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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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왕국 초대 국왕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6대 국왕
마리아 1세
Maria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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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조제파 안토니아 제르트루드스 히타 조아나
(Maria Francisca Isabel Josefa Antónia Gertrudes Rita Joana)
출생
1734년 12월 17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사망
1816년 3월 20일 (향년 81세)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리우데자네이루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여왕
1777년 2월 24일 ~ 1816년 3월 20일
브라질 왕국의 여왕
1815년 12월 16일 ~ 1816년 3월 20일
배우자
페드루 3세 (1760년 결혼 / 1786년 사망)
자녀
주제, 주앙 6세, 마리아나 비토리아
아버지
주제 1세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형제
마리아 아나, 도로테이아, 베네디타
종교
가톨릭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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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6대 여왕이자 브라질 왕국 초대 여왕. 별명은 "경건한 왕(a Piedosa)" 또는 "광인왕(a Louca)"이다.


2. 생애[편집]


1734년 12월 17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에서 포르투갈 왕자 주제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딸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장녀로 출생했다. 여동생으로 마리아 아나, 도로테이아, 베네디타가 있었다. 1750년 아버지가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로 등극한 뒤 16살의 나이에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브라질 여공(Princesas do Brasil)[1] 및 브라간사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과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며, 종종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곤 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해 3만에서 10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1만 채 이상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마리아는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주제 1세는 대지진 이후 심각한 폐소공포증에 시달려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걸 극도로 기피하고 왕궁에서 벗어나 아주다 언덕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걸 선호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아주다 언덕에서 살아갔다.

1759년 9월 3일, 주제 1세가 타보라 후작부인이자 자신의 정부인 테레사 레오노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괴한 3명의 습격으로 팔에 총탄을 맞고 목숨을 간신히 건진 사건이 벌어졌다. 주제 1세의 총신인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는 즉시 조사를 신속하게 실시한 뒤 타보라 가문 구성원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12월 한 달 동안 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는데, 그 중엔 여자와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전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보다못한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와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 공주가 개입해 그들 대부분을 사면시켰지만, 아베이루 공작 호세 데 마스카렌하스 다 실바 에 렌카스트레, 타보라 후작 프란시스쿠 데 아시스, 테레사 레오노르 등 타보라 가문 일가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들 수십 명이 산 채로 불태워졌고, 그들의 유골은 타구스 강에 던져졌다. 이후 타보라와 아베이루 가문의 문장은 폐기되었고, 타보라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금지되었다.

주제 1세는 마리아를 스페인 왕자 루이스 안토니오(1727 ~ 178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면서 어느 한 국가의 왕자와 결혼시켰다가는 그 나라를 적대하는 국가들로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해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던 1760년, 마리아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6세에 결혼했는데, 신랑은 뜻밖에도 주제 1세의 남동생이자 마리아의 숙부인 동 페드루 왕자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브라간사 왕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단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기 어려워진 시점에서 공주의 결혼 상대는 포르투갈 국내의 귀족이 유력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모조리 찍어누르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세바스티앙은 장차 여왕이 될 마리아가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겼고, 정치에 별 관심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페드루 왕자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마리아와 짝지어주기로 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친족간의 결혼이 흔했던 유럽 왕실에서도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고 교회법에도 어긋났지만, 어느 누구도 독재 권력을 펼치는 세바스티앙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래도 페드루와 마리아는 서로 화목하게 지냈고, 두 부부 사이에서 주제, 주앙 프란시스코, 주앙, 마리아나 비토리아, 마리아 클레멘티나, 마리아 이사벨이 태어났다. 1774년 주제 1세가 심각한 발작에 시달리자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가 섭정을 맡았고, 마리아는 어머니의 정무를 옆에서 돌봤다.

1777년 2월 24일, 주제 1세가 신트라 궁전에서 사망했다. 이후 마리아와 페드루 부부가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으로 등극했다. 마리아 이전에 테레사 데 레온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을 칭했지만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포르투갈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공동 국왕인 남편은 사냥과 종교 활동에 몰두할 뿐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녀가 통치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했다.

