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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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2. 생애[편집]
1909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사병철(史秉哲)[3]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33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제11회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34년부터 약 1년 간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판임관으로 견습생활을 하였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서기과 서기 및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4]#,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직후에 史村光郁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부터 1년 간 평양지방법원 사법관시보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1943년부터 판사로 재직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고, 1950년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심판사로 피고인 김약수 등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1952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및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59년부터 대법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국학대학 강사로 잠시 활동하다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으며 1971년 국가배상법 제2조 1항과 법원조직법 제59조 1항의 위헌 의견에 찬성했고, 이 판결을 계기로 대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83년 1월 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3. 기타[편집]
일제 말기에 판사로 근무한 이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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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식 이름은 史村光郁(시무라 미쓰후미).[2] #[3] 구한말인 1908년 대한협회 철산지회 회원#, 1909년 대한협회 철산지회 평의원# 등으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915년 12월 15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목회자가 되어 활동하였고#, 1918년부터 도량형기 판매에 종사했으며# 1922년 3월 20일에는 철산군 부서면 선리동 수운도 강난기(姜蘭基)의 어장을 대여받아 1925년 3월 19일까지 운영했다.# 또한 1922년 4월 12일 철산금융조합 감사에 선임되었다.# 1936년 4월 6일 동아일보사 철산지국 고문에 임명되었다.#[4]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길중도 이때 함께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