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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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초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Μιχαήλ Α΄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칭호
데스포티스[1]
생몰년도
1170년 ~ 1214년/1215년
재위기간
1204년 9월 ~ 1214년/1215년
제호
미하일 1세
Μιχαήλ Α΄

콤니노스 두카스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 앙겔로스
아버지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
배우자
멜리시니
형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두카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
자녀
테오도라 콤니니 두케나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
마리아 콤니니 두케나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종교
정교회
반란대상
알렉시오스 3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망명 정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초대 데스포티스.


2. 생애[편집]


그리스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바르조스에 따르면, 1170년요안니스 두카스사생아로 출생했다고 한다. 조부는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이며, 조모는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 콤니니였다. 삼촌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는 이사키오스 2세알렉시오스 3세의 아버지였다. 즉, 그는 두카스, 콤니노스, 앙겔로스왕조의 피가 모두 흘렀는데, 앙겔로스보다 훨씬 명망 높은 콤니노스와 두카스를 성으로 사용했다.

그는 1190년 2월 14일 프리드리히 1세제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동로마 제국을 통과할 때 인질이 되었다. 이후 이사키오스 2세의 통치 말년에 소아시아에서 밀라사와 멜라노디온 테마 총독을 지녔으며, 1200년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같은 테마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201년에 알렉시오스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퇴한 뒤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고, 투르크군이 메안데르 강 계곡 주변의 동로마 영토를 습격할 때 동행했다.

1203년 7월 18일, 알렉시오스 3세가 십자군에게 축출되고 알렉시오스 4세이사키오스 2세가 집권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1204년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후 테살로니카 왕국을 세운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초 1세를 섬겼다. 보니파초 1세는 그를 이피로스로 보내서 백성들을 복종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이피로스에 도착한 그는 곧 라틴 제국에 대항하는 로마인들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아르타의 성 테오도라가 13세기에 쓴 전기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3세는 그를 펠로폰네소스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미하일의 친척인 어느 세나체림을 이피로스의 니코폴리스 주재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세나체림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미하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하일은 니코폴리스로 달려갔지만 주민들이 세나체림을 죽이는 걸 방관했다. 이후 세나체림의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총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그가 펠로폰네소스의 총독으로 임명된 적이 없으며, 알렉시오스 3세가 몰락하기 전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귀환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아르타를 거점으로 삼아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여 북쪽으로 디라히온, 남쪽으로 나우팍토스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동쪽 경계는 보니파시오의 테살로니카 왕국과 맞닿았고, 서쪽 경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 북쪽 경계에는 세르비아가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몰려든 난민들을 사비를 들여 구휼했으며, 국경 주변에 여러 요새를 세웠다. 유민들은 그를 제국을 부활시킬 유일한 인물로 여겼고, 데스포티스라는 칭호로 불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빠져나온 사람의 절반 이상이 이피로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사실 이피로스 일대는 베네치아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해양을 중시해서 두라초코르푸 등 여러 군도를 점령했을 뿐, 이피로스 본토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하일은 이 점을 잘 활용해 이피로스 본토의 패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정교회가톨릭의 결합 가능성을 암시하며 십자군을 더 이상 보내지 말 것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교황은 1209년 8월 17일 답신을 보냈는데, 그를 "로마인들의 미하일 콤니노스"라고 지칭했다. 교황은 이 서신에서 그가 진정으로 교황의 신하라면, 베네치아가 디라히온에 세워놓은 가톨릭 대교구에 이피로스를 종속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아직 세력이 미진하다고 여겨서 요구에 따르는 '척'했다.

