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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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5대 국왕
마누엘 2세
Manuel II


출생
1889년 11월 15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벨렝 궁전
사망
1932년 7월 2일 (향년 42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풀웰
재위기간
포르투갈 국왕
1908년 2월 1일 ~ 1910년 10월 5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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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
이름
마누엘 마리아 필리프 카를루스 아멜리우 루이스 미겔 하파엘 가브리엘 곤자가 샤비에르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이우제니우 드 사셰코부르구고다 이 브라간사
(Manuel Maria Filipe Carlos Amélio Luís Miguel Rafael Gabriel Gonzaga Xavier Francisco de Assis Eugénio de Saxe-Coburgo-Gota e Bragança)
아버지
카를루스 1세
어머니
아멜리 도를레앙
형제자매
루이스 필리프, 마리아
배우자
호엔촐레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1913년 결혼)
자녀
없음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통치
2.3. 1910년 10월 5일 혁명
2.4. 망명 후의 행적
2.5. 사망
3. 브라간사사셰코부르그고타 왕조 구성원
4. 여담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의 마지막 국왕.[1]

별명은 애국자왕(o Patriota) 또는 불운왕(o Desventurado)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파일:Manuel_II_Young.jpg

1889년 11월 15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벨렝 궁전에서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루이필리프의 손자이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의 장녀 아멜리 도를레앙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스 필리프와 마리아가 있었다. 출생 직후 베자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그의 세례식 때 증조부인 전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도 참여했다. 형 루이스와 사이가 무척 좋아 사진을 함께 찍곤 했는데, 일부러 형보다 거만한 포즈를 취하곤 했다.

형이 건재했기에 왕이 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마누엘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언어, 역사, 음악에 깊이 탐구했다. 그는 6살 때 프랑스어, 라틴어, 독일어로 말하고 글을 쓸 정도로 언어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또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리하르트 바그너의 열성팬이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1903년에는 고대 문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어머니, 형과 함께 왕실 요트 아멜리아를 타고 이집트로 여행하기도 했다. 1907년 포르투갈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해군에서 경력을 쌓을 준비를 했다.


2.2. 통치[편집]


파일: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jpg
1910년 5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 마누엘 2세 본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1908년 2월 1일, 아버지 카를루스 1세, 어머니 아멜리 왕비, 형 루이스 필리프와 함께 빌라 비소사에 사냥을 떠났다가 리스본으로 귀환하던 마누엘은 갑작스러운 암살극으로 인해 아버지와 형을 잃고 본인 역시 팔에 부상을 입었다. 마누엘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추가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파초 다스 니디다데스 궁전에서 엄중한 경비를 받았다. 1908년 2월 2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국무회의를 주관한 젊은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통치하기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그가 내린 첫번째 지시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구축해 민심을 요동시키고 아버지와 형을 제대로 경호하지 않은 주앙 프랑코 페레이라 핀투 내각에 사임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후 새 총리에 선임된 프란시스쿠 페레이라 두 아마랄은 진보당과 개혁당 인사들을 골고루 포진시킴으로서 행정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의회를 정상으로 되돌렸으며, 정치범들을 해방하고 공화당의 언론 자유의 보장, 카를루스 1세 암살 주동자들의 묘소에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책은 들끓어오르던 포르투갈 정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실과 정부가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1908년 5월 6일, 마누엘 2세는 의회를 소집한 뒤 의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아버지의 국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으니 앞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에 따라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회 문제"라는 한 가지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마누엘 2세가 지목한 사회 문제는 산업 혁명 이래로 도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가중되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왕실의 안위가 흔들리는 상황을 의미했다. 산업화가 미약한 포르투갈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별로 강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경제 위기에 편승하여 점점 세력을 불리는 공화당에 상당한 사회주의자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누엘은 공화당과는 양립하기 어렵지만,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공화당과 사회당이 서로 갈라서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1909년, 마누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푸앵카레를 포르투갈로 초대해 포르투갈의 실정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 푸앵카레는 포르투갈 전역을 여행하며 실태를 확인한 뒤, 마누엘에게 광범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지역 정부와 행정을 재편하고 정치 개혁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왕은 이 조언에 고무되어 1909년 6월 각료회의 의장인 벤체슬라우 데 리마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사회당이 아퀼레스 몬테바르데의 지도 아래 통합된 것을 이용해 몬테바르데와 접촉해 정권과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노동계급을 공화당으로부터 우리 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유용하고 생산적인 힘이 될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후 왕과 아퀼레스 몬테바르데간의 서신이 연이어 교환되었다. 1910년 7월에는 국립노동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3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몬테바르데가 위원회가 효과적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왕은 공공 사업부 장관을 통해 정부에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국왕에게 호의를 표했지만, 이 정도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공화주의자들을 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누엘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고 각국의 수장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의 확실한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공주와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카를루스 1세가 암살된 일에 깊은 경계를 품고 공주를 보내기를 주저했고, 결혼 협상은 장기간 지연되다가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마누엘 2세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해 영국의 새 국왕 조지 5세에게 위로를 전하며 포르투갈을 계속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그의 통치 2년간 7개의 내각이 수립되었다가 해산되길 반복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개혁당과 진보당은 서로간의 심각한 갈등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공화당은 갈수록 강해져 1910년 8월 28일 선거 결과 9%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14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개혁당과 진보당이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로 정권을 차지할 가망은 없다고 여기고, 혁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2.3. 1910년 10월 5일 혁명[편집]


