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3세(트라페준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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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누일 3세(트라페준타 제국).jpg
이름
마누일 메가스 콤니노스
(영어: Manuel Megas Komnenos, 그리스어: Μανουήλ Μέγας Κομνηνός)
출생
1364년 12월 16일
사망
1417년 3월 5일
직위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트라페준타 제국 제18대 황제.


2. 생애[편집]


1364년 12월 16일 알렉시오스 3세요안니스 6세의 친척인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황후의 아들로 출생했다. 1377년 형 바실리오스가 사망한 후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이복형 안드로니코스의 미망인이자 조지아 왕국의 군주 다비트 9세의 딸인 굴칸-에우도키아와 결혼하여 아들 알렉시오스 4세를 낳았다. 굴칸이 사망한 후 1395년에 동로마 제국의 두카스 가문 일원인 안나 필라트로피니와 결혼했다. 1390년 부친이 사망한 후 트라페준타 제국의 새 황제가 되었다.

1391년 베네치아에게 부과된 관세를 줄이고 오래된 특권을 확인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며, 1396년 베네치아인들이 자체적으로 교회와 은행을 설립하고 자신들의 법으로 심판받을 수 있는 특권을 허락했다. 그는 이를 통해 부친 대에 사이가 악화된 베네치아와 잘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제노바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1416년 제노아는 베네치아에게 특권을 인정한 트라페준타 제국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베네치아 상선들에게 무력 행사를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휘하의 갤리선들을 트라페준타에 상륙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트라페준타 제국의 직할령으로서 크리미아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던 케르손 항구가 킵차크 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트라페준타의 외교적, 상업적 역량은 큰 타격을 입었다. 1398년 흑해 연안을 따라 트라페준타 제국의 국경지대까지 진출한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바예지트 1세의 봉신이 되었지만, 1400년 8월 27일 시바스 시를 공략한 티무르가 오스만 술탄국과의 전쟁에 합류할 것을 요구하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마누일은 직접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지만 20척의 갤리선을 티무르에게 보냈다.

1402년 7월 28일 티무르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섬멸하고 바예지트 1세를 포로로 잡았다. 그 후 티무르는 오스만 술탄국의 영토를 짓밟았고, 그동안 오스만 술탄국의 압박에 시달렸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1403년 티무르가 소아시아를 떠났을 때, 그의 군대 일부가 케라수스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티무르는 아들 미르자 할릴에게 아르메니아, 트라페준타, 조지아를 관할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죽자, 미르자 할릴은 서둘러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돌아가 술탄을 물려받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사실상 자유롭게 하였다.

그의 통치 말년은 아들 알렉시오스 4세와의 불화로 인해 암울해졌다. 마누일은 알렉시오스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궁중 관리들은 조지아 태생의 공주에게서 태어난 알렉시오스를 경멸하여 다른 이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알렉시오스는 선수를 치기로 작정하고, 반란을 일으켜 추종자들을 이끌고 요새로 피신한 마누일을 공격했다. 마누일은 알렉시오스의 요구에 따라 궁중에서 총애받는 이들을 모조리 내쫓아야 했고, 데스포티스 칭호를 내리는 것으로 아들을 달래려 했다. 알렉시오스는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이어가려 했지만, 귀족들의 강한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와 화해했다. 1417년 3월 5일 마누일이 사망했는데, 알렉시오스 4세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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