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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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2. 건국 시기와 전신
3. 건국 및 초기 역사
4. 전성기
5. 모용선비의 침입
6. 전연의 침입과 멸망


1. 역사[편집]



지도로 보는 부여의 역사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이다.

동부여는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부여만 있었다. 이것을 고구려 후기 고구려 정계에 깊숙히 파고든 부여계 귀족들이 선조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냈거나 동부여 사람들이 신화를 조작했는데 그게 고구려 자체 기록과 《구삼국사》를 거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남부여백제에서 제26대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부여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약화되고, 선비족이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된다.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후연에서 등용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인 5세기 경에는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했던 듯하다.


2. 건국 시기와 전신[편집]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1]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했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 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 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바로 이 포자연 문화권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구류가 하필이면 《삼국사기》상 고구려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압록강 유역 적석총에서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학계에서는 이것이 고구려 건국 지배층과 대단히 유관하다고 보고 있다. 학자들이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그냥 부여 출신 전사 집단이 주축이 되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대신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인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3. 건국 및 초기 역사[편집]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2]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추모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이에 반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비교했을 때 매우 다르다. 특히 백제의 건국 설화는 난생설화가 아닌데, 부여,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도 난생설화인 걸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건국 설화가 난생설화가 아닌 나라는 고조선백제 둘뿐이다.

동한대의 《논형》에 처음 부여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원형이다. 다른 여러문서들에서도 논했지만 동명왕이 시조이지만 소수림왕 대에 <주몽 신화>를 만들고 초기 역사를 정비하면서 <동명왕 신화>를 배껴 <주몽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동명왕을 천제의 아들로 설정한 해모수로 바꾸거나 교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것 이외에도 천제의 혈통이란 설정을 부여해 주몽의 고귀함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명왕 신화>에 따르면 동명왕은 탁리국(글자 모양이 비슷해 고리나 색리라고 쓰기도 한다. 고리국이 원래 발음에 가장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에서 탈출해 엄호수를 건너 남쪽에 나라를 세웠다는데, 여기서 동명왕의 도읍지는 길림시, 엄호수는 눈강 또는 제1송화강, 탁리국은 눈강 북쪽의 송눈평원에 있었다는 것에 한국과 중국 사학계 모두 이견이 없다.

또 부여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4~3세기로 추정되는데, 이 당시 단군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패권을 차지했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으로 한반도 서북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다가 다시 중흥하고, 또한 단군조선이 위만조선으로 교체되는 혼란기 속에 고구려의 원형이 된 구려족처럼 이때 즈음에 건국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근데 문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 다음왕 해부루 대에 가섭원으로 천도했다면서 '동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후 동부여와 북부여를 혼재할 뿐 아니라 분명히 동쪽(함경북도 북옥저 쪽으로 추정)인데 고구려는 북벌을 한다든가 등의 이유로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다. 동부여에 관해선 모용선비의 침략 문단을 참고.

이후 금와왕 때는 북쪽으론 제1송화강에 이르고, 동쪽으론 읍루를 복속시키는 등 당대 최강자로 거듭난다.


4. 전성기[편집]


부여의 전성기는 1세기~3세기이다. 부여 남쪽에 위치했고, 오랜 역사와 강성한 국력으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고조선(위만조선)이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의해 멸망(BC 108)하면서 한사군이 설치되었지만, 한나라흉노와의 오랜 전쟁과 토목공사 남발로 인한 과도한 국력소모에 시달린 탓에, 고조선이 기존에 발휘했던 영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데에는 부담이 컸던 상황이었다. 당장 한사군 가운데서도 함경도강원도 지역은 복속에 실패해서 동예옥저로 따로 독립해나갔을 정도였다. 그나마 평안도황해도는 영토 굳히기에는 성공했기는 했지만 한과 원주민의 정체성이 혼재되어 이름만 한나라를 걸치고 있었을 뿐, 오랫동안 반독립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후한 말기에는 낙랑군의 태수인 공손도[3]동탁의 전횡에 수많은 지방관과 호족들, 기타 군벌 세력이 저항하여 반기를 드는 틈을 타서 칭왕을 하고, 독립국 행세를 하기도 했다[4]. 부여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인구를 늘렸고, 동시에 한나라 및 조위와의 친선관계를 도모하여 안보 보장을 받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힘의 공백을 메우고, 전성기를 이룩해냈다. 즉, 한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을 위협할만한 종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시켜주는 마름 역할을 부여가 맡아주면서 군사적인 부담을 덜어냈고, 부여 역시 선진문물 및 군사장비를 중국으로부터 수급받고, 비상시에 한나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 한나라에게나 부여에게나 원원이 되었던 관계였다. 물론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지녔던 고구려를 견제했던 것은 덤으로, 조위의 장수 관구검동천왕대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여의 지배자 중 하나였던 위거가 위군에게 군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세력과 항상 핑크빛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어서 후한 안제 때인 111년에 기병과 보병 7~8,000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 기록은 하필이면 부여와 낙랑군의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낙랑군재요서설의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허나 주류 학설은 아니며, 학계에서 이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부여가 잘나갈 때는 옆나라 읍루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읍루가 조위 황초(黃初, 220~226) 연간에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진서》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0,000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0,000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이다.