1910년 여름부터 리스본에서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들끓자, 정부는 도시 수비대에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군부 내의 많은 인사들은 군주제는 미래가 없고 공화정 만이 포르투갈을 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910년 10월 3일, 공화당 당수 마차도 산투스는 제16보병 연대로 가서 제16보병 연대에게 거사를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사전에 공화당과 내통한 상병 다수가 즉시 병사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막으려던 사령관과 대위는 피살되었다. 한편, 해군 제독 카를로스 칸디도 도스 헤이스는 수십 명의 카르보나리오들과 함께 제1포병 연대로 이동해 그들을 회유시킨 뒤 마차도와 합세했다. 이후 여러 함대와 포병 연대가 가세했지만, 혁명에 가담하기로 해놓고 실제로는 가담하지 않은 부대도 많았고 정부군 역시 비교적 신속하게 병력을 소집해 대응에 나섰기에 성공 여부는 불확실했다.

공화파에 동조하는 일부 부대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거나 군주 편에 섰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혁명 세력은 로툰다와 알카타라에 참호를 파고 수비에 전념하면서 토벌대에서 추가 이탈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식민지의 독립 세력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엔히크 데 파이바 쿠제이루가 이끄는 보병 제2연대와 기병 제2 연대는 로툰다 인근에 이동식 포대를 설치해 혁명군을 격멸하려 하다가 혁명군의 역공을 받았다. 쿠제이루는 수적인 열세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면서, 리스본 사단 사령관 안토니우 카르바할 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카르바할은 철수 명령을 내릴 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쿠제이루는 절반 가량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각했다. 또한 카르보나리우들은 혁명이 개시되자마자 전신선을 차단해 리스본 외부 부대에 토벌 명령이 전달되지 않게 했으며, 명령을 이미 입수한 부대가 이동할 수 없도록 철로 역시 끊었다. 여기에 혁명군에 가담한 순양함 상 라팔 호가 로툰다와 알칸타라 사이의 루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정부군의 사기는 갈수록 악회되었다.

