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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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업
2. 교역



1. 산업[편집]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태백산(太白山)의 토끼, 남해부(南海府)의 곤포(昆布, 다시마), 책성부(柵城府)의 된장, 부여부(扶餘府)의 사슴, 막힐부(鄚頡府)의 돼지, 솔빈부(率賓府)의 말,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의 명주(紬),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 미타호(湄沱湖)의 붕어가 있고, 과일에는 환도(丸都)의 오얏, 낙유(樂游)의 배가 있다.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


발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기에 다양한 환경을 통해서 여러 특산물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발해의 농업은 돈화 오동성지(敦化 敖東城址) 영안(寧安) 상경 용천부 유적지에서 쇠로 만든 보습·낫·가래 등의 농기구가 출토되어 철기를 사용한 농기구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축을 사용하는 쟁기질 농업 역시 존재하여 날이 달린 주철제 쟁기 같은 첨단 농기구로 땅을 경작하였다. 총 14종의 재배 식물을 기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전반적으로 기후가 찬 지대가 많았기 때문에 벼농사보다는 밭작물인 보리·· 등이 많이 재배되었다. 또한 산업용 작물을 재배해서 기름이나 밧줄, 매트 등도 생산하였다.

가축 중에선 돼지가 가장 가치 있는 가축이었으며 그 외에 개, 말, 소와 같은 다른 동물종들의 수는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개는 돼지와 소와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으며, 식용이면서 사냥의 동반자이자 애완동물이기도 했다. 말은 군사 장비의 일부였기 때문에 대부분 아주 늙은 개체가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약 12종의 발굽동물, 24종 이상의 육식동물과 많은 종류의 새와 파충류가 식량과 모피 등을 목적으로 사냥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이 포획된 동물은 멧돼지였고 그 다음이 다양한 종류의 사슴이었다. 사냥 장비는 전투용 무기와 크게 다르지 않게 활과 화살, 창과 칼을 사용하였다. 또한 12종의 유용하면서 식용 가능한 야생식물이 도시 거주지의 지층에서 발견되었고 29종 이상의 조개류 및 갑각류가 발해인들에 의해 식용되었다.

발해의 영토가 전체적으로 동해 등의 바다와 접한 부분이 많고 대규모 하천과 담수호가 영토 내에 있어 어업을 하기에 자연적으로 유리한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해주 유적지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철제 낚싯바늘과 낚시추, 큰 물고기를 사냥할 때 쓰는 낚시용 창 등과 메기, 검은 아무르 도미, 연어, 황다랑어, 청어, 가자미 등 20종의 물고기 뼈가 발견되었다. 또 내륙 지역에서 조개나 갑각류 껍질, 진주조개 및 청어, 연어, 넙치 등의 뼈가 발견되어 연해주 내륙 지역의 거주자가 직선으로 약 70km, 육지나 하천 루트를 사용할 경우 95~130km 떨어진 해안 주민과 교역한 사실이 드러나 발해 내에서의 국내 교역이 확인되었다.[1]


2. 교역[편집]


발해는 주변 여러 국가들과도 교역을 하였는데 먼저 당나라의 경우, 발해가 수출한 상품은 담비·호랑이·표범·곰·말곰·토끼·쥐 등의 가죽, 인삼·우황·백부자(白附子)·사향·꿀 등의 약재, 고래·마른 문어·매·말·양·베(布)·주(綢)·명주(紬)·구리 등이 있으며 수입품은 백(帛)·금(錦)·면(綿)·견(絹)과 금·은으로 만든 그릇 등이 있었다. 특히 솔빈부의 이 발해의 중요 수출품이었는데 제나라를 세운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일가도 발해와의 직접 교역을 통해 이 발해 명마들을 사들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일본과의 교역의 경우, 발해의 수출품은 담비 가죽·호랑이 가죽·표범 가죽·인삼·꿀 등이었으며 수입품은 견(絹)·면(綿)·시(絁)·능(綾)·금(錦)·포(布)·힐라(襭羅)·백라(白羅)·실·황금·수은·석유·수정 염주(水精念珠), 빈랑선(檳榔扇) 등이 있었다. 기록상으론 727년(무왕 9)에 담비 가죽 300장, 739년(문왕 4)에 대충피(大蟲皮, 호랑이 가죽으로 추정됨) 7장, 곰 가죽 7장, 담비 가죽 6장 등을 보냈으며, 일본은 그 값의 몇 십 배나 되는 시(絁), 사(絲), 면(綿), 포(布) 등을 발해에 보내왔다. 특히 담비 가죽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919년에 발해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를 들 수 있다. 이듬해 5월 12일에 열린 풍락전(豊樂殿)의 연회석에 사절단의 대표인 대사(大使) 배구(裵璆)는 가죽 옷을 입고 참석하였는데, 시게아키라(重明) 친왕(親王)이 검은 담비 가죽 옷 여덟 벌을 겹쳐 입고 참석하여 배구를 비롯한 발해 사절단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남쪽의 신라와도 견직물과 토기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경제 교류가 있었는데, 양국 간의 교류로는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의 동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 주요 노선이었지만 민간 상인들이 많이 이용한 것은 서경 압록부의 환주(桓州)에서 만포를 거쳐 신라의 서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연해주 지역에서 소그드 은화, 화병모양 거란 토기, 철제 바르간(口琴), 위구르 토기, 사리함 유리병, 경교 십자가, 청동 거울, '룬 문자' 강돌, 원무 토기편, 낙타 뼈, 청동 쌍봉낙타상 등 다수의 서역 유물들이 발굴되어 거란, 돌궐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 역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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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 내용들의 출처는 "극동의 중세 제국들의 도시들" N.N. Kradin 12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