 계양군의 정실부인, 막내 딸은 훗날의 인수대비가 되었으므로 혜빈 양씨와 비교할 때 신빈 김씨의 승리는 예정된 일이었다.

2.2. 불교에 대한 믿음[편집]


당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신빈 김씨도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특히 아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살았는데, 세종의 상중에 막내 아들 담양군이 12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8] 신빈 김씨가 요절한 아들을 위하여 불경을 인쇄하려고 하자, 문종은 쌀 500석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내주어 국고를 비웠다는 비판을 들었다.[9]

오죽하면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어머니가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단종이 의정부와 논의하여 머리를 기르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신빈 김씨는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10]

이 밖에도 김수온이 쓴 〈묘적사중창기(妙寂寺重創記)〉에 따르면, 밀성군이 어머니를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묘적사에 후하게 시주하고 신빈 김씨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11]

2.3. 세조의 배려[편집]


신빈 김씨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주 온천으로 목욕을 갔다. 신빈 김씨의 온천행은 《단종실록》부터 언급되는데, 한번 온천으로 갈 때마다 아들들이 뒤를 따랐으므로 많은 물자가 소비되어 비판 받았다.[12] 그러나 세조는 관찰사에 명하여 신빈 김씨를 대접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13]

1464년(세조 10) 9월 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조가 쌀, 콩 등 70석을 부조하였다.

3. 대중 매체[편집]


초반에 '이선'이라는 이름의 궁녀로 나오는데, 훗날의 신빈 김씨 역할이었다.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아무나 붙잡고 막무가내로 자신을 팔아보려던 와중에 충녕대군을 만나서 궁녀가 된다. 원래는 비중이 큰 역할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배우의 성대결절로 중도 하차하면서 드라마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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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시대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던 호조 소속의 관청. [2] 다만, 두 옹주는 장성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3] 세종의 모든 부인 중에서는 소헌왕후(8남 2녀)가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4]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12일 정묘 5번째기사. # [5] 적서를 가리지 않는다면 계양군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 된다. [6]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27일 병오 2번째기사. # [7] 세종실록 79권, 세종 19년 12월 9일 병인 1번째기사. # [8] 당시에는 후궁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신빈 신씨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때 세종의 허락 없이 하는 머리를 깎아서 논란이 일었다. [9] 문종은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정혼까지 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담양군을 애틋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담양군의 정혼자에게 상복을 입혀 담양군의 정실 부인으로 확정지으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10]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12일 신축 1번째기사. # [11]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묘적사다. [12] 1454년(단종 2) 3월 11일, 신빈 김씨가 지난 번에 온천으로 떠날 때에 아들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이 뒤따랐다는 말이 나온다. [13] 세조실록 13권, 세조 4년 7월 12일 정유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