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1세(트라페준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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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일:마누일 1세(트라페준타 제국).jpg

생몰 기간 : 1218년 ~ 1263년
재위 기간 : 1238년 ~ 1263년

트라페준타 제국의 4대 황제. 뛰어난 업적을 이룩하여 대제(메가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2. 생애[편집]


트라페준타 제국은 안드로니코스 1세 기도스 치세에 룸 술탄국의 속국화 의무를 수용했다. 이어 몽골이 침공하여 조지아의 대부분을 점거했다. 조지아의 바그라투니 왕실은 소국의 왕으로 존속되어 멸망하지 않았지만, 트라페준타 제국과 조지아는 이제 영토도 축소된 완전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1235년 사망하고, 그의 형이자, 이전 알렉시오스 1세의 장남이었던 요안니스 1세 메가스 콤니노스 악수코스(1235~1238)가 즉위했다가 3년간의 짧은 통치 끝에 폴로 경기를 하던 중 사고로 죽었다. 요안니스의 아들이었던 요안니키오스는 강제로 수도자가 되고, 요안니스의 동생인 마누일 1세의 치세가 시작된다.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의 계속된 병력 차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지아 왕국마저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243년에 트라페준타와 조지아 동맹군을 거느린 룸 술탄국은 몽골군에게 처참히 짓밟혔다. 이 때를 기화로 룸 술탄국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고, 트라페준타 제국은 조금씩 독립적 지위를 획득해갈 수 있게 되었다. 룸 술탄국의 쇠퇴로 아나톨리아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는데 트라페준타 제국은 이 상황을 틈타 다시 시노페를 영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바뀌지는 않았고, 1253년 마누일은 이런 대책에 고심하다 프랑스 왕국의 성왕 루이 9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하게 된다. 그는 이 동맹으로써 루이가 십자군을 일으켜 십자군 국가의 최대 적인 니케아 제국과 룸 셀주크 왕조를 쳐부수기를 바랐지만, 루이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라틴 제국의 왕녀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주는 선에 그쳤고 그나마도 이 결혼동맹 건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한편 마누일은 1254년 시노페를 함락시켰고, 몽골의 침공이 의외로 트라페준타 제국에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발생하는데 1258년에 몽골군이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 바그다드를 파괴한 것이었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로 이르는 무역로가 끊기고, 페르시아 만에서 호르무즈에 입항하여 몽골 제국령이 된 페르시아를 관통한 후, 북상하여 트라페준타에 들어가 거기에서 흑해로 나가는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으로 무역로가 바뀌자 트라페준타 제국은 크게 번영하고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마누일은 이런 부를 바탕으로 트라페준타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니케아 제국에서 정통 황제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아카이아 공국-아테네 공국-테살리아 공국-시칠리아 왕국 연합군을 대파하더니, 1261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것이다. 이로써 대(大) 콤니노스 왕가가 자신들이 로마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졌고 트라페준타 황실은 이제 단순한 트라페준타의 주권자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 동안 베네치아가 영유하던 카파 항은 이제 제노바가 영유하게 되었다.

1263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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