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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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康
(164년 이전? ~ ?)[1]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미디어 믹스
5.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동연의 제2대 수장. 공손도의 서장자로 유주 요동군 양평현[2]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요동 태수로 취임하기 전의 아버지 공손도는 기주 자사까지 올랐던 고관이었으나, 불미스러운 뜬소문으로 파직되어 낙향했고, 요동의 호족들은 한미한 집안에서 벼락출세한 공손도를 탐탁치 않게 봤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양평의 현령이었던 공손소는 공손강을 자신의 휘하로 징집해 부려먹었는데, 여기에 원한을 갖고 있었던 공손강은 동탁이 집권하면서 아버지 공손도가 요동 태수로 임명되자 공손소를 체포해 저잣거리에서 때려 죽였다.

204년, 공손도가 죽자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 공손도가 요동 태수로 세력을 키울 당시의 행보는 불분명하나 <관녕전>에 따르면, 관녕의 명성을 들은 조조가 그를 천거해 중앙으로 부르자 임명장을 중간에 가로채며 전하지 않았고, 주석으로 언급된 부자에 따르면 공손강은 공손도의 서자였으나 공손도 대신 요동을 장악해 대외적으로는 장군, 태수라고 부르며 요동 안에서 왕노릇을 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서자였다고는 하나 204년 당시 공손강의 나이는 이미 4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공손도에게 마땅한 적자도 없었던 데다[3] 공손도 또한 워낙 고령이었기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입지는 보통 탄탄한 수준이 아니었던 듯하다. 주석을 감안하면 이미 실권의 상당 부분이 공손강에게 넘어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으로 "나는 요동의 왕인데 무슨 영녕향후냐!"라며 조조가 보낸 인수를 집어던지고, 조조가 업을 함락시키자 "그냥 내가 조조 밀고 중원 진출해도 괜찮을듯?" 할 정도로 패기만은 항우급이던 공손도와 달리 대외적으론 장군, 태수라 불리며 요동 안에서 소소하게 왕 노릇하는 것에 만족하는 현실적인 면이 강했던 듯 하다.

물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론 여전히 중앙정부 말을 듣지 않는 입장이었으나, 207년에 원소의 아들들인 원상, 원희가 조조에게 패배해 망명해오자 공손강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조조는 요동 공략을 거부하고 철수했다. 공손강의 입장에서는 중앙정부와 화해하기 매우 좋은 기회였기에 이들을 참수하고 수급을 조조에게 바쳐 화친의 선물로 삼았으며, 조조는 공손강을 양평후(襄平侯)에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조조 또한 공손강의 세력권을 인정해주었다.[4]

이후로 기록이 없다가 221년, 공손공이 거기장군에 임명될 때 대사마로 추증되었다. 이로 보면 요동 안에서 왕노릇하며 잘 지내다가 221년 이전에 사망한 듯 싶다. 그의 아들들인 공손황공손연은 나이가 어려서 그의 동생인 공손공이 뒤를 이었는데, 훗날 차남 공손연이 숙부의 자리를 빼앗았다.

환제영제의 치세[5]

말기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그 뒤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桓靈之末, 韓濊强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공손강은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공손강은 건안 연간(196년~220년)에 고구려를 공략하여 피해를 입혔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밝히고 있다. 단, 《삼국사기》에는 공손강과 관련한 기록이 없고 오히려 공손씨의 침입을 선대인 공손도 때에 있었던 일로 기술하고 있다. 다만 서기 197년의 사건은 《삼국사기》의 기술대로 공손강이 아니라 공손도의 집권 시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 원년조에 고국천왕의 형인 고발기가 공손강의 군대를 빌려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때는 공손도도 요동 태수가 되기 전으로 기주 자사에서 밀려난 이후 백수로 있었고, 해당 항목의 공손강은 요동군 양평현 현령인 공손소가 하급무관으로 끌고가서 부려먹고 있었다. 189년에 요동 태수가 된 공손도가 공손소를 처형해 버린 것으로 봐서 이는 공손도의 의도가 절대로 아니고, 동시에 공손도의 오기일 가능성도 없다. 그냥 저 기록 자체가 산상왕에 대응되는 이이모(伊夷謨)[6]를 고국천왕이라고 착각한 김부식이 《통전[7]의 기록을 그대로 베낀 기록이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는 완벽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여담[편집]




4. 미디어 믹스[편집]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공손강(삼국지 시리즈) 문서 참조.


4.2. 삼국전투기[편집]


이름만 언급된다. 아예 짤린 공손도나 공손공보다야는 낫겠지만. 원상과 원희를 베었다는 것이 언급되지만 전후과정을 다 잘라먹었다.


4.3. 삼국지톡[편집]


파일:공손강(삼국지톡).jpg

공손찬과 성씨가 같아서 그런지 묘하게 공손찬과 닮은 느낌이 난다. 물론 공손찬과 성씨만 같을 뿐 혈연관계는 없다.


5. 관련 항목[편집]



[1] 공손강은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189년 이전에 이미 공손소 휘하의 오장(= 분대장급)으로 병역을 마친 상태였다. 후한의 징병제는 23세에 징집되어 2년간 복무를 원칙으로 하기에 이를 기반으로 역산한 것이다.[2]랴오닝성 랴오양시[3] 공손공이 적자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공손공은 애초에 고자였기 때문에 적자 구실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 경우에도 공손공이 공손강에게 밀린 진짜 이유는 무능함 때문이었겠지만.[4] 차라리 공손도라면 모르겠지만 중원 진출에 별 관심이 없던 공손강의 성향상 원상의 정치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았고, 오히려 내부적으로 위험 요소만 가득했다. 그래서 조조는 회군하면서 공손강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원상은 원상대로 숙청당하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여겼는지 먼저 선수를 쳐서 공손강 암살을 꾀했다.[5] 환제는 146년 8월에 즉위했고, 영제는 189년 5월에 죽었다.[6] 원래 《통전》에는 '伊夷模'라 나와 있는데, 《삼국사기》와 표기가 다른 것으로 보아 김부식이 참고한 판본에 '伊夷謨'라 적혀 있었거나, 김부식이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7] 《삼국사기》에 있는 해당 기사의 문장이 《삼국지》의 문장보다는 《통전》의 문장과 똑같아서 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통전》에서 베낀 기록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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