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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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5대 국왕
엔리케 4세
Enrique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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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상상화
출생
1425년 1월 5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
사망
1474년 12월 11일 (49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마드리드
재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
1454년 7월 22일 ~ 1474년 12월 11일
배우자
수리아 2세 (1440년 결혼 / 1453년 무효화)
포르투갈의 주아나 (1455년 결혼 / 1468년 무효화)
자녀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아버지
후안 2세
어머니
아라곤의 마리아
형제
카탈리나, 레오노르, 마리아, 이사벨 1세, 알폰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5대 국왕. 치세 내내 무기력한 통치를 보였고 성기능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불능왕"(el Impotente)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붙은 군주이다.


2. 생애[편집]


1425년 1월 5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와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 마리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카탈리나와 레오노르가 있었지만 모두 1~2살에 사망했으며, 이복 형제로 마리아, 이사벨 1세, 알폰소가 있었다. 출생 후 3개월만에 아버지에 의해 아스투리아스 공에 선임되었고,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던 알바로 데 루냐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년기 때 궁궐에서 시종으로 일하던 후안 파체코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후안 파체코는 1440년 불과 20살의 나이에 엔리케 왕자로부터 "식탁에 칼을 올려도 되는" 특권을 수여받고 코르테스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엔리케 4세의 치세에 대표적인 권신이 되었다.

1436년 9월 22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톨레도 협약을 맺고 수 년간 지속된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이때 평화 협상을 중재한 나바라 왕국의 여왕 수리아 1세의 딸 수리아 2세와 엔리케 왕자의 결혼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1437년부터 1440년까지 카스티야 귀족들의 대규모 반란이 벌어지는 바람에 결혼식은 기약없이 미뤄졌고,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반란군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1440년 9월 15일에 비로소 바야돌리드에서 수리아 2세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지만, 이후에도 귀족들의 강압적인 요구로 인해 엔리케의 가정교사를 맡던 알바로 데 루냐가 장기간 추방당하는 등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던 1443년 7월 9일,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이 정변을 일으켜 후안 2세를 납치한 뒤 라마가 성채에 가두었다. 그들은 알바로 데 루냐가 권좌에 복귀하기 위해 나바라 국왕이자 아라곤 왕자 후안과 엔리케 왕자의 보좌관인 후안 파체코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이를 막기 위해 예방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후안 왕자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그는 1444년 3월 29일 후안 왕자의 권력 독점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카스티야 고위 귀족들을 규합한 뒤 아버지를 불법적으로 납치한 후안과 '외국인'들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알바로 데 루냐가 엔리케 4세에게 가담하여 엔리케 왕자와 함께 왕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1445년 5월 19일 올메도 전투에서 그와 알바로 데 루냐가 이끄는 왕실군이 후안 왕자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후안 왕자를 아라곤 왕국으로 몰아내면서 종결되었다. 후안 2세는 자신을 구해준 아들에게 보답하고자 로그로뇨, 시우다드 로드리고, 하옌, 카세레스 등지를 영지로 하사했으며, 엔리케를 보좌했던 후안 파체코는 빌레나 후작에 선임되었다. 1450년 아라곤 왕자이자 나바라 국왕 추안 2세와 아들 카를로스 4세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알바로 데 루냐와 함께 카를로스 4세를 지원했다.

1453년, 엔리케는 세고비아 주교 루이스 바스케스 데 아쿠나에게 수리아 2세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요구하는 성적 결합을 3년 이상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성적으로 완성"시킬 수 없었다며, 하느님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몇몇 매춘부들이 증인으로 나와서 엔리케와 성관계를 갖다고 증언했다. 이에 루이스 바스케스 주교는 그해 5월 엔리케가 저주로 인해 성적으로 무력해진다는 이유로 엔리케와 수리아의 결혼을 무효화시켰고, 교황 니콜라오 5세 역시 같은 해 12월 이를 수락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당시에 엔리케가 성기능 장애로 인해 수리아와 성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후대의 많은 연대기들은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엔리케를 "성적으로 무능한 자"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것은 악의적인 이야기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간주한다. 엔리케는 생애 동안 숱한 정부를 두었으며, 훗날 자식을 낳았으니 성적으로 장애가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엔리케가 아버지를 괴롭혔던 아라곤 왕실 출신인 점에 반감을 품고 오래도록 가까이하지 않다가 포르투갈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그녀를 내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447년 후안 2세의 왕비가 된 이자벨[1]은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알바로 데 루냐에게 반감을 품고 엔리케와 은밀히 동맹을 맺고 알바로를 질시하는 귀족들을 은밀히 끌여들었다. 그러던 1453년 4월 왕실의 최고 회계관 알론소 페레스 데 비베로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자벨은 알바로가 고위 관리를 암살하도록 사주한 게 분명하다고 고발했다. 후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알바로를 알론소 페레스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했다. 그 직후, 이자벨과 엔리케 4세는 왕의 허락을 받고 정변을 일으켜 알바로의 측근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후 알바로에게 전 왕비 마리아를 독살한 혐의를 추가로 뒤집어씌우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6월 2일에 바야돌리드 광장에서 참수했다.

