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 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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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몬 왕조 8대 군주
Σαλώμη Ἀλεξάνδρα | 살로메 알렉산드라

파일:살로메 알렉산드라.jpg

제호
한국어
살로메 알렉산드라
히브리어
שְׁלוֹמְצִיּוֹן
그리스어
Σαλώμη Ἀλεξάνδρα
라틴어
Salome Alexandra
존호
국왕
생몰 년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67년
재위 기간
기원전 76년 ~ 기원전 67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하스몬 왕조 8대 여왕.

2. 행적[편집]


그녀의 행적을 자세히 전하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정작 그녀의 가계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해문서에서는 그녀를 히브리어 이름인 시옴지온(שְׁלוֹמְצִיּוֹן: 시온의 평화)라고 언급했지만, 그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행적으로 추정하건대, 바리사이파를 지지하는 집안 태생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생년월일 역시 논란 거리인데, 그녀의 생애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가 케네스 엣킨슨은 그녀가 기원전 141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녀는 하스몬 왕조 5대 군주 요한 히르카노스 1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1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104년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임종을 눈앞에 뒀을 때 후처에게 통치권을 물려주고 아리스토불로스 1세를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계모에게 통치권이 주어진 것에 불만을 품은 아리스토볼로스는 아버지가 죽자마자 의붓 어머니를 감옥에 던져넣어 거기서 굶어죽게 만들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대놓고 유대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바리사이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아리스토볼로스 1세는 초막절 축제 기간에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녀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형제 안티고노스가 그를 대신하여 축제를 이끌었는데, 축제에 익숙하지 않아서였는지 갑옷을 입은 채 참여했다. 살로메 측 사람들은 안티고노스가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무장하고 있다고 모함했고, 그는 이를 믿고 바리스 요새로 이동했다. 살로메는 남편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이대로 가다가 안티고노스가 즉위하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남편에게 그를 죽이라고 강력히 권했다. 아리스토볼로스 1세는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 안티고노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나중에 의붓 어머니와 형제를 자기 손으로 죽인 것에 심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한 끝에 재위 1년만인 기원전 103년에 사망했다.

그 후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 히르카노스 1세의 셋째 아들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를 출옥시켜서 왕위에 올려놓고 그와 결혼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4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야나이는 처음에는 아내가 친 바리사이파 성향인 점을 고려해 선왕의 바리사이파 탄압을 중지했지만, 그들이 사독의 후손이 아닌 하스몬 왕조가 대제사장을 겸임하는 것에 반감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탈무드에는 그녀가 야나이의 치세 동안 바리사이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구절이 여러 번 기재되었다.

기원전 76년, 야나이가 라가바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진영 내에서 사망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국정을 어린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아니라 그녀에게 위임했다. 그녀는 은신처에 숨어있던 바리사이파 지도자들과 협상해, 그들이 미래의 정권에서 활약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대신 야나이의 유해가 예루살렘에서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고 매장되는 것에 동의하게 했다. 또한, 여자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여왕으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녀는 대표적인 바리사이파 인사인 랍비 시몬 벤 셰타크를 궁정으로 자주 불러들여 조언을 들었다. 그녀는 시몬의 조언에 따라 정식 결혼 계약을 맺은 여성에게 더 유리하도록 혼인법을 개정했고, 여성 교육을 장려했으며, 종교재판정인 산헤드린을 개편해 종교 뿐만 아니라 사법까지 관장하는 최고 법원으로 격상시켰다.

한편, 그녀는 국방에도 힘을 기울였다. 남편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라가바 요새 공략을 완수했고, 용병대를 대폭 기용하고 군대의 규모를 2배로 늘렸으며, 여러 마을을 요새화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분쟁이 재현되는 걸 막기 위해 사두가이파를 예루살렘에서 요새화된 특정 성읍들로 이주시켰다. 또한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2세에게 군대를 맡겨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게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견한 군대에 격퇴되었다.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 왕국티그라네스 2세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공략하면서 시리아에 진출하자, 아르메니아 왕국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9년간의 통치를 안정적으로 이어갔고, 유대 지역은 평온했다. 사해문서에 따르면, 유대는 그녀의 치세에 전례없는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비는 안식일 밤에만 내렸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임금을 잃지 않았으며, 토양이 매우 비옥해져서 밀알은 강낭콩만큼, 귀리는 올리브만큼, 렌틸콩은 금화만큼 자랐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에 사는 유대인들도 그녀에게 기꺼이 복종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수리 사업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한 반 세겔의 인두세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 결과 수리에 필요한 자금이 신속히 마련되면서, 성전은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원전 67년 여왕이 중병에 걸렸을 때, 형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차기 권력을 쥐는 게 예정된 반면에 자신은 일개 장군 노릇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밤에 예루살렘을 몰래 빠져나왔다. 이후 사두가이파를 포섭해 2주 동안 22개의 요새를 공략해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고,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대제사장에 이어 왕위를 겸임했다. 그 후 유대 왕국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볼로스 2세간의 내전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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