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카자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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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이바노비치 카자코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Казако́в
Vasily Ivanovich Kazakov

파일:바실리 카자코프.jpg
출생
1898년 7월 6일
러시아 제국 니즈니노브고로드 주 필리포보
사망
1971년 9월 11일 (향년 77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6년 ~ 1917년
소비에트 지상군
1917년 ~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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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이반 바실리예비치 카자코프
어머니 예브도키아 안드레예브나 카자코바
배우자
예브도키아 알렉세예브나 카자코바 (이혼)
갈리나 파블로브나 카자코바 (사실혼)[1]
? (재혼)
자녀
장남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카자코프[2]
포함 7남매[3]
병과
포병
최종 계급
이등병 (러시아 제국 육군)
포병상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레닌훈장 (4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수보로프 훈장 2등급
적기훈장 (5회)
적성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1. 개요[편집]


소련군인.


2. 생애[편집]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부모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근무하러 떠났고, 바실리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13년부터 전기 설비 공장 노동자로 근무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6년 5월 러시아 제국 육군에 징집됐다. 제433보병연대에서 복무하다 라트비아 리가에서 뇌진탕으로 입원했다. 1971년 2월 퇴원 후 제180예비보병연대 소속으로 2월 혁명에 가담했다. 1917년 12월 군대의 붕괴로 강제 전역해 페트로그라드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2.2. 러시아 내전[편집]


노농적군에 자원 입대했다. 제1포병사단에서 복무하다 1918년부터 제6소총사단으로 파견됐다.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다 이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1934년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했다.


2.3. 독소전쟁[편집]


1941년 7월부터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의 지휘 하에 포병부대장으로 임명됐다. 재임 초부터 치열한 스몰렌스크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을 지휘했으나 흐트러짐 없이 침착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나치 독일 육군전차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대전차포 운용병들을 적절히 배치해 그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했다. 기존의 소련군 교리와는 달리 화력보단 기동성, 배치 현황을 더 중요시했는데, 카자코프의 이 아이디어는 전후 소련군의 교리를 바꾸는 데에 기여했다. 로코솝스키 역시 카자코프를 높게 평가했으며, 그 둘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그는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포병 부대를 배치했다. 보통 2시간 이상 걸리던 교전 준비가 55분 만에 끝났기 때문에 여러 장군들이 카자코프를 불신했다. 그럴 때마다 로코솝스키가 설득에 나서 준비를 도왔다. 덕분에 카자코프는 이후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쟁취했다. 특히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베를린 공방전 당시의 지휘 실력이 최고로 꼽힌다. 1945년 4월, 소련 최고회의 법령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획득했다.


2.4. 전후[편집]


1945년 7월부터 서부군집단 포병 사령관을 역임했다. 1955년 3월 포병상원수로 진급했으며, 1965년 4월부터 소련 국방부 감찰관 고문으로 임명됐다. 이후 196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모스크바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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