마리아가 여왕이 된 뒤에 첫번째로 취한 정책은 아버지 주제 1세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으며 독재정치를 편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를 해임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바스티앙이 자신으로부터 20마일 이상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추가로 내리면서, 자신이 그의 영지 근처를 여행할 경우 세바스티앙은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바스티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들은 그를 아예 죽여버리고 재산을 몰수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세바스티앙이 비록 악행을 저질렀지만 리스본 대지진을 제대로 수습하고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공적을 고려해 이 이상의 처벌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을 해임한 뒤 그에게 탄압받던 800명 이상의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또한 폼발 후작이 후원한 코임브라 대학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백과사전파, 방법론적 자연주의, 이신론이단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고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뒤 추방형에 처해졌다. 이때 추방된 이들 중 한 명인 프란시스쿠 드 멜루 프랑쿠(Francisco de Melo Franco)는 마리아 정권을 규탄한 저서 <어리석음의 왕국>을 집필했다. 다만 폼발 후작이 세운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반적인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1777년, 마리아는 식민지를 놓고 오랜 분쟁을 벌였던 스페인을 상대로 산 일데폰소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며 양측의 수감자를 석방하고 1763년 이후 만들어진 해상 방벽을 상호 배상하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은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철수하고, 포르투갈은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와 산 가브리엘 섬(현재 우루과이 남부), 기니 해역의 안노본 섬과 페르난도 푸 섬을 스페인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경을 이루는 구간을 통과하는 강을 통한 항해는 양국 모두에게 무제한으로 허용되고, 양국은 적국의 선박과 밀수품을 실은 모든 깃발의 선박에 대해 항구 입성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778년에 일데폰소 협약을 보충하는 목적으로 엘 파르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브라질 통치를 완전히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안노본 섬, 비오코 섬과 그 맞은편 기니 만 해안에 대한 무역권을 양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오랜 분쟁을 마무리짓고 화해했다.

1781년 5월 23일, 포르투갈 법원은 1758년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기소되어 심각한 박해를 받았던 타보라 가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유족들에게 재산을 돌려줬으며, 왕실 모해 단체로 규탄받고 금지된 예수회 역시 복권되었다. 폼발 후작은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뒤 1781년 8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자신의 소유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주겠다"라며 사면을 선고했다. 폼발 후작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1782년 5월 8일에 사망했다.

1782년, 마리아는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르는 영국이 프랑스 밀수품에 대한 중립 선박을 무제한 탐색하는 영국 해군 의 전시 정책에 맞서 중립 선박을 보호하고자 결성된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에 가입했다. 러시아 제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이 동맹은 지중해, 대서양북해를 항해하는 자국의 상선을 무자비하게 수색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이 종식되자,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은 해체되었다.

마리아는 과학자들을 후원하고자 리스본 왕립 과학원을 설립했고, 왕립 공립 도서관을 설립해 저명한 문학가들의 저서를 보관했다. 또한 고아와 거지, 부랑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카사 피아 데 리스보아(Casa Pia de Lisboa)를 창설했다. 이 기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학생들은 상업 기술, 프랑스어, 군사 산술, 그림 및 약학 등을 배웠고,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갖췄다는 평을 받은 이들은 사관학교나 런던의 의학 대학, 로마의 포르투갈 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해군 장교를 전면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왕립 해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785년 1월 5일, 마리아 1세는 브라질의 섬유 제조업이 과도하게 발전하여 본국의 섬유업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예와 노동자가 땀을 닦을 때 사용하는 천을 제외한 모든 섬유품을 식민지인들이 개별적으로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명 <1785년 헌장>을 반포했다. 호아킴 호세 다 실바 사비에르(Joaquim José da Silva Xavier)는 이에 반발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봉기를 계획했다가 1789년 체포되었고, 3년간 옥고를 치르다 1792년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 도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786년 초, 마리아는 정무를 보던 중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며 별궁에 옮겨겼다. 이때부터 그녀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대내외에 알려졌다. 1786년 5월 25일 마리아와 함께 포르투갈 국왕을 맡던 페드루 3세가 병사했다. 정치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않았지만 자상한 남편이었던 페드루 3세를 사랑했던 마리아는 남편의 사망에 망연자실했고, 궁궐에서 어떤 오락도 열리지 못하게 했다.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포르투갈에서 행해진 국가 축제는 종교 의식과 비슷했다고 한다.