한편,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에 방문한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 헤르메스 로드리게스 다 폰세카를 위한 연회를 베푼 뒤 파초 다스 니디다데스 궁전에서 일부 관리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전화를 시도했지만 회선이 끊어진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페나 궁전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 카르보나리오 수십 명이 궁궐로 침입하여 창문에 총격을 가했지만, 궁궐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날 9시경 회선이 겨우 연결된 직후 의회 의장으로부터 "반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으니 마프라 또는 신트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마누엘 2세는 "헌법이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 역할을 맡겼기에 나는 이를 완수할 것이다"라며 거부했지만, 정오 무렵 혁명대에 가담한 함선 아다마스토르와 상 라팔이 파초 다 니디다데스 궁전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궁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마누엘 2세는 궁전 공원의 작은 집으로 피신한 뒤 안토니우 테세이라 데 소우사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케일스 궁전에 배속된 포병대를 니디다데스 궁전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는 반란군 주력 부대가 로툰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억제하려면 포대가 거기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우선 신트라 또는 마프라로 피신하고 니디다데스 궁전을 수비하고 있는 병력을 로툰다의 반군 토벌에 투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마누엘 2세는 궁전을 떠나기로 하고 오후 2시에 마프라를 향해 떠났다. 오후 4시경 마프라에 도착했으나, 마프라를 수비하기로 되어 있던 800명의 군인과 지휘관은 온데 간데 없고 단지 100명 미만의 군인만 있었다. 여기에 니디다데스 궁전을 지키던 병사 상당수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로툰다로의 공세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10월 4일 새벽, 로툰다와 루시우의 양 포병대가 서로를 향해 발포를 가했다. 포격전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혁명군 측이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8시경에 양측 수뇌부가 외국 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려는 독일 대사의 요청에 따라 1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독일 외교관이 혁명군과 휴전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백기를 든 채 로툰다 쪽으로 향하자,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민중들이 정부군이 항복했다고 여기고 거리로 뛰쳐나와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이에 루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항복하거나 집으로 도망치면서, 대세는 혁명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오전 9시 리스본 시청 건물의 발코니에서 공화파 지도자 주제 헬바스가 서서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고, 포르투갈 공화당 의원들이 장관직을 맡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마누엘 2세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5일 가족들과 함께 마프라에서 포르투로 향하는 왕실 요트 아멜리아에 탑승했다. 그러나 요트는 도중에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로 향했다. 그가 지브롤터로 이동하라는 측근들의 설득에 따르기로 했는지 또는 도중에 목적지를 변경하도록 강요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지브롤터에 하선한 마누엘은 얼마 후 포르투 마저 공화국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가족 및 측근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영접을 받았다.


2.4. 망명 후의 행적[편집]


마누엘은 어머니가 태어난 런던 트위크넘의 풀웰 파크에 거주하면서 지역 사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트위크넘의 성 제임스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고 여러 자녀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면서 무력으로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왕당파의 움직임에 "그것은 포르투갈을 파괴하는 짓일 뿐이다"라며 반대하면서, 오직 협상과 국민 투표를 통해 재집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왕당파 인사들은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그를 불신해 미겔 1세의 후손들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누엘은 이를 눈치채고 미겔 1세의 후손들과 직접 담판을 보기로 하고 1912년 도버에서 미겔 자누아리우 드 브라간사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가 어찌 나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2세 본인은 미겔이 자신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미겔 1세 후손의 왕위 계승권 영구 박탈을 취소하며 잃어버린 포르투갈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합의를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미겔이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왕 '미겔 2세'를 여전히 자처한 것을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역사가들은 공화국에 대한 투쟁 방식에 대해 대체로 합의를 맺었지만 승계와 관련한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했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누엘은 포르투갈에 영국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왕당파에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공화정부에 협조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수의 왕당파는 공화정부 수립을 방조한 영국을 불신했고, 빌헬름 2세가 승리한다면 왕정을 회복할 길이 열릴 거라 여기고 독일을 지지했다. 한편, 마누엘은 이 참에 전쟁에 참여해 공적을 세움으로써 영국 정부의 인정을 받기로 하고 영국 정부에 참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고, 대신 영국 적십자에 참여하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막상 적십자에 배속된 뒤 기금 모금, 병원 방문, 최전선의 부상병 방문 등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전투 도중에 흉터가 생긴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스티븐의 부시 병원에 정형외과 부서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조지 5세는 승리 축하 행사에 그를 초대해 그동안의 공헌에 감사를 표했다.

1926년, 오스카르 프라고소 카르모나 장군에 의해 고메스 다 코스타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후 코스타는 런던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그의 신임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외무부는 영국에 대한 포르투갈 부채 청산을 협상해야 했는데 대사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난처해 하다가 마누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엘은 조국을 도울 기회가 주어진 것에 기뻐하며 조지 5세 등 여러 인사들과 접촉해 코스타를 대사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해 끝내 관철시켰다. 또한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을 포르투갈로 이전해 불우 이웃 구제에 쓰겠으며, 자신이 죽으면 포르투갈에 묻히겠다고 밝혔다.

마누엘은 망명 기간 동안 포르투갈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는 등 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또한 포르투갈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처음에 전기물을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가 다른 역사가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고 그에 관한 전기를 집필했다. 그러다 1926년부터 전기물에 대한 관심을 접고 1489년부터 16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출간된 포르투갈 문헌들을 수집한 <포르투갈 고대 문헌집(Livros antigos portuguezes)> 3권 집필에 착수했다.

