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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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3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 Μιχαήλ Β΄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파일: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jpg

칭호
데스포티스
생몰년도
?~1266년/1268년
재위기간
1230년~1266년/1268년
제호
미하일 2세
Μιχαήλ Β΄

콤니노스 두카스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
Μιχαήλ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아버지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
배우자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
형제
테오도라 콤니니 두케나
자녀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요안니스 두카스
디미트리오스 두카스 콤니노스
엘레니 앙겔리나 두케나
안나 콤니니 두케나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
종교
정교회
참전
펠라고니아 전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잔존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3대 데스포티스.

국력을 재정비하고 동로마 제국시칠리아 왕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이어갔다.

2. 생애[편집]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창업군주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사생아이다. 1214년 후반 또는 1215년경 부친이 암살당하고 삼촌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데스포티스를 이어받자, 그는 펠로폰네소스망명했다. 1230년 4월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테오도로스가 이반 아센 2세불가리아군에게 참패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하자, 테오도로스의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는 테살로니키로 달아나서 황제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의 영토는 테살로니키 주변에 국한되었고, 아이톨리아와 아카르나니아에서는 친형제인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불가리아군이 강하게 압박을 가해오자, 마누일은 이반 아센 2세에게 복종하여 신하의 예를 갖췄다.

미하일은 이 틈을 타 이피로스로 귀환한 뒤 주민들의 호응으로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어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수중에 넣었다. 1236년 코르푸를 점령하였고, 1238년 세계 총대주교 예르마노스 2세의 방문을 시작으로 니케아 제국과 긴밀하게 교류하였으며, 1249년 요안니스 3세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데스포티스 작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불가리아의 포로 신세가 되었던 테오도로스는 1237년 자기 딸 이리니를 이반 아센 2세의 황후로 삼게 하는 대가로 풀려난 뒤 테살로니키로 돌아와서 마누일을 축출하고 아들 요안니스를 테살로니키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자 마누일이 1239년 병력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를 탈환하려 했다. 테오도로스와 마누일은 곧 합의하여 요안니스가 테살로니키를 지배하고, 마누일은 테살리아를 다스리기로 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테살리아를 확보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 1241년 마누일이 죽자, 그는 테살리아를 곧바로 공략했다. 테오도로스는 니케아 제국에 구원을 청했지만,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를 니케아에 억류한 뒤 테살로니키에 입성하고 테살로니키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제국의 신하가 되게 하였다. 1246년 가을,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가 어린 군주 미하일 아센 2세의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트라키아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동부와 북부를 공략했다. 이피로스의 미하일 역시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북서부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3세가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테살로니키를 완전히 공략하면서, 정세는 니케아 제국 쪽으로 흘러갔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자신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을 제안했다. 부인 테오도라 페르랄리파나는 적극적으로 호응했지만, 미하일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보데나에 은거 중이던 테오도로스가 니케아 제국에 맞설 것을 권하자,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1251년 봄 요안니스 3세가 소아시아 원정을 떠난 틈을 타 테살로니키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테살로니키 시민들이 끝까지 저항해 함락이 어렵자, 북쪽으로 이동하여 프릴레프와 베렐스를 공략했다. 얼마 후 요안니스 3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피로스로 철수했다. 요안니스 3세는 보데나를 공략한 뒤 1252년-1253년 겨울에 카스토리아와 디볼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카스토리아 지역에서 이피로스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피로스군의 요안니스 글라바스와 테오도로스 페트랄리파스 장군이 니케아 제국에 귀순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미하일 2세는 요안니스 3세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이피로스군이 장악한 요새와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영토를 양도하였고, 미하일 2세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이 이뤄졌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 2세에게 테오도로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미하일 2세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압력에 굴복하여 테오도로스를 넘겨줬다. 그는 소아시아로 끌려갔고, 1253년경 그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1256년, 미하일은 니케아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재차 테살로니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시칠리아 왕국만프레디 왕이 디리키움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미하일은 만프레디와 합의하여 자신의 딸 엘레니 앙겔리나 두케나를 만프레디의 아내로 삼게 하고, 디라키움 일대와 코르푸 섬을 지참금으로 줬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에 아케아 공국의 굴리에모 2세를 끌여들어 마케도니아의 니케아 제국 영토를 공략했고, 1259년 펠라고니아 평원에서 미하일 8세의 형제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과 교전했다.(펠라고니아 전투) 그러나 연합군 끼리 상호 의심으로 인해 전세는 불리해졌고, 급기야 굴리엘모 2세가 니케아군에게 붙잡혔다. 결국 니케아 제국은 이피로스를 공략했고, 미하일은 이오니아 제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피로스 주민들의 저항이 심해서 오래 지배할 수 없었던 니케아 제국군은 철수하였고, 미하일은 만프레디 왕의 도움으로 영토를 되찾았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 8세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나, 1264년 패배를 면치 못하고 미하일 8세의 명목상 종주권을 인정했다. 1266년 또는 1268년에 사망하였고, 큰아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차남 요안니스 1세 두카스가 테살리아를 분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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