1788년 9월 11일 장남이자 후계자인 주제 왕자가 천연두에 걸려 27세에 사망했고, 마리아의 고해사제였던 이나치오 데 상 카에타노 역시 그해 11월에 사망했다. 가까운 이들이 자신의 곁을 잇따라 떠나자, 그녀는 극심한 환각, 우울증, 불안 증세를 보였고 나중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까지 맞물리면서 종교적 광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밤마다 궁궐 안에서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시종들은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미친듯이 울부짖는 여왕을 달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792년 2월, 신하들은 여왕이 미쳤다고 결론짓고 영국의 국왕 조지 3세의 정신병을 치료한 전적이 있던 프랜시스 윌리스에게 치료를 맡겼다. 윌리스는 5년간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불치병 판정을 내렸다. 1794년 레알 바라카 데 아주다 궁전이 화재에 휩싸이면서, 궁정은 정신병에 시달리는 여왕이 있는 켈루스로 옮겨졌다. 이후 궁정을 방문한 이들은 궁궐 구석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끔찍한 비명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에서 통치를 맡는 것은 무리였기에, 마리아 1세의 넷째 아들(사실상 둘째 아들)인 주앙이 1799년부터 섭정을 맡았다.

1801년 4월,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권고에 따라 영국과의 협력 관계를 이어가는 포르투갈을 침공해 올리벤사 등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후 엘바스를 공격하려 했다가 프란시스코 데 노로냐 장군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수비대에게 격퇴당한 뒤 철수했고, 양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고도이는 엘바스 외곽에서 오렌지를 가져와서 마리아 1세에게 리스본으로 가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렌지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졌다.

1801년 6월 6일 포르투갈은 영국 선박에 항구를 폐쇄하고 프랑스에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올리벤사를 스페인에게 양도하며, 스페인은 그 대가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윌리엄 헨리 클린턴 대령 휘하의 3,500 병력을 파견해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했다. 이들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29일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 이후 포르투갈이 영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불응하자, 나폴레옹은 바다호스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고도이와 협의해 양국이 포르투갈을 양분하는 대가로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냈다. 1807년 말 장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7,000명이 포르투갈을 전격 침공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브라질로 도피했는데, 마리아 역시 영국 함선 카랙 프린시페 레알 호를 타고 이송되었다. 이 때의 상황은 당시 섭정 왕세자였던 아들 주앙 6세 문서 참고.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왕궁에서 부두로 이동하는 동안 비명을 마구 질러댔고, 이동 중에 하인에게 고문을 당하거나 강도를 당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1808년 1월 살바도르 데 바이아에 상륙한 마리아는 리우데 자네이루의 카르무 수녀원으로 이송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815년 12월 16일 섭정이었던 아들 주앙 6세가 브라질을 왕국으로 승격시키면서 마리아는 브라질 왕위도 겸하게 되었고, 1816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1821년 그녀의 유해는 리스본으로 돌아와서 에스트렐라 바실리카 영묘에 안장되었다.


3. 자녀[편집]


다음은 모두 페드루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로서 주앙 6세를 제외하면, 오래 살지 못했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브라질 공 주제
(José, Prince of Brazil)
1761년 8월 20일
1788년 9월 11일
포르투갈의 베네디타 공주[2]
2남
주앙 6세
(John VI)
1767년 5월 13일
1826년 3월 10일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3]
3남 6녀[4]
1녀
스페인의 가브리엘 왕자비 마리아나 빅토리아
(Mariana Victoria, Infanta Gabriel of Spain)
1768년 12월 15일
1788년 11월 2일
스페인의 가브리엘 왕자[5]

4. 여담[편집]



  • 다른 브라간사 왕조의 구성원들은 모두 리스본 상 비센트 드 포라 수도원의 브라간사 영묘당에 안장되었으나, 마리아 1세는 유일하게 리스본의 에스트렐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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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당시 포르투갈 왕세자에게 주던 작위인 '브라질 공(Príncipe do Brasil)'의 여성형이다.[2] 주제 1세의 4녀이자 펠리페 5세의 외손녀로, 무려 친이모다.[3] 카를로스 4세의 장녀다.[4]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페드루 1세, 미겔 1세 등.[5] 카를로스 3세의 4남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