실제 부여는 선세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대국이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게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000리에 이르렀다.

학계 일부에서는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5. 모용선비의 침입[편집]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285년 선비족 모용부에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단석괴의 등장 시기부터 부여는 선비와 계속 충돌하며 대립하고 있었는데, 서기 285년, 선비 모용부의 우두머리 모용외(285~333 재위)가 침공하여 도성이 함락되고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했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했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는 기록이 있다. 당시 중국의 황제였던 진무제는 부여가 모용선비부의 모용외에게 털리자 평주의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하고, 군사를 보내 모용외를 격파하고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키는 등 전통적인 중국의 동맹 부여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한편 일부 무리는 북옥저에 정착하여 동부여가 되었고, 훗날 고구려 초기의 기록을 정비하는 과정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북부여랑 동부여가 섞이게 됐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285년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옥저 지역으로 도망한 부여 유민들이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6. 전연의 침입과 멸망[편집]


모용외의 침공에 타격을 받은 부여는 국가의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서쪽의 농안 지역으로 옮겼으나, 346년,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333~348 재위)의 대공격에 참패해 부여왕 현을 포함한 무려 50,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0,000명이 아니라 50,000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로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미천왕(제15대, 300~331 재위)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전에 부여를 침공했던 모용외의 모용선비(훗날의 전연)가 요동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루 묘지명>에 미천왕 다음 왕인 고국원왕(331~371 재위) 시기에 대형 관직을 맡은 염모라는 인물이 전연이 북부여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하여 '북부여 수사'라는 관직에 임명되고, 제19대 광개토대왕(391~412재위) 시기의 그 후손인 모두루까지 대대로 북부여 수사의 관직을 맡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346년 부여의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갔지만, 410년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동부여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것마저 맥이 끊기게 되었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북부여는 이후 452년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상태에 돌입할 때쯤 뜬금없이 북위로 사신을 보내고는 다음 기록이 없다가, 고구려가 전쟁하는 틈을 타 독립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건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이후 494년물길의 침입을 받고,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491~519 재위)에게 투항했다(494). 일부 세력은 북부여가 멸망하기 이전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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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2] 한나라의 왕충이라는 역사덕후가 쓴 엄청난 책이다. 한명의 개인이 백명보고 쓰라해도 못 쓸만한 양, 세상 소문까지 다 모은 듯 거의 백과사전 저리가라할 수준의 엄청난 양의 역사 이야기를 써놨기 때문에 현대에도 세계 동양사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자료로 쓰이고 있다. 물론 모든 내용이 팩트일 수는 없으나, 한반도나 만주 이야기까지 저렇게 열심히 써놓는 성의를 보였기에 역사학자들도 크게 인정하는 책이다. [3]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그 공손도다.[4] 공손도 사후에 아들인 공손강원소 사후에 그의 세력이 후계자 문제로 분열된 틈을 타서 하북을 차지한 조조에게 복속하면서 잠시 낙랑군 일대가 후한의 영토로 복귀했지만, 이후에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이 재차 칭왕하고 위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가 위나라의 승상사마의에 의해 진압되는 등, 이후에도 이 지역은 내내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