1454년 7월 21일, 후안 2세가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다. 후안 2세는 유언장에서 이자벨 왕비를 이사벨 공주와 알폰소 왕자의 보호자이자 재산 관리자로 지명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남아 순결을 지켜야 한다면서 엔리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몇몇 연대기에 따르면, 엔리케는 왕이 된 직후 이자벨 왕비와 이복 동생들을 아레발로의 별궁에 가두고 군대를 사방에 배치해 그들의 행보를 철저히 감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이 신뢰성이 높다고 간주하는 여러 연대기 및 공문서에 따르면, 이자벨 왕비는 후안 2세 사후 아레발로에서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관리하고 자녀 교육에 전념했으며, 딸 이세벨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국정에 여러 번 개입했다. 엔리케 역시 초기에는 200명의 기사들을 경비병으로 삼아 그녀를 지켜주게 했으며, 9차례 아레발로를 방문해 그녀를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1455년, 엔리케는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트 1세의 딸 주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포르투갈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 후 쿠엘라르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나스르 왕조에 대한 레콩키스타를 선포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이 아버지 대에 벌어진 심각한 내전으로 인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소규모 기병들이 적의 영토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하고 적이 반격하기 전에 철수하는 방식의 작전을 구사했다. 그 결과 카스티야 왕국은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나스르 왕조에게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힐 수 있었고, 1457년 히네마를 공략했다. 하지만 나스르 왕조 역시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피해를 입은 귀족과 백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자, 1457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부 나스르 사드와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1458년 나바라의 국왕이자 아라곤 왕자 후안이 형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아라곤 국왕 추안 2세로 즉위했다. 그는 엔리케 4세에게 불만을 품은 카스티야 귀족들을 은밀히 후원해 카스티야 왕국이 또다시 내란에 휩쓸리도록 유도하려 했다. 이에 후안 파체코와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왕의 신임을 받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아라곤 국왕과 은밀히 내통했다. 여기에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이었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왕의 신임을 얻어 급격하게 승진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후안 파체코가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벨트란과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내전이 또다시 벌어질 조짐이 일었다. 급기야 귀족들이 이복동생인 알폰소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엔리케는 1461년 알폰소와 이사벨 남매를 이자벨 왕비에게서 멀리 떨어진 궁정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부터 엔리케는 이자벨 왕비와 이복 동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1462년, 주아나 왕비가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낳았다. 이로써 엔리케는 오래도록 갈망했던 자식을 얻었다. 그는 1462년 5월 9일 마드리드의 산 페드로 엘 비에호 성당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후아나를 아스투리아스 여공이자 왕국의 상속자로 선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후아나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며 벨트란의 딸이라는 의미인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고, 엔리케 4세는 동성애자이며 성적으로 능력이 없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한편 1462년 8월 11일 아라곤과 나바라 국왕 후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인들은 엔리케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푸아 백작 가스통 4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지원하에 카탈루냐 봉기를 진압하러 출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엔리케는 굳이 서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와 대적하면서까지 카탈루냐를 확보하려 할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개입하지 않았다.