1209년 여름, 라틴 제국 황제 앙리가 테살로니카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을 실질적인 지배하에 둔 후, 미하일은 앙리에게 동맹을 제안하고자 사절을 보냈다. 앙리는 그의 진의를 의심했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미하일은 앙리의 동생 유스투스와 맏딸을 결혼시키고, 영지의 3분의 1을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앙리가 동의하면서 1210년 6월 20일, 미하일의 사절인 테오도로스 주교와 베네치아 도제 마리노 발라레소의 중재하에 양측 지도자가 선서하면서 평화 협약이 확정되었다. 미하일은 이 평화 협약에서 베네치아 영지에 자신의 땅을 보유하는 대신 베네치아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또한 베네치아에게 광범위한 무역 특권과 세금 면제 특권을 주겠으며, 베네치아 선박이 난파하면 즉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은밀히 라틴 제국과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1209년 몬페라토에 수감되어 있던 알렉시오스 3세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부부의 몸값 협상을 타결하여 아르타의 살라고라 항구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아내 에우프로시나를 이피로스에 남긴 뒤 니케아 제국으로 떠났다.

몇몇 학자는 이때 알렉시오스 3세가 미하일에게 정식으로 데스포티스 작위를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아르타의 테오도라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3세는 떠나기 전에 미하일과 그의 후손에게 이피로스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반면 모레아 연대기에는 알렉시오스가 미하일을 부관으로 삼아 서쪽에 남겨두었다고 기술되었다. 아마도 이 기록들이 시간이 흘러 알렉시오스가 미하일에게 데스포티스 작위를 내렸다고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210년 가을, 앙리 황제가 니케아로 원정을 떠나자 미하일은 라틴 제국과 맺었던 평화 협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으로 쳐들어가 라틴 귀족들과 용병들로 구성된 적군을 격파했다(도모코스 전투). 이때 사로잡은 포로 중 최고위 귀족 3명을 십자가형에 처했고, 나머지 포로를 죽이거나 채찍형에 처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 소식에 격노해 파문을 내렸지만 미하일은 개의치 않고 이후에도 테살로니키의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성직자를 포함한 라틴 수비대를 섬멸했다.

앙리 황제는 이 소식을 접하자 격노하여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불과 12일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로니카로 달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미하일은 불가리아 제2제국과 동맹을 맺고 앙리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불가리아가 트라키아를 계속 압박하는 데다 니케아 제국도 공세를 가하고 있었기에, 앙리는 미하일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앙리가 떠난 뒤 미하일은 테살로니카를 놓고 불가리아와 대립했다. 이피로스 단독으로는 불가리아와 대적할 수 없었기에, 앙리의 동생 유스터스와 연합하여 1211년 펠라고니아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양측은 곧 분열되었다. 갈락시디 연대기에 따르면, 1210년에서 1214년 사이 그와 살로나의 라틴 영주인 토마스 1세가 갈등을 빛었다고 한다. 토마스 1세가 갈락시디 앞바다의 코린토스 만에 있는 몇 개의 섬을 점령하자, 섬 주민들은 미하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미하일은 공격을 개시해 토마스를 죽이고 살로니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토마스 2세가 곧 프랑크 지원군을 이끌고 부친의 영주권을 되찾으면서 이피로스의 살로니아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1212년, 미하일은 테살로니카를 또다시 침공하여 라리사를 함락시키고 라틴 대주교를 폐위시킨 뒤 정교회 지역 교구를 복원했다. 이렇게 새롭게 확보한 영역은 그의 사위 콘스탄티노스 멜리시노스의 영지가 되었다. 1213년 베네치아로부터 디라히온을 탈취했으며, 1214년에는 코르푸 섬을 탈환했다. 이후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로 북상하여 크루여를 공략하고 아르바논 공국을 종속시켰지만, 제타 공략 시도는 세르비아에 의해 저지되었다.

1214년 후반 또는 1215년, 벨라그라다에서 로마이노스라는 하인에게 암살당했다. 암살 배후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어린 아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대신 이복형제이자 니케아 제국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이피로스를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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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인은 생전 데스포티스를 칭하진 않았지만, 당대 로마인들이나 라틴인들에게는 데스포티스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