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르트 1세

덤프버전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2대 국왕
두아르트 1세
Duarte I


파일:두아르트.png

출생
1391년 10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비제우
사망
1438년 9월 9일 (46세)
포르투갈 왕국 투마르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433년 8월 14일 ~ 1438년 9월 9일
배우자
아라곤의 레오노르 (1428년 결혼)
자녀
아폰수 5세, 페르난두, 레오노르, 카타리나, 주아나
아버지
주앙 1세
어머니
랭커스터의 필리파
형제
브랑카, 아폰수, 페드루, 엔히크, 이자벨, 주앙, 페르난두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두아르트 1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2대 국왕. 별칭은 '철학자 왕(o Rei-Filósofo)' 또는 '웅변가 왕(o Eloquente)'이다.


2. 생애[편집]


1391년 10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비세우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인 랭커스터의 필리파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아폰수와 누나 브랑카가 있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기에, 사실상 주앙 1세와 필리파 부부의 장남이었다.형제로 페드루, 엔히크, 이자벨, 주앙, 페르난두가 있었다. '두아르트(Duarte)'는 영국식 이름 에드워드(Edward)를 포르투갈 식으로 바꾼 것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침략을 극복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에드워드 3세를 기리려는 주앙 1세의 의도로 붙여진 이름이다.

두아르트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왕국의 행정을 돌봤으며, 1412년부터 법률 집행과 재정 관리를 담당했다. 1415년 주앙 1세의 세우타 공략에 참여한 뒤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책을 즐겨 읽어서 지식이 풍부했으며,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을 집필했다. 1428년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결혼했을 때 저서 <Leal Conselheiro(충성스러운 상담사)>를 선물했다. 총 103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결혼과 가정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으며, 도덕적, 윤리적 성찰을 통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탐구했다. 또한 <Livro da ensinança de bem cavalgar toda sela(모든 안장에서 잘 타는 법에 관한 책)>에서는 기사가 익혀야 할 승마 기술과 마상창시합 메뉴얼 등을 다루었다. 두아르트가 그 외에 평생 집필한 시와 산문, 서신들은 16세기에 편찬된 <LIVRO DOS CONSELHOS DE D. DUARTE(두아르트 왕의 조언서)>에 정리되었다.

1433년 8월 14일 주앙 1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두아르트 1세는 1434년 4월 8일 산타렘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Lei Mental(정신법)>을 반포했다. 왕실 자산의 승계를 규정한 이 법에 따르면, 왕실에 속한 모든 토지와 재산은 장남에게만 증여할 수 있으며, 상속인 간의 공유는 금지되었다. 아울러 이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기부된 왕실 재산을 도로 왕실에 귀속시켰다. 다만 브라간사 가문의 재산만은 공유를 허락받았고, 왕 본인의 의지로 신하에게 일부 영지를 하사하는 것은 용인되었다. 그는 이 법을 통해 주앙 1세가 1383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상대로 봉기했을 때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모조리 기부해버린 왕실의 영지와 재산을 회수하고자 했다.

두아르트 1세는 5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코르테스를 5번 소집할 정도로 귀족과 성직자, 민중의 합의를 통해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주앙 1세부터 시작된 법률 정비 사업을 추진했으나 그의 대에 이뤄지지 못했고, 아들 아폰수 5세 치세 초기에 섭정을 맡은 페드루 왕자에 의해 완수되면서 포르투갈 왕국 최초의 성문법인 <아폰수 법률(Código Afonsino)>이 탄생했다. 아울러 아버지의 중앙 집중화 정책을 지속하여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력 남용을 방지했고, 해양 탐사 및 정복 정책도 이어갔다.

한편, 형제 엔히크는 두아르트 1세의 지시에 따라 라고스에서 함대를 조직한 뒤 라고스 출신의 탐험가 질 이아느스(Gil Eanes)에게 항해를 맡겼다. 질 이아느스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끝에 1434년 서사하라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보자도르 곶에 도착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 곶의 해류는 무척 세고 괴물이 득실거려서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는 속설이 돌았지만, 보자도르 곶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몇 마일 더 항해한 뒤 본국으로 귀환하여 "비록 암초가 많고 짙은 안개가 자주 형성되어서 위험하기는 하지만 준비를 잘하면 통과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자극받은 탐험가들이 잇따라 아프리카 남쪽 해안으로의 여정에 도전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의 본격적인 해상 진출이 이뤄졌다.

1437년, 엔히크와 페르난두 왕자는 마린 왕조의 지배 영역 한 가운데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세우타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두아르트 1세는 원정 성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고 페드루와 주앙 왕자 역시 반대했지만, 엔히크와 페르난두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그들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 탕헤르 공략에 나선 원정군은 요새를 공략하지 못하고 몇 달간 발이 묶여 있다가 마린 왕조군의 반격으로 궤멸되었고 페르난두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잔여 병력을 수습한 엔히크는 군대가 방해받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하고 페르난두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본국에 귀환한 엔히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두아르트 1세는 1438년 초 레이리아에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돌려주는 문제를 논의했다. 페드루와 주앙은 조약을 이행하라고 촉구했지만, 정작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인 엔히크는 주앙 1세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인 세우타를 넘겨줄 수 없다면서, 페르난두를 석방시킬 다른 방법을 찾자고 주장했다. 여론 역시 엔히크의 주장 쪽으로 쏠리자, 두아르트 1세는 어쩔 수 없이 조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그 후 페르난두는 끝내 석방되지 못한 채 페즈 요새에 갇혀 지내다 1443년에 사망했다.

1438년 9월 9일, 두아르트 1세는 투마르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당시 6살이었던 아들 아폰수 5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섭정으로 레오노르 왕비를 선임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귀족들은 유언에 따르려 했지만, 리스본 시민들은 아라곤 여자에게 포르투갈 통치를 맡길 수는 없으며 당대의 왕자들 중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페드루 왕자가 섭정해야 한다며 봉기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레오노르와 페드루 왕자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고 권력을 공유하기로 했다.


3. 가족 관계[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4 09:08:58에 나무위키 두아르트 1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