1464년, 그동안 국정을 총괄하던 후안 파체코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의 정쟁에서 패해 형제 페드로 기론과 함께 실각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안 파체코는 귀족들을 선동해 1464년 5월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귀족 연합을 결성하고 "벨트란의 사생아인 후아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오직 알폰소만이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엔리케가 유대인과 무슬림을 보호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 귀족에게 해를 끼쳤으며,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고 비난했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이 워낙 많아서 무력으로 진압하기 곤란해지자, 엔리케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그 결과 알폰소는 일전에 엔리케에 의해 궁정에 유폐되었을 때 빼앗겼던 산티아고 영지를 돌려받고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벨트란 데 라 쿠에바는 추방되고 후안 파체코가 권좌에 복귀했다. 다만 후아나는 알폰소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왕의 적출자로 인정되었다.

1465년 1월 16일, 후안 파체코의 주관하에 메디나 델 캄포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대부분 면제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의 권리 상당수를 박탈하며, 왕권을 통제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체택되었다. 엔리케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자, 후안 파체코 등은 4월 27일 반기를 들고 알폰소 왕자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2세'로 옹립했다. 엔리케는 지지자들을 규합해 이들에 맞서는 한편, 후안 파체코의 동생 페드로 기론을 회유하기 위해 이사벨 공주와의 결혼을 제의했다. 페드로 기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회유가 성공하는 듯했지만, 페드로가 결혼식이 열리기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은 엔리케 4세 지지 세력과 알폰소 왕자를 내세운 반란군 간의 각축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세력 확장을 위한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각 도시와 마을들은 자경단을 결성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으며, 유대인과 개종한 무슬림들을 겨냥한 폭동이 종종 벌어졌다. 1467년 엔리케 4세의 지지자들과 알폰소 왕자의 추종 세력이 올메도에서 맞붙었는데,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이겼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엔리케가 전투가 끝난 후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와 알바 백작의 지원을 잃은 반면, 알폰소 측은 톨레도 대주교의 지지를 얻어냈다.

결국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엔리케는 왕실 재무부의 소재지인 세고비야를 알폰소에게 내주고 아내 주아나를 인질로 내줘야 했다. 주아나는 알라에호스 성에 감금되었고 세비야 대주교 알론소 데 폰세카의 감시를 받았는데, 나중에 대주교의 조카인 페드로 폰세카를 애인으로 사겼고 1468년 11월 30일에 2명의 쌍둥이 자녀 페드로와 안드레스를 낳았다. 이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배신감에 사무쳐 주아나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1468년 7월 5일, 세고비야에 군림하던 알폰소가 사망했다.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벨 왕비는 아들 알폰소가 15살의 나이에 절명한 이후로 정신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알폰소를 국왕으로 옹립했던 귀족들이 이사벨을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그녀는 엔리케 4세가 있는 한 절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엔리케는 이사벨의 이같은 태도에 감명받고 1468년 9월 18일 또는 19일에 로스 토로스 데 귀산도에서 이사벨과 만나서 그녀를 아스투리아스 여공으로 세우고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며, 귀족들은 엔리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1469년, 엔리케는 이사벨을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 아라곤 왕자 페르난도와의 혼인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엔리케가 이에 분노해 그녀를 궁에 감금하자, 이사벨은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한 뒤 엔리케가 파견한 추격대를 피해 바야돌리드까지 가서 페르난도 왕자와 만났고, 그 해 10월 바야돌리드 시내 성당에서 결혼을 감행했다. 엔리케는 이사벨의 행위에 분노해 이사벨의 어머니 이자벨 왕비를 아레발로에서 쫓아내고 플라센시아 백작 알바로 데 수니가 이 구즈만에게 넘겼으며, 딸 후아나를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이에 다수의 귀족들이 왕의 조치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엔리케는 이번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카스티야 전역이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1473년 11월, 세고비야 요새 지휘관이자 왕의 사령관인 안드레스 카브레아의 중재하에 엔리케와 이사벨과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후 엔리케는 1473년 12월에서 1월 사이에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만나 우호적인 대화를 나눴지만, 후아나를 왕위 후계자로 삼는다는 결정을 끝내 바꾸지 않았다.

그 후 마드리드에서 후안 파체코의 보호를 받으며 남은 한 해를 보내던 엔리케는 1474년 10월 파체코의 임종을 지켜본 뒤 12월 11일에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후 이사벨의 지지자들과 엔리케의 딸인 후아나의 지지자들 사이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에서 이사벨이 승리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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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손녀이자 레겡고스 데 몬살라스, 벨라스, 콜라레스의 영주 주앙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