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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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하스몬 왕조 11대이자 마지막 군주.
2. 행적[편집]
하스몬 왕조 10대 군주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이다. 기원전 63년 아버지가 폼페이우스에 의해 폐위된 뒤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끌려갔다. 기원전 57년 감옥에서 아버지와 함께 탈출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뒤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당하고 도로 로마로 끌려갔다. 기원전 49년, 아버지가 형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석방된 뒤 시리아로 파견되어 폼페이우스와 대적하는 2개 군단에 가담했다가 도중에 독살당했다. 이후 그는 자신을 하스몬 왕조의 유일한 상속자로 여기고, 어떻게든 왕위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원전 47년, 시리아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찾아가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의 찬탈을 규탄하며, 자신이 아리스토볼로스 2세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가 지원해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막대한 뇌물을 받은 적도 있었기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42년, 처남 프톨레마이오스 메네이의 지원에 힘입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로데에게 패배하고 산악 지대에 숨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발발하자, 그는 파르티아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파르티아 사령관 파코로스 1세로부터 전사 500명을 지원받은 후 예루살렘으로 잠입해 사두가이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후 바르자파르네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분견대와 합세해 요한 히르카노스 2세, 안티파트로스의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로데를 격멸했다.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붙잡힌 뒤 귀가 절단된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처형되었다. 헤로데는 마사다로 숨어서 한동안 버티다가 로마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대의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곧 반격을 개시했다. 기원전 39년 로마에서 돌아온 헤로데는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파견한 실로의 지원에 힘입어 욥바를 공략하고 마사다를 거점으로 삼은 뒤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겨울이 될 무렵 실로가 그로부터 상당한 뇌물을 받은 뒤 더 이상의 협력을 거부하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하는 바람에 예루살렘 공략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섰다. 기원전 38년, 헤로데는 그로부터 갈릴리 속주를 탈환했지만, 헤로데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모사타로 갔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헤로데의 형제 요셉을 죽이고 헤로데의 군대를 축출했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은 뒤 유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에 맞서 여리고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당시 헤로데에게는 그의 군대를 대적할 병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고, 헤로데는 이 틈을 타 곳곳에 흩어진 적을 각개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유대 지방을 공략했다. 기원전 37년 봄 예루살렘을 포위한 헤로데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안티고노스의 추종자들은 로마의 하수인 노릇하는 헤로데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과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그러나 3개월 내지 5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식량이 바닥나서 더 이상 항전할 수 없게 된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할 테니 신변을 보장해달라고 청원했다.
헤로데는 그가 안토니우스의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참가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목숨을 건지면 장차 왕위를 다시 노릴 거라고 예상했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를 처단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안토니우스는 이 말에 따라 그를 처형했다. 이리하여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은 사라졌고, 에돔 출신의 헤로데가 유대 왕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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