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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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파일:빅터 콜.png

두산 베어스 시절
빅터 알렉산더 콜
Victor Alexander Cole

생년월일
1968년 1월 23일 (56세)
국적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출신지
소련 러시아SFSR 레닌그라드
학력
미상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양타
신체
178cm, 84kg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14라운드 (캔자스시티 로열스)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 (1992)
라뉴 베어스 (1998~1999)
SK 와이번스 (2000)
두산 베어스 (2001~2002)

1. 개요
2. 선수생활
2.1. 메이저리그 시절
2.2. 한국 프로야구 시절
3. 은퇴 후
4.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피츠버그 파이리츠, SK 와이번스, 두산 베어스 소속 야구선수.

야구선수로서는 드문 러시아 국적 소유자인데, 시에라리온 태생의 아버지가 의학을 배우러 소련 레닌그라드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 여성을 만났으며 그 이후 콜이 태어났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야구를 배운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소련 출신으로는 역사상 유일하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 또한, KBO 유일의 러시아 국적 외국인 선수기도 하다.


2. 선수생활[편집]



2.1. 메이저리그 시절[편집]


198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14라운드 지명을 받고 프로 입단하였으나 큰 활약 없이 1991년 3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이후 1992년 피츠버그서 8경기 2패만 기록한게 유일한 메이저리그 기록이었다.


2.2. 한국 프로야구 시절[편집]


원래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뛸 뻔했다. 1998년 KBO 리그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었고 당시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 조 스트롱, 호세 파라, 마이크 부시 등과 함께 최대어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을 받았으나, 호기롭게 45만 달러에 옵션까지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고 결국 당시 돈을 잘 쓰지 않는 롯데는 그와 계약하지 않고 2라운드에서 지명한 내야수 덕 브래디와만 계약을 했다.[2] 결국 콜은 대만 프로야구라뉴 베어스[3]로 가고, 한국과의 악연은 끝나는 줄만 알았다.

한편 롯데 자이언츠와 정식 계약을 한 적은 없지만, 롯데 유니폼을 입고 찍은 유일한 사진이 있다. 다름이 아닌 드래프트 당시 롯데의 지명을 받은 뒤 유니폼을 입고 기념촬영을 했기 때문.


2.2.1.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사진

2000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타이론 혼즈헨슬리 뮬렌을 방출한 신생팀 SK 와이번스하비 풀리엄과 함께 콜을 영입한 것, 그렇게 그는 한국에 실제로 왔고, 데뷔전에 152km/h까지 나가는 구속을 선보이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선수층이 전체적으로 얇았던 신생팀 SK에서 선발과 불펜을 오갔지만, 8승 10패 2세이브에 ERA 6.14를 기록했고, 결국 시즌 후 풀리엄과 함께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한국을 떠났다.[4]


2.2.2.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그러다가 2001년 5월, 콜은 반년 만에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게 된다. 마이크 파머를 방출한 두산 베어스가 대체 선수로 그를 영입한 것. 이후 그는 그해 두산 베어스 소속으로 5승 9패 ERA 5.04라는 외국인 선수 치고는 평균 이하의 성적을 올렸으나, 그해 준PO-PO-한국시리즈를 거치며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했고, 두산 베어스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김인식 감독 역시 콜을 좋게 평가하면서 두산과 재계약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2002년에는 12승 6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거두던 그는 시즌 막판 가벼운 부상을 갖고 2군으로 내려갔는데, 이것은 시작이었다. 그는 퓨처스리그에서 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이후 그는 엔트리서 제외되어 재활군에서 있다가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다.


3. 은퇴 후[편집]


이후에는 2003년 러시아 야구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기도 했고, 2007년에는 북미의 독립리그인 노스이스트 리그에 참가했다. 아들인 빅터 콜 주니어가 2016년까지 리버티 대학교[5]에서 좌완투수로 활동했다고 알려졌으나 그 이후의 소식은 없다.

빅터 콜 본인은 미국의 여러 유소년 야구팀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0
SK
37
114⅓
8
10
2
1
6.14
116
12
78
5
71
1.7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1
두산
21
119⅔
6
9
0
0
5.04
115
9
56
4
95
1.43
2002
27
157
12
6
0
0
4.01
152
11
73
8
114
1.43
KBO 통산
(3시즌)
85
391
26
25
2
1
4.95
383
32
207
17
280
1.51
[1] 러시아 국적 선수는 빅터 콜 이외에도 7명이 있다.[2] 당시 용병 드래프트에서 연봉 상한선이 12만 달러였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 할 수도 있는데, 간단하다. 뒷돈 달라는 소리. 그 때나 지금이나 대외금액대로 돈 주는 구단 아무데도 없다.(그래도 2023년 현재 존재하는 첫 해 이적료 포함 100만 달러 이하 규정은 잘 지켜진다는 여론이 대세다.)[3] 현재의 라쿠텐 몽키스[4] 하지만 이 때는 SK 와이번스 투수 중에 제대로 밥값하는 선수는 신인인 이승호 한 명뿐일 정도로 투수진이 막장 그 자체였다. 그 이승호도 노예로 3년간 굴렸다가 뒤에 작살이 나버렸다가 다시 재기를 했다.[5] 윗 문단에 작성 된 롯데 자이언츠 동료가 될 뻔 했던 덕 브래디의 모교이기도 하다.[6]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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