1489년부터 1539년까지의 문헌들을 모은 제1권은 1929년에 출판되었다. 마누엘은 이 저서를 윈저 궁으로 가지고 가서 조지 5세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저서에는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2개의 연대기, 5개의 팜플렛, 33권의 문학 작품이 담겨 있었다.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마누엘은 1540년부터 1569년까지 이어지는 제2권 집필에 바로 착수해 1932년에 완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3권 집필에 착수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사후에 도서관 사서인 마저리 윈터스가 제3권을 출판했다. 그는 이 작품들로 인해 포르투갈 역사가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흉상이 리스본 국립 도서관 입구에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2.5. 사망[편집]



파일:Manuel_II_Before_die.jpg

마누엘 2세가 사망하기 2시간 전에 찍힌 마지막 사진.
1932년 7월 2일 그가 거주하던 런던 풀웰에서 폐부종으로 인한 질식으로 사망했다.[2] 그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새 총리가 되자 포르투갈 정부는 그에게 국가적 장례식을 치르고, 그의 시신을 코메르시우 광장에 묻어주었다. 또한 마누엘의 유언장에 따라 그의 영국 영지와 남은 재산 일부를 매각해 브라간사 가문 재단을 설립했다.

마누엘은 1913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 수장 빌헬름[3]의 딸인 아우구스타 비토리아와 결혼했지만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그래서 명목상의 포르투갈 왕위는 작은 고조할아버지인 미겔 1세의 손자이자 마누엘 2세의 재당숙할아버지인 두아르트 누누(1907~1976)[4]가 계승했다.[5]


3. 브라간사사셰코부르그고타 왕조 구성원[편집]


볼드체는 국왕 내지 왕위 요구자(가문 수장).


마누엘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함에 따라 마리아 2세페르난두 2세의 후손인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 계통은 남계가 끊어지게 되어 (마리아 2세의 두 딸의 후손은 남아있고 포르투갈 왕실은 여성/여계도 승계가 가능하지만 외국 왕가의 일원이라 계승에서 배제) 포르투갈 왕가의 가문명은 다시 브라간사 왕가로 돌아갔다.

  • 주앙 6세 (1767 ~ 1826) / 妻 카를로타 호아키나 (1775 ~ 1830)
    • 미겔 1세 (1802 ~ 1866) / 妻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공녀 아델하이트 (1831 ~ 1909)
      • 미겔 (1853 ~ 1927) / 妻 뢰벤스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마리아 테레사 (1870 ~ 1935)
        • 두아르테 누누 (1907 ~ 1976) 후계자[6]

4. 여담[편집]


  • 비록 국민들의 민주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폐위되어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자신을 폐위시킨 국민들을 일절 원망하지 않았고, 내전을 염려해 자신을 데려와 군주제 복귀를 이루려는 왕당파의 요청을 거절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폐위 후에는 포르투갈 고대 문헌을 정리한 저서를 출간하고 포르투갈 공화정부의 요청에 따라 영국 인사들을 설득하기도 하는 등 애국심이 강해 '애국자왕'이라 불리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는 마누엘 2세의 이종사촌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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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시에 포르투갈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2] 현재는 공식적인 사인이 밝혀졌으나, 사망 당시에는 사망하기 전날 테니스를 쳤다는 점, 겨우 42세에 요절했다는 등의 이유들 때문에 독살 음모론에 휩싸였다.[3]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형.[4] 미겔 1세의 외아들 미겔 자누아리우의 3남, 부인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증손녀인 마리아 프란시스카였다.[5] 현재 포르투갈 왕가의 수장은 두아르트 누누의 아들인 두아르트 피우(1945~)로, 포르투갈인 귀족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 아폰수(1996~)가 후계자다. [6] 촌수 상으로는 마누엘 2세의 할아버지 루이스 1세의 6촌 동생으로 마누엘 2세에게는 8촌 할아버지뻘이지만 나이상으로는 조카뻘이기에 마누엘 2세보다 오래 살았다. 이는 두아르테 누누의 할아버지인 미겔 1세와 아버지 미겔이 자녀를 매우 심하게 늦둥이로 가졌기 때문에 이 정도로 촌수가 벌어진 것이다. [7] 마누엘 2세의 모후 아멜리는 루이필리프의 손자이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의 장녀이고,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의 어머니인 루이즈는 파리 백작 필리프의 4녀로 아멜리와 자매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